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과 유심론 (역학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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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唯物論)과 유심론(唯心論)

 

지금의 서양철학(西洋哲學)에 소위(所謂) 일원론(一元論)과 이원론(二元論)이 있고, 또 일원론중(一元論中)에 유물론(唯物論)과 유심론(唯心論)이 있는데 역리(易理)로써 보면 일원론(一元論)은 통일(統一)의 일(一)을 주(主)하고, 이원론(二元論)은 대대(對待)의 이(二)를 주(主)함이며, 또 유물론(唯物論)은 체(體)를 주(主)하고 유심론(唯心論)은 용(用)을 주(主)함이니, 이는 모두 생존작용(生存作用)의 반면(半面)을 말한 것이다. 특(特)히 유물론(唯物論)과 유심론(唯心論)은 물질(物質)과 정신(精神)의 생성(生成)에 선후(先後)의 순차(順次)와 주종관계(主從關係)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역리(易理)로써 보면 체(體)와 용(用)은 일물(一物)의 양면작용(兩面作用)이므로 물(物)이 생성(生成)하는때에 이미 체(體)와 용(用)이 함께 생성(生成)하는 것이오, 체(體)가 먼저 생성(生成)한 연후(然後)에 용(用)이 스스로 발생(發生)하는 것도 아니며, 또 용(用)이 먼저 발동(發動)한 연후(然後)에 체(體)를 조작(造作)하는 것도 아니니, 이는 만물(萬物)의 생성(生成)에 본체(本體)의 조직(組織)은 반드시 운행(運行)하는 작용(作用)을 수반(隨伴)하는 까닭이다. 물질(物質)은 체(體)이오, 작용(作用)은 용(用)이라, 물질(物質)과 작용(作用)의 발생(發生)에 선후(先後)의 순차(順次)가 있을 수 없고, 또 주종관계(主從關係)가 있을 수 없으니, 비록 일세초(一細草) 일미충(一微虫)이라 하더라도 그 물체(物體)가 있는 때에 반드시 자체(自體)가 운동(運動)할만한 힘과 작용(作用)이 부여(賦與)되는 것이오, 또 그만한 힘과 작용(作用)을 행(行)하기 위(爲)하여 그에 적응(適應)한 신체(身體)의 구조(構造)를 가지는 것이다. 인체(人體)의 물심조직(物心組織)으로 써 보더라도 육체(肉體)는 정(精) 즉(卽) 물질(物質)이니 체(體)가 되고, 정신(精神)은 기(氣)의 작용(作用) 즉(卽) 심(心)이니 용(用)이 되는지라, 육체(肉體)가 없으면 정신(精神)이 의착(依着)할 체(體)를 얻지 못하여 그 존재(存在)가 있을 수 없고, 정신(精神)이 없으면 육체(肉體)가 고무(鼓舞)하는 용(用)을 얻지 못하여 아무런 활동(活動)도 행(行)치 못하는 것이니 정신(精神)과 육체(肉體)는 그 생성(生成)에 선후(先後)의 순차(順次)가 있을 수 없으며, 또 신체(身體)의 조직면(組織面)으로 볼 때에는 육체(肉體)가 주(主)가 되고 정신(精神)이 종(從)이 되는 것이나, 그 운행면(運行面)으로 볼때에는 정신(精神)이 주(主)가 되고 육체(肉體)가 종(從)이 되나니 물(物)과 심(心)은 서로 주(主)가 되고 서로 종(從)이 되므로 양자(兩者)는 균등(均等)하여 주종관계(主從關係)가 없다. 생물(生物)의 생식작용(生殖作用)으로써 보더라도 음성(陰性)은 체(體)이오, 양성(陽性)은 용(用)이라, 음성(陰性)이 없으면 양성(陽性)은 독양(獨陽)이 되어 생(生)치 못하고 양성(陽性)이 없으면 음성(陰性)은 독음(獨陰)이 되어 성(成)치 못하나니, 독음독양(獨陰獨陽)은 모두 세세계승(世世繼承)의 공(功)을 이루지 못하여 생존작용(生存作用)이 폐절(廢絶)되는지라, 식물(植物)의 음양성(陰陽性)은 대체(大體)로 동일화중(同一花中)에 자웅양성(雌雄兩性)이 있거나 또는 동일경내(同一莖內)에 웅화(雄花)와 자화(雌花)가 있으며, 동물중(動物中)에도 동일체내(同一體內)에 음양양성(陰陽兩性)을 함유(含有)한 자(者)가 있으니 이는 모두 음양성(陰陽性)의 발생(發生)에 선후(先後)의 순차(順次)와 주종(主從)의 구별(區別)이 없음을 보임이다. 역(易)에「仁者見之謂之仁 知者見之謂之知 = 인(仁)한 자(者)가 견(見)하매 인(仁)하다 이르고, 지(知)한 자(者)가 견(見)하매 지(知)하다 이른다」【註七】하니, 인(仁)이라함은 물(物)을 애육(愛育)하는 작용(作用)이니 체(體)가되고, 지(知)라 함은 물(物)에 주류(周流)하여 적의(適宜)히 재제(裁制)하는 작용(作用)으로서 곧 의(義)의 정(精)함이니 용(用)이 되는지라, 천지(天地)가 만물(萬物)을 생육(生育)하는 작용(作用)에는 인(仁)과 지(知)의 양면(兩面)이 있는데 이 생육작용(生育作用)을 관찰(觀察)하고 있는 사람중(中)에는 그 기질(氣質)의 相異함을 따라서 그 所見이 또한 不同하여, 氣質이 인(仁)한 자(者)는 인(仁)의 면(面)만을 보고 기질(氣質)이 지(知)한 자(者)는 지(知)의 면(面)만을 보나니, 공자(孔子)가 역학(易學)을 지은 당시(當時)에 이미 체(體)를 주(主)하는 주인론(主仁論)과 용(用)을 주(主)하는 주지론(主知論)이 있은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에 체(體)를 주(主)하는 유물론(唯物論)은 주인론(主仁論)이라 할 수 있고, 용(用)을 주(主)하는 유심론(唯心論)은 주지론(主知論)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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