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歷史'에 해당되는 글 110건
- 2013.10.25 계단관계 (삼화서당국사)
- 2013.10.25 성종의 치적 (삼화서당국사)
- 2013.10.25 토지제도 (삼화서당국사)
- 2013.10.25 사회계급 (삼화서당국사)
- 2013.10.25 고려정치 (삼화서당국사)
- 2013.10.25 고려건국 (삼화서당국사)
- 2013.10.19 신라의 쇠망 (삼화서당국사)
- 2013.10.19 해상발전 (삼화서당국사)
- 2013.10.19 발해의 건국 (삼화서당국사)
- 2013.10.19 삼국의 문화와 경제 (삼화서당국사)
- 2013.10.19 신라의 삼한통일 (삼화서당국사)
- 2013.10.19 삼국혼전 (삼화서당국사)
- 2013.10.19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 (삼화서당국사)
- 2013.10.19 삼국시대의 사회 (삼화서당국사)
- 2013.10.19 백제와 신라의 발전 (삼화서당국사)
계단(契丹)관계(關係)
이때 중국대륙(中國大陸)에는 송(宋)나라가 있었고 만주(滿洲)에는 계단(契丹)이 있어서 서로 다투고 있었다. 원래(原來) 아국(我國)은 만주(滿洲)의 배후(背後)에 있는 강국(强國)임으로 만주(滿洲)에 터를 잡고있는 나라가 중국대륙(中國大陸)과 다투고자하면 먼저 배후(背後)의 위험(危險)을 조정(調整)하지 아니하고는 중국(中國) 방면(方面)으로 전력(全力)할 수 없는 것임으로 삼국시대(三國時代) 이래(以來)로 중국(中國)방면(方面)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아국(我國)의 병(兵)을 받음이 통례(通例)이었다. 계단(契丹)이 발해(渤海)를 멸(滅)한 후(後)에 압록강(鴨綠江) 좌우(左右)의 지(地)에는 여진족(女眞族)이 살았음으로 계단(契丹)과 아국(我國)은 직접(直接) 부딪히는 일이 없고 또 송(宋)나라가 계단(契丹)을 칠 때에 아국(我國)에 원병(援兵)을 청(請)하였으되 아국(我國)에서는 섣불리 이에 응(應)하지 아니하였음으로 계단(契丹)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관섭(關涉)이 없었다. 그러나 계단(契丹)은 어느 때든지 아국(我國)을 제압(制壓)치 아니할 수 없는 처지(處地)였음으로 성종(成宗) 십이년(十二年)에 (三千三百二十六年) 공연(空然)한 트집을 잡아 대군(大軍)을 보내어 북변(北邊)에 쳐들어 왔다.
이때 고려(高麗)는 삼한통일(三韓統一)후(後) 근(近) 육십년간(六十年間) 병혁(兵革)을 알지 못하여 인심(人心)이 해이한 터이라 계단(契丹) 병(兵)이 들어옴을 보고 정부(政府) 고관중(高官中)에는 북변(北邊)의 땅을 할양(割讓)하고 화친(和親)하자는 의론(議論)까지 있었다. 이때 서희(徐熙)는 할지론(割地論)을 크게 반대(反對)하여 말하되 우리 나라는 동방(東方)의 대국(大國)이오 또 계단(契丹)을 막을만한 힘도 있는데 땅을 버려서 화친(和親)함은 국가(國家)의 치욕(恥辱)이오 더욱이 고구려(高句麗)의 고지(故地)를 수복(收復)하려는 우리 나라로서 어찌 경솔(輕率)히 할지론(割地論)을 말하랴 일전(一戰)한 후(後)에 모든 일을 처리(處理)하여도 늦지 아니하다고 하여 스스로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나가 싸워서 적(敵)의 기세(氣勢)를 꺾어놓고 계단(契丹)장수(將帥) 소손령(蕭遜寧)을 찾아가서 저들이 까닭 없이 사단(事端)을 일으켜 이웃나라를 침범(侵犯)함을 힐난(詰難)하였다. 소손령(蕭遜寧)은 고려(高麗)는 신라(新羅)를 물려받은 나라이니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은 전부(全部) 계단(契丹)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主張)하였다. 서희(徐熙)는 우리 나라는 고구려(高句麗)의 부흥(復興)임으로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 한 것이니 땅의 경계(境界)를 말하면 계단(契丹)은 본시(本是) 고구려(高句麗) 땅이니 우리가 차지해야 할 것이라고 항변(抗辯)하였다. 소손령(蕭遜寧)은 그러면 고려(高麗)는 무슨 까닭으로 가까운 계단(契丹)과 사귀지 아니하고 멀리 송(宋)나라와 친(親)하냐 하니 이것은 우리 나라와 송(宋)나라의 관계(關係)를 끊고 자기(自己) 나라와는 친선(親善)하여 후고(後顧)의 걱정을 없애려는 심산(心算)이다. 서희(徐熙)는 우리도 계단(契丹)과 사귀고자하나 중간(中間)에 여진(女眞)의 땅이 가로 놓여 있어서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니 압록강(鴨綠江) 이남(以南)의 땅을 우리에게 달라하여 동의(同意)를 얻고 서로 화친(和親)을 맺고 계단군(契丹軍)이 물러간 뒤에 익년(翌年)부터 군사를 내어 곽주(郭州) 구주(龜州)등 여러 성(城)을 쌓으니 이것이 이른바 강동문성(江東文城)의 기초(基礎)가 된 것이다. 그러나 계단(契丹)은 이번 화친(和親)으로써 만족(滿足)치 아니하고 기회(機會)만 있으면 다시 고려(高麗)를 침범(侵犯)하려 하던 차(次)에 마침 고려(高麗)에 내란(內亂)이 있어서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해(害)하고 현종(顯宗)을 세우니 계단(契丹)이 강조(康兆)의 죄(罪)를 묻는다 빙자(憑藉)하고 삼십만(三十萬)의 군사(軍士)로 쳐들어 왔다. 이때 신하(臣下)들 중에 화친(和親)하자고 주장(主張)하는 자(者)가 있었으나 강감찬(姜邯贊)이 이를 반대(反對)하고 현종(顯宗) 왕(王)을 나주(羅州)로 피난(避難)하게 하고 양규(楊規)로 하여금 계단군(契丹軍)을 맞아 싸우니 계단군(契丹軍)은 약탈(掠奪)과 포학(暴虐)을 마음껏 하다가 마침내 헛되이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우리 나라의 귀중(貴重)한 문헌(文獻)이 많이 불타버렸으니 우리 나라에도 옛날부터 고기삼한(古記三韓), 고기고구려(古記高句麗), 유기신라(留記新羅) 백제(百濟)의 사기(史記) 등(等) 사적(史籍)이 적지 아니하였으나 모두 이와 같은 병화(兵火)에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삼국시(三國時) 이전(以前)의 일을 기록(記錄)한 사서(史書)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기타 중국(中國) 서적(書籍)에 산견(散見)하는 것뿐이다. 계단(契丹)은 고려(高麗)에 대(對)한 야심(野心)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 후 팔년(八年)만에 (顯宗 九年 檀紀 三千三百五十一年) 다시 앞서 쌓은 육성(六城)을 달라는 핑계로 십만(十萬)군(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이에 상원수(上元帥)가 산(山)골에 복병(伏兵)을 두어 계단군(契丹軍)을 무찌르고, 적병(敵兵)이 길을 피(避)하여 송도(松都)로 내려오는 것을 대동강(大洞江)에서 습격(襲擊)하여 적병(敵兵)을 만여명(萬餘名)을 죽이니 계단군(契丹軍)의 기세(氣勢)가 한목 꺾이었다. 이듬해 이월(二月)에 적군(敵軍)의 대부대(大部隊)가 구주(龜州)를 지나는 것을 강감찬(姜邯贊)이 동문(東門) 밖에서 맞아 싸워서 크게 깨트리고 도주(逃走)하는 적(敵)을 추격(追擊)하여 이를 섬멸(殲滅)하니 이후(以後)로 계단(契丹)은 다시 고려(高麗)를 침범(侵犯)하는 일이 없었고 지금까지 우리 국민(國民)은 강감찬(姜邯贊)을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함께 명장(名將)으로 병칭(竝稱)하고 있는 것이다.
만주(滿洲)에서 계단(契丹)의 세력(勢力)이 쇠약(衰弱)해지고 압록강(鴨綠江) 좌우(左右)에 있는 여진(女眞)의 힘이 아직 크지 못한 틈을 타서 고려(高麗)는 이남(以南)의 지(地)를 점차(漸次) 수복(收復)하고 덕종(德宗)은 유소(柳韶)를 시켜서 여진(女眞)을 방비(防備)하기 위(爲)한 성(城)을 쌓으니 압록강(鴨綠江) 어구(於口)인 의주(義州)군 광성면(光城面) 외동(外洞)으로부터 시작(始作)하여 함경남도(咸鏡南道) 정평군(定平郡)의 비백산(鼻白山)을 거쳐서 함주군(咸州郡) 都連逋에 이르기까지 무릇 千餘里이니 이것을 천리장성(千里長城)이라 하며 십이년(十二年)동안의 공력(功力)을 기우려 정종(靖宗) 십년(十年)에 완성(完成)하였다. (檀紀 三千三百二十四年)
成宗때에 地方으로 나누어 경기(京畿)의 외(外)에 관내도(關內道)-양주(楊州)- 광주(廣州)- 해주(海州)), 중원도(中原道)-충주(忠州)- 청주(淸州)), 하남도(河南道)-공주 등(等), 강남도(江南道)-전주(全州)등(等), 영남도(嶺南道)-상주(尙州)등(等), 산남도(山南道)-진주(晉州)등(等) 영동도(嶺東道)-경주(慶州)등(等), 해양도(海陽道)-나주(羅州) 승천(昇川)(順川) 삭방도(朔方道)-춘주(春州) 명주(溟州)등(等), 패서도(浿西道)-서경(西京)등(等)의 십도(十道)로 만들었으니 현종(顯宗)때에 이르러서 북변(北邊)이 아직 정(定)치 못하였음으로 다시 지방(地方)의 구획(區劃)을 고쳐서 경기(京畿)의 외(外)에 양광도(楊廣道)-(지금의 경기도(京畿道)의 일부(一部)와 충청남북도(忠淸南北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교주도(交州道)-(지금의 강원도(江原道)의 일부(一部)) 서해도(西海道)-(지금의 황해도(黃海道)의 오도(五道)를 두고 북변(北邊)에는 동계(東界)와 북계(北界)를 두니 동계(東界)는 또한 동북면(東北面)이라 하는데 지금의 강원도(江原道) 북부(北部)와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남부(南部)이오 북계(北界)는 또한 서북면(西北面)이라 하는데 지금의 평안남북도(平安南北道)의 대부분(大部分)이다. 이와 같이 북변(北邊)을 서계(西界)로 정(定)한 것은 이 지방(地方)이 계단(契丹)및 여진(女眞)과 상접(相接)하는 땅이오 또 앞으로 북진(北進)하려는 계획(計劃)이 있기 때문에 잠정적(暫定的)으로 정(定)해 놓은 행정구역(行政區域)이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기의 융성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
유교와 불교의 문화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성종의 치적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토지제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사회계급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二. 성종(成宗)의 치적(治績)
육세(六世) 성종(成宗)에 이르러 고려(高麗)일대(一代)의 모든 제도(制度)가 비로소 완비(完備)되니 태조(太祖)가 삼국(三國) 통일후(統一後) 사십여년(四十餘年)의 오랜 세월(歲月)을 지나서 겨우 법전(法典)이 완성(完成)되고, 또 고구려(高句麗)의 고지(故地)를 수복(收復)할 북방(北方) 경영(經營)도 진보(進捗)되지 못함은 지지(遲遲)함이 없지 아니하나 이렇게 지지(遲遲)함은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의 유민(遺民)이 부단(不斷)히 반항운동(反抗運動)을 일으켜서 국내(國內)가 안정(安定)치 못함으로 인(因)함이라고 볼 것이다.
성종(成宗)은 불교(佛敎)의 외(外)에 특(特)히 유교(儒敎)를 숭상(崇尙)하여 이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根本)을 삼고 외방(外方)의 우수(優秀)한 자제(子弟)를 뽑아 국자감(國子監)(지금의 대학(大學))에서 공부하게 하고 그 중(中)에서 뛰어난 자(者)를 골라서 다시 송(宋)나라에 유학(遊學)시켰다.
그리고 외방(外方)의 십이목(十二牧)에 경학박사(經學博士) 의학박사(醫學搏士)를 보내어 교육(敎育)과 의료(醫療)를 맡아보게 하였다.
또 경제정책(經濟政策)에 힘써서 농사(農事)철의 부역(賦役)을 금(禁)하고 병기(兵器)를 걷어서 농구(農具)를 만들어 농업(農業)을 장려(獎勵)하니 지금 우리 나라에서 쓰이는 풍장 같은 농악(農樂)이 이 시대(時代)에 처음으로 생긴 것이라 하며 면재법(免災法)을 마련(磨練)하여 재난(災難)을 입은 자(者)에게 세납(稅納)과 부역(賦役)을 감(減)하는 준례(準例)를 세우고 비황책(備荒策)으로 주(州)와 부(府)에 의창(義倉)을 두어 곡식(穀食)을 쌓고 양경(兩京)과 십이목(十二牧)에 상평창(常平倉)을 두어 곡식(穀食)과 포목(布木)을 저축(貯蓄)하였다가 농사(農事)의 형편(形便)을 따라서 물가(物價)가 높으면 상평창(常平倉)의 물품(物品)을 헐(歇)하게 방매(放賣)하여 물가(物價)를 내리게 하고 물가(物價)가 너무 떨어지면 상평창(常平倉)에서 비싸게 매입(買入)하여 물가(物價)의 조절(調節)을 도모(圖謀)하여 국민(國民)의 생활(生活)을 안정(安定)시켰다.
또 특이(特異)한 제도(制度)로 보(寶)라는 것이 있으니 보(寶)는 지금의 계(契)의 기원(起源)으로써 일정(一定)한 재단(財團)을 가지고 거기서 생기는 이식(利息)으로 목적(目的)하는 사업(事業)을 경영(經營)하는 것이니 폐난(弊難)에 빠진 사람들을 구휼(救恤)하기 위한 제위보(濟危寶), 교육(敎育)을 목적(目的)으로 하는 학보(學寶) 같은 것이 그 것이오 이 기관(機關)은 한편으로는 사업(事業) 경영체(經營體)가 되고 한편으로는 서민금융(庶民金融) 기관(機關)이 되어 국민(國民)의 경제(經濟) 생활(生活)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이 때의 물품(物品) 매매(買賣)에는 화폐(貨幣)를 쓰지 아니하고 마포(麻布)와 미곡(米穀)으로 화폐(貨幣)의 대신(代身)으로 썼다. 그러나 사회(社會)가 발달(發達)하고 인구(人口)가 늘어서 매매(買賣)는 점차(漸次) 많아지는데 마포(麻布)는 중량(重量)이 무겁고 습기(濕氣)와 연기(煙氣)에 품질(品質)이 상(傷)하기 쉽고 또 서모(鼠耗)도 적지 아니하여 큰 불편(不便)을 느끼게 되었다. 외국(外國)과의 통상무역(通商貿易)에는 포화(布貨) 이외(以外)에 지은(地銀)을 쓰고 일부(一部)에는 송전(宋錢)이 들어와서 유통(流通)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극(極)히 소수(小數)에 불과(不過)하였다.
이에 성종(成宗)은 비로소 동(銅)을 원료(原料)로 하여 전화(錢貨)를 만드니 이것이 아국(我國) 주전(鑄錢)의 시(始)이다. (檀紀 三千三百二十九年 成宗 十五年) 그러나 貨幣는 반드시 시장(市場)을 통(通)하여 유통(流通)되는 것이오 만일 시장(市場)이 없으면 그것으로써 생활(生活) 필수품(必需品)을 매득(買得)하기에 여간(如干) 불편(不便)이 아니라 이 시대(時代)는 시장(市場) 수(數)가 적고 또 민간(民間)에서 전화(錢貨)를 신용(信用)치 않는 관계(關係)로 널리 쓰이지 못하고 여전(如前)히 포화(布貨)로 쓰게 되었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교와 불교의 문화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
계단관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토지제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사회계급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고려정치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一. 토지제도(土地制度)
토지제도(土地制度)는 태조(太祖)가 신라(新羅)의 구제(舊制)를 습용(襲用)할 것을 원칙(原則)으로 정(定)하고 만사 초창중(萬事 草創中)에 있어 그 세칙(細則)을 정(定)치 못하더니 오세(五世) 경종(景宗)때에 이르러 비로소 전국(全國)의 토지(土地)를 모두 공전(公田)으로 하고 균전제(均田制)에 의(依)하여 수전수전(授田收田)의 법(法)을 확립(確立)하였다. 그 법(法)은 조정(朝廷)의 문무백관(文武百官)으로부터 부병한인(府兵閑人)(관리(官吏)에서 물러난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신분(身分)과 직위(職位)에 따라서 농사(農事)지을 땅과 시초(柴草땔감)로 쓸 토지(土地)를 아울러 주니 이를 전시과(田柴科)라고 한다. 전시지(田柴地)는 자손(子孫)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오 그 받은 사람이 사망(死亡)하거나 퇴직(退職)하면 국가(國家)에 반환(返還)하는 것이 원칙(原則)이며 부병(府兵)은 이십(二十)세(歲)에 전(田)을 받고 육십세(六十歲)에 이르러 도로 바치는 법(法)이었다. 일반(一般) 전시과(田柴科)외(外)에 공음전시과(功蔭田柴科)란 것이 있어서 국가(國家)에 공훈(功勳)을 세운 사람이나 또는 그 자손(子孫)에게 주어서 세습(世襲)으로 인정(認定)하였으며 또 그밖에 공해전(公廨田) (관청(官廳)의 경비(經費)를 쓰기 위(爲)한 것) 사원전(寺院田)(사원(寺院)의 경비(經費)를 위(爲)하여 주는 것) 내계전(內桂田)(왕실(王室)의 재원(財源)으로 쓰는 토지) 녹과전(祿科田)(관리(官吏)들의 생활(生活)을 돕기 위(爲)하여 주는 것)등(等)이 있었다.) 이리하여 토지(土地)는 모두 국유(國有)로하고 조권(租權)을 가지고 있어 토지(土地)의 매매(買賣)를 금(禁)하고 그 겸병(兼倂)의 폐(弊)를 방지(防止)하였다. 농민(農民)은 십육세(十六歲)가 되면 반드시 토지(土地)를 받도록 되어 있으므로 자손(子孫)이 출생(出生)하는 때 그 출생(出生)을 등록(登錄)하여야 그 지(地)를 받는 관계(關係)로 호적(戶籍)에 빠지는 사람이 없고 관리(官吏)가 죄(罪)를 지으면 면직(免職)이 되는 동시(同時)에 그 받은 바의 토지(土地)를 빼앗겨서 생활(生活)의 길이 끊어지게 됨으로 관리(官吏)들이 모두 일에 충실(充實)하고 청렴(淸廉)하였으니 이것이 고려(高麗)초기(初期) 국세(國勢)가 융성(隆盛)한 소이(所以)이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단관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
성종의 치적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사회계급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고려정치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고려건국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사회계급(社會階級)
고려(高麗)는 신라(新羅)의 사직(社稷)을 물려받음과 함께 신라(新羅)의 귀족(貴族)들도 이를 받아드려서 왕대(王代)계통(系統)의 사람들과 함께 고려(高麗)의 특권계급(特權階級)을 이루었다. 그 후(後) 발해(渤海)가 망(亡)하여 그 왕족(王族) 귀족(貴族)이 많이 고려(高麗)에 들어와서 이에 합(合)치고 또 불교(佛敎)로써 국교(國敎)를 삼은 관계(關係)로 승려(僧侶)들도 이 계급(階級)에 참여(參與)하게 되었다. 이러한 특권계급(特權階級)밑에 서민계급(庶民階級)이 있어서 산업(産業)을 맡아보았으며 다시 밑으로 여러 가지의 천인(賤人) 계급(階級)이 있어서 그 중(中)에서도 공사(公私)노비(奴婢)의 노예계급(奴隸階級)은 온갖 학대(虐待)를 받고 한 낟 재물(財物)로서 매매(買賣)되는 풍습(風習)이 있었으며 또 그들의 자손(子孫)은 대대(代代)로 노예(奴隸)가 되는 것이다. 서민계급(庶民階級)이라 함은 농민(農民), 상인(商人), 공장(工匠), 병졸(兵卒) 등(等)으로서 그 중(中)에서도 농민(農民)은 가장 많이 생산(生産)노동(勞動)에 종사(從事)하고 또 부역(賦役)과 병역(兵役)을 맡아 하였다. 이들 중(中)에는 계단(契丹) 여진(女眞) 일본(日本) 등(等)의 귀화민(歸化民)이 많았다.
고려(高麗)의 계급제도(階級制度)는 대단히 엄격(嚴格)하여 인세(人世)의 호적(戶籍)을 고람(考覽)하여 천류(賤類)에 견연(牽連)이 있으면 그 사람을 관리(官吏)로 쓰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건국(建國) 초(初)에 공신(功臣)들은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의 사람들을 잡아다가 마음대로 노예(奴隸)를 삼으니 그들의 불평(不平)과 원망(怨望)이 적지 아니함으로 광종(光宗)은 노비안험법(奴婢按驗法)을 만들어서 노비(奴婢)의 문서(文書)를 새로이 심사(審査)하고 노비(奴婢)와 노주간(奴主間)의 시비(是非)를 재판(裁判)하여 억울(抑鬱)한 노비(奴婢)들은 해방(解放)시키더니 이번에는 노주(奴主)들이 불평(不平)이 일어나서 이미 속량(贖良)한 사람들은 노주(奴主)의 소청(所請)에 따라서 다시 노비(奴婢)를 만든 일도 있었다.
고려(高麗)는 불교(佛敎)와 함께 유교(儒敎)도 발달(發達)하기 시작(始作)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유학(儒學)은 경서(經書)를 줄기로 하여 유학(儒學)의 근본사상(根本思想)을 공부(工夫)하는 일이 적고 과거(科擧)에 필요(必要)한 과목(科目)에 치중(置中)하는 경향(傾向)이 있었다. 과거법(科擧法)은 광종(光宗)때에 중국(中國)사람 쌍기(雙冀)가 귀화(歸化)하고 그의 건의(建議)를 따라서 비롯하였는데 이때의 과거(科擧) 삼(三)은, 일(一)은 진사과(進士科)이니 문예(文藝)를 주(主)로 하여 시험(試驗)함으로 제술과(製述科)라고도 하며, 이(二)는 명경과(明經科)이니 경의(經義)를 주(主)로 하여 시험(試驗)하며 삼(三)은 의복과(醫卜科)이니 의학(醫學) 천문(天文) 음양(陰陽) 지리(地理)를 시험(試驗)하더니 그 후(後)에 명법과(明法科) 진사(進士) 명경(明經)등(等)과(科)에 합격(合格)한 사람들은 귀족계급(貴族階級)에 참여(參與)하게되고 의복(醫卜) 법(法) 등과(等科)는 국가기관(國家機關)의 사무(事務)와 기술(技術)을 맡아보는 것이었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종의 치적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
토지제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고려정치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고려건국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신라의 쇠망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고려(高麗)정치(政治)
고려(高麗)태조(太祖)의 정치(政治)는 신라(新羅)말엽(末葉)의 폐해(弊害)에 감(鑑)하여 여러 가지의 개혁(改革)과 독창(獨創)이 있었다.
一. 신라말(新羅末)에 토지제도(土地制度)가 문란(紊亂)하여 처음에 조세(租稅)는 토지수확량(土地收穫量)의 十分之一을 받던 것을 十分之二三을 받은 까닭에 백성(百姓)의 생활(生活)이 곤란(困難)하고 도적(盜賊)이 많이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었음으로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신라(新羅)의 정전제(丁田制)를 습용(襲用)하되 조세(租稅)는 十分之一로 정(定)하고 건국후(建國後) 三年동안은 전부(全部) 면세(免稅)하였다.
二.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당(唐)나라 문화(文化)가 들어옴으로부터 국민(國民)이 자주정신(自主精神)을 잃고 사대사상(事大思想)에 취(醉)하는 경향(傾向)이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하였음으로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중국(中國)과 아국(我國)은 인성(人性)이 각이(各異)하고 풍토(風土)가 부동(不同)하니 모든 제도(制度)와 문물(文物)은 반드시 중국(中國)과 동일(同一)히 할 필요(必要)가 없다하여 사대(事大)의 풍(風)을 경계(警戒)하였다.
三. 태조(太祖)는 동족(同族)인 발해(渤海)가 계단(契丹)에게 망(亡)한 뒤로 계단(契丹)을 무도(無道)한 나라라 하여 몹시 미워하고 계단(契丹)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화친(和親)할 것을 청(請)하되 듣지 아니하고 북방(北方) 경영(經營)에 전념(專念)하였다.
四. 종래(從來) 중국(中國)에는 연호제도(年號制度)가 있어 자주독립국(自主獨立國)인 천자(天子)는 연호(年號)를 쓸 수 있으되 속국(屬國)은 쓸 수 없었는데 삼국시대(三國時代)에 가장 강성(强盛)하던 시대(時代)에는 우리 나라도 중국(中國)과 대등(對等)한 천자국(天子國)이라 하여 연호(年號)를 썼으니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영락(永樂),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의 건원(建元)같은 것이 그 것이다.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당(唐)나라에 부려(附麗)하여 당(唐)나라 연호(年號)를 쓰더니 태조(太祖) 건국후(建國後)에 우리 나라도 완전(完全)한 자주독립국(自主獨立國)가라 하여 연호(年號)를 세워 천수(天授)라 하였다.
五. 삼국시대(三國時代)이전(以前)에는 유족(遺族)만 성(姓)이 있고 일반(一般) 서민(庶民)은 명(名)만 있고 성(姓)이 없더니 태조(太祖) 건국후(建國後)에 전국민(全國民)에게 일제(一齊)히 성(姓)을 영사(領賜)하고 오직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의 유민(遺民)이 고려(高麗)에 반항(反抗)하는 자(者)에게 마(麻), 우(牛), 돈(豚), 상(象)등(等)의 수축명(獸畜名)을 사(賜)하여 일반(一般) 국민(國民)과 요연(暸然)하게 구별(區別)하였으니 후일(後日) 이조시대(李朝時代)의 재상(宰相) 상진(尙震)은 상(象)성(姓)의 승격(昇格)이라 한다.
六. 태조(太祖)는 승(僧) 도선(道詵)을 선생(先生)으로 모시고 그의 말에 의(衣)하여 각지(各地)에 사찰(寺刹)을 창건(創建)하고 관궐(官闕)을 지으니 도선(道詵)은 당승(唐僧) 일행(一行)의 풍수학설(風水學說)을 배워서 아국(我國) 풍수지리(風水地理)학(學)의 원조(元祖)가 된 자(者)로써 세인(世人)이 용자(龍子)라 칭(稱)하고 이때로부터 명당(明堂) 화복(禍福)의 사상(思想)이 국민(國民)의 머리 속에 뿌리 박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高麗) 태조(太祖) 정치(政治)는 아국사상(我國史上) 중요(重要)한 일시기(一時期)를 획(劃)하였고 삼국(三國)통일후(統一後) 오랜 동안의 정치부패기(政治腐敗期)를 지낸 까닭에 종전(從前)의 농후(濃厚)한 풍속(風俗)은 많이 없어졌으나 고려태조(高麗太祖)의 모든 시책(施策)이 적의(適宜)함을 얻었으므로 국민(國民)의 기풍(氣風)이 진실(眞實)하여 국가(國家)에 전란(戰亂)이 있는 때에 귀족(貴族)의 자제(子弟)가 먼저 창검(槍劍)을 집고 선진(先陣)에 나섰으며 관리(官吏)들이 그 지위(地位)를 자기보다 연장(年長)하고 또 현능(賢能)한 자(者)에게 사양(辭讓)하는 일이 있으니 태조(太祖)가 최응(崔凝)으로써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삼으니 응(凝)이 말하기를 신(臣)의 동료(同僚) 윤봉(尹逢)이 신(臣)보다 십년(十年)을 연장(年長)하니 청(請)컨대 먼저 제수(除授)하소서 하고 사양(辭讓)하니 태조(太祖)가 대희(大喜)하여 그 예양(禮讓)함을 칭찬(稱讚)한 것이 그 일례(一例)이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지제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
사회계급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고려건국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신라의 쇠망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해상발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고려(高麗) 역대표(歷代表)
태조(太祖) |
혜종(惠宗) |
정종(定宗) |
광종(光宗) |
경종(景宗) |
성종(成宗) |
무인(戊寅) |
갑진(甲辰) |
병오(丙午) |
경술(庚戌) |
을해(乙亥) |
임오(壬午) |
26 |
2 |
4 |
26 |
6 |
16 |
목종(穆宗) |
현종(顯宗) |
덕종(德宗) |
정종(靖宗) |
문종(文宗) |
순종(順宗) |
무술(戊戌) |
경술(庚戌) |
임신(壬申) |
을해(乙亥) |
정해(丁亥) |
|
12 |
22 |
3 |
12 |
37 |
반(半) |
선종(宣宗) |
헌종(獻宗) |
숙종(肅宗) |
예종(睿宗) |
인종(仁宗) |
의종(毅宗) |
갑자(甲子) |
을해(乙亥) |
병자(丙子) |
병술(丙戌) |
계묘(癸卯) |
정묘(丁卯) |
11 |
1 |
10 |
17 |
24 |
24 |
명종(明宗) |
신종(神宗) |
희종(熙宗) |
강종(康宗) |
고종(高宗) |
광종(光宗) |
신묘(辛卯) |
무오(戊午) |
을축(乙丑) |
임신(壬申) |
갑술(甲戌) |
경신(庚申) |
27 |
7 |
7 |
2 |
46 |
15 |
충렬(忠烈) |
충선왕(忠宣王 |
충숙왕(忠肅王 |
충혜왕(忠惠王 |
충목왕(忠穆王 |
충정왕(忠定王 |
을해(乙亥) |
을유(乙酉) |
신미(辛未) |
신미(辛未) |
을유(乙酉) |
을축(乙丑) |
34 |
5 |
25 |
52 |
4 |
3 |
공민왕(恭愍王 |
우왕(禑王) |
창왕(昌王) |
공양왕(恭讓王 |
|
|
임진(壬辰) |
을묘(乙卯) |
|
기사(己巳) |
|
|
23 |
4 |
반(半) |
4 |
|
|
고려건국(高麗建國)
고려(高麗)태조(太祖)는 이듬해 송악(松嶽)으로 도읍(都邑)을 옮기고 신라(新羅)와 친선(親善)을 도모(圖謀)하고 후백제(後百濟)를 제압(制壓)하려는 정책(政策)을 쓰니 신라(新羅)도 후백제(後百濟)에게 부대끼던 터임으로 고려(高麗)와 친(親)하려 하였다. 후백제(後百濟) 왕(王) 견훤(甄萱)은 이를 보고 비밀(秘密)히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신라(新羅)에 쳐들어갔다. 신라(新羅) 경애왕(景哀王)은 마침 포석정(鮑石亭)에 나가서 유상곡수(流觴曲水) 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후백제(後百濟)의 군사(軍士)를 만나 왕(王)과 왕비(王妃)와 대신(大臣)들이 모두 참혹(慘酷)한 변(變)을 당하였다. 견훤(甄萱)은 왕(王)을 해치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우고 백성(百姓)을 포로(捕虜)하여 돌아가니 신라(新羅)왕(王)은 나아가 싸울 힘이 없고 들어와 지킬 힘이 없으므로 신하(臣下)들과 의논(議論)하고 고려(高麗)에 항복(降服)하려하니 태자(太子)가 통곡(慟哭)하면서 어찌 천년(千年) 조국(祖國)을 한번 싸우지도 아니하고 남에게 주리오 하나 왕(王)은 공연(空然)히 싸우기만 하면 불쌍한 백성(百姓)의 생명(生命)만을 없앤다 하고 항복(降服)하기로 결정(決定)하니 태자(太子)는 왕(王)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개골산(皆骨山)(금강산)에 들어가서 마의(麻衣)를 입고 일생(一生)을 마치니 이가 곧 마의태자(麻衣太子)이다. (檀紀 三千二百六十八年)
高麗가 新羅를 合倂하던 해에 後百濟에서도 變亂이 일어났다. 甄萱은 네째 아들 金剛을 사랑하여 이를 太子로 세우려 하였음으로 그 兄들이 不平을 품고 그 父王을 金山寺에 가두고 金剛을 죽인 後에 맏아들 神劍이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이에 甄萱은 憤함을 이기지 못하고 高麗로 亡命하여 신검(神劍)을 치기를 請하니 高麗太祖는 甄萱을 厚待하여 後百濟의 人心을 分散시키고 大軍을 거느리고 後百濟를 쳐서 滅하고 이에 半島를 統一하니 그 歷年數는 新羅는 五十六王 九百九十二年이오 後百濟는 二王 四十餘年이었다.
처음에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불교(佛敎)와 유교(儒敎)가 아울러 행(行)하여 불교(佛敎)에는 원효(元曉) 의상(義湘) 같은 명승(名僧)이 나고 원효(元曉)가 지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과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불교(佛敎)의 교리(敎理)에 새로운 진보(進步)를 가져오게 하였고 승(僧) 혜초(慧超)는 당(唐)나라에 건너갔다가 다시 길을 떠나 인도(印度)와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를 편답(遍踏)하고 돌아왔는데 그가 지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팔(八) 세기(世紀) 무렵의 인도(印度) 사정(事情)을 전(傳)하는 유일(唯一)한 책(冊)으로 세계(世界)의 보배가 되어있고 또 혜초(慧超) 이외(以外)에도 신라(新羅)의 중으로써 인도(印度)를 찾아간 사람이 칠명(七名)이나 있다고 한다. 유교(儒敎)에는 설총(薛聰)이외(以外)에 김대문(金大問) 최치원(崔致遠) 같은 명유(名儒)가 났는데 김대문(金大問)은 국가학(國家學)을 연구(硏究)하여 극진(極盡)히 환대(歡待)하였고, 발해(渤海)의 옛 남경(南京)을 수복(收復)하기 시작(始作)하였다. 그러나 발해(渤海)가 망(亡)한 뒤로 만주(滿洲)의 대천지(大天地)는 다시 우리 민족(民族)의 땅이 되지 못하고 계단족(契丹族)과 여진족(女眞族)의 손으로 들어가 버렸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회계급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
고려정치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신라의 쇠망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해상발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발해의 건국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신라(新羅)의 쇠망(衰亡)
신라(新羅)의 통일(統一)한 후(後)에는 통일(統一)하기 이전(以前)의 웅대(雄大)한 기백(氣魄)과 선미(善美)한 풍습(風習)이 점점(漸漸) 사라지기 시작(始作)하니 이것이 사라짐이 곳 쇠망(衰亡)할 전조(前兆)이다. 그 이유(理由)는
一. 통일이전(統一以前)에는 왕위(王位)를 서로 현자(賢者)에게 사양(辭讓)하더니 통일후(統一後)에는 왕위(王位) 다툼이 그치지 아니하여 궁중(宮中)에 살벌(殺伐)과 유혈(流血)의 참극(慘劇)이 연달아 일어났다,
二. 통일이전(統一以前)에는 정치(政治) 지도층(指導層)이 청백(淸白)하고 국사(國史)에 충성(忠誠)하여 민중(民衆)의 모범(模範)이 되더니 통일후(統一後)에는 귀족층(貴族層)이 부패(腐敗)하여 일야(밤낮) 왕유연(日夜 王遊宴)을 일삼고 경중(京中)에는 가무(歌舞)의 음악(音樂)소리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四. 통일이전(統一以前)에는 화랑(花郞)의 무리와 같은 소년(少年) 애국자(愛國者)가 생명(生命)을 아끼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爲)하여 일하더니 통일후(統一後)에는 국민(國民)이 모두 위정(爲政) 계급(階級)을 미워하여 다시 화랑정신(花郞精神)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더욱이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즉위(卽位)한 후(後)로는 간신(奸臣)들이 권력(權力)을 잡고 정치(政治)를 어지럽혀서 백성(百姓)의 원성(怨聲)이 더욱 높아가고 또 흉년(凶年)이 겹 들어서 각지(各地)에 도적(盜賊)이 봉기(蜂起)하였다.
이때 양길(梁吉)이 북원(北原)에서 무리를 모아 가지고 궁예(弓裔)로 하여금 북방(北方)의 여러 고을을 빼앗고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에서 무리를 모으고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을 위(爲)하여 원수(怨讐)를 갚는다하고 후백제(後百濟)라는 나라를 세우고 서남방(西南方)의 여러 고을을 빼앗았다. 얼마 지난 후(後)에 궁예(弓裔)는 스스로 임금이 되어 송악(松嶽)군(郡)에 도읍(都邑)하고 고구려(高句麗)의 옛 나라를 회복(恢復)한다하고 국호(國號)를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하니 이것은 모두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의 유민(遺民)들이 그 조국(祖國)이 망(亡)한지 이미 수백년(數百年)에 아직도 조국(祖國) 광복(光復)의 뜻이 머리 속에 깊이 뿌리 박힌 것을 이용(利用)하여 신라(新羅)에 반항(反抗)케 하고 그 세력(勢力)을 확장(擴張)하려 함이다. 궁예(弓裔)는 다시 철원(鐵原)으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마진(摩震)이라 하다가 또 태봉(泰封)이라고 했다. 견훤(甄萱)은 도읍(都邑)을 무주(武州)로 옮기고 중국(中國)의 여러 나라와 무역(貿易)하여 힘을 기르는 한편 차츰 동(東)으로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한동안 반도(半島) 안에는 삼국(三國)이 다시 벌어지니 이를 후삼국(後三國)이라 한다.
태봉(泰封) 왕(王) 궁예(弓裔)는 송악(松嶽)사람 왕건(王建)을 시켜서 해로(海路)로 나주(羅州)를 쳐서 빼앗고 후백제(後百濟)와 중국(中國)과의 교섭(交涉)하는 교통(交通)을 끊고 고유(固有)한 항해(航海) 세력(勢力)을 발휘(發揮)하여 서해(西海)의 해적(海賊)을 막으니 이때로부터 왕건(王建)의 명성(名聲)이 일국(一國)에 떨쳤으니 태봉(泰封)왕(王)의 성질(性質)이 포악(暴惡)함으로 부하(部下) 제장(諸將)이 왕(王)을 쫓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推戴)하여 임금을 삼으니 이가 곧 고려시조(高麗始祖)이다. (檀紀 三千二百五十一年)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정치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
고려건국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해상발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발해의 건국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삼국의 문화와 경제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해상발전(海上發展)
신라(新羅)는 북(北)쪽의 일면(一面)이 대륙(大陸)에 접(接)할뿐이오 삼면(三面)이 바다로 둘려있는 반도국(半島國)이다. 국민(國民)들은 해상(海上)에서의 활동(活動)이 자못 활발(活潑)하여 수(數)많은 유학생(遊學生)과 상인(商人)들이 당(唐)나라에 내왕(來往)하였고 따라서 당(唐)나라의 해안(海岸)지방(地方)에는 신라(新羅)사람들이 교거(僑居)하는 신라방(新羅坊)이 처처(處處)에 생겼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통일(統一)이후(以後) 더욱 현저(顯著)하여 그 중(中)에서 한 예(例)를 들면 지금의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동남(東南)에 있는 석성만(石城灣) 부근(附近)인 등주(登州) 문등현(文登縣) 청령향(淸寧鄕) 적산(赤山)은 신라(新羅)에서 당(唐)나라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그 곳에서 신라(新羅)사람들이 세운 법화원(法花院)이라는 사찰(寺刹)은 쌀 백석(百石)지기의 장전(庄田)이 있었으며 설법(說法)이 열릴 때에는 신라(新羅)사람들의 남녀 수백명(數百名)이 모였다. 당시(當時)는 일본(日本)사람들이 당(唐)나라에 내왕(來往)하는 것도 신라(新羅)사람들의 힘을 많이 빌렸으니 신문왕(神文王)때에는 당(唐)나라에 가는 일본(日本)사람들의 학생(學生)과 구법승(求法僧)이 많이 신라(新羅)의 배를 타고 다녔으며 경덕왕(景德王)때에는 일본(日本)에가는 당(唐)나라 사신(使臣)이 신라(新羅)의 배를 이용(利用)하였고 혜태왕(惠泰王)때에는 당(唐)나라에 가있는 일본(日本)사람들이 그 본국(本國)과의 통신(通信)을 신라(新羅)의 선편(船便)으로 하였다. 그러나 신라(新羅)의 말엽(末葉)에 이르러 국세(國勢)가 떨치지 못하고 때마침 당(唐)나라도 쇠약(衰弱)해지니 황해(黃海)위에 해적(海賊)이 들끓었고 이는 수백년(數百年)동안 평화(平和)롭게 계속(繼續)되던 양국(兩國)사이의 교통(交通)에 큰 위협(威脅)이 될뿐더러 심지어(甚至於)는 해적(海賊)의 떼가 신라(新羅)사람들을 잡아다가 노비(奴婢)로 팔아먹는 일까지도 있었다. 이때 당(唐)나라에 벼슬살이하던 장보고(張保皐)가 이러한 사실(事實)을 알고 신라(新羅)로 돌아와서 왕(王)에게 아뢰고 스스로 청해진(淸海鎭)(지금의 全羅南道 莞島)) 대사(大使)가되어 군사(軍士) 일만명(一萬名)으로 양해(兩海)의 길목을 지키는 동시(同時) 맹렬(猛烈)한 해상(海上)활동(活動)을 시작(始作)하여 황해(黃海)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掌握)하고 당(唐)나라와 일본(日本)에 무역(貿易)하여 다시금 신라(新羅)의 명성(名聲)이 천하(天下)에 떨쳤다. 그러나 신라(新羅) 조정(朝廷)의 왕위(王位) 다툼의 여파(餘波)가 여기까지 미쳐와서 장보고(張保皐)는 임금이 보낸 자객(刺客)에게 암살(暗殺)을 당(當)하고 빛나던 청해진(淸海鎭)의 막(幕)이 닫혔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건국 (삼화서당국사) (0) | 2013.10.25 |
---|---|
신라의 쇠망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발해의 건국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삼국의 문화와 경제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신라의 삼한통일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발해(渤海)의 건국(建國)
고구려(高句麗)가 망(亡)하고 일변령(釰弁令)등(等)의 광복운동(光復運動)이 실패(失敗)에 돌아감에 그 백성(百姓)들이 혹(或)은 당(唐)나라에 강제(强制)로 옮겨지고 혹(或)은 신라(新羅)로 망입(亡入)하기도 하였으나 또한 많은 사람들이 북방(北方)으로 유입(流入)하였다. 이때 만주(滿洲) 북부(北部)에는 말갈족(靺鞨族)이 살고 칠부(七部)로 나뉘어 있었으나 그 중(中)에 가장 드러난 것은 송화강(松花江) 기슭에 속말말갈(粟末靺鞨)과 흑룡강(黑龍江)가에 사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두 부족(部族)이 있고 고구려(高句麗) 당시(當時)에는 이들 말갈(靺鞨)은 고구려(高句麗)의 속국(屬國)이 되어 있었으나 고구려(高句麗)의 평양성(平壤城)이 함락(陷落)된 뒤에 북방(北方)의 모든 성(城)이 당(唐)나라에 점령(占領)된 것이 아니어서 말갈(靺鞨)사람들이 그러한 성(城)에 웅거(雄據)하고 고구려(高句麗) 유민(遺民)들이 이에 합세(合勢)하였다. 그러한지 삼십년(三十年) 동안에 고구려(高句麗) 유장(遺將) 대조영(大祚榮)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여러 번 당병(唐兵)과 싸워서 크게 이기니 당병(唐兵)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고 고구려(高句麗)가 망(亡)한지 삼십일년(三十一年)만에 새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진국(震國)이라 하니, 그 후(後)에 발해(渤海)로 고치니 이가 곧 발해(渤海) 태조(太祖)이다. (檀紀 三千三十二年)
발해(渤海)는 서(西)로 당(唐)나라와 서역(西域)의 문화(文化)를 받아들이고 동(東)으로 일본(日本)과 무역(貿易)하여 해적(海賊)을 충동(衝動)시켜서 당(唐)나라의 산동반도(山東半島)를 친일도 있었다. 처음에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에 도읍(都邑)하더니 후세(後世)에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로 옮기니 이는 길림성(吉林城) 영안현(寧安縣)에 있는 동경성(東京城)이라 하며 지금도 그때의 그 성(城)자리가 남아 있어서 그 주위(周圍)가 거의 사십리(四十里)나 된다.
이때의 강토(疆土)는 북(北)은 흑룡강(黑龍江)에 이르고 서(西)로 요해(遼海)에 미치고 남(南)은 대동강(大洞江)과 원산(元山) 등지(等地)로써 신라(新羅)와 이웃하고 동(東)은 대해(大海)에 닿으니 중국(中國)사람들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칭(稱)하였으며 발해(渤海)의 건국(建國)과 신라(新羅)의 통일기(統一期)가 거의 연대(年代)를 같이 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은 신라(新羅)를 남국(南國) 또는 남조(南朝)라 하고 발해(渤海)를 북국(北國) 또는 북조(北朝)라 하여 이 시대(時代)를 우리 나라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라고 한다.
발해(渤海)는 만주(滿洲)의 넓은 벌판을 차지하고 고구려(高句麗)의 전통(傳統)을 물려받으며 성당(盛唐)의 문화(文化)를 받아들여서 산업(産業)과 문화(文化)의 발달(發達)이 볼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발해(渤海)에는 부여족(扶餘族)과 말갈족(靺鞨族)이 합쳐서 나라를 세웠으되 어찌한 때문인지 신라(新羅)와는 교섭(交涉)이 거의 없었고 또 말갈족(靺鞨族)은 그 뒤에 오래 남아서 여진족(女眞族)이 되었으되 부여족(扶餘族)은 전연(全然) 만주(滿洲)에 남지 아니하였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라의 쇠망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
해상발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삼국의 문화와 경제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신라의 삼한통일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삼국혼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삼국(三國)의 문화(文化)와 경제(經濟)
삼국(三國)에는 국문(國文)이 없고 중국(中國)의 한문(漢文)을 수입(輸入)하여 썼으므로 일부(一部) 귀족계급(貴族階級)은 그것을 이용(利用)할 수 있었으나 일반(一般)백성(百姓)은 아는 자(者)가 극(極)히 적었고 한문자(漢文字)가 국어(國語)에 맞지 않음으로 일을 기록(記錄)할 때에는 한자(漢字)의 음(音)과 훈(訓)을 빌어서 「밝은달」을 「明期月」이라는 等으로 썼으니 新羅의 향가(鄕歌)가 그 예(例)이다. 신라(新羅)가 삼한통일(三韓統一)뒤에 오륙백년(五六百年)의 전화(戰禍)로부터 비로소 해방(解放)되어 당(唐)나라로 들어가는 유학생(遊學生)이 해마다 늘어가고 성당(盛唐)의 찬란(燦爛)한 문물(文物)을 부지런히 받아들이는 동시(同時)에 한문(漢文) 열(熱)도 상당(相當)히 높아졌다. 그리하여 한문학자(漢文學者) 설총(薛聰)은 이두문(吏讀文)을 만들어 경서(經書)를 해석(解釋)하여 생도(生徒)를 가르치고 종전(從前)에는 지명(地名) 같은 것이 모두 우리 나라 말로 되어 있더니,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때에 모든 지명(地名)을 중국식(中國式)으로 고치니 「沙熱伊 고을」을 「淸風縣」으로 고침과 같음이오 이 무렵을 前後하여 人名도 차츰 中國式 姓名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우리의 옛 모습이 漸次 사라지고 中國을 崇拜하는 風習이 생겨서 사대사상(事大思想)이 국민(國民)의 머리 속에 뿌리를 박게 되었으니 이것이 아국(我國) 국민사상(國民思想)의 일대(一大) 전환기(轉換期)이다.
불교(佛敎)는 아국(我國)에 들어온 후(後) 건축(建築), 조각(彫刻), 야금(冶金), 회화(繪畵) 등(等) 기술(技術)을 전래(傳來) 하여 불교(佛敎) 광포(廣布)와 함께 널리 보급(普及)되었으나 끊임없는 전란(戰亂)으로 인(因)하여 그 발생(發生)하려던 싹은 여지없이 짓밟히더니 신라(新羅)의 통일기(統一期)를 전후(前後)하여 힘있게 발전(發展)하였으니 지금 남아있는 황룡사(皇龍寺)의 구층탑(九層塔), 첨성대(瞻星臺), 불국사(佛國寺), 석굴암(石窟庵) 같은 것이 모두 그 시대(時代)의 만든 유물(遺物)이다.
토지제도(土地制度)는 삼국(三國) 정립(鼎立) 당시(當時)에는 유족(遺族)들이 대 면적(大 面積)을 차지하고 노예(奴隸)를 부려서 경작(耕作)하고 일반(一般)농민(農民)은 각기(各其) 일정(一定)한 면적(面積)을 가지고 농사(農事)지으며 이때는 지(地)가 많고 인구(人口)가 비교적(比較的) 적고 유식민(遊食民)을 구(驅)하여 강제(强制)로 황지(荒地)를 개척(開拓)하고 농업(農業)에 종사(從事)케 하였다.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사회(社會)가 안정(安定)되었으므로 비로소 당(唐)나라의 균전제(均田制)를 배워서 정전제(丁田制)를 만들고 토지(土地)는 모두 국유(國有)로 하고 십오세(十五歲)부터 장정(壯丁)이라 하여 국가(國家)로부터 분배(分配)받고 육십세(六十歲)에 국가(國家)에 반환(返還)하며 공신(功臣)유족(遺族)들에게 사전(賜田)을 주어 토지(土地)의 수세권(收稅權)을 가지게 하였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상발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
발해의 건국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신라의 삼한통일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삼국혼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신라(新羅)의 삼한통일(三韓統一)
처음에 신라(新羅)가 당(唐)나라에 청병(請兵)할 무렵에 신라(新羅) 왕(王)이 승하(昇遐)하고 김춘추(金春秋) 알천(閼川) 두 사람이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할 후보(候補)자(者)가 되었는데 이인(二人)이 서로 왕위(王位)를 사양(辭讓)하다가 춘추(春秋)가 왕(王)이 되니 이가 곧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이때 백제(百濟)는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서 민생(民生)은 도탄(塗炭)에 빠지고 여러 번 신라(新羅)를 치다가 번번이 패(敗)하니 국세(國勢)가 위급(危急)하던 차 당(唐)나라 군사(軍士)가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新羅) 무열왕(武烈王)이 장군(將軍)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백제(百濟) 장군(將軍) 계백(階伯)은 결사군(決死軍) 오천명(五千名)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아가 김유신(金庾信) 군(軍)을 맞아 용감(勇敢)히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하여 마침내 패(敗)하여 전사(戰死)하고 사비성(泗泌城)이 나당(羅唐) 연합군(聯合軍)에게 떨어지고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이 항복(降服)하니 이로써 백제(百濟)는 三十一王 六百七十八年에 亡하고 (단기 二千九百九十三年) 지금 부여(扶餘) 금강안(錦江岸)의 낙화암(落花岩)은 당시(當時) 궁녀(宮女)들이 도망(逃亡)하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애화(哀話)를 남긴 곳이다.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은 백제(百濟)를 멸(滅)한 뒤에 당(唐)나라의 근본(根本) 정책(政策)에 의(依)하여 그 군사(軍士)를 옮겨서 신라(新羅)를 치려하였다. 원래(原來) 외국(外國)의 군대(軍隊)를 이끌어다가 이용(利用)하는 데는 마침내 그 군대(軍隊)의 침박(侵撲)을 받는 것이 고금(古今) 역사(歷史)의 통례(通例)라 무열왕(武烈王)과 김유신(金庾信)은 일직부터 외군(外軍) 이용(利用)의 위험성(危險性)이 있음을 잘알고 또 당(唐)나라의 야심(野心)을 이미 간파(看破)한 터이라 한편(便)으로 백제(百濟)에 출병(出兵)하면서 한편(便)으로 국내(國內)를 굳게 지키니 소정방(蘇定方)이 그 기미(機微)를 알고 감(敢)히 움직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김유신(金庾信)으로써 명장(名將)이라고 칭(稱)하는 소이(所以)이오 후세(後世)에 자국내(自國內)를 텅텅 비워 놓고 외군(外軍)을 이끌어다가 이용(利用)한다는 것은 가장 우매(愚昧)한 것이다.
당(唐)나라는 백제(百濟)의 고지(故地)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등(等) 오(五) 도독부(都督附)를 두었는데 백제(百濟) 유민(遺民)들의 광복운동(光復運動)으로 말미암아 당(唐)나라의 군정(軍政)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왕족(王族) 복신(福信)이 승(僧) 도침(道琛)과 더불어 지금 한산(韓山)부근(附近)인 주류성(周留城)에서 군사(軍士)를 일으켜 일본(日本)에 가 있는 왕자(王子) 풍(豊)을 세워 임금을 삼고 고구려(高句麗)와 일본(日本)에 구원(救援)을 청(請)하여 한동안 그 기세(氣勢)가 떨치더니 나중에 내부(內部)의 세력(勢力) 다툼으로 말미암아 복신(福信)이 도침(道琛)을 죽이고 풍왕(豊王)이 또 복신(福信)을 죽여서 마침내 모두가 무너지고 말았다.
당(唐)나라는 백제(百濟)를 멸(滅)한 뒤에 다시 고구려(高句麗)를 칠 준비(準備)를 시작(始作)하였다. 이때 고구려(高句麗)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고 그 아들 남생(男生)이 정권(政權)을 잡았는데 가족(家族)사이에 불화(不和)가 생겨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우 정사(淨士)는 十二城으로써 신라(新羅)에 가서 붙고 남생(男生) 그 아우 남달(男達)이 서로 시기(猜忌)하여 싸움이 일어나더니 남생(男生)은 당(唐)나라에 항복(降服)하여 본국(本國)의 군사기밀(軍事機密)을 일일이 고(告)하였다. 당(唐)나라 임금 고종(高宗)은 어버이 태종(太宗)의 뜻을 이어 육차(六次)나 고구려(高句麗)를 쳤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으로 평생(平生)의 한(恨)으로 여기던 터이라 장군 이적(李勣)을 시켜서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고구려(高句麗)로 쳐들어 가게하고 이에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도 군사(軍士)와 식량(食糧)을 내어 당군(唐軍)을 도왔다. 고구려(高句麗)는 나라 일이 어지러운 데에 흉년(凶年)이 겹 들여서 매우 곤경(困境)에 빠졌으나 그래도 二年동안이나 지탱(支撑)하다가 마침내 평양성(平壤城)이 함락(陷落)되니 (단기 三千一年) 백제(百濟)가 망(亡)한 후(後) 팔년(八年)만이오 그 역연수(歷年數)는 졸본(卒本) 부여(扶餘) 건국(建國)으로부터는 팔백(八百) 여년(餘年)이오 주몽(朱夢)으로부터는 二十八王 七百五年으로 망(亡)하였다.
당(唐)나라는 평양(平壤)에 동도호부(東都護府)를 두고 고구려(高句麗) 고지(故地)를 구(九) 도독부(都督府)로 나누고 고구려(高句麗) 백성(百姓)을 많이 중국(中國)으로 옮겨갔다. 고구려(高句麗) 유장(遺將) 일변령(釰弁令)은 왕족안승(王族安勝)을 받들어 광복운동(光復運動)을 일으키고 신라(新羅)가 또 이를 도와서 당(唐)나라에 대항(對抗)하였음으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는 마침내 요동(遼東)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안승(安勝)이 일변령(釰弁令)을 죽여서 광복운동(光復運動)은 중심(中心)을 잃어버리고 안승(安勝)은 신라(新羅)로 들어갔다.
처음에 신라(新羅)가 당(唐)나라에 청병(請兵)하여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칠 때에는 그 토지(土地)를 신라(新羅)가 통일(統一)할 생각이었으나 두 나라가 망(亡)한 후(後)에 당(唐)나라가 그 땅을 모두 점령(占領)하고 신라(新羅)는 도리어 당(唐)나라의 위협(威脅)을 받게 되었다. 문무왕(文武王)은 두 나라의 광복운동(光復運動)을 도와서 당(唐)나라와 싸우게 하더니 마침내 당(唐)나라와 직접(直接) 싸우기로 결정(決定)하고 고구려(高句麗)가 망(亡)한 이년후(二年後)부터 칠년(七年)동안 싸움을 계속(繼續)하던 끝에 실력(實力)으로 당군(唐軍)을 몰아내고 대동강(大洞江) 이남(以南)의 땅을 찾아서 비로소 삼한(三韓) 통일(統一)의 업(業)이 이루어졌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해의 건국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
삼국의 문화와 경제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삼국혼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삼국시대의 사회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삼국혼전(三國混戰)
백제(百濟)는 고구려(高句麗)에게 밀려서 웅진(熊津)으로 옮긴 후(後) 외(外)로는 고구려(高句麗)의 침략(侵略)이 그치지 아니하고 내(內)로는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서 국력(國力)이 떨치지 못함으로 한 편(便)으로는 멀리 일본(日本)과 친선(親善)하여 그 후원(後援)을 얻으려 하였으며 백제(百濟)의 학자(學者) 왕인(王人)이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를 가지고 일본(日本)에 들어가서 그 왕자(王子)에게 처음으로 한문(漢文)을 가르쳐주고 불교(佛敎)와 및 건축(建築), 도기(陶器), 양조(釀造), 야금(冶金), 조각(彫刻), 회화(繪畵)등(等)의 기술(技術)을 전(傳)한 것도 모두 이 시대(時代)의 일이었다. 백제(百濟) 성왕(聖王)은 신라(新羅)와 함께 고구려(高句麗)를 치려 하더니 신라(新羅)가 고구려(高句麗)의 강성(强盛)함을 두려워하고 또 부질없이 외국(外國)과 싸우기보다 내정(內政)을 닦아서 국력(國力)을 충실(充實)히 하는 것이 옳다하고 백제(百濟)의 청(請)을 거절(拒絶)하고 도리어 고구려(高句麗)와 통(通)함으로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화호(和好)가 깨지고 신라(新羅)를 치다가 왕(王)이 전사(戰死)하였다. 이에 백제(百濟)는 더욱 약(弱)하여 웅진(熊津)에서 지탱(支撑)치 못하고 도읍(都邑)을 사비(泗沘)(지금의 부여(扶餘))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남부여(南夫餘)라 고쳤다.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때에 불교(佛敎)가 처음으로 들어왔는데 이 나라 정치(政治)는 군주(君主)와 민중(民衆)의 계급(階級) 차별(差別)이 엄격(嚴格)한 계급제도(階級制度)이며 불교(佛敎)는 상하(上下)의 차별(差別)이 없는 평등사상(平等思想)위에 서는 것이므로 법흥왕(法興王)이 불교(佛敎)를 펴서 정치적(政治的)으로는 군민(君民)의 계급(階級)을 엄립(嚴立)하고 종교적(宗敎的)으로는 군민평등(君民平等)을 주창(主唱)하여 국민(國民)의 일치단결(一致團結)을 도(圖)하니 이 정책(政策)이 민심(民心)단합(團合)에 적지 않은 효과(效果)를 거두었던 것이다.
다음임금 진흥왕(眞興王)은 신라(新羅) 중흥(中興)의 영걸(英傑)이라 처음으로 화랑(花郞)이라는 제도(制度)를 만들어 젊은 사람들이 무리를 모아서 오유(娛遊)하면서 학문(學文)과 도덕(道德)을 토론(討論)하기도하고 가무(歌舞)로써 즐기기도 하고 멀리 국내(國內)의 유명(有名)한 산천(山川)을 돌아다니면서 몸도 단련(鍛鍊)하고 인정(人情)도 살피며 그리하는 중에 옳고 바른 사람을 골라서 나라에 천거(薦擧)하여 적당(適當)한 소임(所任)을 맡아보게 하니 당시(當時)에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은 모두 화랑(花郞) 출신(出身)이었고 이것이 신라(新羅)의 삼한통일(三韓統一)의 원동력(原動力)이 된 것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중국(中國)과 교통(交通)하여 서로 화호(和好)를 맺는 것이 외교정책(外交政策)의 주요(主要)한 하나로 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한편(便)으로는 대륙문화(大陸文化)를 수입(輸入)하고 한편(便)으로는 대국(大國)의 성원(聲援)을 빌어서 적대국(敵對國)을 위압(威壓)하려 함이니 지금(只今)에 외국(外國) 승인(承認)을 받음과 같은 것이다.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자유(自由)로 중국(中國)과 교통(交通)할 수 있으되 오직 신라(新羅)는 중국(中國)과 교통(交通) 할 길이 없으므로 삼국(三國)의 혼전(混戰) 지대(地帶)인 한강(漢江) 일대지(一帶地)를 점령(占領)하고 서해(西海)로부터 중국(中國)과 교통(交通)하는 것이 국가대계(國家大計)의 주요(主要)한 일부(一部)이었다. 이에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한강(漢江) 지대(地帶)에서 격전(激戰)하고 있는 기회(機會)를 틈타서 먼저 백제군(百濟軍)과 연합(聯合)하여 고구려(高句麗) 군(軍)을 쫓아버리고 다시 백제군(百濟軍)을 반격(反擊)하여 드디어 한주(漢州)(지금의 서울)로부터 인천(仁川) 남양(南陽)에 이르는 지역(地域)을 점유(占有)하니 이로부터 중국(中國)에 통(通)하는 길이 열리고 후일(後日) 삼한통일(三韓統一)의 기초(基礎)가 이루어 진 것이다.
이로부터 해마다 대륙(大陸)과의 교통(交通)이 끊이지 아니하고 유학생(遊學生)과 구법승(求法僧)이 수(數)없이 다녔다. 이때 육가야국(六伽耶國) 중(中)에 가락국(駕洛國)은 법흥왕(法興王)때에 이미 신라(新羅)에 합병(合倂)되고 진흥왕(眞興王)때에 대가야국(大伽倻國)을 쳐서 군현(郡縣)을 삼으니 남은 사(四) 가야국(伽倻國)이 차례로 무너져서 낙동강(洛東江) 유역(流域) 지방(地方)이 전부(全部) 신라(新羅)의 땅이 되었고 지금의 가야금(伽倻琴)은 이 가야국(伽倻國)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며 진흥왕(眞興王)은 또한 북(北)으로 땅을 넓혀서 남옥저(南沃沮)의 중부(中部)에까지 이르고 국경(國境) 지방(地方)에 순수(巡狩)하여 비(碑)를 세우니 지금의 경상도(慶尙道) 창녕읍(昌寧邑)과 서울의 북한산(北漢山) 비봉(碑峰)과 함경남도(咸鏡南道)의 함주군(咸州郡) 황초령(黃草嶺)과 함경남도(咸鏡南道) 이원군(利原郡)의 마운령(摩雲嶺)에 있는 순수비(巡狩碑)가 곧 그것이다.
신라(新羅)의 국세(局勢)가 갑자기 강성(强盛)하여짐을 보는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종래(從來)의 세수(世讎)를 버리고 서로 화호(和好)를 맺어서 신라(新羅)에 당(當)하게 되니 신라(新羅)도 형세(形勢)의 위태(危殆)함을 깨닫고 중국대륙(中國大陸)의 힘을 이끌어 올 정책(政策)을 쓰게 되었다.
이때 중국(中國)은 수(隋)나라가 망(亡)하고 당(唐)나라가 대신(代身)하고 그 임금 태종(太宗)은 유명(有名)한 영왕(英王)이다. 당태종(唐太宗)은 북(北)으로 돌궐(突闕)(터키)을 무찌르고 서(西)로 토번(吐藩)(티베트)과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를 평정(平定)하고 남방(南方)의 여러 나라도 조공(朝貢)하게되어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하였다고 생각되었으나 오직 동방(東方)의 고구려(高句麗)만이 그에게 굴복(屈伏)하지 아니함으로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藏王)때 (檀紀 二千九百七十七年)에 스스로 군사(軍士) 삼십만(三十萬)을 거느리고 風雨같이 몰려와서 이듬해 四月에 이미 요하(遼河)를 건넜고 이때 고구려(高句麗)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국정(國政)을 잡고 굳게 지키었다. 당태종(唐太宗)은 요동성(遼東城)과 백암성(白岩城)을 빼았은 후(後) 안시성(安市城)을 포위(包圍)하고 수개월(數個月)을 싸웠으나 마침내 떨어뜨리지 못하던 중(中) 고구려(高句麗) 장수(將帥)의 화살이 당태종(唐太宗)의 눈을 마쳤으므로 당병(唐兵)은 전의(戰意)를 잃고 또 가을철이 되어 찬바람이 불어오고 양식(糧食)까지 다하게 되었다. 이에 당태종(唐太宗)은 싸움을 단염(斷念)하고 도로 돌아가는데 험로(險路)와 풍설(風雪)에 인마(人馬)의 희생(犧牲)이 길에 가득하였고 그 후(後) 수차(數次)로 군사(軍士)를 보내어 고구려(高句麗)를 쳤으나 역시(亦是) 고구려(高句麗)의 맹렬(猛烈)한 반격(反擊)으로 실패(失敗)하고 돌아갔다.
고구려(高句麗)와 대륙(大陸)의 세력(勢力)이 반세기(半世紀)를 두고 겨룬 그 사이에 신라(新羅)의 힘이 더욱 커지고 그 때에 또 김유신(金庾信)과 김춘추(金春秋)의 두 영걸(英傑)이 나서 하나는 군사(軍事)로 하나는 외교(外交)로 대(大) 신라(新羅)를 세우기에 힘을 다하였다. 백제(百濟)는 성왕(聖王)이 전사(戰死)한 원수(怨讐)를 기어(期於)히 갚으려하여 자주 군사(軍士)를 내어 신라(新羅)를 치고 고구려(高句麗)가 또한 신라(新羅)의 대륙(大陸)의 힘을 이끄는 것을 미워하여 압력(壓力)을 가(加)하니 신라(新羅)는 김춘추(金春秋)를 당(唐)나라에 보내어 구원(救援)을 청(請)하였다. 당태종(唐太宗)이 죽은 후(後) 그 아들 고종(高宗)은 어버이의 뜻을 이어 항상(恒常) 동방(東方)을 판도내(版圖內)에 넣으려 하던 차(次)에 신라(新羅)의 청병(請兵)이 있으므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호기회(好機會)라 하여 드디어 백제(百濟)를 칠 군사(軍士)를 일으켰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의 문화와 경제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
신라의 삼한통일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삼국시대의 사회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백제와 신라의 발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고구려(高句麗)와 중국(中國)과의 관계(關係)
고구려는 압록강(鴨綠江)을 중심(中心)으로 남북(南北) 수천리(數千里)에 걸쳐서 큰 세력(勢力)을 길렀으므로 비단(非但) 신라(新羅)와 백제(百濟)에 대(對)한 압력(壓力)이 될 뿐 아니라 중국대륙(中國大陸)에 대하여도 끊임없는 위협(威脅)이었다.
그러나 전일(前日)의 중국(中國)은 오호(五胡) 십육국(十六國)의 어지러운 시대(時代)였으나 그 뒤에 남북(南北)으로 나뉘었다가 수(隋)나라가 일어나서 통일(統一)을 이룬 뒤에는 고구려(高句麗)와의 사이에는 두 큰 세력(勢力)이 마주쳐서 부딪치지 아니할 수 없이 되었다. 고구려(高句麗) 영양왕(嬰陽王)때에 말갈(靺鞨)을 거느리고 수(隋)나라의 요서(遼西)를 친 것이 동기(動機)가 되어서 수(隋) 문제(文帝)가 삼십만(三十萬) 군사(軍士)로서 쳐들어 왔으나 중도(中途)에서 패(敗)하여 돌아갔다. 다음 임금 양제(煬帝)는 본시(本是) 허심(虛心)이 많은 사람으로서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해 보겠다는 야심(野心)과 부황(父皇)이 이루지 못한 한(恨)을 풀겠다는 생각으로 천하(天下)의 힘을 기우려 영양왕(嬰陽王) 이십이년(二十二年) (檀紀 二千九百四十五年)에 百十三萬의 陸軍과 多數한 水軍을 거느리고 高句麗로 쳐들어오니 陣의 길이가 九百六十里에 뻗쳤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을 미리 짐작(斟酌)하고 을지문덕(乙支文德)으로써 대장(大將)을 삼고 준비(準備)하던 터이라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수군(隋軍) 이십만((二十萬)을 유인(誘引)하여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淸川江))에 이르러 대파(大破)하니 적(敵)의 생환(生還) 자(者)가 겨우 二千八百名에 지나지 못하니 이것을 살수대전(薩水大戰)이라 하며 요동(遼東)에 남아있는 군사(軍士)는 혹(或)은 패(敗)하고 혹(或)은 겁(怯)을 먹고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양제(煬帝)는 이듬해 다시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와서 요동성(遼東城)을 쳤으나 거듭 실패(失敗)하고 세 번째 고구려(高句麗)를 치려다가 국내(國內) 반란(叛亂)으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되지 아니하여 당(唐)나라에게 망(亡)하였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라의 삼한통일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
삼국혼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삼국시대의 사회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백제와 신라의 발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고구려의 융성 (삼화서당국사) (0) | 2013.10.02 |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회(社會)
삼국시대(三國時代)의 토지제도(土地制度)는 모두 국유(國有)로 하고 귀족(貴族) 공신(功臣)들에게 전장(田庄) 식읍(食邑) 등(等)으로 나누어주고 거기에 농경(農耕)에 종사(從事)할 노예(奴隸)를 아울러 주니 고구려(高句麗)에는 좌식(坐食)하는 대가(大家)가 만여호(萬餘戶)이오 하호(下戶)는 그들에게 양식(糧食)과 어염(魚鹽)을 져다 바쳤으며, 신라(新羅)에는 재상가(宰相家)의 노복(奴僕)이 삼천인(三千人)에 달하고 우마(牛馬)의 수(數)도 거의 비슷하였다고 한다. 이 때는 돈이 없고 미곡(米穀)과 마포(麻布)를 교환(交換)의 매개(媒介)로 사용(使用)하니 이것은 고대(古代) 물물교환(物物交換)의 유풍(遺風)이오 지금에 호남(湖南)지방(地方)에서 미곡(米穀)에 한(限)하여 매(買)하는 것을 판다하고 매(賣)하는 것을 산다 하는 것은 삼국(三國) 이래(以來) 미곡(米穀) 마포(麻布)가 돈으로 쓰이던 유속(遺俗)이다.
삼국(三國)의 극성시대(極盛時代)의 도성(都城) 인구(人口)는 고구려(高句麗)는 이십일만여호(二十一萬餘戶)이오 신라(新羅)는 십칠만여호(十七萬餘戶)이오 백제(百濟)는 십오만여호(十五萬餘戶)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구(人口)가 희소(稀少)한 당시(當時)에 도성(都城)인구(人口)가 일호(一戶)에 오인(五人)으로 잡더라도 칠십만(七十萬) 혹(或)은 백만(百萬)이 될 것이니 이것은 사실(事實)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도성(都城)이 팽창(膨脹)치 아니할 수 없는 이유(理由)가 있으니 이 시대(時代)는 전쟁(戰爭)이 그치지 아니하고 어떤 때는 도성(都城)이 수삼개월(數三個月) 적군(敵軍)의 포위(包圍)를 당(當)하는 일도 없지 아니하였다. 이 포위(包圍)에는 식량(食糧) 무기(武器) 기타 여러 가지 생필품(生活品)을 도성내(都城內)에서 자급자족(自作自給)치 아니하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각국(各國)의 도성내(都城內)에는 첫째로 무기(武器)를 제조(製造)하는 공장(工場)이 있고 거기에 종사(從事)하는 기술자(技術者)및 노무자(勞務者)등(等) 백공(百工)이 있고 큰 시장(市場)도 이 도성내(都城內)에 집중(集中)되어 있었다. 국가(國家)가 도성(都城)을 옮길 때에 먼저 공장(工場)과 백공(百工)을 옮긴 것은 이 까닭이오 당시(當時)에 도성(都城)이 팽창(膨脹)한 것은 자연(自然)의 이(理)이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혼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백제와 신라의 발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고구려의 융성 (삼화서당국사) (0) | 2013.10.02 |
삼국의 흥기 (삼화서당국사) (0) | 2013.10.02 |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발전(發展)
백제(百濟)는 건국(建國) 후(後) 점차(漸次)로 마한(馬韓)의 땅을 탈취(奪取)하더니 불과(不過) 이십(二十) 여년(餘年)에 전역(全域)을 통합(統合)하고 반도(半島) 서남부(西南部)의 일대국(一大國)을 형성(形成)하였다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농산(農産)이 많고 일면(一面)이 대해(大海)인 관계(關係)로 조선술(造船術)과 항해술(航海術)이 발달(發達)하여 중국대륙(中國大陸)과 무역(貿易)하고 수군(水軍)이 또한 정예(精銳)하여 한때는 중국(中國)의 동해안(東海岸) 일부(一部)를 점령(占領)한 일도 있었다.
고구려(高句麗)의 세력(勢力)이 남(南)으로 내려 온 후(後) 예성강(禮成江)(황해도)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충돌(衝突)이 일어나기 시작(始作)하였다.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는 본시(本是) 형제(兄弟)의 나라이었으니 고구려(高句麗)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백제(百濟)를 치다가 전사(戰死)하니 이로부터 양국(兩國)이 세수(世讎)가 맺어져서 전쟁(戰爭)이 연년(連年) 부절(不絶)하더니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이 남하정책(南下政策)을 추진(推進)하여 평양(平壤)에 이도(移都)한 후로 백제(百濟)는 그 압력(壓力)에 눌려서 더 북진(北進)치 못하고 개로왕(盖鹵王)때에는 고구려(高句麗)와 싸우다가 왕(王)은 전사(戰死)하고 전군(全軍)이 복멸(覆滅)하고 한강(漢江) 좌우(左右)의 지(地)를 상실(喪失)하고 왕자(王子)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지금의 공주(公州))으로 옮기니 이때가 백제(百濟)의 최대(最大) 수난기(受難期)이었다.
신라(新羅)는 반도(半島)의 동남(東南) 일우(一隅)에 처(處)하여 현군(賢君)이 상속(相續)하고 그 정치(政治)에는 화백(和白)이라는 제도(制度)가 있어 임금을 선거(選擧)하고 다른 중요(重要)한 국사(國事)를 의론(議論)하는데 유족(遺族)들이 모여서 회의(會議)하고 전원(全員)이 찬성(贊成)한 연후(然後)에 결정(決定)함으로 항상(恒常) 국론(國論)이 잘 통일(統一)되고 또 이 나라는 육부족(六部族)의 합의(合意)에 의(依)하여 성립(成立)되었으므로 그 국민(國民)의 부족적(部族的) 단결(團結)이 가장 공고(鞏固)하였으니 이것이 후일(後日) 삼한통일(三韓統一)의 원동력(原動力)이 되었고 이 부족(部族)의 단결력(團結力)은 전전이사(轉轉移徙)하여 다니는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의 미칠 바가 아니었다.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는 아국(我國)의 서해안(西海岸)을 끼고 있어서 일직부터 대륙(大陸)과의 교섭(交涉)이 빈번(頻繁)하여 손쉽게 그 문화(文化)를 수입(輸入)할 수 있었고 한문(漢文)도 국초(國初)부터 들어와서 일부(一部) 지식계급(知識階級)사이에 행(行)하였음으로 문화(文化) 정도(程度)의 향상(向上)이 볼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新羅)는 지리적(地理的)으로 중국(中國)과 직접(直接)으로 교통(交通)하지 못하고 주(主)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를 통(通)하여 간접(間接)으로 대륙(大陸)문화(文化)를 받은 관계(關係)로 문화(文化)의 발달(發達)이 얼마쯤 뒤졌으나 그 대신(代身) 삼한시대(三韓時代)로부터 계속(繼續)하여오는 국유문화(國有文化)를 충분(充分)히 발달(發達)케 하고 그 기초(基礎)위에 대륙문화(大陸文化)를 받아서 세계(世界)에 자랑할만한 신라문화(新羅文化)를 이루었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불교(佛敎)를 받아들일 때에 있어서도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가장 쉽게 받아왔으나 오직 신라(新羅)는 그 받아들이는 가부(可否)에 대(對)하여 논란(論難)과 비판(批判)이 가장 심각(深刻)하여 어려운 곡절(曲折)을 겪었고 그 뒤에 가장 아름다운 불교문화(佛敎文化)의 꽃이 핀 것으로 보아 짐작(斟酌)할 수 있는 것이다. 후세(後世)에 외국문화(外國文化)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깊은 검토(檢討)와 비판(批判)이 없이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은 국유문화(國有文化)의 기초(基礎)가 약(弱)한 까닭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
삼국시대의 사회 (삼화서당국사) (0) | 2013.10.19 |
고구려의 융성 (삼화서당국사) (0) | 2013.10.02 |
삼국의 흥기 (삼화서당국사) (0) | 2013.10.02 |
고조선 (삼화서당국사) (0) | 2013.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