蒙古亂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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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古亂

崔忠獻이 權勢를 잡은 後에 政治가 어지러워서 蒙古의 勢力이 크게 밀려 들어와서 새 版局이 벌어졌다. 蒙古는 本是 外蒙古의 온온한 기슭에서 遊牧하는 部族이러니 成吉思汗(징기스칸)이 나서 四方의 여러 部族을 合쳐서 큰 勢力을 이루니 이는 崔忠獻이 한창 勢道를 부리던 熙宗때 일이다. 金나라가 蒙古의 힘에 눌림에 契丹의 貴族들이 遼東에서 일어나고 金의 叛將 蒲鮮萬奴는 지금의 間道地方을 根據地로 하여 東眞國을 세웠다. 그 後 高宗때에 이르러 遼東의 契丹族이 鴨綠江을 건너서 우리나라 地境 안으로 밀려들어와서 掠奪을 함부로 行하였다. 高麗는 軍士를 보내어 各地에서 契丹兵과 싸우는 中에 또 蒙古가 東眞과 聯合하여 契丹兵을 치기 爲하여 그 뒤를 따라 鴨綠江을 건너오니 國內에 四國軍隊가 어울려서 形勢가 極히 險惡하고 또 急迫하였다. 더욱이 高麗와 蒙古는 從來로 外交關係가 全然 없을 뿐만 아니라 그 人性이 强悍함으로 國內人心이 恟恟하였다.

이때 契丹兵은 앞으로 高句麗軍에게 막히고 뒤로 蒙眞聯合軍에게 쫓기어 西北面의 江東城에 들어가서 지키니 蒙古將 哈眞과 東眞將 完顔子淵이 그 뒤를 따라 江東城을 包圍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形勢가 甚히 危懼함을 보고 戰略과 外交에 能熟한 사람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리라 하여 趙冲을 元帥로 하고 金就礪를 副元帥로 하여 軍士를 거느리고 蒙眞軍의 營에 가서 크게 酒宴을 베풀고 두 將帥를 接待하였다. 두 將帥는 우리나라 두 元帥의 人格이 매우 높음을 보고 慕仰함을 마지 아니하였다. 完顔子淵은 我人에게 말하되 高麗의 趙元帥는 奇偉한 사람이라 國家가 이러한 將帥를 둔 것은 天의 賜함이라 하고 哈眞은 金就礪를 보고 말하되 내가 일직 六國을 征伐하여 貴人을 만남이 많으되 兄의 얼굴을 보니 어찌 그렇게 奇偉한고 하여 稱讚하였다. 이에 세 나라 軍士는 江東城을 쳐서 契丹兵을 전全滅시킨 뒤 蒙塵과 和好를 맺고 無事히 돌려보냈었다. 이 亂에 歸降한 者가 말했는데 이들은 山林地帶와 荒蕪地에 移住시켜 農事짓게 하니 이를 契丹場이라 하고 契丹場에 들어간 者들 中에는 農事짓기 싫어하고 사냥과 皮革 柳器 等 手工業으로 轉業하는 者가 많았으니 이것이 大槪 後日의 所謂 소白丁 고리白丁等이 된 것이다.

滿洲 地方에서는 蒙古의 勢力이 밀려나와서 東眞國은 얼마後에 亡하고 蒙古는 高麗를 救援하였다. 高宗 十二年에 蒙古의 使臣이 高麗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鴨綠江을 건너가서 盜賊을 만나 죽은 일이 있음으로 蒙古에서는 이것을 트집 잡아 가지고 國交가 漸漸 險惡하더니 마침내 高宗 十八年에 第一次로 高麗에 쳐들어 왔다. 原來 滿蒙 地方에 뿌리를 잡은 國家들은,

一. 海洋을 가지지 못해서 海外로 發展할 길이 없고

二. 氣候가 추워서 蠶布 等 衣服 資料가 生産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蒙古가 처음으로부터 高麗를 빼앗을 慾心을 가지는 것도 이 海洋과 衣服 資料를 얻기 爲함이오 契丹兵이 뒤를 쫓아 나온 것도 高麗에 발을 부칠 口實을 얻으려 함이오 다시 高麗에 쳐들어 온 것도 自己들이 처음부터 慾心내던 일을 達成하기 爲함이다.

今後에 있어서도 蒙古方面에 立하는 나라는 海岸을 얻기 爲하여 반드시 가장 距離가 가까운 東海로 進出하려 할 것이오 더욱이 不凍港을 얻기 爲하여 반드시 我國 海岸에 着目할 것은 勿論이다. 蒙古軍이 쳐들어오면서 龜州城을 包圍하니 이때 龜州를 지키던 朴犀와 金慶孫 等이 여러 날 동안 蒙古軍과 싸워서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니 蒙古將 한 사람이 歎服하여 曰 내가 從軍한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城이 이와 같이 攻擊을 받고 屈치 않는 것은 처음 보았노라 城中 諸將들은 後日 반드시 將相이 되리로다 하였다.

그러나 高麗는 마침내 蒙古軍을 對敵치 못하여 그 이듬해 三軍이 蒙古軍에게 屈服하기에 이르렀다. 蒙古에서는 達魯花赤(다루가치)라는 官吏 七十二人을 보내와서 高麗의 內政을 干涉하였다. 이에 高麗 朝廷은 蒙古와 抗爭하려하여 崔忠獻의 아들 崔瑀가 當時 政權을 잡고 있는지라 王을 모시고 江華島로 들어가니 (檀紀 三千五百六十五年) 이는 蒙古軍이 陸地에서는 强하나 水軍이 없어서 바다에서는 힘쓰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三十年동안 蒙古의 軍士가 江華島의 便에 와서 아무리 威脅을 하고 出陸하기를 繼續하여도 崔瑀는 應하지 아니하니 그 忿풀이를 陸地에서 마음껏 하여 前後六次나 그들의 사나운 발굽이 鴨綠江 이쪽을 짓밟아서 西北面 一帶에는 百姓이 견디지 못하여 아주 마을이 비게 되었으며 敵軍은 멀리 慶州까지 쳐들어와서 虐殺과 擄掠을 마음대로 하였다.

大邱 符仁寺에 있는 大藏經版과 慶州 皇龍寺의 九層石塔이 불타 버린 것도 이 때이며 그들이 第六次로 들어 왔을 때는 高麗사람을 잡아 간 것이 二十萬名을 넘고 죽은 사람의 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高麗에서는 大藏經이 불타버린 것을 아깝게 생각하여 高宗王은 다시 發願하여 十六年동안의 努力으로 八萬大藏經版을 새기고 이 大藏經을 새겨 내기에 하도 힘들어서 더 簡便한 方法을 생각해 낸 것이 活字이다.

高宗 二十一年 (三千六百六十七年)에 이미 鑄字로써 冊을 박아내니 이는 獨逸사람들이 西洋에서 처음으로 活字를 만들어서 冊을 박아낸 것보다 二百年이나 앞섰다. 活字는 文明의 母라는 말이 있거니와 世界에서 가장 먼저 活字를 發明한 高麗는 亦是 文化의 先進國이었다.

宋나라 임금이 일부러 使臣을 보내와서 貴重한 冊을 빌려달라 하고 日本이 恒常 南洋의 珍奇한 物件을 가지고 와서 그 값으로 特히 大藏經을 나눠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高麗가 當時의 東洋에서 文化的으로 얼마나 높은 水準을 지니었던가를 알 수 있고 이러한 文化 속에서 맺어진 열매가 活字이었다.

江華島에 들어간 뒤 崔氏는 政權을 오로지 하여 私兵인 三別抄軍으로써 스스로 守備하여 陸地에 나가 싸운 일이 없고 오직 陸地軍隊에 對하여 抗戰을 命令할 뿐이며 西南岸地方으로부터 水路로 食糧과 其他 物資를 運輸해다 安樂한 生活을 繼續하였다.

高宗 四十五年에 崔氏와 三別抄軍사이에 틈이 생김을 利用하여 三別抄를 시켜서 崔氏를 滅하니 崔氏는 四世 六十餘年만에 亡하고 王이 直接 政治를 맡아보게 됨에 마침내 蒙古에 屈服하고 王子를 보내어 和親하기를 請하니 元나라(蒙古) 世祖 忽必烈이 뜻밖의 일로 생각하고 기뻐하여 曰 高麗는 萬里의 나라이라 唐太宗이 치다가 뜻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王子가 오니 이는 하늘이 시킴이라 하고 厚히 接待하고 軍士로 扈衛시켜서 本國으로 돌려보냈었다.

그 동안에 高宗이 昇遐하고 王子가 돌아와서 임금이 되니 이가 元宗이다. 元宗 時代는 戰爭이 겨우 끝나고 그 뒤를 整理하는 가장 複雜한 때라 첫째로 三十年동안 都邑하던 臨時首都 江華島로부터 松京에 還都한 것이오 둘째로 還都한 뒤 三別抄가 叛亂을 일으켜 珍島로 내려가서 官軍과 싸우다가 敗하여 다시 濟州道에 들어가더니 마침내 官軍에게 亡하였다.

이 三別抄의 亂에 對하여 지금의 어떤 學者는 三別抄의 亂으로써 蒙古에 抗戰하는 義擧라 하여 讚揚하고 있으나 三別抄는 元來 崔氏의 手足으로써 蒙古亂中 가장 安樂한 島中生活을 하고 抗敵의 陣에 參加한 일이 없고 崔氏가 亡한 뒤에 如前히 江華島에 있어 陸地에 나와 싸운 일이 없었으니 이것을 抗戰派라고 부를 수 없음은 勿論이오 還都後에 그 組織을 고쳐서 官軍으로 改編하려하매 그들은 過去의 特殊存在로서의 特權이 喪失됨에 不滿을 품고 叛亂을 일으킨 것이다.

셋째로 東北面의 雙域에 있는 官吏들이 本國을 背叛하고 和州 (永興) 以北의 땅으로써 元나라에 附屬한 것이다. 이로부터 元나라가 高麗의 宗主國 노릇을 하게 되었으며 元나라가 日本을 칠 터이니 高麗도 힘을 合하라 하여 忠烈王이 임금이 되던 해에 (檀紀 三千六百七年) 高麗에서 만든 戰艦 九百隻으로 合浦(지금의 마산부근)를 떠나서 對馬島와 壹岐島를 무찌르고 九州의 博多를 占領하였으나 暴風雨가 일어나서 戰艦이 많이 破損되었음으로 더 나가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그 後 七年만에 다시 蒙古軍과 中國의 江南軍과 高麗軍이 聯合하여 日本을 치러 갔으나 이번에도 大風이 일어나서 江南軍이 거의 全滅하고 헛되이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에 中國의 戰艦은 大槪 破損되었으나 高麗 戰艦의 破損 된 것이 極히 적은 것은 百濟時代 以來 我國의 造船技術이 優秀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高麗는 百餘年동안 元나라의 支配를 받는 사이에 나라 政治는 專혀 元나라의 意思에 依하여 行하여졌다. 忠烈王以後로는 代代로 王이 元나라의 公主에게 장가를 들어서 元나라 임금의 사위가 되고 그 公主가 낳은 아들이 王位에 오르게 되니 高麗王室은 血統的으로도 元나라의 支配를 받게 되었고 임금의 諡號는 從前의 宗字를 廢하고 그 머리에 忠字를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代代로 王이 元나라 大都에 別邸를 두고 거기 來往이 잦으니 그 費用도 적지 아니하여 國家財政이 極히 困難하였지만 政治의 命令系統이 헝클어져서 本國에서 發한 命令이 元나라 大都로부터 沮止 當하는 일도 있고 元나라에 阿附하여 權勢를 얻으려 하여 本國을 誣陷하는 吠主犬들이 兩國의 사이를 往來하면서 政府나 임금이 알지 못하는 政令을 發하는 일도 있어 나라 紀綱이 餘地없이 무너졌다.

이러한 吠主犬들은 甚至於 本國의 國號를 廢하고 元나라의 一地方으로 만들자는 運動까지 일어나니 忠宣王은 涕泣하면서 四百年 祖宗의 基業이 나의 몸에 이르러 떨어지게 되니 어찌 痛心한 일이 아니랴하고 李濟賢 等으로 더불어 元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겨우 無事함을 얻은 일도 있었다.

이때 王室로부터 民間에 이르기까지 元나라 風習이 흘러 들어오고 便으로는 文化의 輸入도 活潑하여 安珦이 孔子의 圖像과 儒敎儀式을 中國으로부터 直接 가져 온 것도 이때의 일이오 忠宣王은 元나라에 가서 萬卷堂을 이루고 趙孟頫等 大學者들과 사귀어 한때 大陸文化의 中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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