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政治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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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政治

高麗太祖의 政治는 新羅末葉의 弊害에 鑑하여 여러 가지의 改革과 獨創이 있었다.

一. 新羅末에 土地制度가 紊亂하여 처음에 租稅는 土地收穫量의 十分之一을 받던 것을 十分之二三을 받은 까닭에 百姓의 生活이 困難하고 盜賊이 많이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었음으로 高麗 太祖는 新羅의 丁田制를 襲用하되 租稅는 十分之一로 定하고 建國後 三年동안은 全部 免稅하였다.

二. 新羅 統一後에 唐나라 文化가 들어옴으로부터 國民이 自主精神을 잃고 事大思想에 醉하는 傾向이 一世를 風靡하였음으로 高麗 太祖는 中國과 我國은 人性이 各異하고 風土가 不同하니 모든 制度와 文物은 반드시 中國과 同一히 할 必要가 없다하여 事大의 風을 警戒하였다.

三. 太祖는 同族인 渤海가 契丹에게 亡한 뒤로 契丹을 無道한 나라라 하여 몹시 미워하고 契丹이 使臣을 보내어 和親할 것을 請하되 듣지 아니하고 北方 經營에 專念하였다.

四. 從來 中國에는 年號制度가 있어 自主獨立國인 天子는 年號를 쓸 수 있으되 屬國은 쓸 수 없었는데 三國時代에 가장 强盛하던 時代에는 우리나라도 中國과 對等한 天子國이라 하여 年號를 썼으니 高句麗 廣開土王의 永樂, 新羅 法興王의 建元같은 것이 그 것이다. 新羅 統一後에 唐나라에 附麗하여 唐나라 年號를 쓰더니 太祖 建國後에 우리나라도 完全한 自主獨立國家라 하여 年號를 세워 天授라 하였다.

五. 三國時代以前에는 貴族만 姓이 있고 一般 庶民은 名만 있고 姓이 없더니 太祖 建國後에 全國民에게 一齊히 姓을 領賜하고 오직 新羅와 後百濟의 遺民이 高麗에 反抗하는 者에게 馬, 牛, 豚, 象等의 獸畜名을 賜하여 一般 國民과 暸然하게 區別하였으니 後日 李朝時代의 宰相 尙震은 象姓의 昇格이라 한다.

六. 太祖는 僧 道詵을 先生으로 모시고 그의 말에 依하여 各地에 寺刹을 創建하고 宮闕을 지으니 道詵은 唐僧 一行의 風水學說을 배워서 我國 風水地理學의 元祖가 된 者로써 世人이 龍子라 稱하고 이때로부터 明堂 禍福의 思想이 國民의 머리 속에 뿌리박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高麗 太祖 政治는 我國史上 重要한 一時期를 劃하였고 三國統一後 오랜 동안의 政治腐敗期를 지낸 까닭에 從前의 濃厚한 風俗은 많이 없어졌으나 高麗太祖의 모든 施策이 適宜함을 얻었으므로 國民의 氣風이 眞實하여 國家에 戰亂이 있는 때에 貴族의 子弟가 먼저 槍劍을 집고 先陣에 나섰으며 官吏들이 그 地位를 自己보다 年長하고 또 賢能한 者에게 辭讓하는 일이 있으니 太祖가 崔凝으로써 廣評侍郞을 삼으니 凝이 말하기를 臣의 同僚 尹逢이 臣보다 十年을 年長하니 請컨대 먼저 除授하소서 하고 辭讓하니 太祖가 大喜하여 그 禮讓함을 稱讚한 것이 그 一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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