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는 생존의 기초 (역학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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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恒久)는 생존(生存)의 기초(基礎)

 

우리 인생(人生)은 항구(恒久)와 변화(變化)가 착종(錯綜)한 속에 살고 있는지라, 그러므로 고왕금래(古往今來)로 많은 사람들은 천지(天地)의 항구(恒久)한 체(體)의 면(面)을보고 천지(天地)의 유구(悠久)함을 부러워하며, 인생(人生)의 변화(變化)하는 용(用)의 면(面)을 보고 인생(人生)의 무상(無常)함을 한탄(恨歎)한 것이다.「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는 만고(萬古)의 절창(絶唱)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항구(恒久)와 변화(變化)의 뜻을 부영(賦詠)한 것이니 그 글에「羡長江之無窮 = 장강(長江)의 무궁(無窮)함을 이(羡)한다」함은, 고금(古今)이 여일(如一)하게 끝없이 흐르고 있는 장강(長江)의 항구(恒久)한 체(體)를 부러워 한 것이오, 「哀吾生之須臾 = 우리 인생(人生)의 수유(須臾)함을 애(哀)한다」함은, 이 세상(世上)에 역려과객(逆旅過客)과 같이 잠래선거(暫來旋去)하는 우리 인생일세(人生一世)의 변화(變化)하는 용(用)을 슬퍼한 것이며, 또 「自其變者而觀之則 天地曾不能以一瞬 自其不變者而觀之則 物與我 皆無盡也 = 그 변(變)하는 자(者)로부터 관(觀)하면 천지(天地)도 능(能)히 일순(一瞬)치 못하고 그 불변(不變)하는 자(者)로부터 관(觀)하면 물(物)과 아(我)가 모두 진(盡)함이 없다」함은, 그 변화(變化)하는 면(面)으로 보면 우리 인생(人生)뿐만 아니라 천지(天地)와 장강(長江)도 또한 일순간(一瞬間)의 정지(停止)함도 없이 항상(恒常) 변화(變化)하고, 그 불변(不變)하는 면(面)으로 보면 천지(天地) 장강(長江)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人生)도 또한 항구(恒久)한 것이라 하여, 변화(變化)의 속에 항구(恒久)가 있고 항구(恒久)의 속에 변화(變化)가 있음을 말함이다.

인생(人生)과 사회(社會)의 생존작용(生存作用)에 있어서 항구(恒久)의 체(體)라 함은 상수(常守)할 규모(規模)와 상처(常處)할 거지(居地)를 말함이라, 공자(孔子)의 말에「南人有言曰 人而無恒 不可以作巫醫 善夫 = 남인(南人)이 말을 두어 가로되 인(人)이 항(恒)이 없으면 가(可)히 써 무의(巫醫)를 작(作)치 못한다하니 선(善)한저」【註九】하니, 이는 남방인(南方人)의 속담(俗談)에 사람이 항구(恒久)한 조수(操守)가 없고 사변사개(乍變乍改)하면 인명(人命)을 치료(治療)하는 무의(巫醫)가 될 수 없다하니 그 말이 선(善)하다. 항(恒)이 없으면 무의(巫醫)도 될 수 없는데 하물며 일국(一國)의 인명(人命)을 담임(擔任)하는 위정자(爲政者)가 항(恒)이 없어서야 될 수 있으랴 함을 말함이오, 또 「善人吾不得而見之矣 得見有恒者 斯可矣 亡而爲有 虛而爲盈 約而爲泰 雖乎有恒矣 = 선인(善人)을 내가 얻어 볼 수 없으니 항(恒)이 있는 자(者)를 얻어 보아도 가(可)하리라, 없으되 있는 척하고 허(虛)하되 영(盈)한 척하고 적으되 많은 척하면, 항(恒)이 있기 어렵다」【註十】하니, 항(恒)은 만사(萬事)의 기반(基盤)이라 기반(基盤)이 공고(鞏固)한 연후(然後)에 인격(人格)도 수양(修養)되고 덕업(德業)도 진취(進就)되는 것이오, 항(恒)이 없는 사람은 경조(輕躁) 부박(浮薄)하여 외면(外面)만을 꾸미고 실천(實踐)이 없음을 말함이다.

가정생활(家庭生活)에도 항(恒)이 있어야 하나니, 역(易)에 父父 子子 兄兄 弟弟 夫夫 婦婦而家道正 正家而天下定矣 = 부(父)가 부(父)하고 자(子)가 자(子)하고 형(兄)이 형(兄)하고 제(弟)가 제(弟)하고 부(夫)가 부(夫)하고 부(婦)가 부(婦)하면 가도(家道)가 정(正)하고 가도(家道)를 정(正)하매 천하(天下)가 정(定)한다」【註十一】하여, 부자(父子)․형제(兄弟)․부부(夫婦)가 모두 자기(自己)의 지킬 바의 상도(常度)와 자기(自己)의 맡은 바의 상직(常職)을 어기지 아니하면 가도(家道)가 정제(正齊)하고, 국민(國民) 개개(個個)의 가도(家道)를 정제(正齊)하면 천하(天下)가 안정(安定)한다 함을 말하고, 또 가도(家道)를 정제(正齊)하기 위(爲)하여는 「言有物而行有恒 = 언(言)이 물(物)이 있고 행(行)이 항(恒)이 있다」【註十二】하니, 물(物)이라 함은 존비(尊卑) 상하(上下)의 등분(等分)이라, 부자(父子) 형제(兄弟) 부부(夫婦)가 그 언사(言辭)는 존비(尊卑) 상하(上下)의 등분(等分)을 차리고 그 행동(行動)은 항구(恒久)한 상도(常度)와 일정(一定)한 법칙(法則)이 있은 연후(然後)에 가도(家道)가 정제(正齊)한다 함이니. 이 글의 대지(大旨)는 천하(天下)의 안정(安定)함은 일가(一家)의 정제(正齊)로부터 시작(始作)하고, 일가(一家)의 정제(正齊)함은 일신(一身)의 언행(言行)으로부터 시작(始作)함을 말함이오, 大學書에「身修而後家齊 家齊而後國治 = 신(身)이 수(修)한 후(後)에 가(家)가 제(齊)하고 가(家)가 제(齊)한 후(後)에 국(國)이 치(治)한다」하는 말과 상통(相通)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국속어(我國俗語)에 「國家用人 先視其家 = 국가(國家)가 사람을 씀에 먼저 그 가(家)를 시(視)하라」하니, 이는 국가(國家)가 인재(人材)를 선택(選擇)함에는 먼저 그 사람의 가정(家庭)이 정제(正齊)되고 정제(正齊)되지 못함을 보라고 함이라. 부자(父子) 형제(兄弟) 처자(妻子)가 항상(恒常) 동정식(同鼎食) 공거처(共居處)하면서 그를 정제(正齊)할 수 없는 인재(人材)라면 그 사람이 일국(一國)의 대사(大事)를 맡아서 능(能)히 그 임무(任務)를 감당(勘當)할 수 없을 것이오, 평소(平素)에 언사(言辭)와 행동(行動)이 상도(常度)가 있다고 하면 그 가정(家庭)은 스스로 정제(正齊)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라 함을 말함이다.

가정(家庭)은 사회조직(社會組織)의 단위(單位)가 되는지라, 가도(家道)에 항(恒)이 있음과 같이 사회(社會)의 생존사업(生存事業)에도 또한 항(恒)이 있으니, 역(易)에「振恒在上大無功也 = 진항(振恒)으로 상(上)에 있으니 크게 공(功)이 없다」【註十三】하니, 이는 상위(上位)에 있는 자(者)는 반드시 항구(恒久)한 상도(常道)가 있은 연후(然後)에 사업(事業)의 실공(實功)이 이루어지고, 만일 경솔부동(輕率浮動)하고 조령모개(朝令暮改)하여 상도(常度)가 없으면, 민중(民衆)이 그 적종(適從)할 바를 알지 못하여 의혹(疑惑)이 생(生)하고 의혹(疑惑)이 생(生)하면 정령(政令)을 신(信)치 아니하여 사공(事功)이 이루지 못한다. 함을 말함이오, 또「聖人久於其道 而天下化成 = 성인(聖人)이 그 도(道)에 구(久)하매 천하(天下)가 화(化)하여 성(成)한다」【註十四】하니, 이는 성인(聖人)의 정치(政治)가 일정(一定)한 상규(常規)가 있으므로 천하(天下)의 인심(人心)이 점화(漸化)하여 미속(美俗)을 이룸을 말함이니, 누풍(陋風)을 미풍(美風)으로 개이(改移)하고 악속(惡俗)을 미속(美俗)으로 환역(換易)함에는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되는 것이 아니오, 반드시 항구(恒久)한 도(道)로써 점화(漸化) 점성(漸成)치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다. 국가(國家)의 정책(政策)같은 것도 비록 민중(民衆)의 실생활(實生活)에 적응(適應)하고 시의(時宜)에 합(合)하도록 변통(變通)하여야 할 것이나, 그 소위(所謂) 변통(變通)은 항구(恒久)한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기 위(爲)한 지도원리(指導原理)라든가 백년대계(百年大計)같은 것을 체(體)로 하지 아니하면 안되나니, 항구(恒久)한 체(體)가 없으면 정령(政令)이 사변사개(乍變乍改)하여 마침내 무질서(無秩序) 상태(狀態)에 빠지고 국가(國家)의 생존사업(生存事業)이 지리멸열(支離滅裂)하는 것이다.

아국(我國)의 역사(歷史)에 징(徵)하건대,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인성(人性)은 혼후(渾厚)하고 고려시대(高麗時代)는 직실(直實)하고 고려말(高麗末)에 경조(輕躁)의 풍(風)이 생(生)하여 이조(李朝)에 계승(繼承)된지라 【註十五】. 그러므로 삼국(三國)과 고려(高麗)는 인성(人性)과 정령(政令)이 모두 항구성(恒久性)이 있어 견실(堅實)하고, 고려말(高麗末)에 이르러 민간(民間)의 속담(俗談)에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라는 말이 생기고 이조(李朝)에 이르러 또 「조선공사삼일(朝鮮公事三日)」이라는 말이 생기니, 이는 민중(民衆)들이 정령(政令)이 항구(恒久)치 못하여 삼일(三日)만에 또 변개(變改)됨을 풍자(諷刺)한 말이다. 황방촌(黃尨村)은 세종(世宗)때의 명재상(名宰相)이라, 정부내(政府內)에 법령(法令) 변개론(變改論)이 일어나면 대개(大槪)「나는 변통(變通)의 재(才)가 핍(乏)하니 감(敢)히 변개(變改)하기를 의논(議論)할 수 없고 다만 성헌(成憲)을 준수(遵守)할 뿐이라」하여 응(應)치 아니하니, 이는 방촌(尨村)이 보수(保守)하여서 그런 것이 아니오 당시(當時) 인심(人心)이 경조(輕躁)하여 항구성(恒久性)이 없고 분운(紛紜)히 변개(變改)하기를 좋아하는 폐풍(弊風)을 진압(鎭壓)하기 위(爲)함이라, 이러한 명재상(名宰相)이 있는 까닭에 세종왕(世宗王)의 사업(事業)이 더욱 빛난 것이다,

註一. 恒卦彖傳

註二. 同上

註三. 繫辭下傳 第七章

註四. 屯卦彖傳

註五. 大哉以下는 乾卦彖傳이오, 至哉以下는 坤卦彖傳이다.

註六. 繫辭上傳 第一章

註七. 序卦傳上篇

註八. 屯卦彖傳

註九. 論語子路篇

註十. 論語述而篇

註十一. 家人卦彖傳

註十二. 家人卦大象傳

註十三. 恒卦上六爻小象傳

註十四. 恒卦彖傳

註十五. 아국(我國)의 인성(人性)에 대(對)하여 옛 사가(史家)들은 평(評)하되 삼국시대(三國時代)는 「혼후(渾厚)」하고, 고려시대(高麗時代)는 「직실(直實)」하다고 하며, 이조시대(李朝時代)에 대(對)하여는 세종왕(世宗王)은 말하되 「경조(輕躁)」하다고 하니, 혼후(渾厚)라 함은 체(體)가 돈후(敦厚)하여 항구성(恒久性)이 있고 용(用)이 주편(周遍)하여 안계(眼界)가 넓어서 자기(自己)의 사리(私利)보다도 국가통체(國家統體)의 이해(利害)를 더 크게 생각함이라, 그러므로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일반(一般)으로 겸양(謙讓)의 풍(風)이 대행(大行)하고, 관리(官吏)가 자기(自己)보다 유능(有能)한 자(者)에게 관직(官職)을 사양(辭讓)하는 일이 있고, 국가(國家)에 대난(大難)이 있으면 귀족(貴族)의 자제(子弟)가 먼저 창검(槍劍)을 짚고 궁시(弓矢)를 메고 선진(先陣)에 나서고 사졸(士卒)이 그 뒤를 따르니, 이는 평소(平素)에 국가(國家)의 후은(厚恩)을 특수(特殊)히 향수(享受)하고 있는 자(者)가 국난(國難)에 솔선출동(率先出動)하는 것이 당연(當然)한 의무(義務)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니 이가 아국사(我國史) 상(上)에 가장 광휘(光輝)있는 시대(時代)를 현출(現出)한 원동력(原動力)이오, 저 유명(有名)한 신라(新羅)의 화랑(花郞)도 또한 이러한 미질(美質)속에서 화생(化生)한 것이다. 신라(新羅)가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한 후(後)에 귀족계급(貴族階級)이 안일(安逸)을 탐(貪)하여 부패(腐敗)하기 시작(始作)하고, 고려(高麗)에 이르러서는 혼후(渾厚)의 기상(氣象)이 적어지나, 오히려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유풍여속(遺風餘俗)이 있어 그 기질(氣質)이 직실(直實)하니, 체(體)가 직(直)하면 용(用)이 환(圜)하는 것은 환직호근(圜直互根)의 법칙(法則)이라, 체(體)가 항구성(恒久性)을 띠고 용(用)이 통체(統體)에 주편(周遍)하여, 외구(外寇)가 있을 때에는 역시(亦是) 귀족(貴族)의 자제(子弟)가 전진(戰陣)의 선봉(先鋒)에 입(立)하여 능(能)히 십여차(十餘次)의 강구(强寇)를 대적(對敵)하고 선조(先祖)의 유업(遺業)을 수호(守護)한 것이다. 고려말엽(高麗末葉)으로부터 경조(輕躁)의 풍(風)이 생(生)하여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에 향교학생(鄕校學生)들이 병역(兵役)을 기피(忌避)하기 위(爲)하여 공자묘(孔子廟)를 지킨다는 구실(口實)로써 병역면제(兵役免除)를 정부(政府)에 요청(要請)하니, 당시(當時)의 정승(政丞) 염제신(廉悌臣)이 이를 절책(切責)하되 국난(國難)이 있을 때에 귀족자제(貴族子弟)가 먼저 출전(出戰)하는 것은 조종조(祖宗朝) 이래(以來)의 양풍(良風)이며 또 여등(汝等)이 공자묘(孔子廟)를 지키지 아니하면 공자위패(孔子位牌)가 어디로 도망(逃亡)간다드냐 하여 모두 군대(軍隊)에 편입(編入)한 일도 있다. 이조(李朝)에 이르러서는 경조(輕躁)의 풍(風)이 그대로 계승(繼承)되니, 경조(輕躁)라 함은 체(體)가 돈후(敦厚)치 못하여 항구성(恒久性)이 없고 용(用)이 의착(依着)할 근거(根據)가 박약(薄弱)하여 인성(人性)이 요동부유(搖動浮遊)하고 경박조급(輕薄躁急)함이라, 그러므로 소위(所謂) 문화(文化)는 허례허식(虛禮虛飾)과 무문농필(舞文弄筆)에 흐르고, 소위(所謂) 정치(政治)는 항구성(恒久性)을 상실(喪失)하여 조령모개(朝令暮改)하여 삼일공사(三日公事)의 폐(弊)에 빠지고 드디어 허위(虛僞)의 풍(風)을 생(生)하니 유명(有名)한 「이동고(李東皐)」의 임종유차(臨終遺箚)에 「今世之人 或有不事行檢 不務讀書而高談大言 結爲朋友者 以爲高致 遂成虛僞之風 = 금세(今世)의 인(人)이 혹(或) 행검(行檢)을 일삼지 아니하고 독서(讀書)를 힘쓰지 아니하고 높은 말과 큰말을 하여 결(結)하여 붕우(朋友)를 만드는 것을 써 고치(高致)라 함이 있어 드디어 허위(虛僞)의 풍(風)을 성(成)한다」하여, 붕당(朋黨)의 사(私)가 있음을 경계(警戒)하더니, 불과(不過) 수년(數年)에 망국(亡國)의 장본(張本)이 된 붕당(朋黨)의 파쟁(派爭)을 양성(釀成)하고 다시 삼국(三國) 고려(高麗)의 혼후직실(渾厚直實)의 유풍(遺風)을 찾아 볼 수 없이 된 것이다. 또 이 기질(氣質)의 변천(變遷)을 왕위계승(王位繼承) 문제(問題)로써 보건대, 군주(君主)는 연령(年齡)이 장성(長成)하고 국정(國政)을 통어(統御)할 능력(能力)이 있음을 제일조건(第一條件)으로 하나니, 그런 능력(能力)이 있은 연후(然後)에 군주(君主)를 중심(中心)으로 하여 국내(國內)의 모든 대대세력(對待勢力)이 교호작용(交互作用)을 행(行)하면서 통체(統體)의 통일작용(統一作用)에 귀일(歸一)하는 것이오, 만일 유아(幼兒)가 즉위(卽位)하면 국정(國政)을 통어(統御)하는 중심작용(中心作用)을 행(行)치 못하고 모든 대대세력(對待勢力)이 서로 분립(分立)하여 투쟁(鬪爭)만 있고 조화(調和)가 없어서 국정(國政)이 혼란(混亂)하는 것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인성(人性)이 혼후(渾厚)하고 이 원리(原理)를 잘 체득(體得)하여 육칠백년간(六七百年間)에 유군(幼君)을 세운 일이 없고, 왕자(王子)가 연유(年幼)하면 제질중(弟姪中)에서 선택(選擇)하여 세우고, 신라(新羅)같은 나라는 삼성(三姓)이 상전(相傳)하여 연령(年齡)이 장성(長成)하고 또 현명(賢明)한 자(者)를 세우고, 오직 고구려(高句麗)의 태조왕(太祖王)과 신라(新羅)의 진흥왕(眞興王)이 유년(幼年)으로 즉위(卽位)한 일이 있으나, 이는 아시(兒時)로부터 기위(奇偉)하여 장자(長者)의 풍(風)이 있다 하니 한 예외(例外)이오. 백제(百濟)에 한 유군(幼君)이 있으나 그는 적신(賊臣)의 옹립(擁立)한 자(者)이니 또한 문제외(問題外)이다. 신라(新羅)가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한 후(後)에 군주(君主)들은 일시(一時)의 안일(安逸)을 투취(偸取)하여 국가통체(國家統體)를 위(爲)하는 생각보다 자기(自己)의 혈통(血統)이 만대영화(萬代榮華)하기를 원(願)하는 욕심(慾心)이 앞을서서, 연장차현(年長且賢)한 제질(弟姪) 등(等)에게 왕위(王位)를 주지 아니하고 연유(年幼)한 왕자(王子)를 세우는 풍(風)을 생(生)하여, 소성왕(昭聖王)이 유자(幼子) 애장왕(哀莊王)에게 전위(傳位)하더니 마침내 그 숙부(叔父) 헌덕왕(憲德王)에게 죽고, 이로부터 왕위쟁탈(王位爭奪)의 추악(醜惡)한 전쟁(戰爭)이 전개(展開)된 것이다. 고려초기(高麗初期)에는 부자계승(父子繼承)뿐만 아니라 형전제수(兄傳弟受)한 일도 많더니, 중엽이후(中葉以後)에 이 풍(風)이 변(變)하여 유왕(幼王)의 즉위(卽位)하는 일이 생긴바, 그 결과(結果)는 역시(亦是) 길상(吉祥)치 못하여 헌종(獻宗)은 그 숙부(叔父) 숙종(肅宗)에게 축출(逐出)되고, 충정왕(忠定王)은 그 숙부(叔父) 공민왕(恭愍王)에게 죽으니, 연장(年長)한 제(弟)를 멀리하고 연유(年幼)한 왕자(王子)를 세우는 것이 반드시 화기(禍機)를 포장(包藏)하고 있음은 사실(史實)이 소연(昭然)한지라, 이조(李朝)에 이르러 다시 이 전철(前轍)을 밟아서 단종(端宗)이 또한 그 숙부(叔父) 세조(世祖)에게 죽으니, 실(實)로 후인(後人)으로 하여금 천진란만(天眞爛漫)한 유왕(幼王)들이 시대풍(時代風)의 화(禍)를 입어 횡액(橫厄)에 걸림을 통한(痛恨)케 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 사회(社會)는 이조시대(李朝時代)의 경조(輕躁)의 풍(風)을 그대로 상속(相續)하고 있는지라, 이 풍(風)을 변통(變通)치 아니하고는 정치(政治) 경제(經濟) 문화(文化) 등(等) 천시만설(千施萬設)이 모두 대과(大過) 동요(棟撓)의 상(象)이 되어 부박(浮薄)․퇴폐(頹廢)하여 이조시대(李朝時代)의 삼일공사(三日公事)를 재판(再版)치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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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본능 삼정과 사정 (역학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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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節 삼정(三情)과 사정(四情)

 

‣정대본능(正大本能)

 

 

천지만물(天地萬物)에는 공통(共通)으로 감응(感應) 췌취(萃聚) 항구(恒久)의 삼정(三情)이 있으나 오직 천지(天地)에는 삼정(三情)의 이외(以外)에 또 「정대(正大)의 정(情)」이 있다.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은 한 태일체(太一體)를 이루고 있어 천지(天地)의 이외(以外)에 따로 만물(萬物)이 있는 것이 아니오, 일월대지(日月大地)도 또한 만물(萬物)의 하나로서 만물(萬物)이 없으면 천지(天地)도 있을 수 없다. 다만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의 상이(相異)한 바는, 천지(天地)라 함은 태일체(太一體)인 통체(統體)를 말함이오, 만물(萬物)이라 함은 각(各) 부분(部分)인 개체(個體)를 말함이다. 그러므로 태일체(太一體)의 속에 포함(包含)되어 있는 만물(萬物)은 비록 태일체(太一體)의 일원(一員)이 되고 있으되 모두 독수(獨殊)한 개체(個體)를 가지고 통체(統體)의 일부분(一部分)을 이루고 있으니, 이 통체(統體)와 개체(個體)와의 상이(相異)가 곧 천지(天地)와 만물(萬物)과의 상이(相異)한 바이다. 천지태일체(天地太一體)의 조직(組織)은 천수만분(千殊萬分)한 물(物)을 한 계통(系統)에 연계(連繫)하여 스스로 혼연범위(渾然範圍)하여 편(偏)치 아니하니 이 작용(作用)을 정(正)이라 하고, 천지태일체(天地太一體)의 운행(運行)은 능(能)히 만물(萬物)에 관통(貫通)하고, 또 능(能)히 만물(萬物)을 통어(統御)하여 어느 일물(一物)의 유기(遺棄)함도 없이 스스로 통일운동(統一運動)을 행(行)하여 국(局)치 아니하니 이 작용(作用)을 대(大)라 하니, 천지(天地)의 작용(作用)은 스스로 정(正)하고 스스로 대(大)하여 이 정대작용(正大作用)이 한 본능(本能)으로 되어 있으므로, 역(易)에는 「正大而天地之情可見矣 = 정(正)하고 대(大)함에 천지(天地)의 정(情)을 가(可)히 견(見)한다」【註一】한 것이다.

천지태일체(天地太一體)의 조직(組織)과 운행(運行)에는 무위(無爲)히 또 자연(自然)히 발로(發露)하는 정대(正大)의 정(情)이 있으나, 만물(萬物)의 개체(個體)는 그 조직(組織)이 편(偏)하여 정(正)치 못하고 그 운행(運行)이 국(局)하여 대(大)치 못하니, 뇌풍(雷風) 수화(水火) 산택(山澤) 내지(乃至) 동물(動物) 식물(植物) 같은 것이 모두 일편(一便)의 임무(任務)밖에는 행(行)치 못함은 물론(勿論)이오, 일월대지(日月大地)와 같은 지거지대(至巨至大)한 물(物)도 또한 모두 개체(個體)로 되어 각기(各其) 독자적(獨自的)인 편국(偏局)한 기능(機能)밖에는 가지지 못하니, 이 까닭에 정대(正大)의 정(情)은 오직 천지태일체(天地太一體)에만 있고 만물(萬物)의 개체(個體)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 인생(人生)도 한 개체(個體)로 되어 있는지라, 또한 편국(偏局)하고 정대(正大)의 정(情)이 없으니, 이가 사람이 스스로 인간(人間)의 불완전(不完全)함을 탄식(歎息)하는 소이(所以)이다. 다만 사람은 그 신체(身體)의 조직(組織)이 천지태일체(天地太一體)를 통관(通貫)하고 그 정신(精神)의 운행(運行)이 능(能)히 정대작용(正大作用)을 본받을 수 있는 소질(素質)을 가지고 있으니, 이가 사람이 동물(動物)이나 식물(植物) 등(等)과 상이(相異)한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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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동식과의 비교 (역학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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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동식(動植)과의 비교(比較)

 

이제 동식물(動植物)과 사람을 비교(比較)하여 보건대 만물(萬物)은 그 조직(組織)에 따라서 천(天)에 본(本)한 자(者)와 지(地)에 본(本)한 자(者)가 있으니, 천(天)은 기(氣)의 유행(流行)함이므로 천(天)에 본(本)한 자(者)는 기(氣)가 강건(强健)하여 상(上)을 친(親)하고 지(地)는 정(精)의 응주(凝做)함이므로 지(地)에 본(本)한 자(者)는 정(精)이 후중(厚重)하여 하(下)를 친(親)하나니, 동물(動物)은 상(上)을 친(親)하는 자(者)이오, 식물(植物)은 하(下)를 친(親)하는 자(者)이다. 먼저 식물(植物)로써 보면 식물(植物)은 지중(地中)에 착근(着根)하여 지(地)에 본(本)함으로 스스로 유동(流動)치 못하고 그 섭취(攝取)하는 영양분(營養分)은 근착지(根着地)의 지미(地味)에 국한(局限)하고 기(氣)를 받음이 극(極)히 적으니 정신(精神)은 기(氣)의 작용(作用)이라, 식물(植物)은 하(下)를 친(親)하고 기(氣)가 적음으로 정신작용(精神作用)이 없고 오직 약간(若干)의 감각(感覺)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동물(動物)은 대개(大槪) 배부(背部)는 천(天)을 향(向)하고 복부(腹部)는 지(地)를 향(向)하여 체(體)가 횡재(橫在)하여 평면(平面)이 되고 있으므로 주(主)로 지(地)에 본(本)하여, 비록 그 체(體)가 자유(自由)로 유동(流動)하고 있으되 그 섭취(攝取)하는 바의 식물(食物)은 대개(大槪) 일정(一定)한 범위(範圍)에 국한(局限)하여 각미(各味)를 겸식(兼食)치 못하고 전(專)혀 편식(偏食)하고 있으니, 동물(動物)에 육서(陸棲) 수서(水棲) 식초류(食草類) 식육류(食肉類) 등(等)이 있는 것이 그 일례(一例)이오, 또 비록 호흡(呼吸)하고 있으되 기(氣)를 받음이 광대(廣大)치 못하고 정신작용(精神作用)이 극(極)히 편국(偏局)하여 과거(過去)에 대(對)한 기억(記憶)과 미래(未來)에 대(對)한 추상(推想)이 거의 없고 오직 현실생활(現實生活)에 지배(支配)되고 있으니, 사람도 음식(飮食)을 편식(偏食)하는 자(者)가 대개(大槪) 편성(偏性)이 되고 기(氣)의 부족(不足)한 자(者)가 대개(大槪) 정신(精神)이 건전(健全)치 못하여 그 생활(生活)과 일상(日常)의 활동(活動)이 주(主)로 현실생활(現實生活)에 편국(偏局)하고 있음은 이 까닭이다.

사람은 비록 동물(動物)의 일류(一類)에 소속(所屬)하여 그 삼정(三情)의 발로(發露)는 동물(動物)과 하등(何等)의 차이(差異)가 없으되, 오직 그 조직형태(組織形態)가 두부(頭部)는 천(天)을 향(向)하고 양족(兩足)은 지(地)를 밟아서 천지(天地)로 더불어 삼각(三角)의 자태(姿態)를 이루고 이 자태(姿態)는 직립체(直立體)로 되어 주(主)로 천(天)에 본(本)하여 천지태일체(天地太一體)를 통관(通貫)하고 있다. 소강절(邵康節)은 말하되 「動者體橫 植者體縱 人宜橫而反縱也 飛者有翅 走者有趾 人之兩手翅也 兩足趾也 飛者食木 走者食草 人皆兼之而又食飛走也 故最貴乎萬物也 = 동물(動物)은 체(體)가 횡(橫)하고 식물(植物)은 체(體)가 종(縱)하니 사람은 마땅히 횡(橫)할 것이나 도리어 종(縱)하다 비조(飛鳥)의 유(類)는 시(翅)가 있고 주수(走獸)의 유(類)는 지(趾)가 있는데 사람의 양수(兩手)는 시(翅)오, 양족(兩足)은 지(趾)이다. 비류(飛類)는 목(木)을 식(食)하고 주류(走類)는 초(草)를 식(食)하는데 사람은 양자(兩者)를 겸(兼)하고 또 비주(飛走)를 식(食)하니 이런 고(故)로 사람은 가장 만물(萬物)보다 귀(貴)하다」【註二】하니, 이는 사람은 동물(動物)이면서 또한 동물(動物)의 유(類)를 초월(超越)하여 체(體)가 직립(直立)하고, 그 동작(動作)은 조수(鳥獸)의 시지(翅趾)를 겸유(兼有)하여 양족(兩足)은 신체(身體)를 지탱(支撑)하고 양수(兩手)는 기구(器具)를 사용(使用)하며, 식물(食物)은 초목조수(草木鳥獸) 등(等)의 백미(百味)를 겸식(兼食)함으로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정신작용(精神作用)은 공간적(空間的)으로는 능(能)히 심원(深遠)을 탐색(探索)하여 자연계(自然界)의 비밀(秘密)을 개척(開拓)하고, 시간적(時間的)으로는 능(能)히 과거(過去)를 기억(記憶)하고 미래(未來)를 추상(推想)하며, 더욱이 자기(自己)의 정신력(精神力) 만으로는 오히려 부족(不足)하다고 생각하여 타인(他人)의 지식(知識)․기능(技能) 등(等)을 학내(學來)하여 자기(自己)의 정신력(精神力)을 보익배양(補益培養)하니, 이가 사람의 정신력(精神力)이 광원고대(廣遠高大)하여 멀리 동물계(動物界)를 초출(超出)한 소이(所以)이다. 소강절(邵康節)은 이를 설명(說明)하되 「能用天下之目 爲己之目 其目無所不觀矣 用天下之耳 爲己之耳 其耳無所不聽矣 用天下之口 爲己之口 其口無所不言矣 用天下之心 爲己之心 其心無所不謀矣 夫天下之觀 其于見也 不亦廣乎 天下之聽 其于聞也 不亦遠乎 天下之言 其于論也 不亦高乎 天下之謀 其于樂也 不亦大乎」= 「능(能)히 천하(天下)의 목(目)을 용(用)하여 자기(自己)의 목(目)을 삼으니 그 목(目)이 관(觀)치 못하는 바가 없고, 천하(天下)의 이(耳)를 용(用)하여 자기(自己)의 이(耳)를 삼으니 그 이(耳)가 청(聽)치 못하는 바가 없고, 천하(天下)의 구(口)를 용(用)하여 자기(自己)의 구(口)를 삼으니, 그 구(口)가 언(言)치 못하는 바가 없고, 천하(天下)의 심(心)을 용(用)하여 자기(自己)의 심(心)을 삼으니 그 심(心)이 모(謀)치 못하는 바가 없다. 천하(天下)의 관(觀)함이 그 견(見)함에 또한 광(廣)치 아니하랴, 천하(天下)의 청(聽)함이 그 문(聞)함에 또한 원(遠)치 아니하랴, 천하(天下)의 언(言)함이 그 논(論)함에 또한 고(高)치 아니하랴, 천하(天下)의 모(謀)함이 그 낙(樂)함에 또한 대(大)치 아니하랴」 【註三】하여, 성인(聖人)은 천하(天下)의 이(耳) 목(目) 구(口) 심(心)으로써 자기(自己)의 이(耳) 목(目) 구(口) 심(心)을 삼는 까닭에, 그 보는 것이 지광(至廣)하고 그 듣는 것이 지원(至遠)하고 그 의논(議論)하는 것이 지고(至高)하고 그 즐겨하는 것이 지대(至大)함을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사회(社會)를 조직(組織)하여 통체적(統體的)으로 영원(永遠)히 생존(生存)할 계획(計劃)을 수립(樹立)하고 윤리(倫理)와 도덕(道德)을 정(定)하여 공동생활(共同生活)의 질서(秩序)를 보전(保全)하고 있으니, 이 까닭에 사람을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라고 하는 것이오, 이 정신력(精神力)의 영이(靈異)함이 곧 정대작용(正大作用)을 본 받을 수 있는 소질(素質)이 되고 이러한 소질(素質)을 이성(理性)이라 한다.

이와 같이 사람은 한 면(面)으로는 동물(動物)과 다름이 없는 감정(感情)을 가지고, 한 면(面)으로는 사람 특유(特有)의 이성(理性)을 가지고 있으니, 감정(感情)은 체(體)오, 이성(理性)은 용(用)이다. 세간(世間)에서 흔히 사람을 감정적(感情的)동물(動物)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체(體)의 일면(一面)을 말하는 것이니 실(實)은 사람은 여러 동물중(動物中)에서 유일(唯一)한 이성적(理性的) 동물(動物)이다. 그러므로 삼정(三情)으로써 보더라도 색욕(色慾)은 동물(動物)과 다름이 없으되 또한 음양관계(陰陽關係)에 대(對)하여 혈연적(血緣的) 사회적(社會的)으로 엄격(嚴格)한 규정(規定)이 있으며 식욕(食慾)은 동물(動物)과 다름이 없으되 또한 재화(財貨)와 음식(飮食)에 대(對)하여 예의(禮儀)와 염치(廉恥)가 있어 취(取)할 바와 취(取)치 못할 바를 알며, 자존욕(自存慾)은 동물(動物)과 다름이 없으되 또한 타인(他人)을 위(爲)하고 사회(社會)를 위(爲)하여 자신(自身)의 생명(生命)을 희생(犧牲)하는 일이 있으니, 이것이 모두 이성(理性)으로부터 출래(出來)한 사람의 특유(特有)한 행위(行爲)이다. 이와 같은 이성(理性)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생(人生)은 반드시 정대작용(正大作用)을 본 받아서 모든 행위(行爲)로 하여금 정(正)하여 편(偏)치 아니하고, 대(大)하여 국(局)치 아니한 연후(然後)에 삼정(三情)의 발로(發露)가 모두 절도(節度)에 적중(適中)하여 조화(調和)함을 얻어 생존작용(生存作用)을 완수(完遂)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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