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朝鮮
只今으로부터 四千餘年 前의 옛날에 檀君王儉이 太白山에 내려와서 비로소 나라를 세우고 平壤에 都邑하고 國號를 朝鮮이라 하니 中國의 堯임금 때요 이 해를 我國의 紀元元年이라 한다.
檀君朝鮮은 千餘年동안 繼續하였다 하나 確實한 年代는 알 수 없다. 그 後에 中國의 殷나라가 亡하고 周나라가 代身하게 되었는데, 殷나라의 王子인 箕子가 그 무리를 데리고 朝鮮에 들어와서 只今의 遼西地方에 나라를 세우고 國號를 또한 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箕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滿洲 北部에는 扶餘, 南部에는 句麗貊이 있고 半島方面에는 韓이 있었는데 그 年代와 國都는 알 수 없다.
箕氏朝鮮은 여러모로 發達된 産業의 基礎 위에서 大陸의 進步한 文明을 輸入하여 크게 發展하고 造船技術이 發達하여 바다를 건너 中國의 齊와 魯로 더불어 貿易하며 農事짓는 法과 牛馬를 기르는 牧畜業이 發達하고 사람의 性質이 正直과 禮節과 信義를 崇尙하고 平和와 淨潔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中國사람들은 我國人을 君子之國 大人之市라하고 仁人善이라 불렀다.
(http://blog.daum.net/s4k2y76/699 殷民의 東來)
箕氏朝鮮이 九百餘年동안 繼續하는 中에 中國에서는 周나라 勢力이 차츰 弱해지고 所謂 春秋戰國 時代라 해서 여러 百年동안 戰爭이 繼續되고 凶年이 겹들어서 燕, 趙, 齊, 魯의 中國 北方 사람들이 或은 海路로, 或은 陸路로 朝鮮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中에서도 特히 燕나라는 箕氏朝鮮의 西部를 쳐서 빼앗고 遼河를 사이에 두고 朝鮮과 地境을 接하여 있어서 일직부터 交涉이 잦았고 周나라가 亡하고 秦나라가 中國을 統一할 무렵에 朝鮮으로 避難하여 들어오는 사람이 數 없이 많았다. 그러던 次에 箕埠王때에 燕나라 사람 衛滿을 西部國境에 머물게 하더니 滿이 野心을 품고 많은 軍士를 거느리고 亂離를 일으켜 王都를 치거늘 準王이 미처 抗拒치 못하여 海路로 馬韓에 走入하니 이는 檀紀二千一百四十年 丁未이다.
衛滿이 나라를 세운 後에 國號를 또한 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衛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中國大陸에는 秦나라를 이어서 中原을 統一한 漢나라의 勢力이 커져서 東으로 侵入하니 衛滿의 孫子 右渠는 견디지 못하여 降服하니 이는 檀紀 二千二百二十六年 癸酉의 일이오 衛氏朝鮮은 三代 八十七年으로써 끝마쳤다.
漢나라는 衛氏朝鮮의 故地에 樂浪, 眞番, 臨屯 玄菟의 四郡을 두었다. 四郡의 位置와 넓이에 對하여는 여러 가지 말이 없지 않으나 大槪 樂浪郡은 平壤을 中心으로 한 大洞江 기슭임이 確實하고 眞番郡은 黃海道와 京畿道의 漢江 以北이오 臨屯郡은 咸鏡南道의 南部와 江原道의 鐵嶺 以北이오 玄菟郡은 鴨綠江 기슭을 中心으로 한 平安北道와 佟佳江 下流地方이라 한다. 그러나 四郡은 우리 民族의 猛烈한 反抗때문에 미처 뿌리를 내릴 사이도 없이 眞番 臨屯 二郡은 二十六年만에 없어지고 玄菟郡은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스스로 解消되고 樂浪郡만이 中國 사람들의 根據地로서 半島 中部에 四百餘年동안 남아 있었다.
樂浪郡은 我國의 한 복판에 자리 잡고 中國과 交通이 便利함으로 我國의 中國 貿易을 맡아 하였다. 平壤에서 大洞江을 건너 土城里라는 마을에 分明한 土城 자리가 있고 그 마을 田土사이에서 樂浪郡의 遺物이 나옴으로 보아 이곳이 樂浪의 서울임을 알 수 있다. 그 東쪽 平平한 언덕 위에 數多한 古墳이 있고 그 古墳 속에서 金 玉 銅으로 만든 거울과 各種의 질그릇과 그림을 새긴 솥이라든가 瓦片 漆器 等 樂浪遺物이 많이 나와서 考古學上 보배가 되었다.
朝鮮 中部에 衛滿朝鮮이 建國될 무렵에 只今의 北滿洲 地方에는 扶餘族이 살아서 農業과 牧畜에 힘쓰고 中國의 進步된 文化를 輸入하였으며 地 方이 二千里이오 戶數가 八萬이나되며 西로 烏桓 鮮皐 等의 鄰과 겨뤄서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나라에 큰 水災나 旱災가 들어서 農事가 잘 되지 아니하면 그 過失이 임금에게 있다하여 或은 갈아세워야 한다하고 或은 죽여야 한다 하였다. 扶餘의 임금은 世襲的 酋長에 지나지 아니하여 그 밑에 짐승이름을 붙인 烏, 加, 猪加, 狗加 等 벼슬이 있어 四出道를 나가 지키고 이들은 各其 數百戶로부터 數千戶의 百姓을 거느리고 있었다.
扶餘와 때를 같이하여 東海 方面에는 沃沮, 濊가 있고 半島 南部에는 三韓이 있었다. 沃沮는 지금只今의 咸鏡道 地方에 살았는데 그 땅은 東北이 좁고 西南이 넓으며 長이 千里이고 北으로는 挹婁와 이웃하고 東은 大海이고 南으로는 濊와 잇닿아 있었다. 戶數는 五千이며 임금은 없고 部落마다 首領이 있어 部落일을 추려나가고 言語는 高句麗와 같고 性質이 强直하고 土地가 肥沃하여 여러 가지 穀食이 生産되고 飮食과 居處와 모든 風俗이 高句麗와 비슷하였다. 沃沮는 南北의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北沃沮는 挹婁와 接境한 關係로 여름이면 挹婁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掠奪함으로 山中에 깊이 들어가서 숨어살다가 겨울이 되어 바다가 얼어서 배가 다니지 못하게되면 비로소 部落에 내려와서 살았다.
濊는 지금의 江原道의 東에서 咸鏡道의 南에 걸쳐서 살았다. 스스로 高句麗와 同族이라 하고 戶數가 二萬이며 사람들이 性質이 淳厚하고 廉恥가 밝으며 盜賊이 없어서 밤에 門을 닫는 일이 없었다. 言語와 風俗이 高句麗와 거의 비슷하나 衣服은 다르며 여러 部落은 山川의 境界를 重히 여겨 서로 侵犯하는 일이 없고 이를 犯하면 責禍라 하여 奴隸와 牛馬로써 賠償하며 忌하는 것이 많아서 家族中에서 한 사람이 죽으면 곧 집을 버리고 새집을 지어 살았다. 濊사람들은 麻布를 짜고 養蠶할 줄 알고, 별을 보고 그 해의 農事의 豊凶을 미리 알 수 있었다.
韓에는 馬韓, 辰韓, 弁韓의 三韓이 있었다. 이 時代는 一山의 障과 一水의 阻가 스스로 한 部落을 이루어 國家노릇을 하였는데 三韓의 地方에 이러한 部落國家가 七十八國이나 있었다. 各 部落에는 首領이 있고 馬韓 辰韓 弁韓은 各其 所屬한 部落國家를 統御하는 總王이 있었다.
馬韓은 그 中 西쪽에 있어서 百姓이 農事를 짓고 養蠶을하고 五十四國으로 나뉘어 그 크기가 大國은 萬餘戶, 小國은 數百戶이며 사람의 性質이 勇敢하고 해마다 五月에 播種이 끝난 뒤와 十月에 秋收를 마친 뒤에 한번씩 全國人이 모여 天祭祀를 지내고 여러 날 동안 日夜로 마음껏 먹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놀았다.
弁, 辰韓은 지금의 慶尙道땅에서 모두 二十四國이 있고 大國은 四五千戶이오 小國은 六七百戶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地가 肥沃하여 여러 가지 穀食이 잘되고 벼를 심고 養蠶과 牛馬의 畜産이 盛하고 婚姻에 禮節이 밝고 사람이 죽으면 큰 鳥羽를 달아 보내니 이는 그 靈魂이 날아가도록 함이었다.
이때까지의 歷史家들은 三韓을 나눠서 馬韓 辰韓 弁韓이라 하고 그 中 馬韓이 只今의 漢江 以南에서부터 忠南北道와 全羅道땅이고 辰韓은 只今의 慶尙道의 大部分이고 弁韓은 나중의 伽倻의 여러 나라가 일어난 洛東江 下流地方이라 하였으나 새로운 硏究에 依하면 辰韓이 漢四郡에서 가장 가까운 漢江 流域이고 馬韓은 忠淸道와 全羅道이고 弁韓이 지금의 慶尙道 地方이라 한다.
扶餘의 一族에 卒本扶餘가 있으니 지금의 鴨綠江 沿岸의 땅이오 高句麗의 前身이다.
이 時代의 政治는 信仰과 完全히 分立되지 아니하여 部落의 首領이 마을사람들을 거느리고 天祭를 지내며 또 마을의 政治를 行하였다. 信仰의 가장 높은 對象은 하늘의 象徵인 太陽이었으며 해마다 農事가 끝나면 一定한 때에 新穀으로 술과 떡을 빚어 天祭를 지내고 그 마을사람들끼리 모여 놀았다. 高句麗의 東盟, 東濊의 舞天, 扶餘의 迎鼓 等은 모두 이를 이름이다. 이 祭祀는 처음에 높은 山마루에서 지냈으니 그 곳은 어느 곳보다도 太陽이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러한 風習은 나중에 農業이 發達되고 江岸과 平野에 내려와 살게된 뒤에도 繼續되어 國家에서는 해마다 有名한 높은 山에 山祭를 드리고 고을에는 城隍堂이 있으며 마을에는 堂山이 있어서 온 고을사람과 온 마을사람이 精誠을 바치는 곳이다.
社會는 大家라는 支配階級과 下戶라는 百姓과 奴隸의 세 階級으로 나뉘었고 大家들은 廣大한 土地를 가지고 奴隸를 부려서 農事를 지었으며 이 時代는 土地는 넓고 人口가 稀少함으로 戰爭할 때마다 奴隸로 부릴 捕虜를 얻는 것이 唯一한 戰利品이었다. 産業은 農蠶과 織布가 자못 發達하였으며 弁 辰韓에서는 鐵을 採掘하여 돈으로 쓰고 이웃나라와 서로 貿易하였다.
從前에는 石器와 銅器만 있었는데 銅器는 軟하여 칼 도끼 等으로 使用치 못하더니 鐵이 發見된 後로 鐵製연장과 武器가 생겨서 産業과 戰爭樣式에 大革命을 일으켰다. 지금 이 文明에서 鐵 한 가지를 없앤다고 하면 이 豪華스러운 文明도 자취 없이 사라질 것이니 古代의 鐵의 發見은 참으로 驚異的 事實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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