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社會)의 신진대사(新陳代謝)
인생사회(人生社會)는 부단(不斷)히 운동(運動)하여 일반생물(一般生物)과 같은 생장수장(生長收藏)의 이(理)가 있으므로, 거기에는 현실(現實)과 이상(理想), 보수(保守)와 혁신(革新) 등(等) 대대작용(對待作用)이 생(生)하고, 또 이러한 대대작용(對待作用)이 있으므로 써 부단(不斷)히 운동(運動)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社會)의 성장(成長)이 어느 한도(限度)에 이르면 스스로 생장(生長)을 정지(停止)하고 경화(硬化)․정체(停滯)․폐색(閉塞) 등(等) 수장현상(收藏現象)이 나타나서, 인심(人心)이 구안(苟安)을 탐(貪)하고 만무(萬務)가 해이(解弛)하여 장래(將來)할 화환(禍患)을 원려(遠慮)치 아니하나니, 신라(新羅)가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한 후(後)에 승평(昇平)이 일구(日久)하여 귀족계급(貴族階級)이 향락(享樂)과 부패(腐敗)의 생활(生活)에 빠진 것이 그 일예(一例)이오, 또 사회(社會)가 시(時)로 더불어 진전(進展)하는 도중(途中)에는 스스로 거기에 동반(同伴)치 못하는 낙오자(落伍者)가 생(生)하나니, 지금 우리 사회(社會)에 봉건시대(封建時代)의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잔재(殘滓)가 남아 있는 것이 그 일예(一例)이다. 그런데 사회(社會)에는 반드시 현실(現實)을 유지(維持)하려 하는 세력(勢力)이 있어 그 현실(現實)을 옹호(擁護)하기 위(爲)하여 보수작용(保守作用)을 행(行)하고 또 한편(便)에는 반드시 현실(現實)을 변통(變通)하려 하는 이상(理想)이 있어 보수세력(保守勢力)을 추척(推斥)하고 사회(社會)를 일신(日新)하려 하는 혁신작용(革新作用)을 행(行)하나니, 역(易)에「革去故也 鼎取新也 = 혁(革)은 고(故)를 거(去)함이오 정(鼎)은 신(新)을 취(取)함이라」【註十一】함은, 구폐(舊弊)를 혁거(革去)하여 물(物)을 일신(日新)하는 혁신작용(革新作用)을 말함이다. 보수(保守)는 체(體)가 되고 혁신(革新)은 용(用)이 되는지라, 보수사회(保守社會)의 속에는 반드시 폐고(弊故)한 폐물(廢物)이 생(生)하여 생존작용(生存作用)을 조해(阻害)하는 부면(部面)이 있으므로 사회(社會)는 자체(自體)의 생존(生存)을 위(爲)하여 고(故)를 버리고 신(新)을 취(取)하려 하는 혁신작용(革新作用)이 일어나지 아니할 수가 없으니, 마치 생물체(生物體)의 신진대사(新陳代謝)와 사시(四時)의 서(序)에 성공자(成功者)가 거(去)함과 같은 것이오, 이것이 사회내(社會內)의 운동(運動)이 신고(新故)의 대대(對待)를 생(生)하는 동시(同時)에 또한 신고(新故)의 대대(對待)가 사회내(社會內)의 운동(運動)을 일으키는 소이(所以)이다.
고래(古來)로 전제독재(專制獨裁)의 정치(政治)를 행(行)하는 사회(社會)는 국내(國內)에 일원적(一元的) 지배세력(支配勢力)을 수립(樹立)하려 하여 모든 대대세력(對待勢力)을 억제(抑制)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사회(社會)에는 지배세력(支配勢力)에 대(對)한 혁신운동(革新運動)이 일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정체(停滯)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대작용(對待作用)은 천지(天地)의 생존법칙(生存法則)이라, 현실(現實)의 지배세력(支配勢力)과 대대(對待)하고 있는 혁신세력(革新勢力)이 비록 표면(表面)에 나타나서 활발(活潑)히 동작(動作)치 못한다 하더라도, 사회(社會)의 깊은 오저(奧底)에는 역시(亦是) 대대력(對待力)이 잠행암류(潛行暗流)하여 은연(隱然)히 지배층(支配層)에 대항(對抗)하고 이 잠행력(潛行力)이 축적(蓄積)하여 일시(一時)에 용출(湧出)하는 때는 사회(社會)의 대변동(大變動)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배층(支配層)들은 항상(恒常) 자기(自己)들에게 향래(向來)하는 대항세력(對抗勢力)의 봉인(鋒刃)이 있을 것을 예상(豫想)하고, 그 봉인(鋒刃)을 타(他) 방면(方面)으로 전환(轉換)시키기 위(爲)하여 권모(權謀)와 술책(術策)으로써 인위적(人爲的) 대대작용(對待作用)을 조작(造作)하나니, 그 관용(慣用)하는 수단(手段)으로는 혹(或)은 외국(外國)에 대(對)한 강경외교(强硬外交)의 기치(旗幟)를 고게(高揭)하고 때때로 폭탄적(爆彈的) 선언(宣言)을 발(發)하여 국민(國民)의 주의(注意)를 대외관계(對外關係)에 전환(轉換)시키는 동시(同時)에 외국(外國)에 대(對)한 적개심(敵愾心)을 환기(喚起)하여 자기(自己)들에게 향래(向來)하는 반항력(反抗力)을 마비(麻痺)시키고, 혹(或)은 국내(國內)에 어떤 사건(事件)이 발생(發生)함을 교묘(巧妙)히 이용(利用)하여 고의(故意)로 과장선전(誇張宣傳)하여 국민(國民)의 이목(耳目)을 그 방면(方面)에 집주(集注)시켜 그 사건(事件)과의 대대작용(對待作用)을 행(行)케 하는 것이니, 이가 모두 인생사회(人生社會)에는 대대작용(對待作用)이 없지 못한 소이(所以)이오, 지금 공산주의(共産主義) 국가(國家) 같은 것이 전제독재정치(專制獨裁政治)의 산 표본(標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조대대(人造對待)는 사회(社會)의 자연(自然)스러운 생존작용(生存作用)으로 부터 출래(出來)한 것이 아니므로, 그 사회내부(社會內部)에는 지배층(支配層)에 대(對)한 항쟁세력(抗爭勢力)이 부단(不斷)히 움직이고 있어, 사회(社會)에는 운동(運動)이 지식(止息)치 아니하는 것이다.
더욱이 사회(社會)는 거대(巨大)한 조직(組織)이라 편승편패(偏勝偏敗)하는 일이 거의 없고, 혹시(或是) 일시적(一時的)으로 그러한 현상(現狀)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항구(恒久)히 계속(繼續)되는 것이 아니며, 또 혹(或)은 자체(自體)의 내부(內部)에서 분열작용(分裂作用)이 일어나서 다시 대대양면(對待兩面)을 생(生)하는 일도 있는 것이다. 사회(社會)에 양세력(兩勢力)이 상쟁(相爭)하다가 어느 일편(一便)이 폐절(廢絶)되는 때에 독존(獨存)한 세력(勢力)은 독음(獨陰)이 되고 다시 대대(對待)되는 세력(勢力)이 생(生)치 못하면 사회(社會)의 생존운동(生存運動)이 행(行)치 못하여 침체(沈滯) 부패(腐敗)하는 것이나 사회(社會)는 생생(生生)하여 궁(窮)치 아니하는지라, 반드시 그 독음체내(獨陰體內)에서 상반(相反)되는 양작용(兩作用)이 생(生)하여 필경(畢竟) 분열(分裂)에 의(依)하여 운동(運動)을 행(行)하는 것이다. 생물(生物)의 생식작용(生殖作用)으로써 보면 고등생물(高等生物)은 모두 음양성(陰陽性)이 이체(異體)로 되어 서로 대대(對待)하여 생식(生殖)의 공(功)을 이루고 있지만 저급생물중(低級生物中)에는 음양성(陰陽性)이 동체내(同體內)에 병존(竝存)한 것도 있고 최하층생물(最下層生物)에 이르러서는 자체(自體)의 분열작용(分裂作用)에 의(依)하여 생식(生殖)하고 있는지라, 사회(社會)도 민도(民度)가 높은 곳에서나 또는 높은 시대(時代)에는 대대(對待)되는 양세력(兩勢力)이 존립(存立)하여 사시(四時)의 서(序)가 자연(自然)스럽게 대사(代謝)함과 같이, 어느 일세력(一勢力)이 정권(政權)을 잡고 있다가 인심(人心)이 향응(向應)치 아니하면 곧 정권(政權)을 대대(對待)되는 세력(勢力)에게 양도(讓渡)하고 야(野)에 내려와서 실력(實力)을 양성(養成)한 후(後)에 다시 출발(出發)하여 사시순환(四時循環)의 이(理)를 몸소 실천(實踐)하는 것이며, 민도(民度)가 저하(低下)한 사회(社會)나 시대(時代)에는, 한번 정권(政權)을 잡으면 인민(人民)의 향배여하(向背如何)를 불문(不問)하고 한 사유기(私有器)의 소유권(所有權)으로 생각하여 수중(手中)의 권력(權力)을 이용(利用)하여 백년독점(百年獨占)을 몽상(夢想)하는 것이니, 이러한 사회(社會)에는 순리(順理)로운 정권수수(政權授受)가 있을 수 없고 마침내 유혈(流血)의 혁명(革命)이 일어나거나 그러하지 아니하면 자체(自體)의 분열(分裂)에 의(依)하여 대대세력(對待勢力)이 생(生)하는 것이니, 아국(我國)의 이조정쟁사(李朝政爭史)같은 것은 귀족사회(貴族社會)의 대대운동(對待運動)의 자취를 확실(確實)히 보여주는 것이다.【註十二】
註一. 旣濟卦彖傳
註二. 繫辭下傳 第五章
註三. 繫辭上傳 第十二章
註四. 坤卦彖傳
註五. 乾卦大象傳
註六. 小過卦彖傳
註七. 大過卦彖傳
註八. 論語雍也篇
註九. 論語爲政篇
註十. 繫辭下傳 第五章
註十一. 離卦傳
註十二. 이조(李朝)의 파당대대(派黨對待)의 투쟁(鬪爭)은 멀리 세조(世祖)가 단종(端宗)과 육신(六臣)을 죽이고 탈위(奪位)한데서 발단(發端)하니, 당시(當時) 유신파(儒臣派)의 분노(憤怒)는 主로 공신척리파(功臣戚里派)를 향(向)하여 발사(發射)하고 성종(成宗)일대중(一代中)의 정치투쟁(政治鬪爭)은 전(專)혀 유신파(儒臣派)의 대(對) 공신척리파(功臣戚里派) 공격(攻擊)이다. 이 투쟁(鬪爭)이 연산시대(燕山時代)에 이르러 공신척리파(功臣戚里派)가 유신파(儒臣派)를 일망타진(一網打盡)하는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양성(釀成)하고 중종반정후(中宗反正後)에 조광조(趙光祖)등(等) 유신파(儒臣派)가 다시 등장(登場)하여 공신척리파(功臣戚里派)와의 격렬(激烈)한 투쟁(鬪爭)을 전개(展開)하더니 마침내 공신(功臣)삭탈문제(削奪問題)로 인(因)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보게 되고 중종(中宗)말년(末年)에 유신파(儒臣派)가 다시 거두(擧頭)하더니 명종(明宗)초년(初年)에 또 척리파(戚里派) 윤씨(尹氏)와 충돌(衝突)이 생(生)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만난 것이다. 선조(宣祖)이후(以後)에 비로소 유신파(儒臣派)의 천하(天下)가 되어 오랜동안의 숙분(宿憤)을 쾌설(快雪)하기는 하나 아직 척리파(戚里派)에 대(對)한 숙감(宿憾)이 풀리지 아니하던중(中) 사적(私的)으로는『김효원(金孝元)』대(對)『심의겸(沈義謙)』 공적(公的)으로는 유신파(儒臣派)대(對) 척리파(戚里派)의 대(對) 결전(決戰)이 일어나서 드디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라는 양당(兩黨)을 생(生)한 것이다. 그러나 세조(世祖)이후(以後) 백수십년간(百數十年間)의 정쟁(政爭)은 서로 대대작용(對待作用)을 행(行)하여 정쟁(政爭)의 의의(意義)가 있고 따라서 그 운동(運動)도 활기(活氣)를 띤 것이러니 동서분당(東西分黨)이후(以後)에 척리파(戚里派)는 다시 지평선(地平線) 상(上)에 올라오지 못하고 유신(儒臣)일색(一色)으로 정치(政治)를 운영(運營)하니, 이 때로 부터의 정쟁(政爭)은 종래(從來)와 같은 투쟁(鬪爭)대상(對象)이 있는 것도 아니오, 또 현실(現實)과 이상(理想)의 대립(對立)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정쟁(政爭)의 의의(意義)를 전연(全然) 상실(喪失)하니, 의의(意義)없는 정쟁(政爭)은 다만 권력(權力)과 모략(謀略)으로써 상대방(相對方)을 공파(攻破)하고 정권(政權)을 잡는 것이 유일(唯一)한 목표(目標)이라, 그러므로 동인(東人)은 마침내 서인(西人)을 구축(驅逐)하고 독천하(獨天下)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독천하(獨天下)는 또한 대대(對待)의 대상(對象)이 없는지라, 이에 자체(自體)분열(分裂)에 의(依)한 생식작용(生殖作用)을 행(行)하여 동인(東人)은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분파(分派)되고 북인(北人)은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분열(分裂)된 것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후(以後)에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이 조정(朝廷)에 공립(共立)하더니, 서인(西人)은 남인(南人)을 타도(打倒)한 후(後)에 다시 자체(自體)분열(分裂)에 의(依)하여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을 생(生)하여 대대작용(對待作用)을 행(行)한 것이다. 영조(英祖)이후(以後)에 소위(所謂) 탕평책(蕩平策)을 써서 당쟁(黨爭)의 휴전(休戰)을 도모(圖謀)하나 여의(如意)치 못하고, 주(主)로 노론(老論)이 용사(用事)하여 거의 독천하(獨天下)가 되더니, 이에 무당무파(無黨無派)를 표방(標榜)한 속칭(俗稱) 탕평당(蕩平黨)이 새로 출현(出現)하여 홍씨(洪氏)를 중심(中心)으로한 척리파(戚里派)가 재차(再次) 등장(登場)하니, 이 세력(勢力)은 비록 오래지 아니하여 제거(除去)된 것이나 척리파(戚里派)의 재등장(再登場)의 뿌리는 이미 부식(扶植)되고, 역사(歷史)는 여기서 일대환전(一大圜轉)하여 이래(爾來) 근백년간(近百年間) 왈조(曰趙), 왈김(曰金), 왈민(曰閔), 등(等) 척리(戚里)천하(天下)를 현출(現出)하고 유신파(儒臣派)는 다시 거두(擧頭)치 못하며, 척리(戚里)천하(天下)는 대대작용(對待作用)을 행(行)치 못하고 운동(運動)이 지식(止息)하여 퇴폐(頹廢)와 부패(腐敗)의 일로(一路)를 향진(向進)한 것이다. 한편으로 이조(李朝)의 학술(學術)은 정주학(程朱學)이 독세력(獨勢力)을 차지하여 대대작용(對待作用)이 없고 사상계(思想界)의 침체(沈滯)를 초래(招來)하더니, 여러 차례의 정쟁(政爭)에서 패배(敗北)를 당(當)한 남인(南人)들은 새로운 방면(方面)에 진로(進路)를 개척(開拓)하여, 국리(國利)민생(民生)에 실천(實踐)할 수 있는 실사구시학(實事求是學) 즉(卽) 실학(實學)으로써 종래(從來)에 공리공론(空理空論)에 흐르고 있는 소위(所謂) 성리학(性理學)과 대대(對待)하니, 정치(政治)와 사회(社會)가 천부만패(千腐萬敗)한 이조(李朝)말기(末期)에 있어서 실학(實學)의 발생(發生)은 실(實)로 유일(唯一)한 생기(生氣)의 약동(躍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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