海上發展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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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上發展

新羅는 北쪽의 一面이 大陸에 接할뿐이오 三面이 바다로 둘려있는 半島國이다. 國民들은 海上에서의 活動이 자못 活潑하여 數많은 遊學生과 商人들이 唐나라에 來往하였고 따라서 唐나라의 海岸地方에는 新羅사람들이 僑居하는 新羅坊이 處處에 생겼다. 이러한 事實은 統一以後 더욱 顯著하여 그 中에서 한 例를 들면 지금의 山東半島의 東南에 있는 石城灣 附近인 登州 文登縣 淸寧鄕 赤山은 新羅에서 唐나라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그 곳에서 新羅사람들이 세운 法花院이라는 寺刹은 쌀 百石지기의 庄田이 있었으며 說法이 열릴 때에는 新羅사람들의 男女 數百名이 모였다. 當時는 日本사람들이 唐나라에 來往하는 것도 新羅사람들의 힘을 많이 빌렸으니 神文王때에는 唐나라에 가는 日本사람들의 學生과 求法僧이 많이 新羅의 배를 타고 다녔으며 景德王때에는 日本에 가는 唐나라 使臣이 新羅의 배를 利用하였고 惠泰王때에는 唐나라에 가있는 日本사람들이 그 本國과의 通信을 新羅의 船便으로 하였다. 그러나 新羅의 末葉에 이르러 國勢가 떨치지 못하고 때마침 唐나라도 衰弱해지니 黃海위에 海賊이 들끓었고 이는 數百年동안 平和롭게 繼續되던 兩國사이의 交通에 큰 威脅이 될뿐더러 甚至於는 海賊의 떼가 新羅사람들을 잡아다가 奴婢로 팔아먹는 일까지도 있었다. 이때 唐나라에 벼슬살이하던 張保皐가 이러한 事實을 알고 新羅로 돌아와서 王에게 아뢰고 스스로 淸海鎭(지금의 全羅南道 莞島) 大使가되어 軍士 一萬名으로 兩海의 길목을 지키는 同時 猛烈한 海上活動을 始作하여 黃海의 制海權을 掌握하고 唐나라와 日本에 貿易하여 다시금 新羅의 名聲이 天下에 떨쳤다. 그러나 新羅 朝廷의 王位 다툼의 餘波가 여기까지 미쳐와서 張保皐는 임금이 보낸 刺客에게 暗殺을 當하고 빛나던 淸海鎭의 幕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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