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易學)으로 본 수(數)와 상(象)과의 관계(關係)
‣수(數)와 상(象)
사람의 지식(知識)에는 두 가지의 최대최고(最大最高)한 것이 있으니 그 하나는 공간적(空間的)으로 유심(幽深)한 사물(事物)을 통지(洞知)하는 것이오 또 하나는 시간적(時間的)으로 미래사(未來事)를 선견(先見)하는 것이다 역학(易學)은 인생사회(人生社會)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을 완수(完遂)하기 위(爲)하여 이 두 가지 지식(知識)을 사람에게 가르치는 학문(學問)이니, 역(易)에 「夫易 聖人之所以極深而硏幾也 唯深也 故能通天下之志 唯幾也 故能成天下之務 = 그 역(易)은 성인(聖人)의 써 심(深)을 극(極)하고 기(幾)를 연(硏)하는 바이라, 이 심(深)한 고(故)로 능(能)히 천하(天下)의 지(志)를 통(通)하고, 이 기(幾)한 고(故)로 능(能)히 천하(天下)의 무(務)를 성(成)한다 」【註一】한바, 심(深)은 유심(幽深)함이오 기(幾)는 미래사(未來事)의 기미(機微)이라, 이는 유심(幽深)을 통지(洞知)하는 까닭에 천하(天下)의 의지(意志)를 통조(通照)하고, 기미(機微)를 선견(先見)하는 까닭에 천하(天下)의 업무(業務)를 성수(成遂)함을 말함이다. 그런데 만물(萬物)의 조직(組織)과 운행(運行)에는 반드시 수(數)와 상(象)이 있으니, 상(象)은 수(數)가 아니면 입(立)치 못하고, 수(數)는 상(象)이 아니면 나타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수(數)를 주체(主體)로하여 볼 때에는 수(數)는 체(體)가되고 상(象)은 용(用)이 되며, 상(象)을 주체(主體)로하여 볼 때에는 상(象)은 체(體)가되고 수(數)는 용(用)이 되어, 수(數)와 상(象)은 체용관계(體用關係)로써 일이이(一而二), 이이일(二而一)의 작용(作用)을 행(行)하는데, 역학(易學)이 유심(幽深)을 탐색(探索)하고 미래(未來)를 추지(推知)하는 방법(方法)은 주(主)로 수(數)와 상(象)의 이(理)를 응용(應用)하고 있으니, 역(易)에「知來者逆 是故易逆數也 = 내(來)를 지(知)하는 자(者)는 역(逆)하는지라 이런 고(故)로 역(易)은 역수(逆數)라」【註二】하고, 또 「極其數 遂定天下之象 = 그 수(數)를 극(極)하여 드디어 천하(天下)의 상(象)을 정(定)한다」【註三】함은, 이 뜻을 말함이오, 서화담(徐花潭)이 「理之錯綜處 在數上分曉 = 이(理)의 착종(錯綜)한 곳은 수(數)의 상(上)에서 분효(分曉)한다」【註四】함은, 수(數)로써 이(理)를 명효(明曉)함을 말함이니, 지금 자연과학(自然科學)이 수학(數學)과 물상(物象)으로써 자연계(自然界)의 사물(事物)을 천명(闡明)하는 것도 또한 이 이(理)에 의(依)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계(自然界)의 수(數)와 상(象)은 수학(數學)이나 물리학(物理學) 등(等)으로써 정확(正確)하게 표출(表出)할 수가 있으나, 복잡(複雜)하고 미묘(微妙)하고 기복곡절(起伏曲折)이 많은 인생사회(人生社會)의 생존작용(生存作用)에 대(對)하여는, 수학(數學)이나 물리학(物理學)만으로서 공식(公式)을 만들기도 어렵고 이론(理論)을 전개(展開)하기도 어려운 것이니, 이는 사람에게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있는 까닭이다. 즉(卽) 인생사회(人生社會)에는 사람의 자유의지(自由意志)가 강력(强力)히 작용(作用)하고 있어 사물(事物)의 변화(變化)가 자연계(自然界)보다 격심(激甚)하고 또 전변번복(轉變飜覆)이 무상(無常)한 까닭에 금일(今日)의 공식(公式)이 반드시 명일(明日)의 공식(公式)으로 되는 것이 아니오, 이곳의 물리학적(物理學的) 계산(計算)이 반드시 저곳에도 적용(適用)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은 자연물(自然物)의 일분자(一分子)이오 그 사람으로서 구성(構成)된 사회(社會)도 또한 자연물(自然物)의 일부(一部)이니 자연물(自然物)에 적용(適用)되는 수(數)와 상(象)이 인생사회(人生社會)에 적용(適用)되지 못할 이(理)가 없음으로 그를 척도양형(尺度量衡)하는 수(數)는 대체(大體)를 파악(把握)하는 개산(槪算)이 아니면 안되고, 그 상(象)은 전체(全體)를 통관(通觀)하는 개황(槪況)이 아니면 안된다. 지금에 흔히 쓰고 있는 사회통계(社會統計) 같은 것은 그 조사범위(調査範圍)나 조사사항(調査事項) 등(等)으로 볼 때에 그 대부분(大部分)은 결(決)코 정확(正確)한 것이 아니오 개산(槪算)과 개황(槪況)에 불과(不過)한 것이지만 이것으로써 사회상태(社會狀態)를 대강(大綱) 파악(把握)하고 통관(通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역학(易學)은 인생사회(人生社會)의 생존원리(生存原理)를 구명(究明)하는 학문(學問)이라, 공간적(空間的)으로는 개체(個體)를 아는 동시(同時)에 또한 통체(統體)를 알고, 분석(分析)을 아는 동시(同時)에 또한 종합(綜合)을 알며, 시간적(時間的)으로는 현실(現實)을 아는 동시(同時)에 또한 이상(理想)을 알고 금일(今日)을 아는 동시(同時)에 또한 미래(未來)를 아는 학문(學問)이므로, 역학(易學)이 쓰고 있는 수(數)와 상(象)은 범위(範圍)와 준사(準似), 즉(卽) 개산(槪算)과 개황(槪況)이다. 개산(槪算)과 개황(槪況)이 비록 정확(正確)치 못한 듯 하나, 변화무상(變化無常)한 사회사물(社會事物)에 있어서는, 수학적(數學的)공식(公式)이나 물리학적(物理學的)계산(計算)보다, 이 대체(大體)를 파악(把握)하고 전체(全體)를 통관(通觀)하는 개산(槪算)과 개황(槪況)이 도리어 정확(正確)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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