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歷史'에 해당되는 글 110건

  1. 2015.02.19 亂後의 形勢(서당국사)
  2. 2015.02.19 壬辰倭亂(서당국사)
  3. 2015.02.19 社會의 腐敗(서당국사)
  4. 2015.02.19 日本과의 關係(서당국사)
  5. 2015.02.19 中宗反正後의 國政(서당국사)
  6. 2015.02.19 燕山君의 失政(서당국사)
  7. 2015.02.19 李朝基礎의 完成(서당국사)
  8. 2015.02.18 端宗과 世祖(서당국사)
  9. 2015.02.18 建設時機(서당국사)
  10. 2015.02.18 王位爭奪 (서당국사)
  11. 2015.02.18 李朝政治 (서당국사)
  12. 2015.02.18 李朝建國 (서당국사)
  13. 2015.02.17 高麗의 滅亡 (서당국사)
  14. 2015.02.17 外國關係 (서당국사)
  15. 2015.02.17 政治의 紊亂 (서당국사)

亂後의 形勢(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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亂後의 形勢

七年동안의 大亂은 비록 끝났으나 起耕치 못한 土地가 적지 아니하고 집과 家産을 蕩盡하고 生計를 잃은 百姓이 數없이 많고 山谷에 避難 갔던 사람들은 飢餓를 견디지 못하여 草根木皮로 延命하면서 겨우 故鄕에 돌아 왔으나 依支할 곳이 없어서 道路에서 彷徨하였다. 朝廷에서는 이러한 難民에 對하여 아무런 救濟策이 없었고 더욱이 亂中에 國籍의 大部分이 없어졌는데 勢力있는 者들은 남의 土地를 冒耕하여 自己의 土地를 만들려하니 到處에서 田訟이 일어나되 官家에서 이를 適當하게 處理치 못하였고 朝廷에서는 土地測量에 着手하였으나 事務가 자리를 잡지 못하여 잘 進陟되지 아니 하였다. 한 便으로는 黨爭이 더욱 甚하여 北人들 끼리에 다시 大北과 小北으로 나눠져서 그 勢力 다툼은 一步를 나아가 王位 爭奪戰과 엉켜지게 되었으니 이는 官人들 끼리에만 勢力을 다투기보다 勢力의 發願인 君王을 자기들 便에 넣는 것이 가장 有力하기 때문이다. 黨爭이 이와 같이 深刻하게 되니 亂後의 모든 整理 같은 것은 아무런 效果를 나타내지 못하고 말았다.

宣祖의 다음 임금 光海君은 本是 亂中에 人心을 收拾하려고 갑자기 世子로 세운 것이라 宣祖가 이를 바꾸려는 뜻이 있었다. 이 機微를 알고 小北派는 宣祖의 뜻을 받들려 하고 大北派는 世子를 擁護하여 서로 다투더니 宣祖가 病中에 大北派를 斥逐하던 中 急猝히 昇遐하고 光海君이 王位에 오르고 大北派 李爾瞻 鄭仁弘 等이 勢力을 잡으니 巷間에서는 宣祖가 過毒하였다고 傳했다.

當時 稅納은 土地의 所出로써 바치는 租稅와 地方의 特産物을 바치는 貢物과 兵役과 賦役 代身으로 바치는 軍布가 있었는데 여기에 여러 가지 弊害가 따르고 더욱이 大亂을 치른 後로 土地制度와 稅制가 極度로 紊亂하여졌음으로 光海君 卽位 初 李元翼(號 梧里)이 大同法을 設하기를 請하였다. 이 法은 宣惠廳이라는 機關을 두고 每年 春秋에 田 一結에 米 八되를 거두어 京庫에 收納하여 隨時로 國費를 支出하는데 各 司私主人으로 하여금 上供하는 諸 物品을 收納케 하고 이 外에는 尺布 升米도 民戶主로부터 加徵치 못하게 하여서 私主人 防納計倍의 弊를 끄치려 함이라 光海君은 이 制度를 京畿道에 먼저 試驗的으로 行하니 巨室豪民과 私主人들이 모두 防納의 大利를 잃고 百方으로 沮害함으로 光海君은 여러 번 이 制度를 罷하려 하였으나 京畿百姓들이 一齊히 그 便利함을 말하고 罷하지 못하도록 다툰 까닭에 繼續하여 行하고 그 後에 漸次로 他道에 施行하였다.

光海君은 性質이 사납고 어두워서 政治가 몹시 어지럽고 大北派를 重用하여 그 兄 臨海君 以下 同氣를 많이 죽이고 宣祖 王妃 仁穆大妃를 廢하여 西宮에 幽閉하고 廢母에 反對하는 李元翼(梧里) 李恒福(弼雲),(白沙) (鰲城府院君) 鄭蘊(號 桐溪)等을 罪주었다. 李恒福이 咸鏡道 北靑으로 귀양 가는 길에 鐵嶺에 올라서서 「鐵嶺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九重宮闕에 뿌려본들 어떠하리」라는 노래를 지은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이에 오랫동안 勢力을 잃고 機會를 엿보고 있던 西人들이 秘密히 反正할 꾀를 꾸미더니 光海君 十年에 李貴(黙齋), 金瑬(北渚)等이 中心이 되어 反政軍을 일으켜서 王을 江華島에 내치고 王의 조카 綾陽君을 맞아드려 王位에 오르게 하니 이가 곧 仁祖이다.

壬辰亂이 끝난 지 이미 二十餘年이라 亂後 整理도 채 되지 못한 위에 光海君의 亂政이 또 十五年 동안을 繼續하니 國家의 政治는 말할 수 없이 헝클어지고 百姓의 生活은 極度의 困窮에 빠졌다. 이에 仁祖는 李元翼을 불러들여 政丞을 삼고 亂麻 같은 政治를 整理하는데 李元翼은 大同法을 八道에 모두 施行하기를 極力으로 主將하였다. 그 때 反對하는 者가 많아서 京畿道 以外에 겨우 忠淸道에 施行하니 百姓들은 모두 이 法을 大歡迎함으로 얼마 後에 反對論을 물리치고 八道에 施行하였다.

처음에 反正을 꾀하던 여러 사람들은 오직 國家와 百姓을 爲하여 擧義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反正後 功臣들의 大部分은 純全히 私利를 爲하여 行動하고 功臣이라는 特權을 利用하여 牟利 行爲를 恣行함으로 國人의 非難이 적지 아니 하였고 金長生(沙溪) 같은 이는 功臣들에게 글을 보내어 反正 擧義한 것은 一國이 稱誦하는 일이나 功을 憑藉하고 私利를 圖謀하면 後世의 公論이 이를 무엇이라고 評하랴 警告한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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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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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

宣祖 初에 日本에서는 豊臣秀吉이 國內를 統一하고 將次 大陸으로 進出할 野心이 있어 우리나라에 使臣을 보내어 兩國이 서로 親和하게 지내자 하고 또 우리나라에 侵入할 뜻이 있다는 風說이 퍼지고 있음으로 宣祖 二十三年에 朝廷에서는 黃允吉과 金誠一을 通信使로 日本에 보내니 그 形式은 兩國 修好를 爲함이나 其實은 秀吉의 態度를 打診함이다. 黃과 金이 돌아온 後 두 사람의 復命이 서로 같지 아니하니 黃은 말하되 秀吉의 眼光이 빛나고 態度가 倨慢하니 반드시 入寇하리라 하고 金은 말하되 秀吉의 눈이 쥐눈 같고 人物이 보잘 것 없으니 반드시 入寇치 아니한다. 하였다. 黃은 西人임으로 西人들은 덮어놓고 黃의 말을 옳다하고 金은 東人임으로 東人들은 金의 말을 支持하여 國家明日의 興亡이 달려있는 重大 事에 敵의 實情을 깊이 檢討치 아니하고 오직 黨人 擁護만을 爲主하였으며 이때 東人의 勢力이 컸음으로 朝廷의 議論은 金의 말을 좇게 되고 宣祖도 또한 金이 善使하였다 하여 褒賞하고 着手中에 있는 南方의 軍備도 睡眠狀態에 빠지고 君臣以下가 모두 泰平夢에 醉倒하였다.

日本 秀吉은 우리나라의 軍備의 虛實을 前日의 使臣 往來 時에 미리 探知하고 宣祖 二十五年 壬辰(檀紀 三千九百二十五年)에 明나라를 치러가니 朝鮮은 길을 빌려달라고 憑藉하고 그해 四月에 軍士 二十萬과 小西行長 加藤淸正 等 將帥를 보내어 風雨같이 몰려와서 釜山에 上陸하니 이는 우리나라의 靑天霹靂이오 醉生夢死하던 我國 軍隊가 百戰 老鍊한 倭兵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에 東來城이 一戰도 못하고 陷落되고 敵軍은 거침없이 東西 두 길로 나뉘어 京城을 向하여 北上하니 朝廷에서는 이 急報를 듣고 모두 蒼皇罔措하고 宣祖는 金誠一이 國事를 그르쳤다 하여 곧 잡아오라고 嚴命을 내리더니 誠一이 惶恐 入京하는 次에 宣祖는 다시 命令을 내리어 이번 倭寇는 너로 因하여 오는 것이니 네가 나가서 막으라 하여 南方으로 보내었다.

朝廷에서는 敵을 막을 힘이 없고 西路를 좇아 避難의 길을 떠나니 京城 안에 있던 亂民들이 景福宮에 불질러 사뤘으며 各地의 守令들은 大部分이 職務를 버리고 逃亡하였음으로 戶口와 土地의 文籍이 이때에 大槪 滅失되었다. 倭兵이 釜山에 上陸한지 겨우 二十日만에 京城이 陷落되고 八道 人心이 土崩하듯이 무너져서 다시 收拾할 수가 없었다. 宣祖는 西路를 避難하면서도 西道 人心의 向背를 크게 疑懼하여 李元翼을 불러서 말하되 卿이 일직 安州 牧使가 되었을 때 行政을 잘하여 平安道 百姓이 지금까지 卿을 생각한다하니 卿이 먼저 平安道에 가서 民心을 按撫하라하고 또 崔興源을 불러 말하되 卿이 일직 黃海監司사가 되었을 때 百姓을 사랑하였음으로 黃海道 百姓이 지금까지 卿을 잊지 아니한다 하니 卿이 먼저 黃海道에 가서 民心을 收拾하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開城에 가서 얼마동안 머물다가 倭兵이 따라옴을 보고 平壤을 거쳐서 義州에 가서 머물고 있었다.

國勢가 이렇게 危殆로운 地境에 이르렀을 때에 國內에는 오직 두 줄기의 生氣가 움직였으니 그 하나는 李舜臣의 海戰이오 또 하나는 義兵의 蹶起이다. 李舜臣은 全羅道 左水使가 된 때로부터 미리 倭賊의 侵入이 있을 것을 斟酌하고 優秀한 戰船을 製造하려 하여 百濟 時代 以來 高麗 時代로 거쳐서 傳해오는 我國 特有의 造船技術을 써서 새로이 한 배를 創造하니 그 배는 鐵板으로 위를 덮어서 거북의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 송곳을 꽂고 敵兵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그 사이에 十字路를 通하여 우리 軍士가 自由로 通行하게 하고 前後左右에 銃穴을 내어서 軍士가 그 밑에 숨어 銃을 놓게 된 것이니 이를 龜船이라 한다.

李舜臣은 倭兵이 들어옴을 보고 龜船 八十隻을 거느리고 五月 七日 玉浦에서, 六月 四日에 唐浦에서, 七月 八日에 閑山島의 앞바다 等 敵의 水軍을 連거푸 쳐 부시고 閑山島의 길목을 守備하니 敵이 다시 南海 邊을 엿보지 못하였다. 처음에 倭兵은 陸路와 海路의 두 길로 倂進하여 一擧에 우리나라를 삼키려 한 것인데 海路가 李舜臣에게 막힌 까닭에 陸路 軍의 東은 咸鏡道 豆滿江까지 들어가고 西는 平壤까지 들어갔으되 더 北上하기를 두려하여 王을 쫓아가지 못하였으니 이 大亂에 우리나라가 다시 蘇生함에는 李舜臣의 힘이 絶對한 것이었다.

倭兵이 처음 들어 올 때에는 人心이 모두 慌怯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또 敵은 鳥銃을 가지고 있는데 銃의 威力이 얼마나 큰가를 알지 못함으로 敢히 接戰할 勇氣를 내지 못하더니 時日이 經過함을 따라 漸次로 敵의 情勢를 알게 됨으로부터 憂國之士들의 擧義하려는 氣運이 움직였다. 慶尙道에서 처음으로 義兵을 일으킨 者는 郭在祐(號 忘憂堂)이니 紅衣를 입고 馬를 타고 敵陣에 들어가서 橫行하되 敵이 敢히 막지 못하고 天降紅衣將軍이라 부르고 紅衣將軍이 있는 곳에는 敵이 반드시 避去하였다. 全羅道에서는 光州의 高敬命(號 霽峰)이 아들 從厚, 因厚와 金千鎰 等으로 더불어 義兵을 일으키니 이 消息을 듣고 各地에서 義兵이 연거푸 일어났음으로 壬辰倭亂中에 義兵의 勢力이 가장 큰 곳이 湖南이었고 이 義兵의 힘에 依하여 湖南이 保全된 까닭에 國家의 生脈이 끊어지지 아니한 것이다.

湖南 義兵가운데 高敬命 軍과 아울러 有名한 것은 錦山의 趙憲(號 重峯)軍이다. 趙憲은 壬辰 前年에 미리 明年에 큰 兵亂이 일어 날줄을 알고 宣祖에게 上疏하여 政治의 잘못됨을 痛論하고 急히 防備의 策을 세울 것을 極言하니 그 말이 너무 過激함으로 朝廷에서는 이를 狂人이라 하여 귀양 보내었다.

壬辰亂이 일어남에 同志를 모아서 義兵을 일으키니 遠近의 뜻 있는 사람들이 모두 趙憲이 일어났다. 하여 聳觀하고 憂國하는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여러 番 倭兵과 싸워서 이기더니 錦山싸움에서 衆寡가 不適하여 敗死하고 同志인 七百義士도 함께 죽으니 지금도 戰爭하던 자리에 七百義士 塚이 있으며 이 싸움에 倭兵도 죽은 者가 많고 또 戰爭의 後方 勢力이 어떠함을 알지 못하여 물러가고 다시 全羅道를 엿보지 못하니 湖南北部의 保全함은 主로 趙憲의 힘이었다.

이밖에도 各道에서 義兵이 일어나서 큰 戰功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敵兵을 괴롭게 하여 마음대로 橫行치 못하게 하고 우리나라 百姓에게 한줄기의 氣를 넣어준 功은 적지 아니하였으며 特히 僧兵의 힘이 또한 적지 아니하니 僧 惟政(號 泗溟山人)은 西山大師 休靜의 高弟로서 僧兵을 모아 비록 實戰에는 參加치 아니하였으나 物資의 運搬과 여러 가지 役事에 큰 助力을 하였다.

이때 國軍들도 漸次로 勢力을 얻어서 倭兵을 쳐 부시려는 勇氣를 내게 되고 權慄은 梨崎(배티,大芚山附近)에서, 李廷馣은 延安에서, 金時敏은 晉州에서 모두 크게 이겼다.

이 程度의 兵力만으로는 全國에 가득히 찬 敵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王(宣祖)은 義州에 있어서 柳成龍 李恒福(號 白沙) 李德馨 號 (漢陰)等으로 더불어 國事를 議論하는데 亂이 일어난 後에 黨爭은 一時 멈추어 졌으나 그 底流에는 如前이 東西의 軋轢이 있음으로 王(宣祖)은 「痛哭關山月 傷心鴨水風 朝臣今日後 寧復有西東」가 하여 東西의 싸움이 國家로 하여금 이 地境을 만들어 놓고 또 여기까지 몰려와서 東西 싸움을 하느냐 恨歎하였다.

國事가 이에 이르매 獨力으로는 恢復할만한 길이 없음으로 明나라에 請兵하기로 決定하였다. 이때 明나라에서는 異常한 訛言)이 傳播되어 朝鮮이 倭와 共謀)하여 明國을 치러온다고 하였다 그 證據로는 倭兵이 들어온後 한번의 決戰도 없이 王(宣祖)은 鴨綠江 邊까지 들어오고 倭兵은 平壤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朝廷에서는 請兵하는 使臣을 보내어 이를 辨明하고 또 援兵을 보내어 달라고 懇請하였으며 明나라에서는 使臣을 보내어 調査한 結果 日本秀吉이 將次 明나라를 치기 爲하여 朝鮮에 길을 빌려 달라 하고 朝鮮이 그를 拒絶하자 곧 侵入한 事情과 明國의 울타리가 되고 있는 朝鮮이 明國을 代身하여 倭寇의 禍를 받고 있다는 事實을 確實히 알게 되고 이에 朝鮮에 援兵을 보내기로 決定하였다. 그리하여 癸巳年 正月에 明將 李如松이 군사 四萬을 거느리고 鴨綠江을 건너와서 平壤의 敵을 大破하니 敵이 開城 方面으로 물러났다. 李如松은 敵을 輕히 여기고 追擊하여 碧蹄舘에서 싸우다가 敗하고 다시 追擊할 생각이 없었다. 이때에 權慄이 幸州에서 크게 敵을 破하니 敵은 制海權을 잃어서 補給이 끊어지고 또 平壤과 幸州에서 大敗하여 氣勢가 漸漸 줄어들더니 李如松이 明나라사람 沈惟敬을 시켜서 倭將 小西行長과의 사이에 和議를 進行 시켰음으로 倭兵은 이해 四月에 京城을 물러나서 南海岸으로 내려갔다.

倭兵은 南海岸에서 오래 머물 計劃을 세우고 또 前日에 晉州에서 敗한 것을 憤하게 여겨서 十餘萬의 軍士로 晉州城을 包圍하였다. 前番에 金時敏이 晉州 싸움에 大勝할 때는 數千兵으로써 敵의 十萬兵을 물리쳤는데 이번에는 城中兵이 六萬에 이르니 사람마다 모두 城을 지키기에 아무 念慮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나 오직 晉州 妓生 論介가 근심하였다. 義兵將 金千鎰이 그 緣故를 물으니 論介가 對答하되 前番에는 軍士가 비록 적으나 將帥가 서로 사랑하고 號令이 한군데서 나온 까닭에 이겼지만 이번은 軍士가 비록 많으나 統率이 없고 將帥가 兵을 알지 못하니 이 까닭에 근심한다고 하였다.

城中은 九日 九夜의 동안에 百餘次例를 싸워서 番番히 적을 막으나 마침내 城이 陷落하고 城中의 百姓들까지 모두 七萬名이 죽으니 그 慘酷하기가 壬辰亂 中에서도 가장 甚하였고 論介는 敵將에 끌려서 矗石樓 아래의 岩上에서 敵의 酒宴에 나갔다가 敵將의 허리를 안고 함께 江中에 떨어져 죽으니 後人이 이 岩石을 義妓岩이라고 이름 지었다.

 

  王(宣祖)은 京城이 收復한 後 京城을 떠난지 一年半만에 舊都에 돌아왔다. 그러나 倭兵이 아직 南方에 가득히 차있어 어느 때에 다시 쳐올지 알 수 없고 沈惟敬의 和議의 對하여는 反對의 態度를 취하고 明나라에 積極 南攻하기를 請하였다 明나라에서는 軍士와 物資를 遠輸하기가 困難하다하여 苟且히 和議를 成立시키려하니 王(宣祖)은 國力이 弱하여 獨力으로 倭를 殲滅치 못함을 슬퍼하여 軍制의 大 改革을 提案하니 이 案은 隸를 解放하여 軍士로 쓰자는 것인데 이는 軍制 改革이 될 뿐만 아니라 社會階級制度의 一大 革命이 되는 것이다.

我國의 軍制는 兩班階級은 軍役이 免除되고 奴隸階級은 賤人이라 하여 軍役에 參與치 못하게 하니 그 까닭은 萬一 賤人이 먼저 入隊하여 軍校가 되고 良民이 後에 入隊하여 兵卒이 되면 良民이 賤人의 指揮를 받게 되어 社會의 秩序가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王(宣祖)은 良民이나 賤人이나 모두 나의 赤子이오 또 國家의 앞날을 생각하여 볼 때 軍士가 不足한 現實을 打開하려면 數十萬의 賤人 壯丁을 쓰지 않을 수가 없으니 從來의 階級制度를 깨뜨리고 賤人을 良民과 함께 軍士로 쓰게 하려하니 諸臣들은 이를 잘 討議하라고 令을 내렸다.

朝廷 諸臣中에는 여기에 贊成한 사람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私奴를 많이 부리고 있는 兩班階級은 强硬한 反對運動을 일으켰으니 그 理由는 奴主의 分은 君臣의 分과 같으매 만일 奴隸를 解放하여 良民을 만들면 이는 綱常이 무너지는 것이라 하니 其實은 國家의 綱常을 尊重히 여기는 데서 나온 主將이 아니라 專혀 奴隸를 부려서 豪華한 生活을 누리려는 私心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王(宣祖)의 提案이 마침내 通過되지 못하니 王(宣祖)은 「國家를 살리는 最善의 案이 個人들의 私心때문에 實行되지 못하니 可歎한 일이로다.」하고 이 制度를 公奴에게만 施行하였다. 公奴中에는 晝夜로 武藝를 練習하여 軍隊에 들어가서 良民이 된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으나 便으로 兩班階級의 여러 가지 妨害로 因하여 完全한 實施를 보지 못하였다.

倭兵은 南海岸으로 물러간 後에 明나라와의 사이에 和議가 進行되어 차츰 本國으로 물러가더니 兩國의 代表 사이에 決定한 和議 條件과 明나라가 豊臣秀吉에게 보낸 勅書의 內容이 서로 틀린다 하여 宣祖 三十年 丁酉에 다시 大軍을 보내어 쳐들어오니 이를 丁酉亂이라 한다.

倭兵은 前番의 失敗에 삼가서 水軍을 더 增加하고 또 미리 間諜 要詩羅를 놓아서 우리 朝廷과 李舜臣과의 사이를 離間하니 우리 朝廷에서는 그 謀略에 넘어가서 李舜臣을 잡아다가 獄에 가두고 將次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 事件의 裏面에는 亦是 黨派 싸움이 숨어 있으니 朝廷이 義州에 있을 동안은 黨爭이 한동안 멈추고 있더니 京城에 還都한 後에 다시 再燃하여 北人의 勢力이 優勢한 판인데 李舜臣은 柳成龍의 薦擧한 사람이오 柳成龍은 南人이기 때문에 北人들은 李舜臣을 黨爭의 犧牲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王(宣祖)은 李舜臣 處置에 對하여 意見을 柳成龍에게 물으니 柳成龍은 「李舜臣은 名將이라 倭人의 말을 듣고 함부로 罪줄 수도 없고 또 戰亂이 끝나지 아니한 때 이런 名將을 죽이는 것은 不可하다」하였다.

王(宣祖)은 이 말을 重히 여겨 다만 免職시키고 釋放하니 이때 史臣은 이를 評하기를 「南海를 홀로 지켜서 國脈을 붙잡고 오던 名將이 敵의 謀介 離間과 黨爭의 餘波로 이런 일을 當하니 멀리 南方의 賊勢를 바라보고 가까이 朝廷의 形便을 살펴봄에 가슴속에서 痛哭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구나」하였다.

李舜臣이 免職된 뒤에 元均이 三道水軍統制使가 되니 元均은 本是 李舜臣과 함께 水使로 있었는데 李舜臣이 統制使가 된 뒤에 그 部下되기를 부끄러워하여 恒常 李舜臣을 朝廷에 謀害하던 者이오 먼저에 李舜臣이 罪를 받은 것도 元均의 謀害가 有力한 一因이 된 것이다. 倭兵들은 元均이 李舜臣을 代身함을 듣고 水軍을 크게 發하여 우리 水軍을 치니 元均이 大敗하여 陸地에 올라와 逃亡하였는데 그 生死는 世上이 알지 못하며 敵은 全羅道 海岸을 占領하고 멀리 忠淸道의 稷山 唐津에 까지 侵入하였다. 朝廷에서는 크게 唐慌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판이라 하는 수 없이 다시 李舜臣으로 統制使를 삼았다. 이때 倭兵이 全羅道 陸地에 깊이 들어와 싸우므로 李舜臣은 山谷길을 좇아 右水營에 이르니 戰船의 남은 것이 겨우 十二隻이라 避難船을 모아 가지고 珍島의 울돌목(鳴梁)에서 敵船 五百隻을 무찌르고 古今島를 무찌르니 敵의 勢力이 꺾이어서 다시 西海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때 陸地에서는 明나라 援軍이 南原에서 敗하고 또 蔚山 泗川 順天等地에 陣地를 쌓고 敵과 싸우다가 모두 敗하였다.

敵勢가 다시 盛함을 보고 全羅道 光州사람 金德齡이 義兵을 일으키니 金德齡은 勇力이 있고 眼光이 횃불과 같아서 對敵하는 바가 없고 倭兵이 두려워하여 敢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때 忠淸道에서 叛亂軍이 일어나서 金德齡도 自己들과 合謀한다고 宣傳하니 朝廷에서는 곧 金德齡을 잡아다가 調査한 結果 그 無罪함을 알았으나 金德齡은 李貴의 薦擧한 사람이오 李貴는 西人이라 東人이 朝廷안의 勢力을 잡고 있는데 金德齡의 목숨을 救援하여 줄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金德齡같은 勇將을 放免하였다가 後日에 萬一 叛亂을 일으키면 抑制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죽였다.

우리나라 軍士와 明나라 軍士는 南海岸에서 오랫동안 敵兵과 對峙하고 있더니 宣祖 三十一年 戊戌 十一月에 豊臣秀吉이 죽으면서 倭兵을 撤收시키는데 李舜臣은 그 退路를 막고 慶尙道 露梁에서 敵을 맞아 싸워 크게 破하더니 敵의 彈알에 맞아 戰死하고 敵이 逃還한 者가 겨우 五十餘隻에 不過하고 七年동안의 大亂이 이로써 끝났다. 이때 朝廷의 一部에서는 李舜臣이 「萬一 戰勝하고 돌아오더라도 반드시 奸臣들의 謀害로 죽을 것이니 차라리 戰死하리라」하고 일부러 투구를 벗고 彈알에 죽었다고 하였다.

壬辰倭亂은 日本이 無端히 軍士를 일으켜서 隣國을 侵略하여 無辜한 人民을 함부로 殺戮하고 우리나라는 饑饉과 疾病이 이에 겹 들여서 慘酷한 禍가 蒙古의 侵入보다 더 甚하였고 明나라가 오랫동안 軍士를 움직여서 이 때문에 나라가 몹시 病弊하였다.

明나라 軍士가 우리나라에 와서 있는 동안에 橫暴한 일도 적지 아니하고 소위 關王廟라 하여 中國 옛날의 關羽將軍을 모시고 宣祖 王으로 하여금 절하게 하는 일도 있어 우리나라를 괴롭게 함이 많았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大亂을 求해 주는 恩惠를 깊이 感謝하여 아무런 不平도 말치 아니 하였고 明나라는 이 亂離에서 많은 軍士와 財物을 잃은 까닭에 얼마 되지 아니하여 滿洲族에게 亡하게 되니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깊이 明나라 恩惠를 생각하여 오래 잊지 아니 하였다.

이 亂離에 武器의 發達한 것은 龜船 以外에 飛擊震天雷가 있으니 이는 李長孫이 만든 大砲로써 이 砲가 터지면 소리가 天地를 震動하고 鐵片이 튀어 나가서 敵을 해치는 것인데 慶尙左水使 朴昔이 이 砲를 써서 慶州를 恢復하였다. 倭兵으로부터 얻은 鳥銃은 本是 日本이 西洋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인데 우리나라도 이 法을 얻은 後에 工匠에게 命令하여 製造하니 이가 우리나라가 銃을 使用한 처음이다. 倭兵은 물러갈 때에 여러 가지 技術者를 사로잡아 가고 特히 그 中에는 陶工이 가장 많았음으로 日本의 陶磁器 工業이 이로부터 始作하였다. 倭兵은 저희들도 많은 軍士와 物資를 犧牲하고 아무런 所得이 없이 돌아갔으나 우리나라의 優秀한 技術을 배워 갔음으로 저희들끼리 말하기를 「武裝한 遊學生을 朝鮮에 보냈다」고 하였다. 豊臣秀吉이 죽은 後 德川家康이 새로이 幕府를 열어서 以前의 잘못을 말하고 國交를 恢復하기를 거듭 請하며 또 그들에게 사로잡혀간 數千名의 捕虜를 돌려보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日本에 對한 復讐心이 복 받혀서 許諾치 아니하더니 兩國間에 오랫동안 國交가 끊어지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戰爭이 끝난지 七年(乙巳)만에日本의 所願을 들어서 釜山에 다시 倭館을 열고 對馬島와의 貿易을 許諾하여 그 後 三百年동안 繼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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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의 腐敗(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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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의 腐敗

燕山君 以後 六十餘年 間 奸臣이 政權을 잡을 때가 많았고 明宗 末年에 이르러서는 政治가 極度로 어지럽고 貨賂가 盛行하여 社會는 腐敗 一路를 걷고 있었다. 外方의 貢物은 開國初에 地方産物과 戶口數를 勘案하여 定한 것인데 燕山君이 이를 加徵하고 또 産物이 數量과 戶口가 五六十 年間에 變動된 것이 적지 아니 하되 朝廷에서는 그것을 民間 實情에 맞도록 改正치 아니하여 民弊가 甚하였다.

軍役은 軍布을 바치고 徵召됨을 免하는 制度가 行하였는데 이는 各 鎭堡가 軍布를 받아 가지고 軍人을 傭人하기 爲함이다. 그러나 鎭堡의 主將이란 者들은 軍布로써 私腹을 채우고 軍士를 傭人치 아니 하는 까닭에 各 鎭堡의 實際 人員은 定員數의 千의 二三에도 達치 못하고 軍籍에는 虛名 假名 甚至於 狗名 猫名까지 씌어있었다. 그리고 한번 軍布를 바치기 始作한 사람은 每年 繼續하여 바치기로 되어있는데 或은 그 사람이 死亡한 뒤에도 如前히 徵布하는 일이 있으니 이를 白骨徵布라하고 或은 乳兒에게도 徵布하였으니 이를 黃口徵兵이라 하고 或은 사람이 苦役을 견디지 못하여 全家를 거느리고 逃亡하여 버리면 그 軍布를 그의 一族으로부터 받고 一族이 없으면 切隣으로부터 徵收하니 이는 軍布가 主將의 私收入이 되는 까닭에 死亡 乳兒 逃亡 같은 事實을 國家에 報告하지 아니하고 繼續 徵收하는 것이며 이로 因하여 鎭堡에는 每年 固定不變하는 軍布 收入이 있었다. 그럼으로 이때에는 各 鎭堡의 價格이 軍布 疋數에 定해져서 그 價格의 多少로써 地位의 高下를 定하는 것이었다.

吏胥의 弊亡 前부터 있는 일이지만 中宗 明宗의 前後 三十餘年 間 中央의 政治가 어지러움으로 因하여 더욱 甚하여져서 모든 苛斂誅求에 百姓들은 그 生活을 維持할 수 없었고 當時 郡縣의 數는 三百二十餘인데 郡縣이 너무 많아서 百姓의 負擔이 過重함으로 이를 廢合하여 百姓의 負擔을 輕減하려고 企圖한 일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吏胥의 失職하는 者가 많게 됨으로 郡縣의 實權을 잡고 있는 吏胥들은 中央政府 內의 奸臣輩들과 結託하여 極力으로 沮害한 일도 있었고 守令들은 中央으로부터 任命되어 三年이라는 任期(任期에는 伸縮이 있었다.)를 지내는데 地方의 實情을 잘 알지 못함으로 그 大部分은 吏胥의 손에 事務를 맡겨 버리는 形便이어서 百姓들은 守令보다도 吏胥를 두려워하였으니 이 까닭에 國家의 末端行政은 吏胥政治로 化하였다.

曺植 같은 이는 明宗에게 上書하여 王의 母后 文定王后가 寡婦로서 政治를 어지럽게 한다는 寡婦干政論과 郡縣의 吏胥輩들이 國事를 그르치고 있다는 吏胥亡國論을 올려 世人의 耳目을 聳動케 한 일도 있었다.

이때 儒臣들은 여러 次例의 士禍를 겪어서 비록 氣가 꺾이었으나 그 潛在한 힘은 더욱 굳세어 功臣戚里들을 미워하는 생각이 날로 强해지더니 明宗 末年에 文定王后가 죽음에 從來 王后의 힘을 背景으로 하여 온갖 橫暴를 恣行하던 尹元衡은 依支할 곳이 없는 一獨夫라 儒臣들은 一齊히 蹶起하여 마침내 尹元衡을 몰아내고 무리를 一掃하였다.

明宗의 뒤를 이어 宣祖가 王이 되니 이때는 名相 李浚慶이 領議政이 되고 朝廷이 儒臣 一色으로 組織되었다. 世祖때에 儒臣 對 功臣戚里파의 싸움이 일어난 以來 一百十餘 年만에 비로소 儒臣이 完全히 政權을 잡으니 이로부터 그 理想하는 바의 政治를 實現할 時機가 到來한 것이다.

그러나 李浚慶은 그 臨終 遺箚에 「只今 士習이 浮虛하여 虛僞가 風을 作하니 朋黨의 漸이 있다」고 警告하니 當時 儒士들이 輕躁하여 篤實한 風이 없고 高言大談을 일삼고 사람의 조그마한 過失이라도 寬容함이 없이 攻擊하기를 좋아함으로 반드시 朋黨이 생긴다고 豫言한 것이다.

이 遺箚가 한번 들어오자 朝廷 諸臣들은 朋黨이 없음을 極力 辨明하고 李珥같은 이는 李浚慶이 無根한 말로써 士林을 禍毒하는 것이라 하여 攻駁하고 甚至於 李浚慶을 追罪하자는 激論까지 일어난 일이 있으니 이는 自己들이 決코 朋黨을 만들지 않을 것을 盟誓함과 같음이다.

그러나 李浚慶이 죽은지 四年만인 宣祖 八年 乙亥(檀紀 三千九百八年)에 마침내 東西分黨이 생기고 말았다. 처음에 沈義謙은 王室의 外戚으로서 明宗때에 奸臣들의 行惡이 甚한 中에서 儒士들을 救活한 일이 많았음으로 비록 沈이 戚里派에 屬하되 儒臣들의 好感을 얻고 있으며 金孝元은 新進 儒士로써 年少儒臣들의 推仰을 받고 있었는데 金孝元은 沈義謙을 戚里派라 하여 排擊하고 沈義謙은 金孝元이 일직 權臣의 門에 出入하였다 하여 蔑視한 關係로 두 사람사이에 葛藤이 생겼다. 이에 沈義謙을 右하는 者와 金孝元을 右하는 者가 생기고 輕佻浮薄한 무리들이 마치 正月 初生 줄다리기에 兩便에 서로 와서 덧붙듯이 或은 沈義謙派에 붙고 或은 金孝元派에 붙어서 朝廷안이 兩黨으로 갈라지니 沈의 집은 서울의 西便에 있음으로 그를 西人이라 하고 金의 집은 東便에 있음으로 東人이라 하고 또 老成派는 大槪 西人이 되고 少壯派는 大槪 東人이 되니 儒臣 對 功臣戚里派의 百十餘年間의 激烈한 鬪爭은 亦是 儒士 對 戚里의 些少한 感情 疏隔을 契機로 하여 그 形態가 一變하여 同流 相殘 同志 相食하는 儒臣 對 儒臣의 醜惡한 黨爭으로 化하였다.

黨爭이 한번 일어난 後 朝廷안에는 中正 不偏한 者가 거의 없고 오직 自黨의 이해를 爲하여 움직여서 政治의 理想이 있는 것도 아니오 事의 是非와 善惡을 가리는 것도 아니오 東人은 東人을 擁護하고 西人은 西人을 擁護하여 一大 亂鬪 場을 이루었다. 宣祖는 群臣에게 누가 朋黨을 만들고 있느냐고 問責한즉 群臣들은 朋黨이라는 말은 다만 巷間에서 流布되는 風說이오 朝臣中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辨明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쓰고 罪 줌이 모두 黨爭의 影響을 받아서 公論이 行치 못하고 政治가 어지러워짐으로 李珥는 이를 調停하는 것을 己任으로 삼고 分黨의 張本人인 沈義謙과 金孝元을 外官으로 내어보내면 黨爭이 멈추리라고 하여 王께 이 意見을 아뢰었던바 王은 沈義謙으로 開城 留守를 삼고 金孝元으로 會寧 府使를 삼으니 비록 同한 外官이로되 沈은 昇進되고 金은 貶點되는 結果를 生하였다. 이에 東人들은 크게 不平을 품고 또 金의 貶點은 李珥의 提案에 依한 것이라 하여 一齊히 일어나서 李珥도 公正한 調停者가 아니고 西人에 黨하여 東人을 壓迫하는 것이라 하여 攻擊을 行하니 李珥는 調停하기를 斷念할 뿐만 아니라 朝廷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음으로 鄕里로 물러갔다. 이때 李之菡은 國事를 근심하여 말하기를 栗谷이 朝廷에 있으면 큰 效果는 없어도 破局은 되지 않을 것이지만 한번 물러가는 날이면 이 政局을 다시 收拾할 수 없으리라 하여 크게 歎息하였다.

飮食이 있는 곳에 반드시 다툼이 있는지라 처음에는 西人이 得勢하더니 얼마 되지 아니하여 東人이 힘이 커지자 東人 속에서 다시 內部에 싸움이 일어나니 이는 李山海를 中心으로 한 一派와 柳成龍 號 (西崖)을 中心으로 한 一派이니 李는 서울에 살고 있음으로 北이라 하고 柳는 嶺南에 살고 있음으로 南人이라 하였다. 이에 朝廷은 南 北 西의 三黨으로 나뉘어 三色 싸움을 하게 되었다.

이때 日本과의 關係는 날로 險惡하여 가고 國內 情勢는 黨爭으로 因하여 더욱 腐敗하여지고 特히 兵備가 極히 虛疎하여 北의 野人이나 南의 倭寇가 侵入하는 일이 있으면 到底히 막을 수 없이 되었다. 이에 李珥는 미리 十萬 兵을 養하여 京城에 二萬을 두고 各道에 一萬씩을 두어 廬外의 惡을 防備할지오 萬一 그렇지 아니하면 一年을 不去하여 土崩의 禍가 있으리라고 逕庭에서 아뢰나 柳成龍이 無事泰平한 때에 兵을 養하는 것은 禍를 養함이라 하여 反對하고 다른 朝臣들도 黨爭에만 熱中하고 國事를 근심하는 者가 없음으로 이 나라를 살리는 唯一策인 十萬 養兵論은 實現되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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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과의 關係(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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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과의 關係

世宗때에 玉浦를 열어서 貿易을 許諾한 것이 그 後 차츰 倭人의 數爻가 늘어서 數千名에 이르며 朝廷의 命令을 어기는 일이 적지 아니하더니 中宗 五年(檀紀 三千八百四十三年 (庚午)에 對馬島와 連結하여 亂을 일으키니 이를 三浦倭亂 또는 庚午倭變이라 한다.

이 亂은 곧 平定되었으나 그 後에도 中宗 三十九年에 統營郡 蛇梁에서 變亂을 일으킨 일이 있고 明宗 十年 乙卯에 또 다시 海南郡 達梁浦에 侵入하니 이를 乙卯倭變이라 한다. 元來 倭人들은 我國과 貿易하지 아니하고는 살수가 없는 데이나 그 貿易額에는 制限이 있으므로 倭人들은 秘密히 制限外의 貿易을 行하고 또 變裝하고 居住區域밖에 나와서 民家로 좇아다니면서 장사하는 한便 國家의 政治와 事業의 機密을 偵探하여 倭 本國에 報告하는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에 政府에서는 地方官吏에게 命하여 그를 嚴禁한 關係로 兩國民의 感情이 서로 좋지 못하여 마침내 三浦의 變이 일어나고 그 變이 平定된 뒤로 從來의 貿易額을 半으로 줄이니 이때로부터 倭人의 我國에 對한 感情이 더욱 惡化되었다.

이에 朝廷에서는 倭人들이 倭寇를 잡아 바치었다든가 漂流한 우리나라 사람을 돌려 보내주었다든가 하여 우리나라에 功勞가 있는 者에게는 官職을 주어 이를 守職倭라 하여 特別한 待遇로써 그들을 撫摩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그들의 感情은 마침내 풀리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奸狡한 꾀로써 우리나라를 속이고 우리나라 國政을 密偵하니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들을 對할 때 敬語를 쓰는 일이 적고 흔히 왜놈이라 불러서 侮辱하였다. 金安國같은 이는 이를 근심하여 兩國民 사이의 感情이 좋지 못하고 將來 國家에 利롭지 못하리라고 警告한 일도 있었다.

乙卯亂이 일어나자 朝廷에서는 李浚慶으로 都巡察使를 命하여 치게 하니 李浚慶이 湖南에 내려갔으나 軍士도 몇 사람 되지 아니하고 武器도 없어서 싸울 수가 없었다.

이에 한편으로는 軍士들을 召集하고 한편으로는 武器를 만들어서 迎擊하더니 賊은 掠奪하여 가지고 海上으로 도망하였다. 이 亂이 있은 後에 한동안 兩國 交通이 끊어지더니 日本이 다시 通商하기를 懇望하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들을 撫摩하는 것이 得策이라 하여 通商을 許하는데 從來에 開港한 菁浦方面은 疊疊한 島嶼에 싸여서 倭船이 숨기 쉽고 우리나라의 斥候가 보기 어려움으로 釜山 一港을 열어서 倭船의 來往을 許하니 이는 釜山에 섬이 없어서 倭船의 來往을 보기 쉬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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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宗反正後의 國政(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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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宗反正後의 國政

中宗의 反正은 燕山君의 虐政에 괴로움을 받던 百姓과 두 番의 士禍에 氣가 꺾어진 儒學界에 한 光明을 주고 活氣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社會의 行方面에 改革의 氣運이 움직였다. 이때 金宏弼의 弟子에 趙光祖(號 靜菴))가 있으니 그는 儒學을 振興하고 政治를 淨化함으로써 己任을 삼고 中宗의 信任을 얻어 金淨 金湜 等 靑年學徒와 더불어 그 理想한 바를 實現하기에 努力하였다. 그리하여 비로소 鄕約法을 施行하여 地方自治의 制度를 세우니 鄕約이라 함은 中國 宋나라 사람들이 始作한 것으로 한 地方사람끼리 自治的인 規約을 만들어 善한 일을 서로 勸勉하고 惡한일을 서로 規諫하고 禮義로써 서로 交際하고 患難을 서로 救濟한다는 네 가지 趣旨에서 나온 것이다. 中宗反正의 때에 功臣에 濫參한 者가 많았으니 元來 反正功臣이라 함은 反正事業을 劃策하고 身命을 그 事業에 바친 者를 말함이다. 그런데 中宗의 功臣中에 擧事하는 날에 그 所聞을 듣고 비로소 와서 列에 參擧한 者 實際로 이 事業에 貢獻한 일이 없이 功臣들과 因緣이 있는 者들이 功臣名簿에 記錄됨으로 因하여 功臣인 者가 七十餘人에 達하고 功臣들은 國家로부터 功臣田을 받아서 世襲하고 君을 封하여 社會的 特權을 享有하니 趙光祖 一派는 이러한 功臣들을 削除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當時 反正의 功이 있는 功臣들 中에는 特權을 濫用하여 勢力을 얻기와 財貨를 모으기에만 힘쓰는 者가 적지 아니하니 이는 國家를 爲하여 反正事業을 行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富貴를 얻으려 하는 反正 牟利輩의 行動이었다. 儒臣對 功臣의 싸움은 해를 지낼수록 더욱 深刻하여지는 터이라 趙光祖 儒臣一派가 이를 그대로 看過할 理가 없었다. 그리하여 功臣派에 어떠한 過失이 있는 때는 總蹶起하여 攻擊하고 王이 自己들의 意見을 듣지 아니하는 때에는 同盟退職한 일도 二三次 있었으나 中宗王은 暗王이라 趙光祖를 信任한 것도 마음속으로부터 나온 信任이 아니라 다만 一般世論을 듣고 그를 賢人이라 하여 大用한 것이다. 그런데 趙光祖 一派는 中宗을 堯舜과 같은 聖君을 만들고 社會로 하여금 誠意正心할 것을 强要하다 깊이 歎하였다.

이 까닭에 趙光祖 一派는 弊政을 改革한 것이 많아서 百姓으로부터 歡迎을 받는 反面에 功臣 貴族들로부터 極度의 미움을 받고 王도 또한 漸漸으로 厭症을 내게 되었다.

趙光祖 一派는 專혀 道學을 主張하여 小學과 같은 修身書와 近思錄과 같은 性理學을 爲主하고 詩 賦 表 策과 같은 文章學을 排斥하며 人才를 取함에 있어도 文章으로써 科擧를 보는 現行試驗法을 廢止하고 人物考査로써 사람을 取하는 賢良科를 行하기를 建議하니 이때 領議政으로 있는 鄭光弼이 홀로 反對하여 말하되 賢良科의 이름은 비록 좋으나 人心이 淳厚치 못한 今日에는 반드시 弊害가 生할 것이니 行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王은 趙光祖의 말을 좇아 마침내 施行하였다. 그러나 賢良科의 試驗官은 主로 趙光祖 一派가 當하고 있었음으로 그 取하는바 사람은 거의 性理學 派들이어서 文章을 主하는 선비들의 不平이 적지 아니하고 人才를 씀이 偏僻하다는 非難이 各方面에서 일어났다.

李朝의 田制는 國有制이오 買賣와 典當을 禁하더니 徵兵制度에 入營하는 費用 또 兵役服務中 衣食諸費를 軍人이 自擔하는 關係로 農民이 軍隊에 徵召되는 때에는 그 入營하는 모든 費用을 마련하기 爲하여 耕作하던 土地를 典當치 아니할 수 없고 典當期間은 五年으로하되 그 期間이 지나도 負債를 갚지 못하는 때는 土地가 貸金業者의 所有로 넘어가는 것이니 이것이 비록 國法에 違反되는 일이나 國家에서는 軍隊徵召上 禁止할 수 없는 일임으로 黙認치 아니할 수 없으니 이것이 田制破綻의 始初이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典當行爲가 秘密裏에 行하더니 乃終에는 公公然하게 慣習化하고 所有의 移轉도 自由로 行하여 完全한 私有制로 化하고 따라서 土地없는 農民들은 남의 土地를 耕作하고 收穫物의 一部를 地主에게 주게 되었으니 이것이 地主와 小作人이 發生한 始이오 世宗 末年으로부터 世祖때에 걸쳐서 생긴 일이다. 그 後에는 典當期間 五年이라는 것이 五十日로 短縮되니 軍隊로 徵召되는 軍人이 五十日 期間內에 還土할 수는 없음으로 典當하는 날이 곧 土地가 永永 放賣되는 날이다.

이 까닭에 貧民들의 耕地는 急速度로 富人의 손에 兼倂되고 中宗때에 이르러서는 地主와 小作人이라는 두 階級이 똑똑히 社會面에 나타났다. 江陵사람 朴遂良은 御前에서 賢良科 試驗을 마치고 말하되 「平素에 生覺하고 있는 바를 한번 殿下께 아뢰고자 하였는데 이 機會에 아뢰어도 좋은가」라고 물어서 王의 許諾을 받고 아뢰기를 「지금 江陵 地方은 土地없는 農民이 許多하여 農民 生活이 대단히 窮乏하니 이것은 하루바삐 고치지 아니하면 國家의 將來에 큰 근심이 될 것이니 다시 均田制를 行하는 것이 可하다」고 하였다.

重臣들 中에는 地主의 土地를 國家에서 收上하여 土地없는 農民에게 분급(分給)할 수 는 있으나 그렇게 하면 空然한 混亂을 일으킬 것이라 하여 反對하고 前日에 分給한 것을 地主에게 팔고 農土를 잃었으니 지금 分配하여 주더라도 또 後에 다시 地主에게 팔 것이 아니냐하여 應치 아니하였다. 이 問題가 한번 提議되자 朝廷안에는 兩論이 對立하고 趙光祖 派에서는 土地를 다시 分配하자는 革新論을 主張하여 비록 後日에 다시 팔아버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今日의 일은 今日의 情에 맞게 하는 것이 政治의 本旨라 하여 期於히 土地制度를 改革하려 하였다. 王은 重臣들로 하여금 여러 날 동안 討論시킨 結果 한 사람의 土地 所有는 五十結 以內로 制限하기로 하니 當時에 있어서 土地 所有를 制限한 것은 一大 改革이 아닌 것은 아니나 大體로 地主階級에 有利한 解決이오 今後의 土地 兼倂의 防止에 아무런 實效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地主 階級이 이 制度令에 對하여 不滿을 가진 것은 勿論이다.

趙光祖 一派의 政治 理念은, 그 理想은 좋으나 그 手段이 過激한 點이 많고 功臣 貴族들과의 사이에 極端의 非妥協 態度를 取하고 性理學派 以外의 사람에게는 偏狹한 排他心으로 對하여 當時 賢 宰相으로 이름난 鄭光弼같은 이도 그들은 鄙夫라고 痛罵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自己 일파一派의 사람들을 朝廷에 布列하고 漸漸 政治의 實權을 잡으며 百姓들은 그들을 크게 歡迎하게 되니 이에 王은 隱然히 危懼 不平한 마음을 품게되었다. 그러던 中 그들은 七十餘人의 僞勳을 削除하자고 提議하니 功臣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들기 始作하고 平素에 儒臣派로부터 小人이라는 이름 밑에 極度의 排斥을 받은 南袞과 功臣의 한사람인 沈貞 等이 主動이 되어 便으로 王의 마음을 動搖시키고 便으로 趙光祖 派의 謀逆함을 誣告하여 中宗 十四年 己卯에 趙光祖와 그의 同志들을 一網打盡하여 卽回로 죽이려하는 것을 鄭光弼이 王의 소매를 붙잡고 「新進 年少들이 時務를 알지 못하고 그 行動이 過激하였을 뿐이오 異志가 있는 것이 아니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挽留하여 모두 귀양살이 보내더니 未久에 謫所에서 大部分을 죽이니 이것이 己卯士禍이다. 이 禍가 있은 後에 賢良科를 廢하고 土地制度 限令이 스스로 消滅됨은 勿論이오 小學과 近思錄을 읽는 者는 모두 趙光祖 派라 하여 强壓함으로 이러한 글은 當世의 큰 禁物이 되고 南袞 沈貞 等이 用事하여 政治를 어지럽게 하고 鄭光弼도 그들에게 물려 나갔다.

南袞 沈貞 等이 政權을 잡고 그 黨類를 이끌어 들여 政治를 어지럽힌 지 十餘年에 王은 그 무리에게 속은 줄을 깨닫고 金安老를 써서 그 무리를 없애니 이를 以毒制毒이라 하여 安老의 凶惡함은 袞貞의 무리보다 더 甚하였다. 安老가 用事한지 七年에 王은 그 一派를 모두 除去하니 奸臣이 政權을 잡음이 前後 十九年동안이라 王은 크게 悔悟하여 歎息하되 「처음에 趙光祖 一派를 몰아내면 國事가 잘될 줄 알았더니 袞貞 一派의 奸惡은 말할 수 없이 甚하였고 이 一派를 몰아내면 今後는 아무 일 없을 줄로 생각했더니 安老의 凶惡은 前보다 더 甚하여 國家를 危殆롭게 하고 百姓을 괴롭게 하였다. 後世에 나를 어떤 임금이라 稱할고」하고 鄭光弼을 謫所로부터 불러들여 政丞을 삼으니 百姓들이 天日을 본듯이 歡呼하였다. 이에 小學 近思錄의 禁이 스스로 풀리고 儒臣들을 擧用하였으며 豊基郡守 周世鵬은 비로소 書院을 짓고 거기에 先賢을 모시고 儒生들이 모여서 道學을 硏究하게 하니 이것이 李朝書院의 始初이다.

그러나 中宗은 暗主라 朝廷안에 王權 爭奪의 端緖가 열리었다. 中宗도 妃에 先妃 尹氏는 仁宗을 낳고 繼妃 尹氏는 明宗을 낳았는데 仁宗의 外叔은 尹任이오 明宗의 外叔은 尹元衡이니 世人이 尹任을 大尹이라 하고 尹元衡을 小尹이라 하고 이 두 사람의 勢力 다툼을 大尹 小尹의 싸움이라 하였다. 仁宗은 中宗을 이어 王이 된지 겨우 一年에 昇遐하고 아들이 없음으로 그 아우 明宗이 十二歲에 王이 되고 그 母后 文定王后가 政治 實權을 잡고 尹元衡이 用事하니 最初부터 戚里派를 미워하는 儒生들이 明宗 外家의 擅政함을 좋아할 理가 없었다. 이에 尹元衡은 前부터의 政敵인 大尹 一派와 自己에게 좋지 못한 感情을 가지고 있는 儒臣들을 一切 排除하기로 定하고 明宗이 王이 되던 乙巳年에 根據없는 事實을 꾸며서 逆賊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을 或은 죽이고 或은 귀양보내니 이를 乙巳士禍라 한다.

乙巳士禍는 여러 次例 士禍 中 가장 慘酷하고 人心이 가장 憤慨하였다. 戊午 己卯의 士禍는 그 相對者가 奸臣들이었고 甲子士禍는 燕山君이 그 어머니를 爲한 復讐이니 或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乙巳士禍는 王의 母后와 王의 外叔이 아무런 罪가 없는 儒臣들을 誣陷하여, 絶對忠誠을 다할 것을 學問의 大本을 삼고 있는 儒學徒들도 王室에 對한 忠誠이 엷어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前者에 세 번의 士禍에는 비록 慘酷한 變을 當하였으되 오히려 다시 儒學을 振興하여 그 理想하는 바를 政治의 面에 實現하려고 努力하는 사람이 連달아 나왔지만 乙巳士禍 以後에는 그들은 政治에서 물러나 現實 世上과 因緣을 끊고 山林에 숨어서 오로지 學問에만 힘쓰게 되었음으로 政治와 學問이 나뉘어져서 所謂 山林學者라는 것이 생기고 實事를 떠나서 理論에 行動을 떠나서 思索에 치우치는 傾向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徐敬德(號 花潭) 曺植(號 南溟) 이李滉(號 退溪) 奇大升(號 高峯) 李之菡(號 土亭)같은 一代 名儒가 나서 明宗時代의 儒學界에 꽃을 피웠으나 그들은 政治 方面에 발을 들이지 아니하고 비록 李滉같은 이는 王의 부름을 받아서 벼슬에 나온 일이 있으나 기회만 있으면 다시 山林으로 돌아갔음으로 그때에 이를 評하여 山禽이라고 別名을 지은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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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山君의 失政(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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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山君의 失政

成宗 王妃 尹氏는 燕山君의 生母라 尹妃가 王에게 不遜한 일이 있음으로 王이 廢位하였다가 죽였다. 燕山君은 性質이 元來 亂暴한데 그 母가 寃死함을 알고 心中에 깊은 惡感을 품고 있었다. 이때 臣下들 中에는 後日에 燕山君이 王位에 오르면 반드시 國事를 크게 그르치리라고 諷諫한 사람도 있었으나 成宗도 그 性味를 모르는 바 아니로되 참아 世子를 廢할 수가 없다하여 實行치 못하고 마침내 燕山君을 세워서 李朝 衰頹의 端을 열었으니 이는 專혀 成宗 柔弱의 所致이다.

燕山君이 王이 된 後에 儒臣 對 功臣戚里의 싸움은 如前히 激化하였다. 成宗은 恒常 儒臣을 擁護한 까닭에 儒臣의 言論이 實行되었지만 燕山君은 昏暗한 임금이라 儒臣들이 功臣戚里를 攻擊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또 그때 朝廷에는 功臣의 子孫들과 外戚의 무리가 權勢를 잡고있어 儒臣들을 몹시 미워하였다. 그런데 金宗直이 일즉 「弔義帝文이라는 글을 지은 일이 있으니 이 글은 옛날 中國에 項羽가 義帝라는 어린 임금을 세우고 섬기다가 죽인 일이 있는데 隱然히 義帝를 端宗에 比하고 項羽를 世祖에게 比하고 義帝를 弔함은 곳 端宗을 弔함이라 宗直의 弟子 金馹孫이 史官이 되어 이 글을 史草에 記載하고 그 끝에 「忠憤之文」이라고 附記하였다.

功臣戚里派 中의 李克墩 柳子光 等이 이 史草를 보고 이는 世祖의 일을 誹謗하는 것이라 하여 燕山君에게 알리니 燕山君은 이를 大逆罪라 하여 金宗直의 屍體를 파내어 버리고 金馹孫 鄭汝昌 金宏弼 等을 비롯하여 그의 弟子들을 或은 죽이고 或은 귀양보내니 이를 戊午士禍 또는 史禍라 하고 李朝 儒學界에 第一次의 劫運이었다.

燕山君은 淫蕩하고 遊宴을 좋아하여 莫大한 財政을 消費하고 遊宴費가 不足하게 되자 人民으로부터 貢物을 加徵하여 祖宗 以來의 規準을 깨뜨리고 奸人輩를 登用하여 國政을 混亂케 하더니 戊午士禍가 있은지 六年만에 그 生母 尹氏를 廢하여 죽일 것을 主張한 사람들을 調査하여 或은 죽이고 或은 귀양 보내니 이를 甲子士禍라 하고 儒學界의 第二次 劫運이었다. 두 番의 士禍가 있은 後로 燕山君은 虐政이 더욱 甚하여 政治가 어지럽고 百姓이 살 수 없으니 이에 成希顔 朴元宗 等이 反正運動을 일으키어 燕山君을 廢하여 江華島의 喬桐에 내치고 燕山君의 아우 晉城大君을 推戴하여 세우니 이를 中宗反正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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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基礎의 完成(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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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基礎의 完成

世祖의 다음에 睿宗은 位에 있은지 一年이오 成宗이 王이되니 이때는 李朝의 基礎가 굳어지고 또 여러 가지 制度가 갖추어졌다. 王은 儒臣 金宗直 等을 쓰고 東國通鑑 東國與地勝覽 東文選같은 冊을 만들고 또 世祖때에 始作하여 끝마치지 못한 經國大典을 完成하니 이는 以後 數百年동안 政治를 行하는 기틀이 되었다. 集賢殿은 世祖때에 廢하였으나 成宗은 弘文館을 새로이 두고 젊은 學者들을 工夫시키던 湖堂도 다시 始作하였다.

社會의 階級에는 네 層이 있어 그 地位가 職業과 社會的 待遇를 달리 하였으며 大槪는 居住地域도 달리하고 또 다른 階級과 婚姻하는 일도 적었다. 여러 階級 中에 가장 上層에 있는 것이 兩班이니 兩班이라 함은 東班인 文官과 西班인 武官을 合한 말이다. 公卿과 士大夫 階級을 통틀어 말함이며 이들은 政治를 指導하는 地位를 차지하여 모든 特權과 享樂을 누리었다.

그 다음에 中人 階級이 있으니 그들은 醫官 譯官 計士 觀相 律學 寫字 圖畵 等 國家에 要緊한 技術 方面의 일을 맡아보았다. 社會的 地位는 양반과 常民의 中間이었으며 이 밖에 吏胥와 軍校 같은 層은 보다 얼마쯤 낮은 것이었으나 亦是 中人 階級에 屬하였다. 그 다음에 常民階級은 農業 工業 商業에 從事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數가 가장 많고 또 國家經濟의 中心을 이루고 있으나 그 社會的 地位가 낮아서 自己의 生存權을 保全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하고 兩班과 中人에게 눌리어 지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賤民階級은 奴婢를 비롯하여 俳優 巫堂 妓生 驛卒 白丁 等을 말하는 것이니 奴婢에는 國事에 屬하는 것을 公奴婢라하고 個人家에 屬하는 것은 私奴婢라 하며 白丁에도 지금에 흔히 말하는 소 잡는 사람만이 白丁이 아니라 柳器 匠皮 革工 같은 것도 모두 白丁이라 불렀고 이들은 人權을 主張하지 못함은 勿論이오 어떤 境遇에는 牛馬와 同樣의 待遇를 받았다.

外交關係에 있어서는 明나라에 對한 朝貢과 日本 南陽 等에 對한 交隣이 있었는데 이러한 外交의 裏面에는 隣國들과 平和로운 貿易을 行하려는 것이 있었다. 明나라와의 關係는 해마다 使臣을 보내어 朝貢貿易을 行하고 저쪽에서 使臣이 오면 이를 勅使라 하여 特別히 待遇하였는데 朝貢貿易이라 함은 物貢의 形式을 通하여 나라와 나라사이의 公的貿易을 行하는 것으로 이는 中國 사람들의 大國然하는 自尊心에 말미암은 것이며 우리나라에서 貢物의 形式으로 내어가는 物件은 金銀, 人蔘, 豹皮, 苧布, 花紋席, 螺鈿, 白紙 等이었고 그 代身 저쪽에서 들어오는 것은 主로 絹緞, 磁器, 藥材, 書籍 等이었으며 이밖에도 國境 地帶의 私貿易과 密貿易을 通하여 두 나라 사이의 物資가 많이 交流되었으니 이 時代는 三國時代에 比較的 自由로 中國으로 往來하면서 學問도 배우고 貿易도 하던 때와 달라서 公的으로 中國을 다니는 以外에는 往來를 嚴禁하는 鎖國時代라 物資의 有無相通이 如意치 못함으로 鴨綠江 岸의 中江鎭과 豆滿江岸에서 年 一二次 公的貿易을 行하는 外에 密易이 年中 盛行하였다. 明나라에 바치던 金銀 貢은 世宗때에 外交 交涉에 依하여 免除되고 그 後로는 우리나라에서 金銀이 나지 아니함을 보이기 爲하여 金銀鑛을 廢한 일도 있었다.

日本과의 사이는 世宗 元年에 對馬島를 친 以後로 한때 交通이 그쳤었으나 對馬島는 山이 많고 食糧 其他 物産이 적어서 우리나라의 힘을 입지 아니하면 살아갈 수가 없음으로 저쪽에서 謝罪의 뜻을 表하고 다시 서로 和好하기를 懇請하였다. 이에 世宗은 三浦를 열어서 對馬島人이 와서 貿易함을 許諾하니 三浦라 함은 薺浦 (지금의 (昌原郡)(馬山傍) 薺德里의 乃而浦 釜山浦 蔚山의 塩浦이다. 그 後에 癸亥條約을 맺어서 해마다 對馬島 王이 보내는 배를 五十隻으로 限定하며 또 米豆 二百石 씩 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貿易品을 倭人들은 銅 銀 硫黃 等의 鑛産物을 비롯하여 南洋의 特産인 蘇木 胡椒 香料 等을 들여오고 우리나라에서는 綿布 麻布 米豆 白紙 書籍(特히 大藏經)을 보내었다.

女眞과의 사이에는 豆滿江 기슭에 鏡城 鏡源의 貿易所를 열어서 그들의 馬匹과 여러 가지 獸皮 卽 土豹皮, 貂鼠皮, 熊皮, 鹿皮를 들여오는 代身 이쪽에서 金銀, 麻布, 苧布, 綿布, 農具, 釜鼎, 鍮器, 白紙, 鹽醬, 酒 等을 내어 보냈으며 또 女眞의 酋長들에게 職帖을 주어서 그 階級에 따라 서울에 와서 進上肅拜란 이름으로 公的貿易을 하게 하니 이는 朝貢貿易의 形式을 본뜬 것이다. 이리하여 서울에는 지금의 太平路에 太平館이 있어 明나라 使臣들을 接待하고 東大門안에는 北平館이 있어 倭人들이 들게 하였다. 그들이 와서 묵을 때면 後市라는 名目으로 館所 에서 貿易이 行하여 졌다. 이 밖에 琉球國에서도 자주 使臣을 보내어와서 蘇木, 胡椒, 香料, 雪糖, 錫, 서각(犀角) 等의 여러 가지 珍奇한 南洋産物을 가져오고 우리나라의 綿布, 麻布, 大藏經 等을 얻어 갔으며 暹羅(지금의 (泰國))에서도 方物을 가지고 使臣을 보내온 일이 있었다.

그러나 外國 使臣이 우리 國境에 들어오면 政府에서 그들을 厚待하는 뜻으로서 서울까지 오는 費用과 서울에서 머물고 다시 돌아갈때 國境까지 나가는 費用을 負擔하였고 그 보내는 物件도 가져온 物件의 倍를 주었음으로 南洋의 여러 나라에서는 자주 使臣을 보내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負擔이 적지 아니하니 이는 外國이 우리나라에 朝貢한다는 形式을 꾸미고 貿易上 實權을 取하려 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外國의 朝貢을 받는 것을 滿足하게 생각할 뿐이오 우리나라 사람이 海外에 나가서 貿易하는 길을 全然 閉鎖하여 버리니 이 까닭에 貿易關係에는 恒常 損을 보고 國民의 海外 雄飛의 氣象은 날로 사라졌다.

成宗의 世는 建國한지 이미 八九十年이라 國家의 基礎가 굳어진 때라 漸次 保守의 傾向이 生하고 모든 部面에 硬化 沈滯의 빛이 濃厚하여지니 史家들은 이를 盛極時代將衰의 期라 한다.

特히 貴族의 勢力이 强하고 班常의 區別이 嚴하며 全國的으로 不過 三十 內外의 族閥이 政治를 專行하고 地方別로는 京畿 忠淸 慶南의 三道가 貴族 住居의 中心이 되었다. 또 男尊女卑의 制度가 더욱 嚴格하여 女子의 改嫁를 不許하고 再嫁女의 所生한 子孫은 國家가 敍用치 아니하고 貴族들은 寡婦를 禁錮하는 것을 家內의 榮譽로 여겼으며 妾의 所生한 子孫은 庶孼이라 하여 賤待하고 庶子들은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니 이 庶子는 所謂 그 아비된 者가 享樂과 淫慾의 滿足을 얻기 爲하여 生긴 産物이오 母腹으로부터 落地하는 瞬間이 이미 賤待를 받을 運命을 가졌으니 庶子의 庶子된 罪는 아비에게 있는 것이오 庶子自身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비된 者는 妾을 蓄하는 날에 벌써 庶子의 出生할 것이 約束되었고 그 庶子가 社會로부터 賤待를 받는 것을 알면서 蓄妾生活을 하는 것은 그 心身의 腐敗한 所致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오 더욱이 庶子孼 賤待의 制度는 蓄妾을 가장 많이 하는 貴族階級들이 만든 것이다.

世祖때에는 强力한 專制政治를 行하여 비록 諫官이라 하더라도 言論의 自由를 行치 아니하더니 成宗이 性質이 仁柔하고 言語를 開하여 諫官들의 言論自由를 認하니 이에 儒臣 對 功臣戚里의 싸움이 벌어졌다. 儒臣들은 世祖때에 가슴속에 쌓여 있으되 發表할 수 없었던 鬱憤이 一時에 터져 나와서 功臣戚里의 조금이라도 過誤를 犯함이 있는 때는 一毫의 寬容이 없이 論駁 攻擊하고 어느 한 사람이 攻擊을 始作하면 儒臣 全體가 그를 應援하여 朝廷은 儒臣이 指導權을 잡고 成宗도 大體로 儒臣들의 말을 聽從하였다.

이때의 儒敎는 高麗時代의 漢學과 달라서 宋나라의 程朱學인 性理學을 말하는 것이니 性理學을 또한 理氣說이라 하고 金宗直의 弟子 가운데서 性理學에 가장 밝은 사람은 鄭汝昌 (號) (一蠹)) 金宏弼(호(號) (寒暄堂))이니 鄭汝昌의 理氣論에는 「理의 在하는 바에 氣가 또한 聚하고 氣가 動하는 바에 理가 또한 着하여 彼此의 別이 없다. 그러나 理는 渾然至善하여 爲함이 없고 氣는 醇醨(漓)淸濁하여 運用이 있어 彼此의 別이 있으니 이를 一하되 二하고 二하되 一한다 함이다. 理가 없으면 氣가 凝做할 바가 없고 氣가 없으면 理가 流行치 못한다」하니 이것이 理氣說의 大要이다. 이 理氣說의 새로운 理論은 靑年學者들 사이에 歡迎되고 李朝一代 學問의 中心이 되었다.

이와 같이 儒敎를 崇尙하였음으로 敎育과 科擧도 또한 儒學을 中心으로 하였으니 敎育機關으로는 서울에 成均館(지금의 國立大學校)을 비롯하여 四部學堂이 있고 外方에는 고을마다 鄕校가 있고 마을에는 書堂이 있어 主로 敎의 經典을 가르쳤고 이밖에 特殊 科目으로 天文 地理 醫學 律學 算學 書學 畵學을 硏究하는 機關이 있고 또 漢語 女眞語 蒙古語 倭語 等을 가르치는 機關도 있다.

科擧는 國家에서 人才를 取하는 最高 試驗이라 太宗 世宗의 時代에는 主로 政治 經濟 社會 等 主要한 現實問題에 對한 論文을 試驗하더니 成宗 以後에는 그러한 論文 試驗이 점점 적어지고 主로 文章을 取하는 詩賦表策 等의 試驗이 行하니 이 詩賦表策 等의 試驗은 그 속에 治國 經綸이 있는 것도 아니오 國民生活 上에 어떠한 關聯이 있는 것도 아니오 다만 工巧로운 尋章摘句와 吟風弄月을 일삼는 것이니 이 까닭에 所謂 學問은 形式에 흐르고 實用이 없는 貴族階級의 遊戱物이 되고 말았다. 그럼으로 鄭汝昌같은 이는 巧詩 하는 士를 取하지 아니하여 말하되 「詩는 性情의 發함이라 어찌 屑屑하게 工夫를 强下하리오」하였다.

李朝開國 後에 外方官吏의 民弊를 作하는 者가 있고 없음을 調査하기 爲하여 자주 敬差官이라는 特使를 보내더니 그 後에 그 官名을 御使라 고쳐서 秘密히 各道에 보내 이가 暗行御史의 起源이다. 成宗때에 이르러 王이 性質이 仁柔하여 官吏가 罪를 받는 者가 極히 적고 泰平盛代라고 일컬었으나 그 反面에 民弊를 作하는 官吏가 많이 생겨서 社會內部에 頹廢의 氣運이 싹트기 始作하였다. 이에 暗行御史를 各道에 派遣하니 當時 趙之瑞 鄭光弼 金馹孫 같은 이가 모두 名御使였다.

御使의 任務는 大體로 國法을 지키지 않는 者, 父母에 不孝하는 良風美俗을 害하는 者, 守令이나 吏胥들이 國穀을 盜賊하고 人民을 괴롭게 하는 者等 法律과 道德에 어그러지는 行爲 一切를 調査하고 그것을 犯한 者를 發見할 時는 王의 代理의 資格으로 그 고을에 出道하여 或은 守令을 罷免시킬 수도 있고 或은 罪人을 先斬後啓할 수도 있음으로 外方에서는 御使를 虎라고도 불렀다.

御使가 數月의 동안에 一道를 巡行하는 것임으로 奸吏들의 所行을 一 一히 探知할 수는 없으나 한번 出動하면 一道가 肅然하여 奸惡을 恣行치 못하니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집에 畜猫가 있으매 鼠가 肆行치 못한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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端宗과 世祖(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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端宗과 世祖

世宗의 다음에 文宗은 在位한지 겨우 二年이오 그 아들 端宗이 王이 되니 나이 겨우 十二歲이다. 그런데 當時 端宗에게는 母后가 없고 近親이라고는 叔父 七人 卽 首陽大君 以下 七人君이 있어 모두 强盛하니 國民들은 王의 將來에 對하여 모두 危懼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前日에 世宗이 昇遐하였을 때에 國民이 聖君을 잃은 것을 크게 슬퍼하였는데 文宗이 昇遐하였을 때에는 그때보다도 더욱 슬퍼하니 그것은 文宗을 爲한 슬픔이 아니라 어린 端宗이 保護者가 없고 七大君의 힘이 强大함으로 國事가 將次 어떻게 될까 근심하는 슬픔이었다.

端宗 二年에 首陽大君이 權擥 韓明澮等과 더불어 亂을 일으켜, 그때 政丞으로 있는 皇甫仁 金宗瑞等을 죽이고 스스로 軍國 大權을 잡고 있더니 또 二年後에 端宗을 몰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니 이가 世祖이다. 이에 端宗의 舊臣中에는 兩派로 갈려서 鄭麟趾 申叔舟等은 世祖에게 붙고 世祖의 行爲를 痛憤히 생각하는 成三問 朴彭年 河緯地 李塏 柳誠源 兪應孚 等은 世祖를 몰아내고 端宗을 復位하려 하다가 未然에 發覺되어 그 家族및 連累者들과 함께 死刑을 當하고 端宗은 魯山君으로 내려서 寧越로 귀양 가더니 이듬해에 世祖의 아우 錦城大君이 慶尙道 順興에서 李甫欽과 더불어 端宗 復位를 일으키다가 敗하여 죽고 端宗도 또한 世祖에게 害된 바 되었다.

世祖는 王位를 억지로 얻었으나, 政治를 잘하여 成長期에 있는 李朝를 힘써 培養하였다. 王은 抑佛政策을 늦추어서 서울 안에 圓覺寺를 짓고 十三層塔을 쌓으며 刊都監을 두어서 佛經을 많이 박아내었다.

특히 民間의 弊害를 없애기에 努力하여 百姓들이 抑鬱한 일이 있는 때는 直接으로 王에게 上書하게 하고 비록 勢力이 있는 者라도 民弊를 짓는 者는 容恕함이 없이 處罰하였다.

(權擥은 權近의 孫子라 權近은 高麗 臣下로써 李氏 得國함에 歸化하였다. 처음에는 太祖가 써먹기 爲하여 잘 待遇하더니 李氏가 完全히 得國하니 權近을 節槪없는 臣下라고 물리치니 老末年에 忿함을 참지 못하였다. 이를 孫子가 알고 端宗이 임금이 되어 世祖가 王位를 빼앗는다는 것을 듣고 이에 參與하여 李氏끼리 싸우라는 內容計劃을 세웠다. 그러니 高麗 臣下가 李朝 집안끼리 싸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死六臣은 다만 端宗이 王位에 오르면 世祖보다 政治를 잘한다하여, 또 나라를 爲하여 端宗을 받든 것이 아니라 端宗에만 忠誠한 것이다. 世祖가 한 일은 無理가 아니고 當然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說도 있다.)

當時 民弊의 가장 큰 者는 防納이니 防納이라 함은 百姓이 國家에 바치는 貢物을 商人이나 勢力있는 者들이 代納하는 것이다. 當時의 百姓이 國家에 對한 負擔의 義務에는 土地生産의 一部를 바치는 租稅, 各 地方에서 産出되는 特産品을 바치는 貢物, 兵役, 築城, 運輸 等에 從事하는 賦役의 세 가지가 있었다.

貢物은 全國 各 郡을 單位로 하여 바치는 것인데 例컨대 海邊 郡은 魚物 海草 等等 山間 郡은 毛皮 藥材等 平野 郡은 煙草 果實 明油等 全州의 紙, 海州의 墨, 甲山의 山蔘, 江原道의 淸蜜, 全羅道 竹物 等이오 政府에서 數百種의 産物을 各郡 産出額과 戶口數를 參酌하여 各道에 配定하고 道는 郡에 配定하고 郡은 百姓의 各에 配定하며 百姓이 自己에게 配定된 貢物을 郡守에게 바치면 郡의 吏胥들이 그것을 檢査하여 收納하니 當時 貢物의 負擔은 租稅보다 몇 배나 重하고 檢査에 不合格되면 다시 好品을 求得하지 아니하면 안되므로 百姓의 損害가 적지 아니하였고 吏胥들은 百姓의 弱點을 乘하여 비록 好品이라도 不合格으로 退却하고 商人과 結託하여 百姓으로부터 時價의 二三倍를 걷어서 그 物品을 代納하고 差額되는 利益을 分食하는 것이다.

大抵 李朝의 吏胥는 行政上 한 特殊階級으로 存在하였다. 吏胥는 原來 國家의 官吏가 아니오 各郡의 行政事務를 돕는 事務員으로서 아무런 俸給이나 報酬를 받지 아니하는지라 李朝開國 初에는 事務는 多端하되 生活費를 얻을 길이 없음으로 苦役과 窮困을 견디지 못하여 逃亡하는 者도 적지 아니하더니 그 後에 百姓들로부터 橫斂하는 曲逕을 發見하고 또 所謂 郡守 縣令은 그 地方의 實情을 잘 알고 있는 吏胥의 힘을 받지 아니하면 郡政을 行할 수가 없음으로 郡行政의 實權은 全혀 吏胥의 손에 쥐여있었고 더욱이 全國 三百餘郡에는 모두 그 地方 出身의 吏胥가 있어 國家에서 任命한 守令과 百姓의 中間에 介在하여 事務階級으로써 一大勢力을 形成하고 있어 守令은 勿論이오 中央政府에서도 그 勢力을 無視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吏胥들이 貢物 檢査를 하게되니 그 合檢 不合檢은 專혀 그들의 一口一筆에 달려 있고 거기에 따라서 防納制가 생기게 되니 百姓에게 끼치는 弊害는 實로 莫大하고 世祖在世하는 동안은 嚴格하고 果斷있는 行政으로 能히 이 弊害를 막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임금 때로부터 漸漸 復活되고 말았다.

世宗이 六鎭을 建設한 뒤에 野人들의 侵略이 그치지 아니 하고 端宗 때에는 그 勢力이 더욱 盛하였음으로 朝臣 中에는 六鎭을 抛棄하자는 卑屈한 論者도 있어 한동안 서로 議論을 다투었다. 世祖가 王이 된 뒤에 처음에 鴨綠江기슭의 四郡을 廢하고 野人들을 撫摩하기로 하였으나 갈수록 그들의 버릇이 사나워 짐으로 世祖는 會寧을 엿보는 野人을 쳐서 이를 豆滿江 북쪽으로 쫓고 또 申叔舟를 보내어 江 內外의 野人의 巢窟을 엎었으며 魚有沼 南沼 將軍 等을 시켜서 婆豬江의 野人 魁首 李滿住의 父子를 잡아 죽였다.

世祖의 王位 爭奪 亂은 李氏王家의 開國 初부터 있은 例의 骨肉戰이오 六臣의 死는 主를 爲한 死節이라 君主政治 時代에는 흔히 있는 일이오 아무런 特異한 것이 없으나 다만 이 亂이 우리나라의 政治와 人心에 미친 影響은 實로 크고 또 深刻한 것이었다. 高麗 末에 鄭夢周가 國事에 殉節하고 그 弟子 吉再(號) (冶隱)가 鄭夢周의 理學 系統을 繼承하고 그것이 金叔慈(號 江湖))를 거쳐 金宗直(號 佔畢齊)에게로 傳하였는데 이 系統의 學을 받은 儒士들은 節義에 對한 觀念이 가장 强하고 따라서 世祖의 行事에 對하여 큰 憤怒를 품고 世祖에게 붙어서 功臣이 된 鄭麟趾 申叔舟 韓明澮 權擥 等을 極度로 미워함은 勿論이오 韓明澮 같은 사람은 이 功勞로 國舅가 되었기 때문에 儒士들은 王室의 外戚까지를 몹시 미워하여 이때로부터 儒士 對 功臣 戚里의 激烈한 鬪爭이 벌어져서 爾來 百餘年동안을 政界의 大小事件이 主로 儒士 對 功臣戚里의 싸움으로부터 일어났고 畢竟 우리 社會를 亡쳐버린 朋黨 싸움의 始初인 東西分黨도 儒士 對 戚里의 싸움에서 發端한 것이다.

또 한가지 影響은 벼슬하는 사람들이 君主에 忠誠을 다하다가 世祖의 毒手에 걸려서 無慘히 죽고 그 家族까지 虐殺 當하는 것을 보고 世事의 無常함을 보고 長太息하고 自後로는 保身之策에 置中하고 될 수 있는 대로 伉直한 行動을 避하려 하였음으로 政界의 空氣가 因循姑息과 悠悠泛泛에 흘러서 創造와 革新을 行하려는 活氣를 全혀 잃으니 이것이 李朝一代를 通하여 新銳와 獨創이 생기지 못한 主因이 되었다.

李朝開國 以來로 西北人을 쓰지 아니함으로 西北人의 不平이 적지 아니하고 太祖를 도와서 革命을 成功한 西北 猛將들도 모두 憤氣를 품고 鄕里에 돌아갔으며 特히 太祖의 牙將으로 있던 佟豆蘭도 太祖가 姓을 李氏를 주고 淸海伯을 封하여 特殊한 待遇를 하였으나 亦是 不滿을 품고 削髮爲僧하여 그 털과 上疏文과 함께 封하여 太祖에게 올리고 逃亡하여 그 故鄕인 咸鏡道 北靑으로 돌아가니 太祖는 後日에 或 變을 生할까 두려워하여 그 家族을 漢陽으로 옮겨온 일도 있다.

그러던 中 世祖의 亂이 일어나서 人心이 불안하게 되자 咸鏡사람 李施愛가 亂離를 꾸며서 咸鏡監司(申叔舟의 아들)를 죽이고 各地에서 亂民이 일어나서 守令들을 죽였다. 世祖는 軍士를 보내어 여러 달 만에 平定하고 爾來百年동안 咸鏡道에 停擧를 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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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設時機(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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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設時機

太宗이 임금이 된 것은 開國한지 九年만이라 이제로부터 漸次로 建設的 政策을 行하게 되었다.

經濟面에서는 高麗時代以來로 貨幣制度를 여러 番 確立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太宗이 다시 着手하여 錢貨를 만들려 하였으나 그 原料되는 銅이 不足함으로 主로 楮幣를 만들어 쓰게 하니 이는 지금의 紙幣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錢貨를 信用치 않는 當時 사람들이 楮貨를 信用할 理由가 없었다. 그리하여 楮幣의 價値가 暴落하더니 마침내 流通이 끊어지고 前日과 같이 麻布를 交換의 媒介로 쓰고 五升布를 標準으로 하니 五升布라 함은 一定하여있는 布幅에 經絲 四百本을 말함이다. (한 목은 十 오리 一升은 八목)

文化 面에 있어서 特記할만한 것은 鑄字所 設置이다. 高麗때에 活字를 만들어 쓴 일이 있었으나 그 規模가 크지 못하더니 太宗 三年에 鑄字所를 두고 李稷 朴錫命 等으로 하여금 銅으로 많은 鑄字를 만들어 主要한 書籍을 印刷하여 내니 이는 우리나라 出版文化史上 劃期的 革命이다.

外交에 있어서는 太祖開國할 때에 明나라의 承認을 얻고 해마다 많은 歲幣를 바치기로 하였음으로 明나라의 歲幣 要求가 數量이 많고 또 苛酷하여 特히 馬匹의 要求가 더욱 甚하여 每年 數千匹 乃至 萬餘匹을 强要하고 또 畜牛까지 要求하니 朝廷에서는 여기에 應하면 國內의 馬匹이 全部 없어질 것이오 應하지 아니하면 明나라로부터 어떠한 壓迫이 올지 알 수 없어서 進退 兩難에 빠졌다. 朝臣 中에는 이를 拒絶하자고 主張한 强硬 論도 있었으나 太宗은 穩話하게 이를 解決하자고 撫摩하고 明나라에 對하여 歲幣를 減할 것을 여러 次例로 要請하더니 얼마後에 그 要請대로 實現되었다.

高麗末에 極盛하던 倭寇는 한동안 잠잠하더니 太宗때에 南海岸을 侵犯한 일이 있음으로 太宗이 位를 世宗에게 傳하고 大上王이 되었으니 自己 生前에 倭寇의 巢窟을 없애야 한다하고 世宗 元年에 李從茂로 하여금 對馬島를 쳐서 相當한 戰果를 내었으나 오래 守備하기가 어려움으로 얼마 후에 回軍하였다. (李從茂가 변변치 못하여 一敗하여 돌아왔다.)

처음에 太宗의 長子 讓寧大君으로써 世子를 삼았으나 三子 忠寧大君이 聖德이 있음을 보고 恒常 將次 忠寧大君에게 王位를 傳할 생각이 있고 讓寧大君이 또한 天資가 倜儻하여 自己보다 忠寧大君의 才德이 뛰어남을 알고 王位를 그에게 넘기려하여 거짓 放蕩하여 世子의 位에서 물러나니 李氏 開國이후 醜惡한 王位 爭奪戰을 하는 속에서 홀로 讓寧大君이 이와 같은 特異한 行動을 한 것은 一身의 榮譽보다 國家 全體를 위하는 至誠에서 나온 것이며 三國時代에 王位를 相讓하던 渾厚한 風을 다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後에 忠寧大君이 王이되니 이가 世宗이라 世宗은 李朝 一代를 通하여 第一가는 聖君일 뿐만 아니라 我國의 歷史 全體를 通하여 보아도 가장 훌륭한 人君이다.

世宗은 黃憙 許稠 等 名相으로 더불어 國事를 議論함에 그 重點을 人才 問題에 두었다. 즉 어떻게 하면 人才를 많이 培養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좋은 人才를 擧用할 수 있을까 하고 또 君王이나 宰相의 하는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은 훌륭한 人才를 얻어서 國家의 各 機關에 適材適所로 配置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科擧로써 人才를 取하는데 그 出題는 主로 政治 經濟 國防 文化 等에 關한 實際 方策으로 하고 여기에 及第한 사람은 다시 湖堂에 보내어 몇 해 동안을 자유롭게 硏究케 하니 이 까닭에 人才가 輩出하여 여러 가지 큰 事業을 行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西邊과 北邊에는 女眞族이 居住하고 있는데 國人들은 이를 野人이라 불렀다. 太祖가 開國한 뒤에 鴨綠江과 豆滿江의 以南의 女眞族이 한때 모두 歸附하였으나 이는 一時的의 일이오 그 地帶가 우리나라의 領土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 野人은 恒常 西北 邊의 근심이 되더니 世宗은 이를 征伐하기로 決意하고 金宗瑞를 보내어 北邊을 치게 하니 朝臣 中에는 有限한 人力으로써 成功할 수 없는 軍役을 始作한다하여 極力으로 反對하는 者가 적지 아니하였다. 世宗은 굽히지 아니하고 野人을 쳐서 或은 降服받고 或은 豆滿江 外로 쫓아내고 豆滿江 南에 鍾城 慶源 會寧 慶興 穩城 富寧의 六鎭을 새로이 세우고 慶尙道 百姓을 옮겨서 그 地方을 채우니 渤海가 亡한지 五百餘年에 이地帶가 처음으로 우리나라 領土로 돌아왔으며 歸順한 野人들은 或은 우리나라 사람에 同化하고 或은 在家僧이라는 特殊人으로서 그 地方에 남았었다.

(咸鏡地名에 興 字가 셋이 있는 것은 太祖의 高祖父가 살았던 데를 慶興이라 하고 定宗 太宗의 出生地를 咸興이라 하고 永興은 太祖가 낫기 때문에 永興이라고 地名을 各各 지었다. 新興은 倭政때 새로 지은 地名)

世宗이 租稅制度에 對하여는 七八年을 苦悶하고 드디어 投票制度를 實施하였다.

西邊에서는 婆豬江 기슭에 野人 李滿住 等이 雄據하여 자주 鴨綠江을 건너와 掠奪함으로 太宗때에 甲山의 땅을 나누어 지금의 平安道에 閭延郡을 두었다. 世宗때에 이르러 野人의 侵入이 잦아서 江岸 一帶에는 百姓들이 安住할 수 없으니 世宗은 이를 다만 防備하느니보다 한 걸음 나아가 江을 건너서 野人의 本據를 부실 計劃을 세웠다. 그러나 江건너는 明나라의 領土이오 또 林木이 蔽文하여 함부로 쳐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이에 明나라에 對하던 外交로써 野人征伐의 不得已함을 力說하고 便으로는 秘密히 北伐軍을 訓練하고 江邊에 軍糧을 備蓄하니 朝臣 中에는 北伐을 反對하는 者가 많아서 每日 이 問題를 가지고 떠들었다. 世宗은 萬一 野人의 本據를 깨지 않으면 西邊 一帶는 野人의 獨舞臺가 될 것이니 이를 實行치 아니할 수 없고 또 이를 치자면 明나라 領土에 公公然하게 들어갈 수가 없음으로 秘密裏에 擧事하려는 것이다. 이 問題를 크게 떠들어서 萬一 明나라에 들리면 大事가 틀어질 것이니 조용히 處理하고자 타일렀다.

그러나 反對하는 者들은 듣지 아니하고 連日 떠들었다. 世宗은 大怒하여 曰 野人의 侵略을 그대로 放任하자는 것은 國土를 賊에게 주자는 생각이니 外交關係에 關한 일을 公公然하게 떠들면 國家 將來에 무슨 利益이 있느냐 하여 責하고 我國 人性이 輕躁하여 반드시 國家 大事를 그르칠지로다. 하고 嘆息하였다. 이에 모든 反對를 물리치고 崔潤德을 보내어 野人을 치고 江 이쪽에 慈城 茂昌 虞芮의 세 곳을 두니 이로써 鴨綠江 기슭에 四郡이 이루어져서 그 後 多少의 曲折이 없지 않았으나 이때부터 鴨綠江이 完全히 우리나라의 國境이 되었다.

土地의 租稅制度는 古制에 依하여 收穫量의 十分之一을 받기로 하였으나 土地마다 每年 一定한 額數를 받는 貢法을 쓰느냐 또는 해마다 年年의 豊凶과 作況의 良否를 實地로 踏査하여 稅額을 定하는 踏驗法을 쓰느냐 하는 것이 全國的으로 一大 訟案이 되었다. 土地가 肥沃하여 努力을 들이면 收穫을 올릴 수 있고 또 水旱災가 적은 土地를 가진 사람은 貢法을 歡迎하고 土地가 瘠薄하고 氣候의 影響을 많이 받아서 凶年이 잦은 土地를 가진 사람은 踏驗法을 歡迎하였다. 그리하여 貢法도 써보고 踏驗法도 써 보았는데 貢法에서 土地의 等級을 定하는 일이나 踏驗法에서 每年의 收穫量을 定하는 일이나 모두 實際로 幹事하는 官吏의 公正與否가 法의 精神을 살리고 죽이고 하였다.

그러나 稅制를 어느 쪽으로든지 確定치 아니할 수 없음으로 世宗은 各道를 單位로 하여 各 守令과 農家로 하여금 어느 制度를 贊成하는가를 落點케 하니 落點이라 함은 지금의 投票와 같은 것이다. 그 結果 忠淸 全羅 慶尙의 三道는 貢法 贊成 者가 十의 八이오 京畿 江原의 兩道는 兩法의 贊成이 大略 半半이었다. 이에 民意를 尊重히 여겨 三南과 京畿 江原은 貢法을 쓰고 西北 三道는 踏驗法으로 쓰이게 하되 貢法을 쓰는 地帶에서도 土地 等級이 낮은 薄土에 對하여는 災를 주기로 하였다. 同一한 國內에서 地方에 따라서 相異한 法을 쓴 것은 오직 民情에 맞추려 함이오 더욱이 지금으로부터 五百餘年 前옛날에 民意를 묻기 爲하여 大衆의 落點制를 썼다는 것은 一大 奇觀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土地制度에 結負制를 偏用한 것은 制度의 紊亂을 發生시킨 一因이 되었다. 新羅時代의 土地制度에는 面積을 表示하는 頃畝制와 收穫量을 表示하는 結負制를 竝用하니 一結의 百分之一이 負가되고 一負의 十分之一이 一束이 되었다. (結은 맥, 負는 짐, 束은 뭇)

頃이라 함은 土地의 一等地의 一結과 同一한 面積이오 頃의 百分之一이 畝가된다. 高麗에 이르러 처음에는 兩制를 竝用하다가 그 後에 稅額計算의 便宜를 爲하여 結付法을 專用하고 李朝에 이르러 이를 踏襲하였다. 世宗때에 土地를 九等에 나누었는데 이를 結負와 頃으로써 比較하여보면 一等地 一結은 一頃의 面積과 同一하나 九等地 一結은 四頃 餘의 面積과 同一함으로 土地의 等級에 따라서 頃數가 모두 다르고 따라서 그 土地를 보고 그 結數를 알 수 없으며 或 勢力있는 者들이 農民의 土地를 侵犯하되 國家의 土地帳簿에는 結負數만 있고 그 土地의 地圖라든가 面積이든가가 記載되어 있지 아니함으로 侵占與否와 侵犯한 面積을 可考할 길이 全然없고 이 까닭에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各 土地의 稅額이 헝클어지기 始作하였다. (世宗이 面積을 재기 爲하여 人才를 求하니 人才가 없어서 面積을 재지 못하여 土地制度가 紊亂하였다.)

世宗은 天性이 聰明하고 또 學問을 좋아하여 宮中에 集賢殿을 두고 學者들을 모아서 學問을 硏究하는 한편 有益한 書籍을 많이 만드니 高麗史 八道地理志 農事說 醫方類聚 鄕藥集成方等은 모두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音樂에도 많은 關心을 가져서 海州에서 秬黍가 나고 南陽에서 磬石이 나며, 朴堧으로 하여금 樂器를 고쳐 만들고 이어서 舊樂을 고쳐 다듬으니 지금껏 世界에 자랑이 되고 우리나라의 雅樂은 이때에 完成한 것이다. 또 曆象 方面에도 硏究를 쌓아서 蔣英實과 더불어 大小 簡儀臺 自擊漏(물시계) 仰釜日晷(해시계) 等을 만들고 銅으로 測雨器를 만들어 서울과 各道에 나눠주어서 雨量을 재었다. 이는 西紀1639年보다. 二百年이 앞서서 活字와 함께 우리 文化의 자랑거리다.

또 우리 文化史上 가장 特記할만한 事業은 訓民正音 즉 國文의 創製이다.

世宗은 「諸國이 各其 文字가 있어서 方言을 記하거늘 獨히 無하노라 我國語音이 中國과 달라서 漢字와 서로 流通치 못함으로 愚民이 言코자 함이 있으되 마침내 그 情을 伸치 못하노라 내가 이를 憫惘히 여겨 文字를 新製하야 人人으로 하여금 學習하기 쉽고 日用에 便케 하고자 하노라」함과 같이 國家意識의 自覺과 大衆敎育의 必要에 依하여 國文을 만들 생각을 가지고 鄭麟趾 申叔舟 成三問 崔恒 等과 더불어 親히 硏究를 거듭한 結果 그의 二十八年 三千七百七十九年 丙寅)에 二十八字를 지어내어 中外에 領布하니 이것이 오늘날 世界의 여러 文字中에서 第一 優秀한 우리 國文이다.

이때 漢學思想에 젖은 崔萬里같은 무리들은 訓民正音을 聖賢의 글이 아니라 하여 쓰기를 反對한 일이 있었으나 世宗은 이를 물리치고 訓民正音으로써 龍飛御天歌를 지어내는 한편 官廳의 公文書에 이 글을 쓰게 하며 또 儒敎와 佛敎의 經典을 飜譯하여 百姓들에게 읽혔다. 民間에서는 이 글을 諺文 또는 諺書라하고 漢文을 飜譯한 것을 諺解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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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位爭奪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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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位爭奪

처음에 太祖는 松京으로부터 都邑을 옮기려하여 公州 鷄龍山과 漢陽을 親히 돌아본 結果 漢陽으로 옮겨왔는데 얼마 안가서 王子의 變이 일어나서 骨肉의 慘酷한 禍亂을 자아냈다. 太祖에게는 神懿王后 韓씨의 所生에 六子가 있고 神德王后 康씨의 所生에 芳蕃 芳碩의 二子가 있는데 太祖의 革命 運動에 韓氏 所生의 芳遠(太宗)의 힘이 가장 크더니 韓氏는 開國하기 前에 죽고 康氏가 王后로 되어 自己의 所生 芳碩으로 世子를 삼으려하니 政府大臣 中에는 「平時에는 長을 세우고 亂時에는 功을 먼저 한다.」하여 反對한 일도 있었다.

太祖는 王位로써 國家 全體와 關聯시키지 아니하고 李氏家의 私事로 생각하여 그 사랑하는 康氏의 所生 芳碩으로써 世子를 삼으니 韓氏 所生의 여러 兄들이 不平을 품고 그 中에서도 開國의 功이 있는 芳遠의 不滿이 가장 컸다.

이때 世子 芳碩을 돕는 責任을 맡은 者는 鄭道傳 等이라 鄭道傳 等은 여러 王子가 不平을 품고 있는 形勢를 살피고 太祖에게 말하여 王子들의 兵器를 지니는 것을 禁하고 다시 王子 七人을 七道에 分遣하고자 하니 이는 王子들을 放逐하려는 術策이다. 이에 芳遠은 크게 怒하여 芳蕃 芳碩과 鄭道傳 等을 죽이고 芳遠의 兄 芳果가 世子가 되니 太祖는 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또 忿함을 참지 못하여 가장 親近한 部下를 거느리고 처음에는 서울 近處의 山寺를 逍遊하다가 멀리 北으로 行하여 舊居인 咸興 本宮으로 들어갔다. 이에 芳果가 王位에 오르니 이가 定宗이오 定宗 元年에 漢陽은 骨肉의 變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新都를 버리고 開京으로 돌아갔다. 定宗은 芳遠으로써 世弟子를 삼으니 芳遠의 兄 芳幹이 거기에 不滿을 품고 朴苞로 더불어 芳遠을 害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朴苞는 잡혀서 죽고 芳幹은 兎山으로 쫓겨나갔다. 定宗이 임금이 된지 二年만에 하루는 世弟芳遠의 氣色이 殊常함을 보고 王位를 芳遠에게 傳하니 이가 太宗이다. 太宗은 卽位한 後 곧 漢陽으로 돌아왔는데 朝臣中에는 開京 舊都를 생각하고 新都를 싫어하는 者가 많아서 王都가 安定치 못하더니 하루 밤에 開京宮闕이 全部 불에 타버리니 다시 開京으로 옮기자는 사람이 없었다.

太祖가 咸興에 들어간 後에 朝廷에서는 자주 問安使를 보내었으나 太祖는 忿함이 풀리지 아니하여 오는 사람마다 죽여서 一人도 生還한 者가 없으니 지금까지도 한번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咸興差使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太宗이 朴淳을 보내어 太祖의 還國하기를 請하고 父子間의 天倫의 情을 極盡하니 太祖가 感動하여 돌아왔다.

朴淳의 極盡한 말의 內容을 咸興古老들이 口碑로 相傳하는 말에 依하면 「父子가 相爭하여 南北 二朝가 있음과 같이 國民의 눈에 보이는데 創業한지 오래되지 못하고 人心이 安定되지 못하여 將次 무슨 變亂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어찌 父子가 相爭하여 나아가 國家 萬年의 基業을 떨어뜨리랴」함이라 太祖는 이 말을 듣고 大悟하여 드디어 南還을 決意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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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政治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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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政治

一. 土地制度이니 高麗時代는 土地는 모두 國有로 하고 壯丁에 따라서 授受하더니 太祖가 恭愍王 三年에 改革한 田制는 다만 私田을 廢하고 科田制를 復活한 것이 高麗의 田制와 같을 뿐이오 土地를 農民에게 分配한 것은 壯丁 授受制가 아니라 大槪 農民이 現在 耕作하고 있는 土地를 그 農家에 주는 것을 原則으로 한 까닭에 各 農家의 耕作面積에 많고 적은 差異가 생겼다.

그러므로 土地는 비록 高麗의 國有制를 그대로 繼承하고 있으나 各 農家의 耕地는 永久 耕作權의 形態로 되어 있어 그 속에 後日 私有地로 될 싹을 包藏하고 있으며 그 耕作地는 國法에 의하여 自由로 買賣 典當하는 것을 禁하고 있으나 이것은 完全히 國有制가 私有制로 變해 넘어가는 過渡期的 形態이었다.

二. 高麗는 佛敎로서 國敎를 삼고 各地에 數多한 寺刹을 세우고 王室로부터 民間에 이르기까지 모든 儀式은 佛敎式을 썼다. 그러나 末葉에 이르러 佛敎의 廢가 적지 아니 하였음으로 李朝는 佛敎를 極度로 排斥하여 寺刹의 大部分을 헐어버리고 寺刹土地를 沒收하고 儒敎로서 國敎를 삼고 特히 中國 宋나라의 程朱學을 尊崇하고 朱子家禮에 依하여 집마다 家廟를 만들게 하고 程朱學 以外의 學文은 모두 異端이라 하여 一切로 容納치 못하게 하였다. 人爲的 國民思想 統一의 結果는 學風이 偏狹하여 排他性이 强하고 思想의 沈滯를 招來하여 生發의 氣가 없었다.

三. 高麗에 武臣橫暴의 弊가 크고 李成桂 自身도 武臣으로써 王代의 社稷을 빼앗았음으로 李朝는 武臣을 누르고 文臣을 높여서 國家大事는 專혀 文臣의 손에 依하여 行하니 이 까닭에 社會는 文弱에 빠져서 外敵이 쳐들어오면 나아가 막을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恒常 退屈하였으며 貴族의 子弟는 勿論이오 그 一門까지도 兵役을 免除하고 오직 無勢無力한 寒門微族의 사람들만 軍兵으로 만들었다.

四. 革命을 일으킨 理論이 光明正大치 못하여 高麗遺民들의 反對가 强烈하였음으로 李朝는 王代復興運動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建國한지 三年에 全國의 王代를 老少없이 모두 잡아서 虐殺하니 이때 王代를 江華島와 南海 여러 섬에 보내어 安住시킨다 하고 배에 싣고 들어가다가 물속에 넣어 죽인 者도 八百餘名이오 開城으로부터 以北의 平安道地方에 사는 王代들은 모두 逃亡하여 遼東으로 들어가니 지금 滿洲地方에 다른 姓보다 特히 王代가 많은 것은 이 까닭이라 하며 外國으로 逃亡할 수 없는 王代들은 姓字를 고쳐서 玉 全 田 車 等으로 變하니 革命後에 前朝 王族을 一人도 남기지 아니하고 虐殺한 것은 我國有史 以來 오직 李朝뿐이었다. 便으로 黃海道 平安道 地方에서 王代를 받들고 叛亂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開城 以北의 사람을 朝廷의 大官에 쓰지 아니하고, 咸鏡道는 自己의 出身地方이다.

人性이 强하고 萬一 大用하면 李氏 朝廷에 不利한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亦是 大官에 쓰지 아니하니 이 까닭에 李朝 五百年동안에 西北人은 仕路가 막힌 것이다.

五. 高麗 末葉에 政治가 紊亂하여지자 權臣貴族들은 國家의 官吏에 定員이 있음에도 不拘하고 마음대로 自己 親戚이나 特殊關係가 있는 者를 官吏로 쓰게 되어 定員數의 倍 以上을 超過하였는데 李朝 開國後에 官吏의 數를 줄이고 官吏를 改替하려하였으나 만일 그 때문에 人心이 不安하여 動搖가 생기면 李氏 政權의 維持에 不利할까 念慮하여 官吏의 數도 줄이지 못하고 主要한 자리 外에는 改替하지도 못하니 이 까닭에 財政이 困難하고 따라서 官吏의 俸給은 生活費를 充足치 못하였고 이것이 李朝 五百年동안을 通하여 貪官汚吏가 많이 생긴 主因이 되었다. (官吏數가 많으면 李朝時代의 貪官汚吏가 생긴다.)

六. 高麗의 문은 貴族이 이미 없어지고 李氏에 親附한 者가 新貴族이 되었는데 李氏 朝廷은 아직 人心이 安定되지 못하고 어느 한 구석에서 어떠한 事件이 일어날지 알 수 없음으로 이들 新貴族을 特別 待遇하고 民財를 빼앗아 먹는 것을 黙認하기까지 하고 李氏에게 謀反하는 일을 告發하라고 獎勵하여 厚한 賞을 주었으니 이것이 李朝 一代에 貴族의 橫暴와 告發의 弊習을 助長한 一因이 되었다.

七. 李朝가 高麗를 빼앗은 것은 社會의 發展을 爲한 革命이 아니오 다만 李氏家가 王노릇을 한다는 것이 主要한 目的이 되어 있으니 이것은 李代 開國後 흔히 「化家爲國」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開國한 처음부터 醜惡한 王位爭奪戰이 일어나서 五百年동안을 끊임없이 父子 兄弟 叔姪 等의 사이에 流血의 劇을 演出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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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建國

太祖 李成桂의 先祖는 本是 咸鏡道에 살았는데 그 高祖父가 元나라에 들어가서 벼슬을 하고 지금의 咸鏡北道 慶興에 살더니 太祖의 어버이 李子春은 永興에 살고 거기서 太祖를 낳으니 이때 永興은 雙城總督府로 되어 元나라에 屬하였다. 恭愍王때에 柳仁雨가 雙城을 칠 때에 李子春이 이를 도와서 功이 있었음으로 朔方道萬戶 兼 兵馬使가 되어 咸州를 中心으로 하여 큰 勢力을 가졌고 이때 太祖는 나이 젊었으나 特出한 武藝가 있었음으로 咸州 以北에 살고 있는 女眞族들의 推仰을 받고 있으며 後日에 太祖가 자주 큰 功을 세운 것도 그 手下에 佟豆蘭 以下 女眞 出身의 猛將을 많이 가지고 있는 까닭이라 한다.

太祖가 建國한 이듬해에 國號를 고쳐서 朝鮮이라 하고 三年 後에 都邑을 지금의 서울에 옮기고 景福宮을 짓고 城을 쌓아서 五百年 王業의 基礎를 닦았다.

 

이조(李朝)역대표(歷代表)

태조(太祖)

정종(定宗)

태종(太宗)

세종(世宗)

문종(文宗)

단종(端宗)

임신(壬申)

기묘(己卯)

신사(辛巳)

기해(己亥)

신미(辛未)

계유(癸酉)

7

2

18

32

2

3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

연산군(燕山君

중종(中宗)

인종(仁宗)

병자(丙子)

기축(己丑)

경유(庚酉)

을묘(乙卯)

병인(丙寅)

을사(乙巳)

13

1

25

11

39

1

명종(明宗)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

효종(孝宗)

현종(顯宗)

병오(丙午)

무진(戊辰)

을유(乙酉)

계해(癸亥)

경인(庚寅)

경자(庚子)

22

41

14

27

10

15

숙종(肅宗)

경종(景宗)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

헌종(憲宗)

을묘(乙卯)

신축(辛丑)

을사(乙巳)

정유(丁酉)

신유(辛酉)

을미(乙未)

46

4

52

24

34

15

철종(哲宗)

광무황제(光武皇帝)

융희황제(隆熙皇帝)

 

 

 

경술(庚戌)

갑자(甲子)

정미(丁未)

 

 

 

14

44

4

 

 

 

 

비고(備考)

一. 고려(高麗)왕실(王室)이 없어진 것은 태조(太祖)가 한양(漢陽)에 이도(移都)하니 전(全) 백성(百姓)이 송경(松京)에 회귀(回歸)하기에 뜻을 두니 태종(太宗)이 부하(部下)로 하여금 망월대(望月臺)를 불살라 버리라

二. 개국(開國)초(初)에 무국호(無國號)하여 고려권지국사(高麗權知國事)라 칭(稱)하고 명국(明國)에서 태조(太祖)가 왕위(王位)에 오름을 승낙(承諾)받고 화녕(和甯, 寧)과 조선(朝鮮)이라는 두 이름에서 조선(朝鮮)이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이조(李朝)는 명(明)의 아유국(阿諛國))

三. 태조(太祖)는 백성(百姓)을 위하여 혁명(革命)함이 아니라 다만 일생(一生)에 왕위(王位)를 차지하려고 명국(明國)에 아유(阿諛)해서 겨우 임금이 되니 이태조(李太祖)는 명(明)에서 명령(命令)하면 모두 응(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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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의 滅亡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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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의 滅亡

恭愍王 末年에 元나라가 北으로 쫓겨 가고 明나라가 中原을 차지하게 되니 (檀紀 三千七百一年) 高麗 朝廷에서는 大陸 外交에 對하여 두 가지 意見이 對立되었다. 崔瑩은 오래 동안 元나라에 가 있어서 저쪽의 事情을 잘 알고 있음으로 元나라와 明나라의 現 勢力이 아직 定해진 것이 아니니 우리는 元나라와 사귀고 明나라를 누르면서 이 機會에 遼東을 恢復하여 國勢를 다시 한 番 떨쳐보자 하고 李成桂는 明나라가 이미 中原을 차지하였으니 우리는 天下의 大勢에 어김없이 元나라에 對하던 態度로써 明나라를 對하는 것이 옳다고 主張하니 이것이 所謂 親元派와 親明派와의 對立이다. 그러던 次에 明나라는 차츰 遼東을 平定하고 禑王 十四年에 이르러서는 鐵嶺衛를 세우고 將次 鴨綠江이쪽의 땅을 빼앗으려 하니 崔瑩이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다하여 明나라를 치기로 決定하니 李成桂는 여러 番 王에게 글을 올려 反對하였다.

崔瑩은 조금도 北伐計劃을 굽히지 아니하고 스스로 八道都統使가 되어 王과 함께 西京으로 나가서 曹敏修와 李成桂로 하여금 軍士 五萬을 거느리고 가서 遼東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北伐을 反對하는 李成桂에게 大軍을 주어서 그 計劃을 實現하려 한 것이 崔瑩의 一大失策이었다. 李成桂는 鴨綠江에 이르러서 威化島 (을혜섬)에 머무는 차에 曹敏修를 달래어 장마철에 많은 軍士가 江을 건너가기 어렵고 또 明나라는 새로 일어나서 그 强大한 氣勢를 對敵하기가 쉽지 아니하니 여기서 回軍하는 것이 옳다하고 風雨같이 西京을 向하여 行進하니 이것은 分明히 王命을 拒逆하는 일이라 軍士中에서는 벌써 木子 得國이라는 謠言이 盛行하고 崔瑩은 王과 함께 形勢가 이미 틀리고 李成桂의 손에 잡혀 죽으니 國人이 崔瑩의 죽음을 듣고 都下가 모두 撤市하여 弔하고 遠近의 男女老少 없이 모두 서로 붙들고 울었다. 李成桂는 禑王의 아들을 세우니 이가 昌王이다. 이로부터 李成桂가 權勢를 한 손에 잡고 안으로는 그의 反對派를 몰아내고 밖으로는 明나라와 親하여 高麗의 運命은 이미 朝夕으로 保全하기 어렵게 되었다.

처음에 恭愍王때에 僧 辛旽을 써서 國政을 맡겼다가 失政을 보고 辛旽을 죽였는데 禑王은 或은 恭愍王의 아들이라 하고 或은 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王室을 中心으로 奇怪한 風說이 크게 流行하니 禑王을 王代라 하는 것은 主로 王代 朝廷을 支持하려는 사람이오 辛代라 하는 것은 主로 李成桂를 中心으로 한 革命派이다. 李成桂는 禑王을 辛代라 하여 몰아내어 죽이고 그 아들 昌王 또한 辛代의 血統이라 하여 몰아내어 죽이고 王代중에서 가장 暗弱한 恭讓王을 세우니 이때로부터는 이미 李成桂의 天下가 되고 만 것이다.

高麗의 田制는 紊亂할대로 紊亂하여 이를 事務的으로 바로잡을 수 는 없었다. 이에 趙浚 等이 私田 改革을 主張하여 勳臣 貴族들의 猛烈한 反對가 있었으나 李成桂의 勢力이 이를 支持하여 高麗가 亡하기 前해인 恭讓王 三年에 옛날의 科田制를 復活하는 田制改革을 斷行하고 私田 文券을 서울의 한 복판에 쌓아 놓고 萬民 環視中에 불살라 버리니 이로써 李成桂의 勢力은 農民들의 歡迎을 받고, 便 묵은 貴族들의 勢力을 무너뜨리어 勢力은 더욱 커지고 또 國家의 財源을 넉넉하게 하여 李氏朝鮮 建國의 經濟的 基礎를 삼았다.

우리나라 衣服 資料는 麻布가 가장 主되고 그밖에 中國으로부터 輸入되는 綿布 等이 있고 農村의 細民層은 狗皮를 입는 者도 적지 아니 하였다. 그러던 中 恭愍王때에 文益漸이 中國에 갔다가 交趾(베트남)로부터 棉花 種子를 가져오는데 이때 元나라에서는 棉花 種子를 外國에 보내는 것을 嚴禁하고 있었음으로 文益漸은 筆管속에 秘密히 넣어 가지고 와서 심은 것이 우리나라 棉花 栽培의 始初이며 高麗가 亡할 무렵에 全國에 퍼져서 우리나라 衣服界에 一 新紀元을 그었던 것이다.

高麗의 王室을 지켜가고 李成桂의 勢力을 눌러 보려고 하는 사람들 中에 그 中心 人物은 鄭夢周였다. 그러나 鄭夢周는 一個 文臣이라 아무 武力的 實力이 없더니 恭讓王 四年에 李成桂가 海州에 갔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傷하였다는 所聞을 듣고 이를 機會로 李成桂를 몰아내려 하였으나 李成桂가 松京에 돌아오고 그 아들 李芳遠이 刺客 趙英珪를 보내어 善竹橋에서 鄭夢周를 처 죽였다.

鄭夢周가 죽자 高麗의 運命도 이와 함께 다 하였다. 그해 七月에 李成桂는 恭讓王을 廢하여 原州로 내치고 王位에 오르니 이가 李太祖이오 (檀紀 三千七百二十五年 壬申) 高麗는 三十四王 四百七十五年으로 끝마쳤다.

高麗時代는 三國時代의 武勇의 遺風이 있어 能히 契丹 蒙古 紅巾賊 倭寇와 같은 大敵을 막아 싸우니 當時의 遺物로서 建築에 浮石寺의 無量壽殿, 彫刻에 恩津의 彌勒佛 等은 美術로도 有名하거니와 그 굳세고 힘찬 모습은 그때 사람의 氣質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末葉에 이르러 從來에 國難이 있을 때는 貴族의 子弟가 陣의 先頭에 나서던 眞實한 風이 없어지고 勢力이 있는 者들이 兵役을 忌避하는 風이 生하니 紅巾賊의 亂에 儒學을 배우는 學生들이 우리는 孔子廟를 지키는 儒生들이니 戰爭에 나갈 수 없다고 政府에 請願한바 그때 政丞 廉悌臣이 嚴責하여 曰 國難이 있을 때에 貴族子弟들이 먼저 칼을 잡고 나가는 것은 祖宗 以來의 常規라 너희들이 孔子廟를 憑藉하는 것은 兵役을 忌避함이라 너희들이 지키지 아니하면 孔子廟가 어디로 逃亡가느냐 하고 一齊히 戰爭에 내어 보낸 일이 있으니 이것이 高麗사람의 氣質의 變함이오 이 變化한 氣質이 李朝에 相續 되었다.

高麗社會의 腐敗는 革命을 불렀고 革命은 社會發展 科程에 있어서 一大 淸新劑가 된 것이다. 그러나 李成桂는 恭愍王 三年에 이미 田制를 改革한 뒤에 自己가 國王이 되지 아니하면 안되겠다는 政治改革에 對한 主張을 내 세운 것이 없고 다만 王代 社稷을 빼앗으려는 權力 다툼만을 일삼았기 때문에 朝臣中에는 李成桂의 革命에 對하여 强烈한 反對를 한 者가 적지 아니하고 그 中에는 松京의 杜門洞에 숨어서 一生을 李氏의 앞에 무릎을 屈치 안한 者 있으니 이를 杜門洞 七十二賢이라 한다.

七十二賢과 그 子孫들은 李氏에 服하지 아니하고 或은 柳器 皮革匠등 賤業을 하는 者도 있고 或은 商業에 몸을 던져 松京과 延安 배천(白川)의 사이를 往來하는 者도 있었으니 지금의 開城 사람의 商業術이 一國에 有名하고 開城商業簿記가 西洋式 簿記와 倂稱되고 있는 것은 당시 杜門洞 諸賢의 創案으로 된 까닭이라 한다.

 

備考

一. 高麗王室이 없어진 것은 太祖가 漢陽에 移都하니 全 百姓이 松京에 回歸하기에 뜻을 두니 太宗이 部下로 하여금 望月臺를 불살라 버리라

二. 開國初에 無國號하여 高麗權知國事라 稱하고 明國에서 太祖가 王位에 오름을 承諾받고 화녕(和甯, 寧)과 朝鮮이라는 두 이름에서 朝鮮이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李朝는 明의 阿諛國)

三. 太祖는 百姓을 爲하여 革命함이 아니라 다만 一生에 王位를 차지하려고 明國에 阿諛해서 겨우 임금이 되니 李太祖는 明에서 命令하면 모두 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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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國關係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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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國關係

元나라가 亞細亞 大陸에 大帝國을 建設한지 八九十年에 차츰 그 힘이 기우러져서 四方에 盜賊이 일어나도 그를 막아내지 못하는 形便이라 恭愍王은 世子때에 元나라에 가 있어서 이러한 事情을 잘 알고 있음으로 이 機會에 元나라 勢力을 물리치기로 하고 王의 五年(檀紀 三六八九年)에 元나라에서 高麗에 設置하여둔 征東行者를 罷하고 前日에 元나라에게 빼앗긴 東北面의 땅과 나아가서는 遼東 等地를 도로 찾으려하여 印璫으로 하여금 鴨綠江便의 八站을 치고 柳仁雨로 하여금 東北面의 雙城 以北을 收復하게 하니 이것은 오랜 동안 北方 民族에게 눌려서 피어나지 못하던 大高句麗主義가 다시한번 光彩를 보이게 된 것이다. 이때에 元나라의 紅頭賊이란 盜賊의 무리 十餘萬名이 우리나라에 根據를 잡으려 하여 쳐들어 왔다. 高麗로서는 뜻밖의 일이오 盜賊의 氣勢는 매우 사나웠음으로 王은 慶尙道 尙州 等地로 避難하니 賊이 松京을 陷落시켜서 宮闕과 모든 財寶 文獻이 蕩盡하였다. 數日後에 鄭世雲이 安祐 金得培 李芳實等 三元帥로 더불어 겨우 쳐서 破하니 敵의 太平은 죽고 나머지는 鴨綠江을 건너가서 달아났다.

王은 期於코 遼東을 恢復하려하여 李成桂等으로 하여금 遼陽城을 쳐서 떨어뜨리고 遼東의 官民에게 榜을 내 걸어 우리의 目的은 한때 잃어버린 故地를 찾으려 함에 있다하고 타일렀다. 이는 勿論 遼河까지가 本是 우리의 地境임을 말함이겠지만 이때 形便으로도 元 나라가 高麗를 누르고 國境을 南으로 뻗은 反面에 百姓들은 이 分明치 않은 地境을 믿어서 前날 보다도 더 北쪽으로 나갔음으로 遼東平野에 高麗사람이 많이 살아서 遼陽에 高麗軍民總督府가 생기더니 이때 마침 高麗의 國情이 安定되지 못하고 그 때문에 大陸政策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나라는 北으로 滿洲大陸과 接하고 東으로 一 海峽을 隔하여 日本과 이웃하고 있음으로 外交關係와 國防關係는 恒常이 두 方面에서 생겼다. 高麗 末葉의 倭寇는 高麗를 滅亡케 한 一因이 된 大事件이라 元來 倭寇는 日本사람의 海賊떼로서 高麗 中葉부터 高麗와 宋나라의 海岸地方을 擄掠질 하여 代代로 내려오면서 掠奪 强盜로 業을 삼는 무리들이었다. 恭愍王때에 이르러 倭寇가 더욱 甚하여 海岸地方은 勿論이오 차츰 陸地로 들어오고 또 南方을 휩쓴 뒤에 北으로 뻗어서 京畿道의 江華 豊德같은 서울의 咫尺에까지 미쳤다.

海岸地方 사람들은 安堵하고 살 수 없음으로 깊이 陸地로 들어가고 良田沃畓에 갈대가 茂盛하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穀食이 많이 나는 土地는 主로 沿海岸에 있는데 海岸地方에 農民이 살지 못하고 모든 土地가 荒蕪로 化한 까닭에 國內의 食糧이 不足하고 國家의 財政이 또한 窘塞하였다.

이와 같이 倭寇가 三十餘年을 繼續하는 동안에 崔瑩과 李成桂가 여러 次例로 倭寇를 大破한 일이 있고 崔茂宣이 元나라 사람에게서 처음으로 火藥을 製造하는 方法을 배워 我國 最初의 火器를 만들어서 全羅道 鎭浦에서 倭寇의 배 三百隻을 單番에 무찌른 일이 있었다. 그러나 倭寇의 氣勢는 좀처럼 줄어들지 아니하고 禑王때에는 王都를 깊은 陸地로 옮기자는 議論도 일어나고 鄭夢周를 日本에 보내어 倭寇를 禁해 달라고 請한 일도 있었으며 臨津江 於口로부터 南岸을 거쳐 멀리 東海岸의 咸州 海岸에 이르기까지 延長 四千里의 땅이 모두 倭寇의 亂舞場이 되었고 어떤 곳에는 鷰雀이 林木에 歸巢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倭寇中에는 日本 海賊만 있는 것이 아니오 高麗사람으로서 地方官吏에게 不滿을 품은 者와 生活이 困難한 자者가 倭寇노릇을 하는 假 倭寇도 적지 아니하여 防備가 虛疎한 곳에는 반드시 倭寇가 出沒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倭寇의 大部隊가 全羅道 雲峰으로 모이었다. 李成桂는 部下將 佟豆蘭과 精兵을 거느리고 가서 荒山 西北에서 크게 싸워서 倭寇의 阿只拔都 大將을 죽이고 그 무리를 쳐 없애니 이로부터 倭寇의 氣勢가 꺾이어서 다시 前日과 같이 橫行하지 못하였고 李成桂가 凱旋하는 大路變에는 百姓들이 모여 나와서 歡迎하고 崔瑩은 李成桂의 손을 잡고 울면서 그 功을 稱謝하니 이에 李成桂의 威望이 一世를 덮어서 後日 革命의 基地를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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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의 紊亂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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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의 紊亂

高麗는 農業으로써 國家經濟의 中心을 삼았음으로 土地生産은 國民生活의 基礎가 되고 國家財政의 支柱가 되고 戶口의 整備 軍士의 徵發 等이 모두 土地의 授受制度로부터 出發하였으니 國家의 興廢, 政治의 善否가 모두 土地制度의 如何에 달려 있었다. 蒙古亂 以後로 社會의 秩序가 헝클어짐을 따라 가장 먼저 弊害를 生한 것이 土地制度였다.

처음에 官吏의 俸給으로써 農民의 耕作하는 土地의 收租權을 준 것은 다만 現物 運搬의 不便을 덜기 爲한 方便에 不過한 것이오 그 官吏에게 土地를 준 것은 아니오 收租權을 가진 官吏와 農民과의 사이에 身分的으로 奴主關係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土地 生産物의 十分一을 官吏에게 주면서도 賦役이나 戶稅는 國家에 바친 것이니 이것은 다른 나라의 封建社會의 農奴制와는 그 性質이 全然 다르다.

그런데 國家의 秩序가 한번 헝클어지자 權臣 貴族 土豪들은 그 收租權을 가지고 農民에 對하여 國家의 戶口帳에서 削去하고 國家에 바쳐야 할 賦役과 戶稅를 自己가 私取하니 國家의 公民의 數는 날로 줄어들고 이 까닭에 戶籍이 헝클어지고 또 土地授受法이 제대로 實行되지 못함으로 因하여 兵役을 負擔할 壯丁의 數도 알 수 없이 되었다.

便으로 奸人의 무리가 함부로 弄奸을 하여 일찍 官吏가 兵丁을 들어간 일이 없이 田柴科의 土地를 盜賊해 먹으며 아비는 公田을 私私로이 아들에게 世襲시키고 아들은 이를 隱匿하여 나라에 바치지 아니하니 高麗 土地 一百七十餘萬結 中에서 國家의 土地帳에 남아있는 土地가 七八十萬結 밖에 되지 아니하였다 한다.

또 農民 한 집의 耕作하는 土地에 對하여 收租權을 가지고 있다고 自稱하는 者가 六七人에 達하는 일도 있어 어느 사람이 國家에서 認定한 收租權者인지 알 수 없고 이 까닭에 農民이 지은 一年 農事는 모두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이 公田數가 줄어들고 國家에 들어가는 田租가 또한 中間에서 橫領되어 國家財政은 말할 수 없이 窘塞하였고 或 賢相이 들어 있어 이 弊害를 그치려하되 盤根錯節한 權臣 貴族들의 勢力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었고 農民들은 하루바삐 政局에 大變動이 생겨서 새로운 政治가 나오기를 渴望하였다.

世上일이 이와 같이되니 官吏의 腐敗는 極度에 達하여 民財를 빼앗아 먹기를 恒茶飯事로 하니 이때의 史官들은 이를 評하여 말하되 鷹犬을 雉兎의 場에 放함과 같다고 하였다.

高麗文化에 中心이 되고 있는 佛敎에도 弊害가 生하여 僧侶들은 特權을 믿고 放恣한 行動을 마음대로 하고 寺刹에서 淫犯을 行하는 일도 적지 아니하여 政界와 함께 腐敗 一路를 걷고 있었다. 여기에 不滿을 가진 儒臣中에는 佛敎를 排斥하는 소리가 漸漸 높아지고 儒敎 獎勵의 先陣에 나선者가 安珦이다. 安珦은 中國으로 부터 孔子圖像과 儒敎의 모든 儀式을 傳해오고 또 宋나라의 程朱學 卽 性理學을 가져와서 後進을 가르치니 이것이 우리나라에 性理學이 뿌리를 뻗은 始初이오 이어서 李穡(號 牧隱) 鄭夢周(號 圃隱) 같은 大儒를 生하니 當時 鄭夢周는 東方 理學의 祖라 稱하였고 이 淵源이 李朝에 흘러 내려가서 性理學의 全盛時代를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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