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歷史'에 해당되는 글 110건
- 2015.02.17 蒙古亂 (서당국사)
- 2015.02.17 繼生하는 叛亂 (서당국사)
- 2015.02.17 女眞關係 (서당국사)
- 2015.02.17 中期의 隆盛 (서당국사)
- 2015.02.17 儒敎와 佛敎의 文化 (서당국사)
- 2015.02.17 契丹關係 (서당국사)
- 2015.02.16 二. 成宗의 治積 (서당국사)
- 2015.02.16 土地制度 (서당국사)
- 2015.02.16 社會階級 (서당국사)
- 2015.02.16 高麗政治 (서당국사)
- 2015.02.16 高麗建國 (서당국사)
- 2015.02.16 新羅의 衰亡 (서당국사)
- 2015.02.16 海上發展 (서당국사)
- 2015.02.15 渤海의 建國 (서당국사)
- 2015.02.15 三國의 文化와 經濟 (서당국사)
蒙古亂
崔忠獻이 權勢를 잡은 後에 政治가 어지러워서 蒙古의 勢力이 크게 밀려 들어와서 새 版局이 벌어졌다. 蒙古는 本是 外蒙古의 온온한 기슭에서 遊牧하는 部族이러니 成吉思汗(징기스칸)이 나서 四方의 여러 部族을 合쳐서 큰 勢力을 이루니 이는 崔忠獻이 한창 勢道를 부리던 熙宗때 일이다. 金나라가 蒙古의 힘에 눌림에 契丹의 貴族들이 遼東에서 일어나고 金의 叛將 蒲鮮萬奴는 지금의 間道地方을 根據地로 하여 東眞國을 세웠다. 그 後 高宗때에 이르러 遼東의 契丹族이 鴨綠江을 건너서 우리나라 地境 안으로 밀려들어와서 掠奪을 함부로 行하였다. 高麗는 軍士를 보내어 各地에서 契丹兵과 싸우는 中에 또 蒙古가 東眞과 聯合하여 契丹兵을 치기 爲하여 그 뒤를 따라 鴨綠江을 건너오니 國內에 四國軍隊가 어울려서 形勢가 極히 險惡하고 또 急迫하였다. 더욱이 高麗와 蒙古는 從來로 外交關係가 全然 없을 뿐만 아니라 그 人性이 强悍함으로 國內人心이 恟恟하였다.
이때 契丹兵은 앞으로 高句麗軍에게 막히고 뒤로 蒙眞聯合軍에게 쫓기어 西北面의 江東城에 들어가서 지키니 蒙古將 哈眞과 東眞將 完顔子淵이 그 뒤를 따라 江東城을 包圍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形勢가 甚히 危懼함을 보고 戰略과 外交에 能熟한 사람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리라 하여 趙冲을 元帥로 하고 金就礪를 副元帥로 하여 軍士를 거느리고 蒙眞軍의 營에 가서 크게 酒宴을 베풀고 두 將帥를 接待하였다. 두 將帥는 우리나라 두 元帥의 人格이 매우 높음을 보고 慕仰함을 마지 아니하였다. 完顔子淵은 我人에게 말하되 高麗의 趙元帥는 奇偉한 사람이라 國家가 이러한 將帥를 둔 것은 天의 賜함이라 하고 哈眞은 金就礪를 보고 말하되 내가 일직 六國을 征伐하여 貴人을 만남이 많으되 兄의 얼굴을 보니 어찌 그렇게 奇偉한고 하여 稱讚하였다. 이에 세 나라 軍士는 江東城을 쳐서 契丹兵을 전全滅시킨 뒤 蒙塵과 和好를 맺고 無事히 돌려보냈었다. 이 亂에 歸降한 者가 말했는데 이들은 山林地帶와 荒蕪地에 移住시켜 農事짓게 하니 이를 契丹場이라 하고 契丹場에 들어간 者들 中에는 農事짓기 싫어하고 사냥과 皮革 柳器 等 手工業으로 轉業하는 者가 많았으니 이것이 大槪 後日의 所謂 소白丁 고리白丁等이 된 것이다.
滿洲 地方에서는 蒙古의 勢力이 밀려나와서 東眞國은 얼마後에 亡하고 蒙古는 高麗를 救援하였다. 高宗 十二年에 蒙古의 使臣이 高麗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鴨綠江을 건너가서 盜賊을 만나 죽은 일이 있음으로 蒙古에서는 이것을 트집 잡아 가지고 國交가 漸漸 險惡하더니 마침내 高宗 十八年에 第一次로 高麗에 쳐들어 왔다. 原來 滿蒙 地方에 뿌리를 잡은 國家들은,
一. 海洋을 가지지 못해서 海外로 發展할 길이 없고
二. 氣候가 추워서 蠶布 等 衣服 資料가 生産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蒙古가 처음으로부터 高麗를 빼앗을 慾心을 가지는 것도 이 海洋과 衣服 資料를 얻기 爲함이오 契丹兵이 뒤를 쫓아 나온 것도 高麗에 발을 부칠 口實을 얻으려 함이오 다시 高麗에 쳐들어 온 것도 自己들이 처음부터 慾心내던 일을 達成하기 爲함이다.
今後에 있어서도 蒙古方面에 立하는 나라는 海岸을 얻기 爲하여 반드시 가장 距離가 가까운 東海로 進出하려 할 것이오 더욱이 不凍港을 얻기 爲하여 반드시 我國 海岸에 着目할 것은 勿論이다. 蒙古軍이 쳐들어오면서 龜州城을 包圍하니 이때 龜州를 지키던 朴犀와 金慶孫 等이 여러 날 동안 蒙古軍과 싸워서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니 蒙古將 한 사람이 歎服하여 曰 내가 從軍한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城이 이와 같이 攻擊을 받고 屈치 않는 것은 처음 보았노라 城中 諸將들은 後日 반드시 將相이 되리로다 하였다.
그러나 高麗는 마침내 蒙古軍을 對敵치 못하여 그 이듬해 三軍이 蒙古軍에게 屈服하기에 이르렀다. 蒙古에서는 達魯花赤(다루가치)라는 官吏 七十二人을 보내와서 高麗의 內政을 干涉하였다. 이에 高麗 朝廷은 蒙古와 抗爭하려하여 崔忠獻의 아들 崔瑀가 當時 政權을 잡고 있는지라 王을 모시고 江華島로 들어가니 (檀紀 三千五百六十五年) 이는 蒙古軍이 陸地에서는 强하나 水軍이 없어서 바다에서는 힘쓰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三十年동안 蒙古의 軍士가 江華島의 便에 와서 아무리 威脅을 하고 出陸하기를 繼續하여도 崔瑀는 應하지 아니하니 그 忿풀이를 陸地에서 마음껏 하여 前後六次나 그들의 사나운 발굽이 鴨綠江 이쪽을 짓밟아서 西北面 一帶에는 百姓이 견디지 못하여 아주 마을이 비게 되었으며 敵軍은 멀리 慶州까지 쳐들어와서 虐殺과 擄掠을 마음대로 하였다.
大邱 符仁寺에 있는 大藏經版과 慶州 皇龍寺의 九層石塔이 불타 버린 것도 이 때이며 그들이 第六次로 들어 왔을 때는 高麗사람을 잡아 간 것이 二十萬名을 넘고 죽은 사람의 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高麗에서는 大藏經이 불타버린 것을 아깝게 생각하여 高宗王은 다시 發願하여 十六年동안의 努力으로 八萬大藏經版을 새기고 이 大藏經을 새겨 내기에 하도 힘들어서 더 簡便한 方法을 생각해 낸 것이 活字이다.
高宗 二十一年 (三千六百六十七年)에 이미 鑄字로써 冊을 박아내니 이는 獨逸사람들이 西洋에서 처음으로 活字를 만들어서 冊을 박아낸 것보다 二百年이나 앞섰다. 活字는 文明의 母라는 말이 있거니와 世界에서 가장 먼저 活字를 發明한 高麗는 亦是 文化의 先進國이었다.
宋나라 임금이 일부러 使臣을 보내와서 貴重한 冊을 빌려달라 하고 日本이 恒常 南洋의 珍奇한 物件을 가지고 와서 그 값으로 特히 大藏經을 나눠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高麗가 當時의 東洋에서 文化的으로 얼마나 높은 水準을 지니었던가를 알 수 있고 이러한 文化 속에서 맺어진 열매가 活字이었다.
江華島에 들어간 뒤 崔氏는 政權을 오로지 하여 私兵인 三別抄軍으로써 스스로 守備하여 陸地에 나가 싸운 일이 없고 오직 陸地軍隊에 對하여 抗戰을 命令할 뿐이며 西南岸地方으로부터 水路로 食糧과 其他 物資를 運輸해다 安樂한 生活을 繼續하였다.
高宗 四十五年에 崔氏와 三別抄軍사이에 틈이 생김을 利用하여 三別抄를 시켜서 崔氏를 滅하니 崔氏는 四世 六十餘年만에 亡하고 王이 直接 政治를 맡아보게 됨에 마침내 蒙古에 屈服하고 王子를 보내어 和親하기를 請하니 元나라(蒙古) 世祖 忽必烈이 뜻밖의 일로 생각하고 기뻐하여 曰 高麗는 萬里의 나라이라 唐太宗이 치다가 뜻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王子가 오니 이는 하늘이 시킴이라 하고 厚히 接待하고 軍士로 扈衛시켜서 本國으로 돌려보냈었다.
그 동안에 高宗이 昇遐하고 王子가 돌아와서 임금이 되니 이가 元宗이다. 元宗 時代는 戰爭이 겨우 끝나고 그 뒤를 整理하는 가장 複雜한 때라 첫째로 三十年동안 都邑하던 臨時首都 江華島로부터 松京에 還都한 것이오 둘째로 還都한 뒤 三別抄가 叛亂을 일으켜 珍島로 내려가서 官軍과 싸우다가 敗하여 다시 濟州道에 들어가더니 마침내 官軍에게 亡하였다.
이 三別抄의 亂에 對하여 지금의 어떤 學者는 三別抄의 亂으로써 蒙古에 抗戰하는 義擧라 하여 讚揚하고 있으나 三別抄는 元來 崔氏의 手足으로써 蒙古亂中 가장 安樂한 島中生活을 하고 抗敵의 陣에 參加한 일이 없고 崔氏가 亡한 뒤에 如前히 江華島에 있어 陸地에 나와 싸운 일이 없었으니 이것을 抗戰派라고 부를 수 없음은 勿論이오 還都後에 그 組織을 고쳐서 官軍으로 改編하려하매 그들은 過去의 特殊存在로서의 特權이 喪失됨에 不滿을 품고 叛亂을 일으킨 것이다.
셋째로 東北面의 雙域에 있는 官吏들이 本國을 背叛하고 和州 (永興) 以北의 땅으로써 元나라에 附屬한 것이다. 이로부터 元나라가 高麗의 宗主國 노릇을 하게 되었으며 元나라가 日本을 칠 터이니 高麗도 힘을 合하라 하여 忠烈王이 임금이 되던 해에 (檀紀 三千六百七年) 高麗에서 만든 戰艦 九百隻으로 合浦(지금의 마산부근)를 떠나서 對馬島와 壹岐島를 무찌르고 九州의 博多를 占領하였으나 暴風雨가 일어나서 戰艦이 많이 破損되었음으로 더 나가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그 後 七年만에 다시 蒙古軍과 中國의 江南軍과 高麗軍이 聯合하여 日本을 치러 갔으나 이번에도 大風이 일어나서 江南軍이 거의 全滅하고 헛되이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에 中國의 戰艦은 大槪 破損되었으나 高麗 戰艦의 破損 된 것이 極히 적은 것은 百濟時代 以來 我國의 造船技術이 優秀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高麗는 百餘年동안 元나라의 支配를 받는 사이에 나라 政治는 專혀 元나라의 意思에 依하여 行하여졌다. 忠烈王以後로는 代代로 王이 元나라의 公主에게 장가를 들어서 元나라 임금의 사위가 되고 그 公主가 낳은 아들이 王位에 오르게 되니 高麗王室은 血統的으로도 元나라의 支配를 받게 되었고 임금의 諡號는 從前의 宗字를 廢하고 그 머리에 忠字를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代代로 王이 元나라 大都에 別邸를 두고 거기 來往이 잦으니 그 費用도 적지 아니하여 國家財政이 極히 困難하였지만 政治의 命令系統이 헝클어져서 本國에서 發한 命令이 元나라 大都로부터 沮止 當하는 일도 있고 元나라에 阿附하여 權勢를 얻으려 하여 本國을 誣陷하는 吠主犬들이 兩國의 사이를 往來하면서 政府나 임금이 알지 못하는 政令을 發하는 일도 있어 나라 紀綱이 餘地없이 무너졌다.
이러한 吠主犬들은 甚至於 本國의 國號를 廢하고 元나라의 一地方으로 만들자는 運動까지 일어나니 忠宣王은 涕泣하면서 四百年 祖宗의 基業이 나의 몸에 이르러 떨어지게 되니 어찌 痛心한 일이 아니랴하고 李濟賢 等으로 더불어 元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겨우 無事함을 얻은 일도 있었다.
이때 王室로부터 民間에 이르기까지 元나라 風習이 흘러 들어오고 便으로는 文化의 輸入도 活潑하여 安珦이 孔子의 圖像과 儒敎儀式을 中國으로부터 直接 가져 온 것도 이때의 일이오 忠宣王은 元나라에 가서 萬卷堂을 이루고 趙孟頫等 大學者들과 사귀어 한때 大陸文化의 中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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繼生하는 叛亂
肅宗의 아들 仁宗은 나이 어리고 그 外祖父 李資謙이 權力을 잡고 스스로 높은 벼슬에 나아가서 國事를 마음대로 뒤흔들고 九城 싸움에 나가서 功을 세우고 돌아온 拓俊京을 心腹으로 부려서 온갖 暴虐한 일을 다 하였다. 그는 自己에게 反對하는 사람을 모조리 放逐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고자 하여 王을 죽이려 하니 이것은 木 子 得國 秘訣에 因함이라 그러나 資謙은 마침내 敗하고 말았다. 이 亂離에 宮闕이 불타 버리고 서울이 쓸쓸하게 됨에 僧 妙淸과 詩人 鄭知常 等을 中心으로 西京에 都를 옮기고 임금을 皇帝라 일컫고 年號를 세우자는 意見이 일어났다. 그러나 朝廷에서는 그 意見을 反對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妙淸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西京에서 亂離를 일으켜 새로 나라를 세워 國號를 大爲라 하고 年號를 夫開라 하니, 仁宗은 金富軾으로 하여금 軍士를 거느리고 나아가 싸워 그 이듬해에 平定하였다.
妙淸의 亂에 對하여 옛날 史書에는 妙淸으로써 妄誕한 사람이라 하고 그 亂을 일으킨 것은 政權 다툼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여러 學者들은 妙淸으로써 金富軾을 中心으로 한 事大主義에 對抗하는 革命家라 하여 是非가 定치 못하고 있다. 當時의 時勢를 보건대 朝廷안에는 中國을 祖國처럼 여기는 事大主義 思想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으니 政治家中에는 거기에 不滿을 품은 者 적지 아니하였고 妙淸도 그 中의 一人이었다. 이 事大主義의 革破를 主張함에는 그것을 主張할만한 人物이 아니면 안된다. 그러나 妙淸은 事實로 妄誕한 사람이오 風水地理說로써 王의 마음을 이끌고 鄭知常이 또한 陰陽說로써 거기에 附同하였으며 西京에 都邑을 옮기려 함은 西京에 妙淸의 勢力이 이미 扶植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妙淸이 眞心으로 國家의 百年大計를 爲하는 正人 志士가 아니오 다만 勢力 다툼을 爲한 術策에 不過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高麗는 太祖 以來로 右文政策을 쓰고 武人을 낮추어보게 되어서 武人들의 不平이 적지 아니하더니 毅宗때에 이르러 王은 本是 氣質이 懦弱하여 近侍와 文臣들만을 가까이하고 그들이 또한 王의 사랑을 믿고 放恣한 일이 많아서 武臣들의 感情이 더욱 날카로워 졌다. 이러한 武臣들의 不平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鄭仲夫 等이 亂을 일으켜 近侍와 文臣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의 집을 헐어버리고 王을 몰아내고 王의 아우를 세우니 이가 明宗이다. 이 亂離가 庚寅年에 第一次로 일어나고 癸巳年에 再次 일어났음으로 이를 庚癸之亂이라 한다. 鄭仲夫는 나라의 權勢를 한 손에 잡고 朝廷의 重要한 벼슬에서 外方의 所任에 이르기까지 全部 武臣이 맡아보게 되었다.
文臣의 世上은 비록 無力하나마 傳統과 權威를 세우고 그를 中心으로 하여금 움직여 나갔지만 武人의 世上은 그러한 것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힘으로 움직였다. 鄭仲夫는 權勢를 잡은지 十年만에 慶大升에게 죽고 大升은 多幸이 天命을 마쳤으나 그때 서울 안 盜賊은 모두 武臣의 部下라고 할 만치 百姓들의 怨聲이 적지 아니하였으며 그가 죽은 後에 將軍 李義旼이 權勢를 잡고 갖은 暴虐을 다하여 木子 得國의 秘訣을 利用하여 叛逆을 圖謀하더니 崔忠獻이 義旼을 죽이고 그의 三族과 종들까지도 모조리 잡아 죽이니 國家의 모든 權勢가 忠獻에게 돌아갔다. 忠獻은 明宗을 가두고 그 아우를 세우니 이가 神宗이다. 忠獻은 私兵을 길러서 自己를 守護케 하니 그 勢力이 官軍보다 억세고 나라의 政治를 自己 집 都房에 앉아서 處決하니 이것을 都房政治라하고 都房政治가 생긴 後로 朝廷은 빈집이 되고 官軍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아니하고 그가 權勢를 잡은 二十四年間에 두 임금을 내치고 내 임금을 세우니 柔弱한 王들이 또한 忠獻의 脾胃를 맞추는 수밖에 다른 道理가 없었다.
武臣의 亂離를 거쳐서 그들의 跋扈로 遺族社會의 묵은 傳統이 무너지고 社會가 힘으로 움직이게 되자 이때까지 下層에서 눌려 살던 農民과 奴隸階級이 자주 叛亂을 일으켰다. 그 中에서 가장 두드러진 事件으로는 明宗때에 公州에서 일어난 亡伊의 亂과 淸道에서 일어난 金沙彌의 亂과 神宗때에 東京(慶州)에서 일어난 金順의 亂과 蔚珍에서 일어난 金偉의 亂 같은 것이며 奴隸의 叛亂으로는 神宗때에 私奴 萬積의 事件과 같은 것은 注目할 現象이니 萬積은 官私 奴婢 數千名을 松都의 뒷산에 모아 놓고 崔忠獻 以下 자기네들의 上典을 各各 죽이고 奴婢 文書를 불사라서 奴婢를 모두 解放하여 三韓에 賤人 階級을 없이하고 또 將相이 本是 種이 있는 것이 아니니 우리도 將相이 될 수 있다하고 일을 꾸미다가 中途에 發覺되어 擧事치 못하고 모두 잡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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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眞關係
女眞은 처음에 渤海國을 構成한 靺鞨의 一族이라 渤海가 契丹에게 亡한 뒤에 女眞族이 南滿州 方面에 居住하는 者는 契丹에게 歸化하여 熟女眞이 되고 白頭山을 中心으로 한 北滿州와 沃沮故地에 居住하는 者는 恒常 契丹에 反抗하였음으로 이를 生女眞이라 한다. 우리나라와 隣接하고 있는 女眞族은 모두 生女眞으로서 貿易과 侵略을 되풀이하였으나 高麗를 두려워하는 氣色이 없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哈爾濱(하얼빈) 附近의 完顔 部에 烏雅束이 나서 그 勢力이 무척 늘어서 이웃의 여러 部族을 合치고 그 힘이 우리나라 國境에까지 미치니 烏雅束의 先世는 高麗 東北面의 和州(지금의 永興)사람 金某임으로 그들은 高麗를 父母之國이라 肅宗 九年 正月에 咸州(지금의 咸興)의 女眞 部落을 統合한 烏雅束의 部下는 國境을 넘어서 定平에 들어왔다. 이에 高麗에서는 林幹을 보내어 치다가 失敗하고 다시 尹瓘을 代身 보내었으나 또한 功을 이루지 못하고 겨우 敵을 宥和하여 돌려보내었다. 그러나 尹瓘은 이 싸움에서 女眞이 어찌하여 强한가를 알았다. 그것은 高麗의 步兵에 對하여 敵은 모두 騎兵이어서 처음부터 對敵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尹瓘은 이에 神騎隊라는 騎兵隊를 만들어서 猛烈한 訓練을 시켰다. 그러던 中 肅宗이 昇遐하면서 遺言으로 지금의 女眞의 勢力을 꺾지 아니하면 반드시 後患이 있으리라 하여 女眞을 치기를 付託하였다.
肅宗 二年에 (紀元 三千四百四十年) 女眞이 다시 國境을 侵犯함으로 尹瓘이 十七萬의 軍士를 거느리고 長城을 넘어 가서 敵의 巢窟 一百 三十餘所를 무찌르고 英州, 雄州, 福州, 吉州, 咸州, 公嶮鎭, 宜州, 通泰, 平戎의 九城을 쌓으니 이것이 有名한 東北面 九城이다.
九城의 땅이 지금의 어느 곳인지 確實히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或은 公嶮鎭을 지금의 北間島의 땅이라 하고, 或은 吉州를 지금의 咸鏡北道 吉州라 하여 마치 九城의 땅이 豆滿江의 左右에 까지 미침과 같이 말하는 일도 있으나 當時 戰爭한 日數와 距離 等으로 생각하여 보면 지금의 咸鏡南道의 北部 海岸地方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이 해로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女眞은 高麗에 怨讐를 갚고 九城을 恢復하려하여 쉴 사이 없이 反擊을 되풀이하고 또 完顔部가 數萬名으로서 英州 雄州 吉州等을 차례로 包圍하였으나 成功치 못하였다. 이때 女眞은 九城 等地에서 쫓겨나간 部落이 安住할 곳을 잃어서 몹시 疲勞하고 高麗도 또한 九城의 땅이 驗하여 지키기 어렵고 또 距離가 멀어서 모든 軍需物을 輸送하기 어려워서 國力이 疲弊하였다. 이에 女眞은 使臣을 보내어 와서 九城을 返還하여 달라고 哀願하여 曰 만일 九城을 돌려주면 以後로는 永遠히 高麗를 父母의 나라로 섬기고 子子孫孫이 朝貢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하늘에 盟誓하고 돌 자갈 하나라도 地境을 넘어서 던지지 아니 하겠다고 굳게 다짐함으로 高麗는 그들의 所願을 들어주기로 하고 官員을 보내어 女眞 面長들로 하여금 咸州城 밖에 壇을 모으고 하늘에 盟誓케 한 다음 九城으로부터 次例로 물러나니 이로써 여러 해 동안 애써 이루어진 東北面의 計劃이 모두 무너졌다.
그러나 返還은 效果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으니 後日 高麗와 女眞과의 交涉에 큰 影響을 끼쳐서 오랫동안 不安하던 東北面의 國境이 이로부터는 平靜하여졌고 烏雅束의 아들 阿骨打가 女眞國을 크게 만들어 國號를 金이라 하고 契丹 卽 遼나라를 滅하고 다시 中國에 쳐들어가서 宋나라를 楊子江 南쪽으로 몰아내서 東洋 天地를 뒤흔들었건만 高麗에 對하여는 恒常 友好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擇里志라는 글에 쓰여 있는 것을 보면 滿洲에서 일어난 國家는 大江과 大野를 가지고 있어 그 氣風이 雄大함으로 高句麗와 渤海는 能히 中國大陸과 雌雄을 다투었고 渤海 遺族인 金나라는 能히 中國에 들어가서 帝王노릇을 하였는데 鴨綠江 以南에 (局蹐), 跼蹐하고 있는 國家는 千里의 江과 百里의 野가 없기 때문에 겨우 그 封域을 僅守할 뿐이라는 뜻을 썼는데 地理와 國民氣風의 關係가 있고 없는 것은 別問題로 하고 어쨌든 우리 民族이 滿洲를 잃은 後에 그 勢力이 갑자기 微弱하여진 것은 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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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期의 隆盛
文宗의 世는 建國한지 이미 一百三十餘이오 外로는 北邊에 千里長城이 쌓인 後에 國境에 큰 일이 없고 內로는 文化가 發達하고 道路를 열어서 交通을 便利하게 하니 勿論 當時의 交通은 지금과 같이 어떠한 山谷泰山이든지 牛馬車가 通行할 수 있는 道路가 아니오 所謂 平地의 道路도 겨우 牛馬車가 通行할 수 있음에 不過하고 山路에는 步行人이나 駄牛馬가 行할 程度이니 지금 各地에 남아있는 舊路 廢路가 곧 그 時代의 遺物이다.
그러므로 그 當時에는 軍士가 行陣할 때에는 軍士들이 무거운 食糧 戰具같은 것을 지는 外에 駄牛馬의 列이 千里 二千里를 잇닿았다 한다. (그러나 文宗때는(??) 成宗 以後 各 主要 道路에 비로소 院을 두어 行人의 宿所로 쓰는 政策을 그대로 이어오고 山谷驗山에도 大槪 道路를 만들어 從前에 比하여 交通이 훨씬 便利하여졌다.
建國 初期로부터 新羅와 後百濟의 遺民이 恒常 反抗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음으로 文宗은 外方에서 反抗하는 思想이 있는 有力한 鄕吏의 子弟를 서울에 와서 머물게 하니 이것을 其人이라 하고 其人制가 생긴 以後로 外方의 人心이 漸次 安定되고 이 其人制는 後日의 京主人의 根源이 된 것이다.
文宗의 世는 高麗 一代를 通하여 가장 좋은 太平時節을 이루었고 高麗도 三國時代의 王位 繼承의 좋은 法을 받아 幼君을 세우지 아니하고 王位를 아들에게만 傳함이 아니라 兄弟 相傳하는 뜻이 적지 아니하더니 宣宗이 그 아들 獻宗에게 王位를 傳하니 獻宗은 黃口 幼兒라 國政을 堪任할 能力이 없고 모든 行政權이 그 臣下의 손에 依하여 左右되니 王의 叔父 肅宗이 政府를 顚覆하고 王을 몰아내고 스스로 王이 되니 이것은 李朝때의 端宗 事變과 같은 것이다.
貨幣制度는 成宗이 처음으로 創設한 뒤로 잘 行치 못하였고 大賢國師 義天 같은 이도 鑄錢의 實行을 主張하니 肅宗이 王이 된 後로 이 政策을 强力히 推進하여 鑄錢官을 두고 鑄錢을 만들어 主要都市에서 쓰게 하니 이때의 錢面에는 海東通寶를 비롯하여 海東重寶 東國通寶 東國重寶 三韓通寶 三韓重寶等으로 쓰이었으며 또 一斤重의 銀으로 我國地形을 본뜬 甁을 만들어서 돈으로 쓰니 이 銀甁은 그 模樣을 좇아서 濶口라 하였으며 이 外에도 碎銀 小銀甁 같은 것도 쓰였다.
肅宗이 貨幣制度를 確立하려고 한 것은 當時 産業이 發達하여 國內에 物貨의 流通이 많을 뿐만 아니라 外國貿易이 또한 늘어가는 까닭이었다. 이때 高麗는 大陸勢力과 恒常 武力 交涉을 가지고 있으되 한 便으로 碧瀾(禮成江)나루를 通하여 宋나라와 黑水(지금의 北滿州) 日本 琉球(오끼나와 부근) 暹羅(타이랜드)等 여러 나라와 또 멀리는 大食國(中東地方)의 商人들과 平和로운 貿易을 繼續하였고 저쪽에서 들어오는 物件은 主로 비단, 冊, 文房具, 藥材, 香料, 茶, 玳瑁, 犀角 等이며 이쪽에서 나가는 것은 銅, 銀, 布木, 人蔘, 牛黃, 虎皮, 紙, 花紋席, 螺鈿, 磁器 等이었다. 高麗磁器는 天下의 絶品으로서, 또 高麗의 繭紙는 高麗 特産品으로써 當時 宋나라에서 大歡迎을 받았던 것이다.
西南海中에 있는 耽羅는 지금의 濟州道인데 古初에 兄弟 三人이 石穴中에서 살더니 그 後에 女子와 牛鳥와 各穀 種子를 실은 배가 海邊에 와서 닿음으로 三人이 女子를 分娶하고 姓은 各各 高 夫 良으로 定하고 農事지으니 人口가 次次 늘어가서 한 獨立國家가 되었고 三國時代에 비로소 百濟와 通하였다. 新羅統一 後로부터 高麗에 이르기까지 한 屬國으로 朝貢하고 있더니 肅宗은 이를 內地와 同一하게 만들고 高麗의 政治를 펴기 爲하여 國號를 廢하고 郡을 만드니 이때로부터 耽羅는 國家에서 보내는 官吏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人性이 强悍하고 從前의 王子 系統이 地方의 勢力을 가지고 있어 國家에 對하여 反亂이 자주 일어났다.
高麗初期로부터 國家의 運命을 豫言한 所謂 秘訣이 流行하였는데 그 秘訣에 木子가 得國하여 漢陽에 都한다는 말이 있었음으로 李氏 姓을 가진 者가 陰謀를 꾸미는 일이 種種있었다. 肅宗은 漢陽(지금의 서울)에 李本을 많이 심고 長成함을 기다려 尹瓘으로 하여금 斫伐케 하여 李氏의 王氣를 制壓한다고 한 일까지 있었으니 高麗의 政治는 秘訣의 힘의 作用이 적지 아니하였고 이 秘訣은 李朝의 鄭鑑錄과 같은 것으로서 當時 高麗의 民間에도 秘訣의 힘의 影響이 가장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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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敎와 佛敎의 文化
高麗 建國 以後에 儒敎가 들어와서 官家에서 세운 敎育機關에 依하여 相當한 發達을 이루고 이러한 官學外에 私學이 있어서 한때 크게 떨치었고 學生들은 官學보다도 私學에 가기를 좋아하였으며 따라서 官學에서보다 私學에서 더 많이 人才가 났다.
高麗時代의 黃金時代라고 稱하는 文宗때에는 有名한 私學이 十二個나 있어서 거기서 工夫하는 學徒들은 十二門徒라하고 그 中에서도 海東孔子라고 稱하는 崔沖의 門이 가장 이름이 높고 當時 國家의 드러난 人物은 大槪가 이 崔門 出身이었고 崔沖의 諡號가 文憲公임으로 文憲公徒라고 稱 하였다.
高麗는 佛敎로써 國敎를 삼고 政治制度 같은 것이 佛法에 因緣되지 아니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一般 風習에도 모두 佛敎의 精神이 들어 있었다.
高麗社會의 特殊한 風習으로는 燃燈會와 八關會가 있었으니 이는 國家祭典으로써 우리나라 古代社會에서 널리 行하여진 迎鼓 東盟 舞天 等의 風俗이 佛敎의 影響을 받아서 얼마쯤 變化하여진 것이다. 燃燈은 佛을 섬기는 것이오 八關은 天神을 비롯하여 自然神을 섬기는 것이니 둘 다 燈불을 燦爛히 켜고 온갖 飮食을 베풀며 그 사이에 춤추고 노래하여 全國民이 함께 즐기고 同時에 天地神明을 즐겁게 하여 豊年이 들고 天下가 和平하기를 빌고 感謝하는 것이었다.
成宗때에는 僧 三十餘名을 宋나라 抗州에 보내어 그 곳 永明寺 智賢禪師에게 禪宗의 敎理를 배워 오고 그 外에도 佛法을 닦으러 大陸에 건너가는 僧이 數없이 많았다. 그 中에서도 高麗 佛敎界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大賢國師 義天이다. 義天은 文宗의 넷째 아들로써 十一歲에 出家하여 僧이 되고 後에 宋나라에 건너가서 佛經 千卷을 求해 오고 또다시 宋나라와 遼나라(契丹)와 日本에 사람을 보내어 四千卷을 求해와서 興王寺에 敎藏都監을 두고 佛經을 박아내니 一千十部 四千七百四十卷이며 이를 興王寺版 大藏經 또는 義天의 續藏經이라 한다.
이보다 앞서 成宗때에 佛法의 힘으로 契丹의 軍士를 물리치려 하여 佛經 版刻을 始作하여 大藏經 一千七十六部 五千四百八十卷을 박아내고 그 後 文宗때에 빠진 佛經 一千卷을 박아내고 여기에 興王寺版을 合치면 그 當時의 世界에서 가장 完備한 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國寶가 後日 蒙古亂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高宗이 다시 發願하여 十六年동안의 努力으로 이를 새로 만드니 이것이 지금 慶尙道 海印寺에 있는 有名한 八萬大藏經이다.
佛敎가 퍼짐과 함께 거기에 따르는 美術工藝도 크게 發達하여 我國史上 美術工藝의 黃金時代를 이루었고, 다만 三國時代는 人性이 渾厚함으로 모든 製品이 雄大한 氣象이 나타나고 있음에 比하여 高麗時代의 人性은 渾厚한 風이 적고 오직 眞實하였음으로 모든 製品에 優雅한 맛은 有餘하나 雄大한 氣象은 적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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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關係
이때 中國大陸에는 宋나라가 있었고 滿洲에는 契丹이 있어서 서로 다투고 있었다. 原來 我國은 滿洲의 背後에 있는 强國임으로 滿洲에 터를 잡고 있는 나라가 中國大陸과 다투고자하면 먼저 背後의 危險을 調整하지 아니하고는 中國 方面으로 全力할 수 없는 것임으로 三國時代 以來로 中國方面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我國의 兵을 받음이 通例이었다. 契丹이 渤海를 滅한 後에 鴨綠江 左右의 地에는 女眞族이 살았음으로 契丹과 我國은 直接 부딪히는 일이 없고 또 宋나라가 契丹을 칠 때에 我國에 援兵을 請하였으되 我國에서는 섣불리 이에 應하지 아니하였음으로 契丹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關涉이 없었다. 그러나 契丹은 어느 때든지 我國을 制壓치 아니할 수 없는 處地였음으로 成宗 十二年에 (三千三百二十六年) 空然한 트집을 잡아 大軍을 보내어 北邊에 쳐들어 왔다.
이때 高麗는 三韓統一後 近 六十年間 兵革을 알지 못하여 人心이 解弛한 터이라 契丹 兵이 들어옴을 보고 政府 高官中에는 北邊의 땅을 割讓하고 和親하자는 議論까지 있었다. 이때 徐熙는 割地論을 크게 反對하여 말하되 우리나라는 東方의 大國이오 또 契丹을 막을만한 힘도 있는데 땅을 버려서 和親함은 國家의 恥辱이오 더욱이 高句麗의 故地를 收復하려는 우리나라로서 어찌 輕率히 割地論을 말하랴 一戰한 後에 모든 일을 處理하여도 늦지 아니하다고 하여 스스로 軍士를 거느리고 나가 싸워서 敵의 氣勢를 꺾어놓고 契丹將帥 蕭遜寧을 찾아가서 저들이 까닭 없이 事端을 일으켜 이웃나라를 侵犯함을 詰難하였다. 蕭遜寧은 高麗는 新羅를 물려받은 나라이니 高句麗의 옛 땅은 全部 契丹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徐熙는 우리나라는 高句麗의 復興임으로 國號를 高麗라 한 것이니 땅의 境界를 말하면 契丹은 本是 高句麗 땅이니 우리가 차지해야 할 것이라고 抗辯하였다. 蕭遜寧은 그러면 高麗는 무슨 까닭으로 가까운 契丹과 사귀지 아니하고 멀리 宋나라와 親하냐 하니 이것은 우리나라와 宋나라의 關係를 끊고 自己 나라와는 親善하여 後顧의 걱정을 없애려는 心算이다. 徐熙는 우리도 契丹과 사귀고자하나 中間에 女眞의 땅이 가로 놓여 있어서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니 鴨綠江 以南의 땅을 우리에게 달라하여 同意를 얻고 서로 和親을 맺고 契丹軍이 물러간 뒤에 翌年부터 軍士를 내어 郭州 龜州등 여러 城을 쌓으니 이것이 이른바 江東六城의 基礎가 된 것이다. 그러나 契丹은 이번 和親으로써 滿足치 아니하고 機會만 있으면 다시 高麗를 侵犯하려 하던 次에 마침 高麗에 內亂이 있어서 康兆가 穆宗을 害하고 顯宗을 세우니 契丹이 康兆의 罪를 묻는다 憑藉하고 三十萬의 軍士로 쳐들어 왔다. 이때 臣下들 中에 和親하자고 主張하는 者가 있었으나 姜邯贊이 이를 反對하고 顯宗 王을 羅州로 避難하게 하고 楊規로 하여금 契丹軍을 맞아 싸우니 契丹軍은 掠奪과 暴虐을 마음껏 하다가 마침내 헛되이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우리나라의 貴重한 文獻이 많이 불타버렸으니 우리나라에도 옛날부터 古記三韓, 古記高句麗, 留記新羅 百濟의 史記 等 史籍이 적지 아니하였으나 모두 이와 같은 兵火에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三國時 以前의 일을 記錄한 史書는 三國史記 三國遺事 기타 中國 書籍에 散見하는 것뿐이다. 契丹은 高麗에 對한 野心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 後 八年만에 (顯宗 九年 檀紀 三千三百五十一年) 다시 앞서 쌓은 六城을 달라는 핑계로 十萬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이에 上元帥가 山골에 伏兵을 두어 契丹軍을 무찌르고, 敵兵이 길을 避하여 松都로 내려오는 것을 大洞江에서 襲擊하여 敵兵을 萬餘名을 죽이니 契丹軍의 氣勢가 한목 꺾이었다. 이듬해 二月에 敵軍의 大部隊가 龜州를 지나는 것을 姜邯贊이 東門 밖에서 맞아 싸워서 크게 깨트리고 逃走하는 敵을 追擊하여 이를 殲滅하니 以後로 契丹은 다시 高麗를 侵犯하는 일이 없었고 지금까지 우리 國民은 姜邯贊을 乙支文德과 함께 名將으로 竝稱하고 있는 것이다.
滿洲에서 契丹의 勢力이 衰弱해지고 鴨綠江 左右에 있는 女眞의 힘이 아직 크지 못한 틈을 타서 高麗는 以南의 地를 漸次 收復하고 德宗은 柳韶를 시켜서 女眞을 防備하기 爲한 城을 쌓으니 鴨綠江 於口인 義州郡 光城面 外洞으로부터 始作하여 咸鏡南道 定平郡의 鼻白山을 거쳐서 咸州郡 都連逋에 이르기까지 무릇 千餘里이니 이것을 千里長城이라 하며 十二年동안의 功力을 기우려 靖宗 十年에 完成하였다. (檀紀 三千三百二十四年)
成宗때에 地方으로 나누어 京畿의 外에 關內道-(楊州)- (廣州)- (海州), 中原道-(忠州)- (淸州), 河南道-(公州) 等, 江南道-(全州)等, 嶺南道-(尙州)等, 山南道-(晉州)等 嶺東道-(慶州)等, 海陽道-羅州 昇川 順川) 朔方道-(春州 溟州)等, 浿西道-(西京)等의 十道로 만들었으니 顯宗때에 이르러서 北邊이 아직 定치 못하였음으로 다시 地方의 區劃을 고쳐서 京畿의 外에 楊廣道-(지금의 京畿道의 一部와 忠淸南北道) 慶尙道 全羅道, 交州道-(지금의 江原道의 一部) 西海道-(지금의 黃海道)의 五道를 두고 北邊에는 東界와 北界를 두니 東界는 또한 東北面이라 하는데 지금의 江原道 北部와 咸鏡南道의 南部이오 北界는 또한 西北面이라 하는데 지금의 平安南北道의 大部分이다. 이와 같이 北邊을 西界로 定한 것은 이 地方이 契丹및 女眞과 相接하는 땅이오 또 앞으로 北進하려는 計劃이 있기 때문에 暫定的으로 定해 놓은 行政區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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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成宗의 治積
六世 成宗에 이르러 高麗一代의 모든 制度가 비로소 完備되니 太祖가 三國 統一後 四十餘年의 오랜 歲月을 지나서 겨우 法典이 完成되고, 또 高句麗의 故地를 收復할 北方 經營도 進捗되지 못함은 遲遲함이 없지 아니하나 이렇게 遲遲함은 新羅와 後百濟의 遺民이 不斷히 反抗運動을 일으켜서 國內가 安定치 못함으로 因함이라고 볼 것이다.
成宗은 佛敎의 外에 特히 儒敎를 崇尙하여 이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根本을 삼고 外方의 優秀한 子弟를 뽑아 國子監(지금의 大學)에서 공부하게 하고 그 中에서 뛰어난 者를 골라서 다시 宋나라에 遊學시켰다.
그리고 外方의 十二牧에 經學博士 醫學搏士를 보내어 敎育과 醫療를 맡아보게 하였다.
또 經濟政策에 힘써서 農事철의 賦役을 禁하고 兵器를 걷어서 農具를 만들어 農業을 獎勵하니 지금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풍장 같은 農樂이 이時代에 처음으로 생긴 것이라 하며 免災法을 磨練하여 災難을 입은 者에게 稅納과 賦役을 減하는 準例를 세우고 備荒策으로 州와 府에 義倉을 두어 穀食을 쌓고 兩京과 十二牧에 常平倉을 두어 穀食과 布木을 貯蓄하였다가 農事의 形便을 따라서 物價가 높으면 常平倉의 物品을 歇하게 放賣하여 物價를 내리게 하고 物價가 너무 떨어지면 常平倉에서 비싸게 買入하여 物價의 調節을 圖謀하여 國民의 生活을 安定시켰다.
또 特異한 制度로 寶라는 것이 있으니 寶는 지금의 契의 起源으로써 一定한 財團을 가지고 거기서 생기는 利息으로 目的하는 事業을 經營하는 것이니 弊難에 빠진 사람들을 救恤하기 爲한 濟危寶, 敎育을 目的으로 하는 學寶 같은 것이 그 것이오 이 機關은 한便으로는 事業 經營體가 되고 한便으로는 庶民金融 機關이 되어 國民의 經濟 生活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이때의 物品 買賣에는 貨幣를 쓰지 아니하고 麻布와 米穀으로 貨幣의 代身으로 썼다. 그러나 社會가 發達하고 人口가 늘어서 買賣는 漸次 많아지는데 麻布는 重量이 무겁고 濕氣와 煙氣에 品質이 傷하기 쉽고 또 鼠耗도 적지 아니하여 큰 不便을 느끼게 되었다. 外國과의 通商貿易에는 布貨 以外에 地銀을 쓰고 一部에는 宋錢이 들어와서 流通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極히 小數에 不過하였다.
이에 成宗은 비로소 銅을 原料로 하여 錢貨를 만드니 이것이 我國 鑄錢의 始이다. (檀紀 三千三百二十九年 成宗 十五年) 그러나 貨幣는 반드시 市場을 通하여 流通되는 것이오 萬一 市場이 없으면 그것으로써 生活 必需品을 買得하기에 如干 不便이 아니라 이 時代는 市場 數가 적고 또 民間에서 錢貨를 信用치 않는 關係로 널리 쓰이지 못하고 如前히 布貨로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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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地制度
土地制度는 太祖가 新羅의 舊制를 襲用할 것을 原則으로 定하고 萬事 草創中에 있어 그 細則을 定치 못하더니 五世 景宗때에 이르러 비로소 全國의 土地를 모두 公田으로 하고 均田制에 依하여 授田收田의 法을 確立하였다. 그 法은 朝廷의 文武百官으로부터 府兵閑人(官吏에서 물러난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身分과 職位에 따라서 農事지을 땅과 柴草(땔감)로 쓸 土地를 아울러 주니 이를 田柴科라고 한다. 田柴地는 子孫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오 그 받은 사람이 死亡하거나 退職하면 國家에 返還하는 것이 原則이며 府兵은 二十歲에 田을 받고 六十歲에 이르러 도로 바치는 法이었다. 一般 田柴科外에 功蔭田柴科란 것이 있어서 國家에 功勳을 세운 사람이나 또는 그 子孫에게 주어서 世襲으로 認定하였으며 또 그밖에 公廨田(官廳의 經費를 쓰기 爲한 것) 寺院田(寺院의 經費를 爲하여 주는 것) 內桂田(王室의 財源으로 쓰는 土地) 祿科田(官吏들의 生活을 돕기 爲하여 주는 것)等이 있었다. 이리하여 土地는 모두 國有로하고 租權을 가지고 있어 土地의 買賣를 禁하고 그 兼倂의 弊를 防止하였다. 農民은 十六歲가 되면 반드시 土地를 받도록 되어 있으므로 子孫이 出生하는 때 그 出生을 登錄하여야 그 地를 받는 關係로 戶籍에 빠지는 사람이 없고 官吏가 罪를 지으면 免職이 되는 同時에 그 받은 바의 土地를 빼앗겨서 生活의 길이 끊어지게 됨으로 官吏들이 모두 일에 充實하고 淸廉하였으니 이것이 高麗初期 國勢가 隆盛한 所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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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階級
高麗는 新羅의 社稷을 물려받음과 함께 新羅의 貴族들도 이를 받아들여서 王代系統의 사람들과 함께 高麗의 特權階級을 이루었다. 그 後 渤海가 亡하여 그 王族 貴族이 많이 高麗에 들어와서 이에 合치고 또 佛敎로써 國敎를 삼은 關係로 僧侶들도 이 階級에 參與하게 되었다. 이러한 特權階級밑에 庶民階級이 있어서 産業을 맡아보았으며 다시 밑으로 여러 가지의 賤人 階級이 있어서 그 中에서도 公私奴婢의 奴隸階級은 온갖 虐待를 받고 한 낟 財物로서 買賣되는 風習이 있었으며 또 그들의 子孫은 代代로 奴隸가 되는 것이다. 庶民階級이라 함은 農民, 商人, 工匠, 兵卒 等으로서 그 中에서도 農民은 가장 많이 生産勞動에 從事하고 또 賦役과 兵役을 맡아 하였다. 이들 中에는 契丹 女眞 日本 等의 歸化民이 많았다.
高麗의 階級制度는 대단히 嚴格하여 人世의 戶籍을 考覽하여 賤類에 牽連이 있으면 그 사람을 官吏로 쓰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建國 初에 功臣들은 新羅와 後百濟의 사람들을 잡아다가 마음대로 奴隸를 삼으니 그들의 不平과 怨望이 적지 아니함으로 光宗은 奴婢按驗法을 만들어서 奴婢의 文書를 새로이 審査하고 奴婢와 奴主間의 是非를 裁判하여 抑鬱한 奴婢들은 解放시키더니 이번에는 奴主들이 不平이 일어나서 이미 贖良한 사람들은 奴主의 所請에 따라서 다시 奴婢를 만든 일도 있었다.
高麗는 佛敎와 함께 儒敎도 發達하기 始作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儒學은 經書를 줄기로 하여 儒學의 根本思想을 工夫하는 일이 적고 科擧에 必要한 科目에 置中하는 傾向이 있었다. 科擧法은 光宗때에 中國사람 雙冀가 歸化하고 그의 建議를 따라서 비롯하였는데 이때의 科擧 三은, 一은 進士科이니 文藝를 主로 하여 試驗함으로 製述科라고도 하며, 二는 明經科이니 經義를 主로 하여 試驗하며 三은 醫卜科이니 醫學 天文 陰陽 地理를 試驗하더니 그 後에 明法科 進士 明經等科에 合格한 사람들은 貴族階級에 參與하게 되고 醫卜 法 等科는 國家機關의 事務와 技術을 맡아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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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政治
高麗太祖의 政治는 新羅末葉의 弊害에 鑑하여 여러 가지의 改革과 獨創이 있었다.
一. 新羅末에 土地制度가 紊亂하여 처음에 租稅는 土地收穫量의 十分之一을 받던 것을 十分之二三을 받은 까닭에 百姓의 生活이 困難하고 盜賊이 많이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었음으로 高麗 太祖는 新羅의 丁田制를 襲用하되 租稅는 十分之一로 定하고 建國後 三年동안은 全部 免稅하였다.
二. 新羅 統一後에 唐나라 文化가 들어옴으로부터 國民이 自主精神을 잃고 事大思想에 醉하는 傾向이 一世를 風靡하였음으로 高麗 太祖는 中國과 我國은 人性이 各異하고 風土가 不同하니 모든 制度와 文物은 반드시 中國과 同一히 할 必要가 없다하여 事大의 風을 警戒하였다.
三. 太祖는 同族인 渤海가 契丹에게 亡한 뒤로 契丹을 無道한 나라라 하여 몹시 미워하고 契丹이 使臣을 보내어 和親할 것을 請하되 듣지 아니하고 北方 經營에 專念하였다.
四. 從來 中國에는 年號制度가 있어 自主獨立國인 天子는 年號를 쓸 수 있으되 屬國은 쓸 수 없었는데 三國時代에 가장 强盛하던 時代에는 우리나라도 中國과 對等한 天子國이라 하여 年號를 썼으니 高句麗 廣開土王의 永樂, 新羅 法興王의 建元같은 것이 그 것이다. 新羅 統一後에 唐나라에 附麗하여 唐나라 年號를 쓰더니 太祖 建國後에 우리나라도 完全한 自主獨立國家라 하여 年號를 세워 天授라 하였다.
五. 三國時代以前에는 貴族만 姓이 있고 一般 庶民은 名만 있고 姓이 없더니 太祖 建國後에 全國民에게 一齊히 姓을 領賜하고 오직 新羅와 後百濟의 遺民이 高麗에 反抗하는 者에게 馬, 牛, 豚, 象等의 獸畜名을 賜하여 一般 國民과 暸然하게 區別하였으니 後日 李朝時代의 宰相 尙震은 象姓의 昇格이라 한다.
六. 太祖는 僧 道詵을 先生으로 모시고 그의 말에 依하여 各地에 寺刹을 創建하고 宮闕을 지으니 道詵은 唐僧 一行의 風水學說을 배워서 我國 風水地理學의 元祖가 된 者로써 世人이 龍子라 稱하고 이때로부터 明堂 禍福의 思想이 國民의 머리 속에 뿌리박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高麗 太祖 政治는 我國史上 重要한 一時期를 劃하였고 三國統一後 오랜 동안의 政治腐敗期를 지낸 까닭에 從前의 濃厚한 風俗은 많이 없어졌으나 高麗太祖의 모든 施策이 適宜함을 얻었으므로 國民의 氣風이 眞實하여 國家에 戰亂이 있는 때에 貴族의 子弟가 먼저 槍劍을 집고 先陣에 나섰으며 官吏들이 그 地位를 自己보다 年長하고 또 賢能한 者에게 辭讓하는 일이 있으니 太祖가 崔凝으로써 廣評侍郞을 삼으니 凝이 말하기를 臣의 同僚 尹逢이 臣보다 十年을 年長하니 請컨대 먼저 除授하소서 하고 辭讓하니 太祖가 大喜하여 그 禮讓함을 稱讚한 것이 그 一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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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建國
高麗太祖는 이듬해 松嶽으로 都邑을 옮기고 新羅와 親善을 圖謀하고 後百濟를 制壓하려는 政策을 쓰니 新羅도 後百濟에게 부대끼던 터임으로 高麗와 親하려 하였다. 後百濟 王 甄萱은 이를 보고 秘密히 軍士를 거느리고 新羅에 쳐들어갔다. 新羅 景哀王은 마침 鮑石亭에 나가서 流觴曲水 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後百濟의 軍士를 만나 王과 王妃와 大臣들이 모두 慘酷한 變을 當하였다. 甄萱은 王을 해치고 敬順王을 세우고 百姓을 捕虜하여 돌아가니 新羅王은 나아가 싸울 힘이 없고 들어와 지킬 힘이 없으므로 臣下들과 議論하고 高麗에 降服하려하니 太子가 慟哭하면서 어찌 千年祖國을 한번 싸우지도 아니하고 남에게 주리오 하나 王은 空然히 싸우기만 하면 불쌍한 百姓의 生命만을 없앤다 하고 降服하기로 決定하니 太子는 王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皆骨山(金剛山)에 들어가서 麻衣를 입고 一生을 마치니 이가 곧 麻衣太子이다. (檀紀 三千二百六十八年)
高麗가 新羅를 合倂하던 해에 後百濟에서도 變亂이 일어났다. 甄萱은 네째 아들 金剛을 사랑하여 이를 太子로 세우려 하였음으로 그 兄들이 不平을 품고 그 父王을 金山寺에 가두고 金剛을 죽인 後에 맏아들 神劍이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이에 甄萱은 憤함을 이기지 못하고 高麗로 亡命하여 神劍을 치기를 請하니 高麗太祖는 甄萱을 厚待하여 後百濟의 人心을 分散시키고 大軍을 거느리고 後百濟를 쳐서 滅하고 이에 半島를 統一하니 그 歷年數는 新羅는 五十六王 九百九十二年이오 後百濟는 二王 四十餘年이었다.
처음에 新羅 統一後에 佛敎와 儒敎가 아울러 行하여 佛敎에는 元曉 義湘 같은 名僧이 나고 元曉가 지은 十門和諍論과 大乘起信論疏는 佛敎의 敎理에 새로운 進步를 가져오게 하였고 僧 慧超는 唐나라에 건너갔다가 다시 길을 떠나 印度와 西域의 여러 나라를 遍踏하고 돌아왔는데 그가 지은 往五天竺國傳은 八世紀 무렵의 印度 事情을 傳하는 唯一한 冊으로 世界의 보배가 되어있고 또 慧超 以外에도 新羅의 중으로써 印度를 찾아간 사람이 七名이나 있다고 한다. 儒敎에는 薛聰以外에 金大問 崔致遠 같은 名儒가 났는데 金大問은 國家學을 硏究하여 極盡히 歡待하였고, 渤海의 옛 南京을 收復하기 始作하였다. 그러나 渤海가 亡한 뒤로 滿洲의 大天地는 다시 우리 民族의 땅이 되지 못하고 契丹族과 女眞族의 손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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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의 衰亡
新羅의 統一한 後에는 統一하기 以前의 雄大한 氣魄과 善美한 風習이 漸漸 사라지기 始作하니 이것이 사라짐이 곳 衰亡할 前兆이다. 그 理由는
一. 統一以前에는 王位를 서로 賢者에게 辭讓하더니 統一後에는 王位 다툼이 그치지 아니하여 宮中에 殺伐과 流血의 慘劇이 연달아 일어났다,
二. 統一以前에는 政治 指導層이 淸白하고 國事에 忠誠하여 民衆의 模範이 되더니 統一後에는 貴族層이 腐敗하여 日夜로 遊宴을 일삼고 京中에는 歌舞의 音樂소리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三. 統一以前에는 年幼한 임금이 거의 없더니 統一後에는 自己의 血統에게 富貴와 榮華를 주기 爲하여 幼兒에게 王位를 傳하여 王位爭奪의 端緖를 열었다.
四. 統一以前에는 花郞의 무리와 같은 少年 愛國者가 生命을 아끼지 아니하고 나라를 爲하여 일하더니 統一後에는 國民이 모두 爲政 階級을 미워하여 다시 花郞精神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더욱이 眞聖女王이 卽位한 後로는 奸臣들이 權力을 잡고 政治를 어지럽혀서 百姓의 怨聲이 더욱 높아가고 또 凶年이 겹 들어서 各地에 盜賊이 蜂起하였다.
이때 梁吉이 北原에서 무리를 모아 가지고 弓裔로 하여금 北方의 여러 고을을 빼앗고 甄萱이 完山에서 무리를 모으고 百濟 義慈王을 爲하여 怨讐를 갚는다하고 後百濟라는 나라를 세우고 西南方의 여러 고을을 빼앗았다. 얼마 지난 後에 弓裔는 스스로 임금이 되어 松嶽郡에 都邑하고 高句麗의 옛 나라를 恢復한다하고 國號를 後高句麗라 하니 이것은 모두 百濟와 高句麗의 遺民들이 그 祖國이 亡한지 이미 數百年에 아직도 祖國光復의 뜻이 머리속에 깊이 뿌리박힌 것을 利用하여 新羅에 反抗케 하고 그 勢力을 擴張하려 함이다. 弓裔는 다시 鐵原으로 옮기고 國號를 摩震이라 하다가 또 泰封이라고 했다. 甄萱은 都邑을 武州로 옮기고 中國의 여러 나라와 貿易하여 힘을 기르는 한편 차츰 東으로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한동안 半島 안에는 三國이 다시 벌어지니 이를 後三國이라 한다.
泰封 王 弓裔는 松嶽사람 王建을 시켜서 海路로 羅州를 쳐서 빼앗고 後百濟와 中國과의 交涉하는 交通을 끊고 固有한 航海 勢力을 發揮하여 西海의 海賊을 막으니 이때로부터 王建의 名聲이 一國에 떨쳤으니 泰封王의 性質이 暴惡함으로 部下 諸將이 王을 쫓아내고 王建을 推戴하여 임금을 삼으니 이가 곧 高麗始祖이다. (檀紀 三千二百五十一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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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上發展
新羅는 北쪽의 一面이 大陸에 接할뿐이오 三面이 바다로 둘려있는 半島國이다. 國民들은 海上에서의 活動이 자못 活潑하여 數많은 遊學生과 商人들이 唐나라에 來往하였고 따라서 唐나라의 海岸地方에는 新羅사람들이 僑居하는 新羅坊이 處處에 생겼다. 이러한 事實은 統一以後 더욱 顯著하여 그 中에서 한 例를 들면 지금의 山東半島의 東南에 있는 石城灣 附近인 登州 文登縣 淸寧鄕 赤山은 新羅에서 唐나라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그 곳에서 新羅사람들이 세운 法花院이라는 寺刹은 쌀 百石지기의 庄田이 있었으며 說法이 열릴 때에는 新羅사람들의 男女 數百名이 모였다. 當時는 日本사람들이 唐나라에 來往하는 것도 新羅사람들의 힘을 많이 빌렸으니 神文王때에는 唐나라에 가는 日本사람들의 學生과 求法僧이 많이 新羅의 배를 타고 다녔으며 景德王때에는 日本에 가는 唐나라 使臣이 新羅의 배를 利用하였고 惠泰王때에는 唐나라에 가있는 日本사람들이 그 本國과의 通信을 新羅의 船便으로 하였다. 그러나 新羅의 末葉에 이르러 國勢가 떨치지 못하고 때마침 唐나라도 衰弱해지니 黃海위에 海賊이 들끓었고 이는 數百年동안 平和롭게 繼續되던 兩國사이의 交通에 큰 威脅이 될뿐더러 甚至於는 海賊의 떼가 新羅사람들을 잡아다가 奴婢로 팔아먹는 일까지도 있었다. 이때 唐나라에 벼슬살이하던 張保皐가 이러한 事實을 알고 新羅로 돌아와서 王에게 아뢰고 스스로 淸海鎭(지금의 全羅南道 莞島) 大使가되어 軍士 一萬名으로 兩海의 길목을 지키는 同時 猛烈한 海上活動을 始作하여 黃海의 制海權을 掌握하고 唐나라와 日本에 貿易하여 다시금 新羅의 名聲이 天下에 떨쳤다. 그러나 新羅 朝廷의 王位 다툼의 餘波가 여기까지 미쳐와서 張保皐는 임금이 보낸 刺客에게 暗殺을 當하고 빛나던 淸海鎭의 幕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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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의 建國
高句麗가 亡하고 釰弁令等의 光復運動이 失敗에 돌아감에 그 百姓들이 或은 唐나라에 强制로 옮겨지고 或은 新羅로 亡入하기도 하였으나 또한 많은 사람들이 北方으로 流入하였다. 이때 滿洲 北部에는 靺鞨族이 살고 七部로 나뉘어 있었으나 그 中에 가장 드러난 것은 松花江 기슭에 粟末靺鞨과 黑龍江가에 사는 黑水靺鞨의 두 部族이 있고 高句麗 當時에는 이들 靺鞨은 高句麗의 屬國이 되어 있었으나 高句麗의 平壤城이 陷落된 뒤에 北方의 모든 城이 唐나라에 占領된 것이 아니어서 靺鞨사람들이 그러한 城에 雄據하고 高句麗 遺民들이 이에 合勢하였다. 그러한지 三十年 동안에 高句麗 遺將 大祚榮은 軍士를 거느리고 여러 番 唐兵과 싸워서 크게 이기니 唐兵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고 高句麗가 亡한지 三十一年만에 새 나라를 세우고 國號를 震國이라 하니, 그 後에 渤海로 고치니 이가 곧 渤海 太祖이다. (檀紀 三千三十二年)
渤海는 西로 唐나라와 西域의 文化를 받아들이고 東으로 日本과 貿易하여 海賊을 衝動시켜서 唐나라의 山東半島를 친일도 있었다. 처음에 中京 顯德府에 都邑하더니 後世에 上京 龍泉府로 옮기니 이는 吉林城 寧安縣에 있는 東京城이라 하며 지금도 그때의 그 城자리가 남아 있어서 그 周圍가 거의 四十里나 된다.
이때의 疆土는 北은 黑龍江에 이르고 西로 遼海에 미치고 南은 大洞江과 元山 等地로써 新羅와 이웃하고 東은 大海에 닿으니 中國사람들이 海東盛國이라고 稱하였으며 渤海의 建國과 新羅의 統一期가 거의 年代를 같이 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은 新羅를 南國 또는 南朝라 하고 渤海를 北國 또는 北朝라 하여 이 時代를 우리나라의 南北朝時代라고 한다.
渤海는 滿洲의 넓은 벌판을 차지하고 高句麗의 傳統을 물려받으며 盛唐의 文化를 받아들여서 産業과 文化의 發達이 볼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渤海에는 扶餘族과 靺鞨族이 합쳐서 나라를 세웠으되 어찌한 때문인지 新羅와는 交涉이 거의 없었고 또 靺鞨族은 그 뒤에 오래 남아서 女眞族이 되었으되 扶餘族은 全然 滿洲에 남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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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의 文化와 經濟
三國에는 國文이 없고 中國의 漢文을 輸入하여 썼으므로 一部 貴族階級은 그것을 利用할 수 있었으나 一般百姓은 아는 者가 極히 적었고 漢文字가 國語에 맞지 않음으로 일을 記錄할 때에는 漢字의 音과 訓을 빌어서 「밝은달」을 「明期月」이라는 等으로 썼으니 新羅의 鄕歌가 그 例이다. 新羅가 三韓統一뒤에 五六百年의 戰禍로부터 비로소 解放되어 唐나라로 들어가는 遊學生이 해마다 늘어가고 盛唐의 燦爛한 文物을 부지런히 받아들이는 同時에 漢文 熱도 相當히 높아졌다. 그리하여 漢文學者 薛聰은 吏讀文을 만들어 經書를 解釋하여 生徒를 가르치고 從前에는 地名 같은 것이 모두 우리나라 말로 되어 있더니, 新羅 景德王때에 모든 地名을 中國式으로 고치니 「沙熱伊 고을」을 「淸風縣」으로 고침과 같음이오 이 무렵을 前後하여 人名도 차츰 中國式 姓名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우리의 옛 모습이 漸次 사라지고 中國을 崇拜하는 風習이 생겨서 事大思想이 國民의 머리속에 뿌리를 박게 되었으니 이것이 我國 國民思想의 一大 轉換期이다.
佛敎는 我國에 들어온 後 建築, 彫刻, 冶金, 繪畵 等 技術을 傳來 하여 佛敎 廣布와 함께 널리 普及되었으나 끊임없는 戰亂으로 因하여 그 發生하려던 싹은 여지없이 짓밟히더니 新羅의 統一期를 前後하여 힘있게 發展하였으니 지금 남아있는 皇龍寺의 九層塔, 瞻星臺, 佛國寺, 石窟庵 같은 것이 모두 그 時代의 만든 遺物이다.
土地制度는 三國 鼎立 當時에는 遺族들이 大 面積을 차지하고 奴隸를 부려서 耕作하고 一般農民은 各其 一定한 面積을 가지고 農事지으며 이때는 地가 많고 人口가 比較的 적고 遊食民을 驅하여 强制로 荒地를 開拓하고 農業에 從事케 하였다.
新羅 統一後에 社會가 安定되었으므로 비로소 唐나라의 均田制를 배워서 丁田制를 만들고 土地는 모두 國有로 하고 十五歲부터 壯丁이라 하여 國家로부터 分配받고 六十歲에 國家에 返還하며 功臣遺族들에게 賜田을 주어 土地의 收稅權을 가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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