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원론'에 해당되는 글 108건
- 2013.09.16 한도와 절 (역학원론)
- 2013.09.16 삼현일장의 이 (역학원론)
- 2013.09.16 화는 중운동의 극치 (역학원론)
- 2013.09.16 이간의 우로 (역학원론)
- 2013.09.16 전례와 경건 (역학원론)
- 2013.09.16 언사와 풍악 (역학원론)
- 2013.09.16 예악의 근본정신 (역학원론)
- 2013.09.16 운명은 선천이오 자유의지는 후천이다 (역학원론)
- 2013.09.16 천명과 운명과의 관계 (역학원론)
- 2013.09.16 관상학의 원리 (역학원론)
- 2013.09.16 선천과 후천의 교호작용 (역학원론)
- 2013.09.16 사람의 생존하는 목적 (역학원론)
- 2013.09.15 본능은 생존목적을 달성하는 수단 (역학원론)
- 2013.09.15 무한한 즐거움 (역학원론)
- 2013.09.15 즐거움도 만인만색 (역학원론)
‣한도(限度)와 절(節)
만물(萬物)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이 중운동(中運動)에 합(合)하는 것은 절(節)이 있는 까닭이니, 절(節)이라 함은 물(物)의 발전(發展)이 그 한도(限度)에 지(止)함이다. 태양(太陽)의 열(熱)과 우로(雨露)의 윤(潤)이 비록 물(物)의 생존(生存)에 불가결(不可缺)한 것이나, 그 절도(節度)를 넘으면 한재(旱災)와 수해(水害)로 전화(轉化)하고, 주(晝)의 명(明)과 야(夜)의 유(幽)가 또한 물(物)의 생존(生存)에 불가결(不可缺)한 것이나, 주야(晝夜)의 장단(長短)이 그 절도(節度)를 넘는 지방(地方)은 물(物)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이 폐색(閉塞)되는 것이다. 초목(草木)의 근(根)․간(幹)․경(莖)․지(枝) 등(等)이 일기일복(一起一伏)하여 절(節)을 생(生)하고, 동물(動物)의 골격(骨格) 등(等)에 굴곡(屈曲)의 절(節)을 이루는 것은, 모두 자체(自體)의 생존상(生存上) 그 조직(組織)이 일정(一定)한 한도(限度)에 지(止)치 아니할 수 없음이다. 그러므로 역(易)에 「天地節而四時成 節以制度 不傷財 不害民 = 천지(天地)가 절(節)하여 사시(四時)가 성(成)하고 절(節)하여 써 도(度)를 제(制)하면 재(財)를 상(傷)치 아니하고 민(民)을 해(害)치 아니한다」【註十】하니, 이는 천지(天地)의 운행(運行)에 동지(冬至)․하지(夏至)와 춘분(春分)․추분(秋分)과 같은 절(節)이 있는 까닭에 사시(四時)가 자연(自然)스럽게 순환(循環)하여 물(物)을 생생(生生)하는 사공(事功)이 이루고 국가(國家)의 경비(經費)에 일정(一定)한 절도(節度)를 만들고 남용(濫用)함이 없으면, 국재(國財)의 모손(耗損)이 없고, 민생(民生)을 상(傷)치 아니함을 말함이니, 이가 곧 천지(天地)의 운행(運行)과 국가경제정책(國家經濟政策)의 중운동(中運動)이다.
사람의 일상생활(日常生活)에도 또한 허다(許多)한 절(節)이 있으니, 재화(財貨)의 소비(消費)에 절검(節儉)․절용(節用)이 있고, 음식(飮食)의 양(量)에 절음(節飮)․절식(節食)이 있고, 희로애락(憙怒愛樂)이 발(發)하여 절(節)에 중(中)함을 화(和)라 이르고, 행지진퇴(行止進退)가 그 분(分)을 넘지 아니함을 예절(禮節)이라 하며, 약(藥)은 비록 질병(疾病)을 치료(治療)하는 요제(要劑)이로되 그 용량(用量)이 절도(節度)를 넘으면 도리어 독(毒)으로 화(化)하고, 주(酒)는 비록 흥분제(興奮劑)이로되 그 음량(飮量)이 절도(節度)를 넘으면 도리어 마취제(痲醉劑)로 변(變)하여 유수(濡首)의 난(難) 【註十一】을 이르게 하는 것이다. 易에는 「甘節」「苦節」【註十二】이 있으니, 萬物의 味에 味의 適中함을 甘이라하고 味의 偏重함을 苦라 하나니, 함(鹹) 산(酸) 신(辛) 고(苦)가 절(節)에 중(中)함은 감절(甘節)이 되고, 절(節)을 지나가면 고절(苦節)이 되는 것이며, 육체(肉體)의 과로(過勞)와 심신(心神)의 과사(過思)를 고(苦)라 하는 것도 그것이 미(味)의 과절(過節)함과 같은 까닭이다.
그러나 사물(事物)이 절(節)을 과(過)하여 일변(一邊)에 편경(偏傾)한 때에 그를 교정(矯正)함에는, 대대균등(對待均等)의 이(理)에 의(依)하여 과절(過節)한 편경(偏傾)과 동등(同等)한 힘 즉(卽) 과절(過節)한 교정력(矯正力)을 가(加)한 연후(然後)에 비로소 중(中)에 돌아오는 것이니, 이 교정력(矯正力)은 상리(常理)로써 보면 과절(過節)하고 있으나 편경(偏傾)을 교정(矯正)하는 면(面)으로부터 볼 때에는 과절(過節)이 아니오 곧 중(中)이다. 역(易)에「過而亨 = 과(過)하여 형(亨)한다」【註十三】함은 절도(節度)를 과(過)함으로써 과오(過誤)가 변통(變通)되어 중(中)함을 말함이다. 예(例)컨대 사치(奢侈)의 풍(風)이 대행(大行)하는 때에 이를 교정(矯正)함에는, 사치풍(奢侈風)과 동등(同等)되는 강력(强力)한 검박풍(儉朴風)으로써 이를 극제(克制)한 연후(然後)에 중(中)에 돌아오는 것이오, 만일 미온(微溫)한 태도(態度)로써 효유(曉諭)․경계(警戒)하는 정도(程度)로서는 결(決)코 교정(矯正)되지 아니 하나니, 역(易)에「用過乎儉 = 용(用)함이 검(儉)에 과(過)한다」【註十四】함은, 재용(財用)이 과검(過儉)함은 절(節)을 지나는 것이나, 과검(過儉)이 아니면 중(中)에 돌아올 수 없는 때는 과(過)함이 마땅하다 함을 말함이다. 사물(事物)이 부패(腐敗)한 때는, 그 부패정도(腐敗程度)와 균등(均等)한 정도(程度)의 소청력(掃淸力)을 가(加)하지 아니하면 부패(腐敗)는 제거(除去)되지 아니하고, 사물(事物)에 타력(他力)의 억압(抑壓)이 있을 때는 그 억압력(抑壓力)과 균등(均等)한 저항력(抵抗力)으로써 반발(反撥)치 아니하면 그 억압(抑壓)은 해소(解消)되지 아니 하나니, 이 소청력(掃淸力)과 저항력(抵抗力)은 상리(常理)로써 보면 절(節)을 과(過)하고 있으나 부패(腐敗)․억압(抑壓)의 현실하(現實下)에서는, 도리어 중(中)이 되나니 이가 모두 「과이형(過而亨)」의 이(理)에 의(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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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현일장(三顯一藏)의 이(理) 절(節)이라 함은 그 한도(限度)에 지(止)하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스스로 수(數)가 있으니 천체(天體)의 운행(運行)으로써 보면 행성(行星)의 태양(太陽)에 대(對)한 공전주기(公轉週期)는 대략(大略) 금성(金星)이 이백이십사일(二百二十四日) 칠(七)이오, 대지(大地)가 삼백육십오일(三百六十五日) 이오(二五)이오, 화성(火星)이 육백팔십육일(六百八十六日) 구팔(九八)이오, 목성(木星)이 사천삼백삼십이일(四千三百三十二日) 오구(五九)이며, 월(月)의 운행(運行)은 일삭망월(一朔望月)이 이십구일(二十九日) 오삼(五三)이오, 일교점월(一交點月)이 이십칠일(二十七日) 이일(二一)인 것 등(等)이 모두 절(節)의 수(數)이다. 소강절(邵康節)은 생존작용(生存作用)의 삼현일장(三顯一藏)의 수(數)를 말하되 「天地之體數四 而用者三 不用者一 = 천지(天地)의 체수(體數)가 사(四)에, 용(用)하는 자(者)가 삼(三)이오 불용(不用)하는 자(者)가 일(一)이라」【註十五】하니, 이는 천지(天地)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은 그 체수(體數)가 사(四)인데 삼(三)만이 현용(顯用)하고 일(一)은 퇴장(退藏)하여 생존작용(生存作用)의 원(源)을 온축(蘊蓄)하여 써 현용(顯用)에 대비(對備)함을 말함이다. 천(天)의 사시(四時)에 동(冬)이 퇴장(退藏)하여 만물(萬物)이 귀로(歸勞)하고, 인신(人身)의 상하전후(上下前後)에 배(背)가 퇴장(退藏)하여 상하전(上下前)이 모두 홀로 운동(運動)하고 있으되 오직 배(背)는 홀로 운동(運動)치 못하고 지(地)의 사유(四維)에 극지(極地)가 퇴장(退藏)하여 만물(萬物)이 생육(生育)치 못하니, 이가 모두 삼현일장(三顯一藏)이다. 그러나 이 퇴장부(退藏部)는 모두 고장(庫藏)의 임무(任務)를 가지고 있으니 동(冬)은 명춘(明春)의 생육작용(生育作用)에 대비(對備)하여 대화(大和)를 보합(保合)하는 고장(庫藏)이오, 배(背)는 장부(臟腑)의 주요기관(主要器官)이 모두 배(背)에 계속(係屬)하여 일신(一身)의 생리(生理)를 주관(主管)하는 고장(庫藏)이니 이 불용(不用)하는 일(一)이 곧 가장 대용(大用)하는 일(一)이라, 대지(大地)의 극지(極地)도 또한 지력(地力)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을 위(爲)하여 어떠한 고장적(庫藏的) 임무(任務)를 다하고 있음이 틀림없는 일이다. 물(物)의 운행과정(運行過程)의 퇴장부(退藏部)는 생존작용(生存作用)이 지(止)하여 절(節)을 이루는 곳이라, 그러나 지(止)하여 절(節)을 이루고 있음은 영구(永久)히 지(止)함이 아니오, 그절(節)에서 종(終)을 이루는 동시(同時)에 또한 시(始)를 이루어 다시 출발(出發)하려하는 귀로처(歸勞處)이다. 동(冬)의 대화(大和)는 만물(萬物)의 성종성시(成終成始)하는 단계(段階)이므로, 역(易)에는 동춘(冬春)의 교(交)에 일년중(一年中) 최대(最大)의 절(節)이 결성(結成)한다 하여 「견다절(堅多節)」【註十六】의 상(象)이 있음을 말하고, 주공(周公)은 「冬日之閉凍也 不固則 春夏之長 草木也 不茂 = 동일(冬日)의 폐동(廢凍)함이 고(固)치 아니하면 춘하(春夏)의 초목(草木)을 장(長)함이 무(茂)치 못하다」【註十七】함은 동(冬)의 폐동(廢凍)은 일년(一年)의 대절(大節)을 이루어 물(物)의 다음 단계(段階)로 발현(發顯)할 정기(精氣)를 보합(保合)하고, 또 보합(保合)의 도(度)가 강(强)할수록 그에 정비(正比)하여 발현(發顯)의 도(度)가 또한 강(强)한 것인데, 폐동(廢凍)함이 강(强)치 못하면 다음해의 생장(生長)이 또한 무성(茂盛)치 못하다 함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물(物)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은 반드시 삼현일장(三顯一藏)의 이(理)에 의(依)하여 사(四)의 일(一)이 퇴장(退藏)하여 절(節)을 이루어 정기(精氣)를 보합(保合)치 아니하면 안되나니, 사람의 일일중(一日中) 동작(動作)과 수면(睡眠)같은 것도 대개(大槪) 사분지삼(四分之三)을 동작(動作)하고 사분지일(四分之一)을 수면(睡眠)하여 정기(精氣)를 축양(蓄養)하여 써 차일(次日)의 활동(活動)에 대비(對備)하고, 체력(體力)과 정력(精力)의 사용(使用) 같은 것도 또한 사분지일(四分之一) 정도(程度)의 여축(餘蓄)을 두지 아니하면 용력(用力)이 과도(過度)하여 심대(甚大)한 피로(疲勞)를 느끼는 것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 「遠輸則百姓貧 力屈財殫 中原內虛於家 百姓之費 十去其七 = 원수(遠輸)한즉 백성(百姓)이 빈(貧)하여 역(力)이 굴(屈)하고 재(財)가 다하여 중원(中原)이 내(內)로 가(家)가 허(虛)하고 백성(百姓)의 비(費)가 십(十)에 칠(七)을 거(去)한다」【註十八】하니, 십(十)의 칠(七)은 대개(大槪) 사분(四分)의 삼(三)이라, 전선(戰線)이 노원(路遠)하여 운송(運送)에 많은 재력(財力)을 소비(消費)하면, 자연(自然)히 병력(兵力)과 물자(物資)를 십(十)의 칠(七) 정도(程度)를 징발(徵發)하게 되어 백성(百姓)이 곤궁(困窮)하게 되는 것이므로, 백성공역(百姓供力)의 최대한도(最大限度)를 십(十)의 칠(七) 이내(以內)에 한지(限止)하여야 할 것을 말함이다. 지금에 국민(國民)의 식량문제(食糧問題) 같은 것도 국민(國民) 총생산량(總生産量)의 사분지삼(四分之三)이 일년중(一年中)에 소비(消費)되고 사분지일(四分之一)이 차년도(次年度)로 이월(移越)하여 써 항상(恒常) 여력(餘力)을 비축(備蓄)하는 것이 식량정책(食糧政策)의 이상(理想)이라고 하는 것도 또한 삼현일장(三顯一藏)의 이(理)에 명합(冥合)하는 것이다. 사람이 일상(日常)의 대인접물(對人接物)에도 이 이(理)가 있으니, 소강절(邵康節)은 말하되 「凡事爲之極 幾十之七則 可以止矣 = 무릇 사위(事爲)의 극(極)은 거의 십(十)의 칠(七)이면 가(可)히 써 지(止)할지라」【註十九】하니, 이는 예(例)컨대 음주(飮酒)함에는 주량(酒量)의 십(十)의 칠정도(七程度)에 지(止)하고, 분노(憤怒)가 발로(發露)하는 때는 십(十)의 삼(三) 정도(程度)를 인내(忍耐)하여 과도(過度)함을 후회(後悔)하는 일이 없게 하고, 권세(權勢)를 장악(掌握)하는 때에 십(十)의 삼(三) 가량(假量)을 타(他)에 양보(讓步)하여 독권전천(獨權專擅)한다는 혐기(嫌忌)를 피(避)하라 함을 말함이다.
四 九 二 三 五 七 八 一 六 註二. 論語爲政篇 註三. 史記管晏列傳 註四. 繫辭上傳 第十一章 註五. 洪範九宮圖는 다음과 같다 註六. 復卦彖傳 註七. 徐花潭 先生集 復其見天地之心篇 註八. 上註는 姤卦彖傳이오 下註는 姤卦大象傳이다 註九. 繫辭下傳 第一章 註十. 節卦彖傳 註十一. 未濟卦 上九爻 小象傳 註十二. 節卦九五 上六爻辭 註十三. 小過卦彖傳 註十四. 小過卦大象傳 註十五. 皇極經世觀物外篇上 이理를 八卦로써 보면 乾․坤․坎․離 四卦는 反易이 없음으로 原數대로 四가되고, 震과 艮은 反易함으로 一이되고, 巽과 兌는 또한 反易함으로 一이되어, 모두 合하여 六이 되니, 이는 體가 八이오 用이 六이다. 또 六十四卦로써 보면 乾․坤․坎․離․頤․大過․中孚․小過 八卦는 反易이 없음으로 原數대로 八이 되고, 그 나머지 五十六卦는 모두 反易함으로 二十八이 되어, 合하여 三十六이 되는데, 六十四는 八八의 因重이오 三十六은 六六의 因重이니, 이도 또한 體가 八이오 用이 六이다 八과 六은 곧 四와 三의 比이므로 八卦와 六十四卦는 三顯一藏의 象이 되는 것이다. 註十六. 說卦傳 第十一章 艮卦 註十七. 韓非子 解老論 註十八. 孫子 作戰篇 註十九. 皇極經世觀物外篇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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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節 중(中)과 화(和)
‣화(和)는 중운동(中運動)의 극치(極致)
천지(天地)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이 중운동(中運動)을 행(行)하고 있음은, 만물(萬物)로 하여금 모두 통일(統一)되어 화(和)를 얻게 하기 위(爲)함이니, 화(和)라 함은 그 체(體)의 조직(組織)은 각기(各其) 독자(獨自)하고 있으되, 그 용(用)의 운행(運行)은 서로 자연(自然)스럽게 조화(調和)하여 편(偏)치 아니하고 국(局)치 아니한 상태(狀態)를 말함이다. 그러므로 생존작용(生存作用)의 본원(本源)이 되고 있는 천지(天地)․산택(山澤)․뇌풍(雷風)․수화(水火)의 팔물(八物)도 또한 운행(運行)하여 이 화(和)의 작용(作用)을 행(行)하는 것이다.
천지(天地)의 지건지순(至健至順)한 덕행(德行)은 이간(易簡)이되고, 산택(山澤)의 비고진열(卑高陳列)한 형상(形狀)은 질서(秩序)가 되고, 뇌풍(雷風)의 동(動)하고 요(撓)하는 작용(作用)은 성기(聲氣)가 되고, 지상(地上)의 수화(水火)는 곧 천상(天上)의 일월(日月)이라, 수화(水火)와 일월(日月)은 천지(天地)의 중기(中氣)로서 조절작용(調節作用)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간(易簡)으로써 물(物)을 생생(生生)하고 질서(秩序)로써 물(物)의 순서(順序)와 정위(定位)를 정제(正齊)하고, 성기(聲氣)로써 물(物)을 고무(鼓舞)하고, 중기(中氣)의 조절작용(調節作用)은 천지간(天地間)을 운행(運行)하여, 냉(冷)으로써 열(熱)을 제(濟)하고 열(熱)로써 냉(冷)을 제(濟)하고, 한번 주(晝)하고 한번 야(夜)하여, 천지간(天地間)의 모든 대대관계(對待關係)를 조화(調和)하여 써 중운동(中運動)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社會)의 생존사업(生存事業)도 화(和)로써 극치(極致)를 삼나니 공자(孔子)의 정치론(政治論)에 「政寬則民慢 慢則糾之以猛 政猛則民殘 殘則施之以寬 寬以濟猛 猛以濟寬 政是以和 = 정(政)이 관(寬)한즉 민(民)이 만(慢)하나니, 만(慢)한즉 규(糾)하기를 맹(猛)으로써 하고, 정(政)이 맹(猛)한즉 민(民)이 잔(殘)하나니, 잔(殘)한즉 시(施)하기를 관(寬)으로써 한다. 관(寬)하여 써 맹(猛)을 제(濟)하고, 맹(猛)하여 써 관(寬)을 제(濟)하는지라, 정(政)이 이로써 화(和)한다」【註一】하니, 관(寬)은 유완(柔緩)함이오, 맹(猛)은 엄급(嚴急)함이오, 만(慢)은 태만(怠慢)함이오, 잔(殘)은 조잔(凋殘)함이라, 이는 정치(政治)는 화(和)로써 극치(極致)를 삼는데 관(寬)과 맹(猛)이 상제(相濟)한 연후(然後)에 화(和)를 얻을 수 있고, 또 관(寬)과 맹(猛)이 교호(交互)로 작용(作用)하여 가(可)히 편승편패(偏勝偏敗)치 못할 것을 말함이오, 또 말하되 「詩曰 不競不絿 不剛不柔 布政優優 百祿是遒 和之至也 = 시(詩)에 가로되 경(競)치 아니하고 구(絿)치 아니하고 강(剛)치 아니하고 유(柔)치 아니하고 정(政)을 포(布)함이 우우(優優)하니 백록(百祿)이 이에 주(遒)한다 하니 화(和)의 지극(至極)함이라」하니, 경(競)은 강(剛)함이오 구(絿)는 급(急)함이오 우우(優優)는 화(和)함이오 주(遒)는 취(聚)함이라, 이것도 강급강유(强急剛柔)가 모두 중(中)하고 절(節)하여 정치(政治)가 화(和)의 극처(極處)에 도달(到達)함을 말함이다.
사회(社會)의 생존사업(生存事業)에 있어서 천지(天地)의 이간(易簡)의 상(象)은 이간정치(易簡政治)가 되고, 산택(山澤)의 질서(秩序)의 상(象)은 전례(典禮)가 되고, 뇌풍(雷風)의 성기(聲氣)의 상(象)은 언사(言辭)가 되고, 수화(水火)의 조절(調節)의 상(象)은 조화(調和)가 되는 것이다. 원래(元來) 천지일월(天地日月)의 운행(運行)은 지대지건(至大至健)함으로 거기에는 스스로 질서(秩序)있는 행도(行度)가 정(定)하고 율동(律動)하는 성음(聲音)이 생(生)하나니, 이 행도(行度)와 성음(聲音)은 충어조수(虫魚鳥獸) 등(等)에 있어서는 동작(動作)과 명성(鳴聲)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언행(言行)이 되고, 정치(政治)에 있어서는 예악(禮樂)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수양론(修養論)과 정치론(政治論)에서 항상(恒常) 언행(言行)과 예악(禮樂)을 중요(重要)하게 말한 것은, 인생사회(人生社會)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은 반드시 천지일월(天地日月)의 질서(秩序)있는 행도(行度)와 율동(律動)하는 성음(聲音)을 본받아야 하는 까닭이오, 다시 팔물(八物)에 취(就)하여는 산택(山澤)에서 전례(典禮)의 상(象)을 취(取)하고 뇌풍(雷風)에서 언사(言辭)와 풍악(風樂)의 상(象)을 취(取)한 것이며, 또 이 뜻을 역경조직(易經組織)에 명시(明示)하니, 계사상전(繫辭上傳)의 초장(初章)으로부터 제칠장(第七章)에 이르기까지와 계사하전(繫辭下傳)의 초장(初章)과 종장(終章)에 이간(易簡)의 이(理)를 말하고, 계사상전(繫辭上傳)의 종장(終章)에 전례(典禮)를 말하고, 계사하전(繫辭下傳)의 종장(終章)에 언사(言辭)를 말하니, 이는 중운동(中運動)에 합(合)하는 생존사업(生存事業)을 행(行)함에는 이간(易簡)․전례(典禮)․언사(言辭)가 가장 중요(重要)한 행사(行事)라 함을 말함이오. 역경(易經)의 상편(上篇)에 수화(水火)로써 종(終)하고 하편(下篇)에 또 수화(水火)의 교불교(交不交)로써 종(終)한 것은, 천지(天地)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은 반드시 조화(調和)에 귀치(歸致)함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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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사와 풍악 (역학원론) (0) | 2013.09.16 |
‣이간(易簡)의 우로(憂勞)
사람이 천지(天地)로 더불어 삼재(三才)의 위(位)를 이루는 것은 사람에게 부여(賦與)된 천명(天命)이며, 이 삼재(三才)의 위(位)를 이루기 위(爲)하여는 역(易)에 「易簡而天下之理得矣 天下之理得而成位乎其中矣 = 이간(易簡)하매 천하(天下)의 이(理)가 득(得)하고 천하(天下)의 이(理)가 득(得)하매 위(位)를 그 중(中)에 이룬다」【註二】하니, 위(位)라 함은 삼재(三才)의 위(位)이오 중(中)이라 함은 천지(天地)의 중(中)이라, 사람이 이간(易簡)의 이(理)를 본받아서 사회(社會)의 생존사업(生存事業)을 행(行)하면, 일신(日新)하는 덕(德)이 가구(可久)하고 부유(富有)하는 업(業)이 가대(可大)하여, 삼재(三才)의 위(位)를 이룬다 함을 말함이다. 그러나 이간(易簡)의 이(理)를 본받아서 실천(實踐)함에는 반드시 우로(憂勞)치 아니하면 안되나니, 우로(憂勞)라 함은 시세(時勢)를 근심하고 세사(世事)를 걱정하는 지성(至誠)을 말함이니, 지성(至誠)은 진실(眞實)이므로 스스로 이간(易簡)의 길에 직통(直通)하는 것이다. 역(易)에 천지(天地)의 이간작용(易簡作用)을 말하되 「鼓萬物而不與聖人同憂 盛德大業 至矣哉 = 만물(萬物)을 고(鼓)하되 성인(聖人)으로 더불어 우(憂)를 한가지로 아니한다」【註三】하니, 이는 천지(天地)의 운동(運動)은 정대(正大)의 정(情)이 있어, 스스로 지성(至誠)하여 아무 사사(私邪)가 없고, 스스로 진실(眞實)하여 아무 허위(虛僞)가 없음으로, 만물(萬物)을 고무(鼓舞)하여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함에 스스로 이간(易簡)한 것이나, 사람은 정대(正大)의 정(情)이 없음으로 비록 성인(聖人)이라 하더라도 우(憂)하고 환(患)하고 노(勞)하고 면(勉)한 연후(然後)에 이간작용(易簡作用)에 합(合)할 수 있음을 말함이다.
이 우로(憂勞)라 함은 변설(辯舌)이나 문장(文章)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오 또 기월간(朞月間)을 면강(勉强)하여 학득(學得)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소위(所謂) 사상(思想)이나 주의(主義)같은 것도 우로(憂勞)하는 지성(至誠)을 체(體)로 하지 아니하면, 그 사상(思想)이나 주의(主義)가 의착(依着)할 근거(根據)를 얻지 못하고 허위(虛僞)에 흘러서, 한갓 세리(勢利)를 활쏘기하고 명예(名譽)를 낚시질하는 방편(方便)으로 되어, 스스로 기만(欺瞞)하고 세상(世上)을 기만(欺瞞)하여 크게 사회(社會)의 생존(生存)을 적해(賊害)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명(有名)한 악양루기(岳陽樓記)에는 「嘗求古仁人之心 居廟堂之高則憂其民 處江湖之遠則憂其君 是 進亦憂 退亦憂 然則何時而樂也 必曰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 = 일즉 고(古)의 인인(仁人)의 심(心)을 구(求)하건대 묘당(廟堂)의 고(高)에 거(居)한즉 그 민(民)을 우(憂)하고, 강호(江湖)의 원(遠)에 처(處)한즉 그 군(君)을 우(憂)하니, 이는 진(進)하여도 또한 우(憂)하고 퇴(退)하여도 또한 우(憂)함이라, 그런즉 하시(何時)에 낙(樂)하랴 반드시 가로되 천하(天下)의 우(憂)에 선(先)하여 우(憂)하고 천하(天下)의 낙(樂)에 후(後)하여 낙(樂)한다 할진저」하니, 이는 인인(仁人)은 벼슬에 있으면 민생(民生)을 근심하고 초야(草野)에 있으면 국사(國事)를 근심하여 진퇴(進退)가 모두 근심인데 오직 천하백성(天下百姓)을 모두 즐겁게 한 연후(然後)에 자기(自己)도 즐겨 하리라 함을 말함이니, 이 선우후락(先憂後樂)하는 심경(心境)이 곧 우국자(憂國者)의 마음이오, 이 마음에서 발로(發露)하는 행위(行爲)가 곧 이간작용(易簡作用)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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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典禮)와 경건(敬虔)
만물(萬物)이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함이, 비록 지잡지동(至雜至動)하되 조금도 혼란(混亂)치 아니함은 자연적질서(自然的秩序)가 있는 까닭이니, 이 질서(秩序)를 사람의 사회생활(社會生活)에 적용(適用)한 것이 곧 전례(典禮)이다. 역(易)에 「聖人有 以見天下之動 而觀其會通 以行其典禮 = 성인(聖人)이 써 천하(天下)의 동(動)함을 보고 그 회통(會通)을 관(觀)하여 써 그 전례(典禮)를 행(行)한다」【註四】하니, 회(會)라 함은 사세(事勢)가 반착(盤錯)하고 중리(衆理)가 취회(聚會)하여 허다(許多)한 곡직(曲直)․난이(難易)가 있는 곳이오, 통(通)이라 함은 회(會)의 속에 질색구애(窒塞拘礙)가 있음을 통활(通闊)하는 것이오, 전례(典禮)라 함은 사람이 떳떳이 지켜야할 전장(典章)․절도(節度)․윤서(倫序)․의칙(儀則) 등(等)과 같은 것으로서 사람의 행위(行爲)에 일정(一定)한 분도(分度)를 설정(設定)하여 항상(恒常) 경건(敬虔)한 태도(態度)를 가지고 유탕(流蕩)․방종(放縱)에 흐르지 아니하게 함이다. 물(物)의 운행과정(運行過程)에는 반드시 중리(衆理)의 착잡(錯雜)과 또 그를 통활(通闊)하는 도리(道理)가 있는데, 거기에는 전례(典禮)가 있은 연후(然後)에 사물(事物)이 순동(順動)하여 서로 문란(紊亂)치 아니하고 스스로 통(通)하는 것이오, 만일 전례(典禮)가 없으면 혼란분잡(混亂紛雜)하여 운행(運行)이 건체(蹇滯)되는 것이니, 사회(社會)가 도덕적(道德的)으로 무질서상태(無秩序狀態)에 빠지는 것은 전례(典禮)가 준행(遵行)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전례(典禮)를 준행(遵行)함에는 백천(百千)의 규정(規定)보다도 오직 경건(敬虔)하는 마음 하나가 주(主)가 되나니, 경건(敬虔)이라 함은 공경(恭敬)하고 엄숙(嚴肅)함을 말함이라, 공자(孔子)의 예론(禮論)에 「林放 問禮之本 子曰 大哉問 禮與其奢也 寧儉 喪與其易也 寧戚 = 임방(林放)이 예(禮)의 본(本)을 물은대 자(子) 가라사대 크다 물음이여 예(禮)가 그 사(奢)함으로 더불어 하곤 차라리 검(儉)할지오, 상(喪)이 그 이(易)함으로 더불어 하곤 차라리 척(戚)할지라」【註五】하여, 검소(儉素)와 애척(哀戚)이 예(禮)의 근본(根本)이 됨을 말하니, 검소(儉素)와 애척(哀戚)은 곧 경건(敬虔)하는 마음이다. 경건(敬虔)의 일이(一二) 예(例)를 들건대 음식(飮食)을 대(對)하여는 일죽일반(一粥一飯)이 그 내처(來處)의 용이(容易)치 아니함을 생각하고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먹는다면 주지육림(酒池肉林)하는 불검(不儉)이 없을 것이오, 의복(衣服)을 대(對)하여는 일사일루(一絲一縷)의 물력(物力)이 간난(艱難)함을 생각하고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입는다면 호화사치(豪華奢侈)하는 불손(不遜)이 없을 것이오, 사람을 대(對)하여는 비록 빈부(貧富)․강약(强弱)의 차(差)는 있을지언정, 각기(各其) 생존(生存)을 유지(維持)하기 위(爲)한 천부(天賦)의 인권(人權)이 있음을 생각하고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대(待)한다면 무리(無理)히 억압(抑壓)․유린(蹂躪)․침어(侵漁)하는 불순(不順)이 없을 것이니, 이러한 불검(不儉)․불손(不遜)․불순(不順)이 없다는 것이 곧 전례(典禮)가 준행(遵行)되어 사회(社會)의 질서(秩序)가 유지(維持)되는 소이(所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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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사(言辭)와 풍악(風樂)
천지(天地)에 율동(律動)하는 성음(聲音)이 있음과 같이,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성음(聲音)은 곧 언사(言辭)이니, 사람은 언사(言辭)로써 그 사상(思想)을 발표(發表)하고 사람과 접응(接應)하는 것이므로, 역(易)에는 언사(言辭)의 중요성(重要性)을 말하되 「亂之所生也 則言語以爲階 = 난(亂)의 생(生)하는바는 곧 언어(言語)가 써 계(階)가 된다」【註六】하여, 변란(變亂)이 생(生)하는 것은 모두 언어(言語)를 근신(謹愼)치 아니한 것이 그 발단(發端)이 됨을 말하고, 또 언사(言辭)로써 인물(人物)을 감식(鑑識)하는 방법(方法)을 말하되 「將叛者其辭慙 中心疑者其辭枝 吉人之辭寡 躁人之辭多 誙善之人其辭游 失其守者其辭屈 = 장차(將且) 반(叛)하려는 자(者)는 그 사(辭)가 참(慙)하고 중심(中心)이 의(疑)한 자(者)는 그 사(辭)가 지(枝)하고, 길인(吉人)의 사(辭)는 과(寡)하고, 조인(躁人)의 사(辭)는 다(多)하고, 선(善)을 경(誙)하는 사람은 그 사(辭)가 유(游)하고, 그 수(守)를 실(失)한 자(者)는 그 사(辭)가 굴(屈)한다」【註七】하니, 언사(言辭)라 함은 그 사람의 심정(心情)과 의사(意思)가 성음(聲音)을 통(通)하여 외부(外部)에 표현(表現)되는 것이므로, 언사(言辭)로써 그 위인(爲人)의 일반(一半)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마음은 진실(眞實)하되 변재(辯才)의 부족(不足)으로 인(因)하여 그 의사(意思)가 충분(充分)히 발표(發表)되지 못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언사(言辭)의 기(氣)에 중심(中心)의 진실(眞實)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며, 또 비록 음흉(陰兇)한 마음을 품고 교언령색(巧言令色)으로써 사람을 속인다 하더라도, 그 언사(言辭)의 기(氣)에 중심(中心)의 음흉(陰兇)이 스스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불의(不義)의 반심(叛心)을 품고 있는 자(者)는 중심(中心)에 반드시 참괴(慙愧)의 기(氣)가 동(動)하고 있으므로, 그 언사(言辭)에 참괴(慙愧)가 나타나는 것이오, 중심(中心)에 의혹(疑惑)을 품고 있는 자(者)는, 진행(進行)하는 방향(方向)이 확정(確定)치 못함으로, 그 언사(言辭)가 일직선(一直線)으로 나가지 못하고 여러 분지(分枝)로 되는 것이오, 정직성실(正直誠實)한 사람은, 소견(所見)과 이론(理論)이 명직(明直)함으로, 그 사(辭)가 소(少)하고 조동경박(躁動輕薄)한 사람은, 자기(自己)를 나타내기에 급(急)함으로, 그 사(辭)가 다(多)하고, 선량(善良)한 사람을 무해모략(誣害謀略)하는 자(者)는, 깊이 그 종적(蹤跡)을 숨기고 은밀(隱密)히 음해(陰害)를 붙이므로, 그 언사(言辭)에 근거(根據)가 없고 허공(虛空)에서 부유(浮游)하는 것이오, 중심(中心)에 확호(確乎)한 조수(操守)가 없는 자(者)는, 심주(心主)가 없어서 주장(主將)이 철저(徹底)치 못함으로, 그 언사(言辭)가 직통(直通)치 못하고 스스로 굴요(屈橈)한다 함을 말한 것이다. 역학(易學)은 사회(社會)의 생존(生存)하는 원리(原理)를 천명(闡明)한 학문(學問)이라, 사회(社會)의 제도(制度)가 아무리 미량(美良)하더라도 그의 운용(運用)을 그르치면 도리어 악제도(惡制度)로 화(化)하는 일이 있으므로, 역학(易學) 전체(全體)를 통(通)하여 현인(賢人)을 존상(尊尙)하고 현인(賢人)을 녹양(祿養)하는 것을 국가(國家)의 최대(最大) 길사(吉事)로하고, 따라서 인물(人物)의 선부(善否)를 감식(鑑識)하여 거용(擧用)하는 것이 극(極)히 중요(重要)한 일이므로, 특(特)히 언사(言辭)로써 감식(鑑識)하는 방법(方法)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 마음이 천지자연(天地自然)과 같이 진실(眞實)하고 조화(調和)하면 그 발로(發露)하는 언사(言辭)가 또한 자연(自然)스러워서 참사(慙辭)․지사(枝辭)․다사(多辭)․유사(游辭)․굴사(屈辭) 같은 것이 없고,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성(聲)에 합(合)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의 언사(言辭)를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성(聲)에 합(合)하게 함에는 성음(聲音)의 가장 조화(調和)되고 있는 풍악(風樂)을 통(通)치 아니하면 안되나니, 풍악(風樂)의 근본정신(根本精神)은 성음(聲音)의 소자출(所自出)하는 심흉(心胸)을 통창(通暢)케 하여 성정(性情)을 양(養)하고 그 사예(邪穢)를 탕척(蕩滌)하고 그 사재(渣滓)를 소융(消融)함에 있는지라, 역(易)의 예괘(豫卦)에 악(樂)을 대작(大作)함을 말한 것은, 화기(和氣)를 조장(助長)하여 정기(正氣)를 기르고 사심(邪心)을 막기 위(爲)함이오, 고어(古語)에 「移風易俗 莫善於樂 = 풍(風)을 이(移)하고 속(俗)을 역(易)함에는 악(樂)보다 선(善)함이 없다」함은, 야비(野卑)한 풍속(風俗)․음란(淫亂)한 풍속(風俗)․강폭(强暴)한 풍속(風俗) 등(等)을 변개(變改)하여 양풍미속(良風美俗)으로 만드는데는 풍악(風樂)을 통(通)하는 것이 가장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율동(律動)에 합(合)함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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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악(禮樂)의 근본정신(根本精神)
사회(社會)의 생존사업(生存事業)인 정치(政治)는 이간(易簡)으로써 정체(定體)를 삼고, 전례(典禮)와 풍악(風樂)으로써 대용(大用)을 삼고, 다시 조절작용(調節作用)으로써 중화(中和)를 만드는 것이니, 공자(孔子)의 정치론(政治論)에 항상(恒常) 「예악(禮樂)」을 말하는 것은 예악(禮樂)이 정치(政治)의 대용(大用)이 되는 까닭이다. 전례(典禮)는 엄숙(嚴肅)하고 풍악(風樂)은 화예(和豫)하니, 엄숙(嚴肅)이 편승(偏勝)하면 인심(人心)이 구속(拘束)되고, 화예(和豫)가 편승(偏勝)하면 인심(人心)이 유탕(流蕩)하는지라, 그러므로 엄숙(嚴肅)과 화예(和豫)가 양자상제(兩者相濟)하고, 또 중기(中氣)로써 조절(調節)하면, 엄숙(嚴肅)하되 구속(拘束)되지 아니하고, 화예(和豫)하되 유탕(流蕩)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례(典禮)와 풍악(風樂)은 형식(形式)과 근본정신(根本精神)이 양전(兩全)치 아니하면 안되나니, 전례(典禮)의 근본정신(根本精神)은 경건(敬虔)하는 마음이오, 풍악(風樂)의 근본정신(根本精神)은 언사(言辭)의 자연(自然)스러운 발로(發露)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의 예악론(禮樂論)에 「禮云禮云 玉帛云哉 樂云樂云 鍾鼓云哉 = 예(禮)라예(禮)라하니 옥백(玉帛)을 이름이랴, 악(樂)이라 악(樂)이라하니 종고(鐘鼓)를 이름이랴」【註八】하니, 이는 예악(禮樂)이라 함은 옥백(玉帛) 등(等) 폐물(幣物)이나 종고(鐘鼓) 등(等) 악기(樂器)를 말함이 아니오 예악(禮樂)의 근본정신(根本精神)을 이름이라 하여 당세(當世)의 사람들이 예악(禮樂)의 근본정신(根本精神)을 망실(忘失)하고, 오직 폐물(幣物)이나 악기(樂器)로써 예악(禮樂)이라고 하는 것을 평(評)한 말이니, 이간(易簡)․전례(典禮)․언사(言辭)는 역학(易學)의 생존사업(生存事業)의 총결론(總結論)이다. 그런데 논어(論語)의 최종장(最終章)에 있는 공자(孔子)의 말에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 = 명(命)을 알지 못하면 써 군자(君子)가 되지 못하고, 예(禮)를 알지 못하면 써 입(立)치 못하고, 언(言)을 알지 못하면 써 인(人)을 알지 못한다」【註九】하니, 이는 자기(自己)에게 어떠한 천명(天命)이 부여(賦與)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위해(危害)를 만날 때에 구차(苟且)히 도피(逃避)하려하고, 이익(利益)을 만날 때에 함부로 추부(趨附)하려하여 고상(高尙)한 인격(人格)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으며, 처신(處身)과 접인(接人)의 예절(禮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향(向)하는 곳마다 질애(窒礙)하여 세상(世上)에 입(立)할 수가 없으며, 사람의 언사(言辭)를 듣고 그를 감식(鑑識)치 못하는 사람은, 인물(人物)의 현우(賢愚)․사정(邪正)을 알지 못한다 함을 말함이다. 이 글의 지명(知命)은 이간(易簡)의 이(理)의 천명(天命)과 조응(照應)하고, 지례(知禮)는 전례(典禮)와 조응(照應)하고, 지언(知言)은 언사(言辭)와 조응(照應)하고, 양서(兩書)의 종장(終章)이 또한 서로 조응(照應)하고 있음은 역학(易學)과 논어(論語)와의 사이에 어떠한 통맥(通脉)이 있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註一. 左傳 魯昭公 二十年, 下句의 引用文도 同一하다.
註二. 繫辭上傳 第一章
註三. 繫辭上傳 第五章
註四. 繫辭上傳 第十二章
註五. 論語 八佾篇
註六. 繫辭上傳 第八章
註七. 繫辭下傳 第十二章
註八. 論語陽貨篇
註九. 論語 堯曰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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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章 운명(運命)과 자유의지(自由意志)
‣운명(運命)은 선천(先天)이오 자유의지(自由意志)는 후천(後天)이다
사람은 천지(天地)의 생존법칙(生存法則)의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천지(天地)가 운행(運行)하면 사람이 수종(隨從)하고 시운(時運)이 천동(遷動)하면 인사(人事)가 신기(新起)하나니, 해가 나오면 동작(動作)하고 해가 들어가면 휴식(休息)하며, 봄이 오면 경작(耕作)하고 가을이 오면 수확(收穫)함과 같은 것이 곧 인사(人事)가 천시(天時)를 수종(隨從)함이다. 천지(天地)와 시운(時運)은 유행(流行)하여 정식(停息)치 아니함으로 인사(人事)도 또한 잠시(暫時)도 정류(停留)치 아니하고 천지시운(天地時運)으로 더불어 함께 운동(運動)하나니, 역(易)에 「天下隨時 隨時之義 大矣哉 = 천하(天下)가 시(時)를 수(隨)하니, 시(時)를 수(隨)하는 의(義)가 대(大)하다」【註一】함은 이 뜻을 말함이다. 그러나 인사(人事)는 비록 천시(天時)를 수종(隨從)하여 운동(運動)하고 있으되 또한 사람의 의지(意志)로써 천시(天時)와 대대(對待)하는 작용(作用)을 행(行)하여 적의(適宜)히 재제변통(裁制變通)하여 생존작용(生存作用)에 적응(適應)케 하는 일이 있으니, 이가 곧 시의(時義)이오 사람이 시의(時義)를 행(行)함은 전(專)혀 자유의지(自由意志)의 힘이다. 그러나 소위(所謂) 자유의지(自由意志)는 생존법칙(生存法則)의 속에 살면서 대자연(大自然)과 대대(對待)하여 그를 이용(利用)하고 또는 개척(開拓)하여 인생(人生)의 생활(生活)을 미리(美利)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 뿐이오, 일보(一步)도 생존법칙(生存法則)의 범위외(範圍外)를 나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출생이전(出生以前)에 이미 조직(組織)된 형질(形質)이 있어 일정(一定)한 체형(體型)으로 구성(構成)되고 그 형질(形質)에 적응(適應)하여 정신(精神)이 의착(依着)하고 있으므로 비록 사람에게 의지(意志)의 자유(自由)가 있으되 그 자유(自由)에는 스스로 일정(一定)한 범위(範圍)와 한도(限度)가 있다. 원래(元來) 형질(形質)은 체(體)이오 정신(精神)은 용(用)이라 대대균등(對待均等)의 이(理)에 의(依)하여 생물(生物)의 정신작용(精神作用)은 그 형질(形質)에 적응(適應)하는 것이므로 형질(形質)의 조직여하(組織如何)에 따라서 그 의착(依着)하는 정신(精神)이 각이(各異)하니, 충어(虫魚)에는 충어(虫魚)의 형질(形質)에 적응(適應)한 정신(精神)이 의착(依着)하고, 조수(鳥獸)에는 조수(鳥獸)의 형질(形質)에 적응(適應)한 정신(精神) 밖에는 의착(依着)치 못하여, 충어(虫魚)가 아무리 공교(工巧)하더라도 고등동물(高等動物)과 같은 정신작용(精神作用)을 가질 수가 없고 조수(鳥獸)가 비록 영리(怜悧)하더라도 사람의 정신작용(精神作用)의 수준(水準)에 올라갈 수는 없으니, 이는 만물(萬物)의 형질(形質)이 조직(組織)될 때에 그 형질(形質)의 생존작용(生存作用)에 적응(適應)한 정도(程度)의 정신작용(精神作用)이 함께 의착(依着)하는 까닭이오 대대법칙상(對待法則上) 대체(大體)로 그 형질(形質)의 생존작용(生存作用)에 적응(適應)한 정도이상(程度以上)의 정신(精神)은 의착(依着)치 아니하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력(精神力)이 비록 영이(靈異)하다 하더라도 그 형질(形質)이 일정(一定)한 체형(體型)으로 응결(凝結)되고 그 의착(依着)한 정신(精神)도 스스로 거기에 적응(適應)치 아니할 수 없으므로 역시(亦是) 인류(人類)의 생존작용(生存作用)에 적응(適應)한 정신(精神)만을 가질 수 있고, 일보(一步)라도 그의 범위(範圍)와 한도(限度)를 넘어가면 거기에는 상상(想像)조차 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세계(世界)가 층생첩출(層生疊出)하나니, 대공간(大空間)의 극한(極限), 대시간(大時間)의 종시(終始), 종자(種子)의 기원(起源), 생명(生命)의 원시(原始) 같은 문제(問題)는 모두 사람의 정신력(精神力)으로서 해결(解決)할 수 없는 경지(境地)이다. 원류(猿類)나 가견(家犬) 등(等)이 아무리 지혜(知慧)롭다 하더라도 인간(人間)들이 음식(飮食)을 먹는 정도(程度)의 의미(意味)는 알 수 있을는지 모르나, 무슨 까닭에 학교(學校)의 교실(敎室)로 출입(出入)하고, 국회(國會)의 의사당(議事堂)으로 왕래(往來)하는지는 상상(想像)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니, 이는 교육(敎育)이나 정치(政治)가 원견(猿犬) 등(等)의 생활(生活)에 적응(適應)할 일이 아닌 까닭이다.
또 만물(萬物)은 모두 대대(對待)로 써 조직(組織)되어 청탁(淸濁)․정조(精粗)․후박(厚薄) 등(等)의 차이(差異)가 있으므로, 사람도 그 형질(形質)의 청탁(淸濁)․정조(精粗)․후박(厚薄) 등(等)에 따라서 그 정신작용(精神作用)에 불소(不少)한 차이(差異)가 있으니, 사람의 지혜(智慧)에 상지(上智)와 하우(下愚)의 구별(區別)이 있고 재능(才能)에 천리(千里)의 재(才)와 백리(百里)의 재(才)가 있고, 기예(技藝)에 특수(特殊)한 소질(素質)이 있는 것 등(等)은 모두 형질(形質)에 적응(適應)한 품성(稟性)의 차이(差異)이니, 소위(所謂) 교육(敎育)과 수양(修養)의 힘으로 써 사람마다 위대(偉大)한 인물(人物)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물(萬物)은 그 출생(出生)하는 때에 자체생활(自體生活)에 적응(適應)한 기관(器官)과 운동능력(運動能力)을 갖추고 있는지라, 사람도 형질(形質)이 출생(出生)하는 때에 그 형질(形質)의 생존작용(生存作用)에 적응(適應)한 정신(精神)이 의착(依着)되고 있으므로, 출생후(出生後)의 교육(敎育)과 수양(修養) 등(等)에 의(依)하여 그 의착(依着)된 한도(限度)까지는 우(愚)를 변(變)하여 지(智)를 만들고 야(野)를 변(變)하여 문(文)을 만들어, 써 개체(個體)와 통체(統體)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을 아울러 행(行)할 수가 있다. 만일 교육(敎育)과 수양(修養)이 없으면 그 의착(依着)한 천품(天稟)의 정신(精神)도 발휘(發揮)할수 없으니, 동일(同一)한 국내(國內)에서 지방(地方)에 따라서 민도(民度)의 상하(上下)와 문화수준(文化水準)의 고저(高低) 등(等)이 있는 것은 이 까닭이다.
그리하여 출생전(出生前)에 구성(構成)된 형질(形質)과 거기에 의착(依着)한 천성(天性)을 선천조직(先天組織)이라 하고, 출생후(出生後)에 그 형질(形質)에 적응(適應)한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는 사상(思想)을 후천운행(後天運行)이라 하며, 선천조직(先天組織)은 사상(思想)이 발생(發生)할 이전(以前)에 형성(形成)되어 천시(天時)를 수종(隨從)하는 것이므로 이는 운명(運命)이 되고, 후천운행(後天運行)은 자기(自己)의 사상(思想)으로 써 시의(時義)를 행(行)하는 것이므로 이는 자유의지(自由意志)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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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天命)과 운명(運命)과의 관계(關係)
역(易)에 「天道變化 各正性命 = 천도(天道)가 변화(變化)하여 각각(各各) 성명(性命)을 정(正)한다」【註二】하고, 또 「昔者 聖人之作易也 將以順性命之理 = 옛적에 성인(聖人)이 역(易)을 지음에 장차(將且) 써 성명(性命)의 이(理)를 순(順)한다」【註三】하니, 성(性)은 물(物)의 품수(稟受)한 천성(天性)이오, 명(命)은 천(天)의 부여(賦與)한 천명(天命)이니, 이 천명(天命)이라 함은 무엇이며, 운명(運命)과의 관계(關係)는 어떠한가. 천명(天命)이라 함은 물(物)의 형성(形成)됨과 함께 그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기 위(爲)하여 부여(賦與)되는 것으로서 부여(賦與)하는 면(面)으로 볼 때에는 천명(天命)이 되고, 품수(稟受)하는 면(面)으로 볼 때에는 천성(天性)이 되는 것이니, 중용서(中庸書)에 「天命之謂性 = 천(天)이 명(命)함을 성(性)이라 이른다」함은, 명(命)과 성(性)이 일물(一物)의 양면작용(兩面作用)임을 말한 것이다. 천명(天命)과 천성(天性)은 형질(形質)이 구성(構成)됨과 동시(同時)에 자체(自體)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기 위(爲)하여 부여(賦與)되고 품수(稟受)된 것으로서, 그 형질(形質)에 적응(適應)한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는 것은 천명(天命)에 속(屬)하고, 자체(自體)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기 위(爲)하여 사물(事物)을 적의(適宜)히 재제(裁制)하는 정신작용(精神作用)의 본원(本源)은 천성(天性)에 속(屬)하는 것이니, 즉(卽) 천명(天命)은 생존작용(生存作用)의 체(體)이오 천성(天性)은 생존작용(生存作用)의 용(用)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부여(賦與)된 천명(天命)은, 각개체(各個體)의 형질(形質)에 적응(適應)한 천성(天性)으로 하여금, 그 개체(個體)의 형질(形質)에 적응(適應)한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도록 운행(運行)하여, 사람의 생활(生活)로 하여금 그 형질(形質)에 적응(適應)한 범위외(範圍外)를 나가지 못하게 하니, 이가 곧 운명(運命)이오, 운명(運命)을 선천조직(先天組織)이라 함은 형질(形質)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이 천시(天時)를 수종(隨從)하는 동시(同時)에 또한 기정(旣定)된 천명(天命)에 지배(支配)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사람의 천성(天性)은 정(情)으로 발로(發露)하여 본능(本能)이 되고, 본능(本能)에는 계한(界限)이 없는지라, 이 계한(界限)없는 본능(本能)에 의(依)하여 무한(無限)히 창조(創造)하고 무한(無限)히 성장(成長)하고 또 무한(無限)히 구원(久遠)하려하는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지고 있으므로, 자유의지(自由意志)는 스스로 운명(運命)과 대대(對待)하게 되나니, 자유의지(自由意志)를 후천운행(後天運行)이라 함은 사상(思想)의 힘이 시의(時義)를 행(行)하는 동시(同時)에 또한 미래(未來)를 향(向)하여 발전(發展)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천명(天命)을 순(順)하는 때는 천명(天命)이 조우(助祐)하고 천명(天命)을 순(順)치 아니할 때는 천명(天命)이 조우(助祐)치 아니하고 또한 재앙(災殃)이 있나니, 역(易)에 「順天休命 = 천(天)의 휴명(休命)을 순(順)한다」【註四】하고 또 「天之所助者順也 = 천(天)의 조(助)하는 자(者)는 순(順)함이다」【註五】함은, 천명(天命)을 순(順)하는 자(者)를 조우(助祐)함을 말함이오, 「天命不祐行矣哉 = 천명(天命)이 우(祐)치 아니함을 행(行)하랴」【註六】함은, 천명(天命)을 순(順)치 아니하는 자(者)를 조우(助祐)치 아니함을 말함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천명(天命)과 천성(天性)을 아울러 가지고 있어, 그것이 운명(運命)과 자유의지(自由意志)로 되는지라, 그러므로 운명(運命)은 체(體)가 되고 자유의지(自由意志)는 용(用)이 되어, 통일체내(統一體內)에서 대대작용(對待作用)을 행(行)하고 대대균등(對待均等)의 이(理)에 의(依)하여 양자(兩者)는 서로 반반(半半)한 교호작용(交互作用)을 행(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함에는 반드시 운명(運命)의 경역(境域)과 자유의지(自由意志)의 범위(範圍)가 대대(對待)하고, 운명(運命)은 수렴작용(收斂作用)으로써 천명(天命)의 경역외(境域外)로 발전(發展)하는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제약(制約)하려하고 자유의지(自由意志)는 발현작용(發顯作用)으로써 기정(旣定)된 운명(運命)을 개척(開拓)하려 하나니, 고어(古語)에「인(人)의 화복(禍福)은 운수(運輸)에 있다」함은, 운명(運命)의 경역(境域)을 말함이오, 「사(事)의 성패(成敗)는 노력(勞力)에 있다」함은, 자유의지(自由意志)의 범위(範圍)를 말함이니 운수론(運數論)은 조직체(組織體)의 체대용소(體大用小)의 이(理)를 취(取)함이오, 노력론(努力論)은 운행력(運行力)의 용대체소(用大體小)의 이(理)를 취(取)함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활(生活)은 반(半)은 운명(運命)의 지배(支配)를 받고 반(半)은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의(依)하여 동작(動作)하고 있어, 운명(運命)으로부터 오는 화복(禍福)과 자유의지(自由意志)로부터 오는 성패(成敗)가 각기(各其) 반반(半半)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운명(運命)과 자유의지(自由意志)는 일물중(一物中)에 혼륜(渾淪)되어 있는지라, 그 한계(限界)에 대(對)하여는 어느 것이 자유의지(自由意志)의 범위(範圍)에 속(屬)하고, 어느 것이 운명(運命)의 경역(境域)에 속(屬)하는지는, 예지(豫知)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세간(世間)의 만사만물(萬事萬物)은 그것을 운명(運命)으로 해석(解釋)하면 운명(運命)이 아닌 것이 없고 또 자유의지(自由意志)로 해석(解釋)하면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아닌 것이 없다. 더욱이 자유의지(自由意志)의 역량여하(力量如何)에 따라서 운명(運命)에 속(屬)하는 경역(境域)에 스스로 광협(廣狹)․대소(大小)의 차(差)가 생(生)하는 것이니, 의지력(意志力)이 박약(薄弱)하여 오직 환경(環境)의 지배(支配)속에서만 생활(生活)하는 것은 운명(運命)의 경역(境域)이 광대(廣大)한 것이오, 그에 반(反)하여 모든 고난(苦難)을 무릅쓰고 환경(環境)을 개척(開拓)하고 나가는 것은 자유의지(自由意志)의 범위(範圍)가 광대(廣大)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능동적(能動的)으로 인사(人事)를 다하여 천명(天命)을 대(待)할 것이오, 다만 수동적(受動的) 태도(態度)로써 성패(成敗)와 화복(禍福)을 운명(運命)의 소관(所關)으로만 추탁(推托)할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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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학(觀相學)의 원리(原理)
사람이 향진(向進)하고 있는 미래(未來)의 경지(境地)는 실(實)로 유심(幽深)하여 예측(豫測)하기 어렵고, 또 자기(自己)에게 부여(賦與)된 천명(天命)이 무엇인가를 알기 어려운 것이니, 이 미래(未來)와 천명(天命)을 전지(前知)하려 하는 것은 인생(人生)의 최대(最大) 소원(所願)이며, 이 소원(所願)을 성취(成就)하기 爲하여 생겨난 것이 곧 관상학(觀相學)이다.
관상학(觀相學)은 역(易)의 상리(象理)를 응용(應用)한 것으로서 그 원리(原理)를 보면 충어조수(虫魚鳥獸) 등(等)은 각기(各其) 독자(獨自)한 형질조직(形質組織)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에 의착(依着)한 정신(精神)이 각이(各異)할 뿐만 아니라, 그 생활(生活)․수명(壽命) 등(等)이 또한 그 유(類)에 따라서 각이(各異)하니, 동물(動物)의 생활(生活)에 수서(水棲)․육서(陸棲)․비류(飛類)․주류(走類) 등(等)의 유(類)가 있고 그 천수(天壽)도 그 유(類)에 따라서 대개(大槪) 일정(一定)한 한도(限度)가 있어, 이삼월(二三月)의 물(物)이 있고 수년(數年)의 물(物)이 있고 혹(或)은 이삼십년(二三十年)․혹(或)은 수백년(數百年)의 물(物)이 있는 것이 그 일례(一例)이오, 이러한 생활(生活)․수명(壽命)은 그 유(類)의 천명(天命)이며, 만물(萬物)에는 모두 그의 형질(形質)의 조직여하(組織如何)에 따라서 천명(天命)이 각이(各異)함으로 그 습성(習性)과 운명(運命)이 또한 각이(各異)한 것이다. 이 이(理)에 의(依)하여 동일(同一)한 유(類)라 하더라도 각개(各個)의 형질조직(形質組織)이 상이(相異)한 때에 그 개성(個性)과 운명(運命)이 또한 상이(相異)할 것은 자명(自明)한 이(理)이다. 이와 같이 형질(形質)의 조직(組織)이 상이(相異)하면 개성(個性)과 운명(運命)이 또한 상이(相異)한지라, 사람도 인류(人類)라는 처지(處地)로써 보면 인류공통(人類共通)의 천명(天命)과 천성(天性)을 가지고 운명(運命) 성정(性情) 등(等)이 상동(相同)한 것이지만, 개인(個人)으로써 보면 전인류중(全人類中)에 동일(同一)한 용모(容貌)를 가지고 있는 자(者)는 일인(一人)도 없음과 같이 각개인(各個人)이 모두 독자(獨自)한 형질조직(形質組織)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독자(獨自)한 형질(形質)에 적응(適應)하여 개성(個性)이 상이(相異)함은 물론(勿論)이오 수요(壽夭)․현우(賢愚)․귀천(貴賤) 등(等) 운명(運命)도 각이(各異)치 아니할 수 없으니, 이것이 관상학(觀相學)의 원리(原理)이다. 그러나 운명(運命)은 선천조직(先天組織)에 속(屬)하고 자유의지(自由意志)는 후천(後天) 운행(運行)에 속(屬)하는데, 조직(組織)은 안정체(安貞體)로서 항구(恒久)하고 있으므로, 체(體)로써 운명(運命)을 예지(豫知)할 수는 있으나, 운행(運行)은 유동(流動)하는 용(用)으로서 부단(不斷)히 변화(變化)하고 있으므로, 용(用)으로써 운명(運命)을 예지(豫知)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관상학(觀相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네 가지가 있으니,
一.은 관상학(觀相學)은 골격(骨格)․형용(形容) 등(等) 체(體)의 조직(組織)으로써 운명(運命)을 점(占)함으로 인생생활(人生生活)의 체(體)에 속(屬)하는 부면(部面), 즉(卽) 부모(父母)․형제(兄弟)․처자(妻子)․재산(財産) 등(等)에 관(關)한 운명(運命)은 알 수가 있으나, 용(用)에 속(屬)하는 사상(思想)․학술(學術)․기능(技能) 등(等) 자유의지(自由意志)는 알기 어려운 것이다.
二.는 사람에게는 체대용소(體大用小)한 자(者)와 용대체소(用大體小)한 자(者)가 있는지라, 체대용소(體大用小)한 자(者)는 자유의지(自由意志)의 힘이 미약(微弱)하여 운명(運命)에 지배(支配)되는 면(面)이 광대(廣大)함으로 이러한 사람에 대(對)하여는 관상학(觀相學)으로써 그 운명(運命)을 알 수가 있으나, 용대체소(用大體小)하여 자유의지(自由意志)의 힘이 강대(强大)한 자(者)는 의지(意志)의 힘이 능(能)히 그 운명(運命)을 개척(開拓)하는 면(面)이 광대(廣大)함으로 운명(運命)을 예점(豫占)하기 어려운 것이다.
三.은 고래(古來)로 「골상(骨相)이 심상(心相)만 같지 못하다」하여, 사람을 음해(陰害)하고 불선(不善)을 적루(積累)한 자(者)는 길상(吉相)이 흉상(凶相)으로 변(變)하고, 사람을 제활(濟活)하고 음덕(陰德)을 적루(積累)한 자(者)는 흉상(凶相)이 길상(吉相)으로 변(變)한다는 뜻을 말하고, 수경집(水鏡集)이라는 상서(相書)에는 「사람을 상(相)하는 법(法)이 그 형용(形容)․골격(骨格)을 취(取)하는 자(者)가 십(十)의 오(五)이오, 그 가변(可變)함을 득(得)하는 자(者)가 또한 십(十)의 오(五)이라」하여, 불변(不變)하는 골격(骨格)과 가변(可變)하는 의지(意志)의 작용(作用)이 반반(半半)함을 말하니, 이 가변(可變)하는 면(面)이 있는 까닭에 운명(運命)을 예점(豫占)하기 어려운 것이다.
四.는 운명(運命)이라 함은 개인(個人)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個人)에게 운명(運命)과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있음과 같이 통체조직(統體組織)인 사회(社會)에도 또한 운명(運命)과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있으니, 역사(歷史)의 발전(發展)은 다만 자연환경(自然環境)에 의(依)하여 기계적(機械的)으로 일정(一定)한 기간(期間)에 일정(一定)한 단계(段階)를 밟아서 진행(進行)하는 것이 아니오, 거기에는 사람의 자유의지(自由意志)가 강력(强力)히 작용(作用)하여 있고 또 다만 국민(國民)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의(依)하여 임의(任意)로 건설(建設)․변개(變改)되는 것이 아니오, 거기에는 부단(不斷)히 운명(運命)의 제약(制約)을 받고 있으니 사회(社會)의 흥망(興亡)․성쇠(盛衰)도 또한 반(半)은 운명(運命)이오, 반(半)은 자유의지(自由意志)이다. 그리하여 개인(個人)과 사회(社會)는 대대관계(對待關係)로써 호근(互根)하고 있는지라, 개인(個人)의 운명(運命)과 사회(社會)의 운명(運命)이 교호(交互)로 작용(作用)하고, 개인(個人)의 의지(意志)와 사회(社會)의 의지(意志)가 또한 교호(交互)로 작용(作用)하여, 개인(個人)의 면(面)과 사회(社會)의 면(面)으로부터 오는 화복(禍福)이 또한 반반(半半)하고 있는 것이다. 전장(戰場)에서 다수(多數)한 생명(生命)이 일시(一時)에 상해(傷害)되는 것은, 그들의 운명(運命)이 모두 그날 그 시(時)에 상해(傷害)되기로 부여(賦與)된 것이 아니오, 국력(國力)이 부강(富强)하고 정치(政治)가 청신(淸新)한 나라의 국민생활(國民生活)이 모두 안락(安樂)한 것은, 그들의 운명(運命)이 모두 천복(天福)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이는 모두 사회(社會)로부터 오는 화복(禍福)이니, 그러므로 개인(個人)의 운명(運命)만으로서 화복(禍福)을 예점(豫占)치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화복(禍福)이 유래(由來)하는 길은 실(實)로 다기다양(多岐多樣)한지라, 그러므로 인생(人生)의 일생행로(一生行路)는 운명(運命)과 자유의지(自由意志)가 반반착종(半半着綜)한 미지(未知)의 지역(地域)을 탐검(探檢)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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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의 교호작용(交互作用)
운명(運命)은 선천(先天)에 속(屬)하고 자유의지(自由意志)는 후천(後天)에 속(屬)하나, 그러나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은 고정불변(固定不變)하는 것이 아니오, 금일(今日)의 선천(先天)은 곧 전일(前日)의 후천(後天)이며, 금일(今日)의 후천(後天)은 또한 후일(後日)의 선천(先天)이 되는 것이다. 전일(前日)의 부조시대(父祖時代)의 생활(生活)은 부조(父祖)가 자관(自觀)하면 부조(父祖)의 자유의지(自由意志)인 후천(後天)에 속(屬)하나, 금일(今日)의 아등(我等)으로서 반관(反觀)하면 아등(我等)의 운명(運命)인 선천(先天)이 되는 것이오, 또 아등(我等)의 금일생활(今日生活)은 아등(我等)이 자관(自觀)하면 아등(我等)의 자유의지(自由意志)인 후천(後天)에 속(屬)하나, 후일(後日)의 자손시대(子孫時代)로서 반관(反觀)하면 또한 자손(子孫)들의 운명(運命)인 선천(先天)이 되는 것이니, 우리의 부조(父祖)가 깊은 음덕(蔭德)을 심은 것은 부조(父祖)의 자유의지(自由意志)가 되나, 그 여음(餘蔭)으로 인(因)하여 우리가 행복(幸福)한 생활(生活)을 향유(享有)하고 있음은 우리의 운명(運命)이 되며, 우리 자신(自身)의 불근신(不謹愼)으로 인(因)하여 악질(惡疾)에 걸림은 우리의 자유의지(自由意志)가 되나, 그 악질(惡疾)로 인(因)하여 자손(子孫)들에게 악질(惡疾)을 유전(遺傳)함은 자손(子孫)들의 운명(運命)이 되는 것이다. 역(易)에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 선(善)을 쌓는 집은 반드시 여경(餘慶)이 있고, 불선(不善)을 쌓는 집은 반드시 여앙(餘殃)이 있다」【註七】하니, 선불선(善不善)을 쌓는 것은 선인(先人)의 자유의지(自由意志)인 후천(後天)에 속(屬)하는 행위(行爲)이나, 경앙(慶殃)을 받는 것은 후인(後人)의 운명(運命)인 선천(先天)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일(今日) 우리들의 후천의지(後天意志)에 의(依)한 국가건설방책(國家建設方策)의 선불선(善不善)은 곧 스스로 후일(後日) 우리 자손(子孫)들의 벗어날 수 없는 선천운명(先天運命)이 되는 것이다. 인류(人類)의 역사(歷史)는 유구(悠久)히 흘러가는지라, 우리가 천행(踐行)하고 있는 일상생활(日常生活)은 모두 유구(悠久)히 흘러가는 역사(歷史)의 한 마디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역사(歷史)의 한 마디에 처(處)하여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우리 자손(子孫)들의 선천운명(先天運命)을 창조(創造)하고 있는 것이다.
註一. 隨卦彖傳
註二. 乾卦彖傳
註三. 說卦傳 第二章
註四. 大有卦 大象傳
註五. 繫辭上傳 第十一章
註六. 無妄卦彖傳
註七, 坤卦文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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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章 결론(結論)
‣사람의 생존(生存)하는 목적(目的)
사람은 무슨 까닭에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問題)는 우리 인생(人生)의 사람마다 자신(自身)의 문제(問題)이다. 혹(或)은 먹기 위(爲)하여 산다 하고, 혹(或)은 살기 위(爲)하여 먹는다 한다. 만일 먹기 위(爲)하여 산다고 하면, 이는 사람의 사는 목적(目的)이 오직 먹는 데에 있을 뿐이오 다른 아무런 뜻도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먹는 것만이 사람의 사는 목적(目的)은 아니다. 또 살기 위(爲)하여 먹는다고 하면, 먹고살아서는 무엇을 하려는가, 아무런 할 일이 없이 다만 살기 위(爲)하여 산다고 하면, 이도 또한 사람의 사는 것이 아무런 뜻도 없고 희망(希望)도 없고 광명(光明)도 없고 스스로 염세증(厭世症)이 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다만 살기 위(爲)하여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역학(易學)은 이 문제(問題)에 대(對)하여 무엇이라고 해답(解答)하고 있는가.
역(易)에 「易簡而天下之理得矣 天下之理得而成位乎其中矣 = 이(易)하고 간(簡)하매 천하(天下)의 이(理)가 득(得)하고 천하(天下)의 이(理)가 득(得)하매 위(位)를 그 중(中)에 이룬다」【註一】하고, 또 「與天地相似故不違 = 천지(天地)로 더불어 서로 같은지라 고(故)로 위(違)치 아니한다」【註二】하고, 또 「夫大人者與天地合其德 = 그 대인(大人)은 천지(天地)로 더불어 그 덕(德)을 합(合)한다」【註三】하여, 사람이 이간정치(易簡政治)를 행(行)하여 천지(天地)로 더불어 삼재(三才)의 위(位)를 이루고 행위(行爲)와 덕업(德業)이 천지(天地)로 더불어 상사(相似)한 것이 곧 현인(賢人)․성인(聖人)․대인(大人)임을 말하니, 이는 천지(天地)는 현인(賢人)․성인(聖人)․대인(大人)의 준칙(準則)이 되고, 현인(賢人)․성인(聖人)․대인(大人)은 만인(萬人)의 준칙(準則)이되고 있으므로, 사람이 천지(天地)를 본받아서 천지(天地)와 상사(相似)하게 되는 것이 곧 사람의 살고 있는 목적(目的)이라 함을 말함이다. 그러면 천지(天地)라 함은 무엇을 말함인가, 역리(易理)로써 보면 천지(天地)는 무한(無限)히 부성(富盛)하고 무한(無限)히 광대(廣大)하고 또 무한(無限)히 구원(久遠)하니, 만물(萬物)을 부유(富有)하여 포함(包涵)치 아니함이 없는 것이 곧 부성(富盛)이오, 제애(際涯)가 없이 넓고 큰 것이 곧 광대(廣大)이오, 일신우신(日新又新)하여 끝없이 계승(繼承)하는 것이 곧 구원(久遠)이다. 그러므로 부성(富盛)․광대(廣大)․구원(久遠)이 곧 사람의 사는 목적(目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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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本能)은 생존목적(生存目的)을 달성(達成)하는 수단(手段)
그런데 사람에게는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는 삼정(三情) 즉(卽) 삼본능(三本能)이 있으니, 본능(本能)은 사람이 출생(出生)할때에 천지(天地)로부터 품수(稟受)한 것으로서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는 발단(發端)이 되는 동시(同時)에 또한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는 수단(手段)이 되는 것이니, 수단(手段)과 목적(目的)은 체용관계(體用關係)로써 호근(互根)하고 있어, 그 수단(手段)이 있는 곳에 반드시 목적(目的)이 있는지라 그러므로 본능(本能)의 속에는 생존(生存)의 수단(手段)과 목적(目的)이 함께 함재(含在)되어 있는 것이다. 감응본능(感應本能)은 음성(陰性)과 양성(陽性)이 상교(相交)하여 차세대(次世代)를 무한(無限)히 창조번연(創造蕃衍)하려 하나니 이는 천지(天地)의 부성(富盛)을 본받음이오, 췌취본능(萃聚本能)은 식물(食物)을 섭취(攝取)하여 자체(自體)를 무한(無限)히 성장확대(成長擴大)하려 하나니 이는 천지(天地)의 광대(廣大)를 본받음이오, 항구본능(恒久本能)은 위해(危害)를 방비(防備)하여 생명(生命)을 무한(無限)히 연장존속(延長存續)하려 하나니 이는 천지(天地)의 구원(久遠)을 본받음이다. 부성(富盛)․광대(廣大)․구원(久遠)은 천지(天地)의 운행(運行)하는 전형(全形)이므로 창조번연(創造蕃衍)․성장확대(成長擴大)․영구존속(永久存續)은 또한 사람의 생존(生存)하는 목적(目的)이 되지 아니할 수 없고, 음양상교(陰陽相交)․식물섭취(食物攝取)․위해방비(危害防備)는 그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기 위(爲)한 수단(手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肉體)의 면(面)으로부터 본 것이니, 사람의 일신(一身)은 육체(肉體)와 정신(精神)의 양면(兩面)이 있으므로 정신(精神)의 면(面)에도 생존(生存)하는 목적(目的)이 있고, 또 사람은 개체(個體)와 통체(統體)가 교호작용(交互作用)하고 있으므로, 통체(統體)의 면(面)에도 또한 생존(生存)하는 목적(目的)이 있는 것이다.
정신(精神)의 면(面)으로는 차세대(次世代)를 널리 교양(敎養)함은 부성(富盛)의 상(象)이오, 학문(學問)을 취적(聚積)하고 인격(人格)을 크게 함은 광대(廣大)의 상(象)이오, 학술사업(學述事業)을 후세(後世)에 전(傳)함은 구원(久遠)의 상(象)이니, 이것이 또한 삼본능(三本能)에 기(基)한 것이라, 공자(孔子)의 학문론(學問論)에 「黙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 묵(黙)하여 식(識)하고 학(學)하여 염(厭)치 아니하고 사람을 가르침에 권(倦)치 아니함이 무엇이 내게 있으리오」【註四】하여, 이 삼사(三事)는 모두 내가 능(能)치 못하노라 함을 말하니, 묵이식(黙而識)은 전언왕행(前言往行)을 다식(多識)함이니 곧 부성(富盛)이오, 학불염(學不厭)은 식견(識見)을 넓힘이니 곧 광대(廣大)이오, 회불권(誨不倦)은 차세대(次世代)의 교육(敎育)이니 곧 구원(久遠)이라, 이 삼사(三事)는 생존목적(生存目的)을 달성(達成)하는 사업(事業)인 까닭에 공자(孔子)가 스스로 불능(不能)하노라고 겸사(謙辭)한 것이다.
사회(社會)의 면(面)으로는 호구(戶口)의 번식(繁殖)은 부성(富盛)의 도(道)이오, 민생(民生)의 풍후(豊厚)는 광대(廣大)의 도(道)이오, 교육(敎育)의 보급(普及)은 구원(久遠)의 도(道)이니, 이가 또한 삼본능(三本能)에 기(基)한 정치(政治)의 삼사(三事)이다. 공자(孔子)의 정치론(政治論)에 「子適衛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又何加焉 曰富之 曰旣富矣又何加焉 曰敎之 = 자(子)가 위(衛)에 갈새 염유(冉有)가 복(僕)하더니, 자(子) 가라사대 서(庶)한저, 염유(冉有)가로되 이미 서(庶)하면 또 무엇을 더하리까 가라사대 부(富)케 할지니라, 가로되 이미 부(富)하면 또 무엇을 더하리까 가라사대 가르칠지니라」【註五】하니, 서(庶)는 호구(戶口)의 중서(衆庶)함이오, 부(富)는 생활(生活)의 풍족(豊足)함이오, 교(敎)는 교육(敎育)의 보급(普及)함이니, 이 삼사(三事)가 겸비(兼備)한 연후(然後)에 정치(政治)가 천지(天地)를 본받아서 생존(生存)하는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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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無限)한 즐거움
삼본능(三本能)에 의(依)하여 생존(生存)의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함에는 반드시 「무한(無限)」과 「즐거움」의 두 가지가 병행(倂行)치 아니하면 안되나니 생존작용(生存作用)에 어떠한 한계(限界)가 있으면 무궁(無窮)히 생생(生生)치 못하고, 즐거움이 없으면 생발(生發)의 기(氣)가 약동(躍動)치 못한다. 천지(天地)의 운행(運行)은 공간(空間)과 시간(時間)이 모두 제애(際涯)가 없으니 이는 무한(無限)이며, 역(易)에 「鼓萬物而不與聖人同憂 = 만물(萬物)을 고(鼓)하되 성인(聖人)으로 더불어 우(憂)를 한가지로 하지 아니한다」【註六】하니, 기(氣)의 운행(運行)은 우(憂)한즉 체색(滯塞)하고 낙(樂)한즉 건행(健行)하는데, 사람의 체울증(滯鬱症) 같은 것이 주(主)로 우수사려(憂愁思慮)로부터 생(生)하는 것은 기(氣)가 체색(滯塞)한 까닭이라, 천지(天地)는 만물(萬物)을 고무(鼓舞)하여 일계일성(一繼一成)하고 일현일장(一顯一藏)함이 모두 건건류행(健健流行)하여 아무런 체색(滯塞)이 없음으로, 일점(一點)의 우수(憂愁)의 상(象)이 없고 즐거움으로 충만(充滿)되어 생기(生氣)가 약동(躍動)하나니, 이가 곧 천지(天地)는 우(憂)치 아니한다 함이다. 사람의 본능(本能)에는 본시(本是) 천지(天地)와 같이 「무한(無限)」이 따르고 있으나, 즐거움이 반드시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은 항상(恒常) 즐거움을 추구(追求)하여 발동(發動)하나니 역(易)에 「樂則行之 憂則違之 = 즐거움은 곧 행(行)하고 근심은 곧 위(違)한다」【註七】함은, 인생(人生)의 행로(行路)에는 반드시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함이오, 또 「樂天知命故不憂 = 천(天)을 즐겨하고 명(命)을 아는지라, 고(故)로 근심치 아니한다」【註八】함은, 천지(天地)의 운행(運行)을 본받는 것을 즐겨하고, 자기(自己)에게 부여(賦與)된 천명(天命)이 무엇인가를 아는 까닭에 근심치 아니한다 함이니, 이는 모두 사람은 무한(無限)히 천지(天地)를 즐겨하면서 살아야 함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육체(肉體)의 면(面)으로는 자손(子孫)의 번연(蕃衍)과 신체(身體)의 성장(成長)과 생명(生命)의 장수(長壽)에 무한(無限)한 즐거움을 느끼는 때에 그 사람은 그 사람으로서의 살고 있는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한 것이오, 정신(精神)의 면(面)으로는 영재(英材)를 얻어서(空間的)교육(敎育)하고 학문(學問)을 쌓아서 인격(人格)이 커지고 덕업(德業)이 영구(永久)히(時間的)후세(後世)에 유전(流傳)함에 무한(無限)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또한 그 사람으로서의 살고 있는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한 것이다.
또 통체(統體)의 면(面)으로는 국가민족(國家民族)의 호구(戶口)가 날로 증식(增殖)하고 민중(民衆)의 생활(生活)이 날로 부유(富裕)하고 문화(文化)가 날로 향상(向上)됨에 무한(無限)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또한 그 사람으로서의 살고 있는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한 것이며, 이 원리(原理)는 일국내(一國內)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인류(世界人類)에 대(對)하여도 한가지로 적용(適用)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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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도 만인만색(萬人萬色)
그러므로 마음의 즐거움은 동일(同一)한 것이로되, 즐거움의 범위(範圍)는 사람에 따라서 서로 동일(同一)치 아니하다. 혹(或)은 육체(肉體)에 대(對)한 본능(本能)이 만족(滿足)을 얻는 때에 무한(無限)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혹(或)은 정신(精神)의 면(面)이나 통체(統體)의 면(面)에 대(對)한 본능(本能)이 만족(滿足)을 얻는 때에 비로소 무한(無限)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또 혹(或)은 호의호식(好衣好食)으로써 육체(肉體)를 양(養)함을 즐겨하고, 혹(或)은 권세(權勢)를 마음대로 행사(行使)함을 즐겨하고, 혹(或)은 포의한사(布衣寒士)의 청빈(淸貧)한 생활(生活)을 하면서 정신적(精神的)으로 천지(天地)와 상사(相似)한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는 것을 즐겨하니, 즐거움도 실(實)로 만인만색(萬人萬色)이다. 공자(孔子)가 「賢哉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回也 = 어질다 회(回)여 일단사(一簞食)와 일표음(一瓢飮)으로 누항(陋巷)에 있음을 사람이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할 것이어늘 회(回)가 그 낙(樂)을 고치지 아니하니 어질다 회(回)여」【註九】하니, 회(回)는 안자(顔子)이오 낙(樂)이라 함은 천지(天地)와 상사(相似)하려하여 천지(天地)의 운행(運行)을 본받는 것을 즐겨 함이니, 이러한 즐거움은 식도락자(食道樂者)나 세도락자(勢道樂者)들의 상상(想像)조차 할 수 없는 경지(境地)이다. 또 고래(古來)의 역사(歷史)를 펴 보건대 사람을 무함음해(誣陷陰害)하고 국민(國民)에게 죄(罪)를 지으면서 권세(權勢)를 잡는 것을 무한(無限)한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는 또한 즐거움의 변태성(變態性)이라, 이러한 사람들은 동류(同類)나 아첨배(阿諂輩)이외(以外)에 진정(眞情)으로 교우(交友)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스스로 부성(富盛)을 버리고 고립(孤立)에 빠짐이오, 수인(讐人)의 보복(報復)이 있을 가 두려워하여 단신(單身)으로 산야(山野)를 소요(逍遙)하거나 필마(匹馬)로 여행(旅行)을 다니지 못하고 외출(外出)할 때에는 반드시 호위(護衛)를 따르게 하니, 이는 스스로 광대(廣大)한 천지(天地)를 버리고 소천지(小天地)에 쭈그림이오, 그 취적(聚積)한 재화(財貨)로써 일시(一時) 구복(口腹)의 즐거움을 얻을 수는 있으나, 인격적(人格的)으로는 죽은지 이미 오래고, 더욱이 시대(時代)는 항상(恒常) 이역(移易)하고 사필(史筆)은 사(私)없이 엄직(嚴直)한지라, 권세(權勢)를 부리는 당일(當日)에는 능(能)히 민중(民衆)의 입을 막을 수가 있으되, 시대(時代)가 바뀐 뒤나, 그 몸이 죽은 뒤의 사필(史筆)을 미리 억제(抑制)할 수는 없으니, 이는 그 자손(子孫)에게 무한(無限)한 치욕(恥辱)을 남겨서 스스로 구원(久遠)한 생생(生生)을 버림이라, 이조(李朝)의 연산(燕山)․중종(中宗)․명종(明宗)․광해(光海) 등(等)의 시대(時代)에 권세(權勢)가 흔천동지(掀天動地)하던 간신(奸臣)들의 자손(子孫)이 수백년(數百年)을 지나도록 머리를 들고 명랑(明朗)한 천지(天地)를 보지 못한 것이 그 일례(一例)이다. 사람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이 개체(個體)의 사욕(私慾)에 편경(偏傾)하면 도리어 악(惡)으로 흐름과 같이, 즐거움이 개체(個體)의 쾌락(快樂)에 편경(偏傾)하면 도리어 근심으로 화(化)하는 것이니, 남을 상해(傷害)하여 불선(不善)으로 얻은 즐거움은, 즐거움이 아니오 곧 근심의 씨이다.
공자(孔子)가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 소사(疏食)를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굽혀 베개 하더라도 낙(樂)이 또한 그 가운데에 있다, 의(義)치 아니하고 부(富)하고 또 귀(貴)함은 나에게 부운(浮雲)과 같으니라」【註十】하니, 이는 부귀(富貴)를 얻기 위(爲)하여 불의(不義)한 일을 행(行)하여, 민중(民衆)으로부터 고립(孤立)하고 광대(廣大)한 천지간(天地間)을 마음대로 활보(闊步)치 못하고 더러운 이름을 구비(口碑)와 사서(史書)에 전(傳)하기보다, 차라리 청빈생활(淸貧生活)로써 천지대자연(天地大自然)을 즐겨 하리라 함을 말함이다. 공자(孔子)는 부귀(富貴)를 싫어함이 아니라, 「崇高莫大乎富貴 = 숭고(崇高)함이 부귀(富貴)보다 대(大)함이 없다」【註十一】하고, 또 「聖人之大寶曰位 = 성인(聖人)의 대보(大寶)는 가로되 위(位)라」【註十二】하여, 성인(聖人)이 부귀(富貴)의 대위(大位)에 있은 연후(然後)에 인정(仁政)을 행(行)할 수가 있다고 말하면서 또한 불의(不義)의 부귀(富貴)를 배척(排斥)하는 것은, 불의(不義)의 부귀(富貴)는 즐거운 일이 아닌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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