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의 隆盛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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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의 隆盛

高句麗의 國都 卒本은 平野가 적고 外敵을 막기에 不便함으로 얼마 後에 國內城에 옮기고 다시 丸都城에 옮겨서 西로 遼河方面으로 내려가고 南으로 韓半島로 내려가기 始作하였다. 高句麗가 西와 南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면 안될 理는 두 가지가 있다.

一. 高句麗의 땅은 平野가 적고 土地가 瘠薄하며 氣候가 寒冷하여 農産이 豊富치 못함으로 國家 存立上 五穀과 蠶麻가 豊盛한 南方으로 進出치 아니할 수 없는 것

二. 遼河로부터 大洞江에 이르는 一帶地는 古來로 우리 民族이 居住하던 朝鮮 故地이던 것이 只今에 玄菟 樂浪等 中國의 郡縣으로 되었음으로 이것을 恢復치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

그러므로 建國初期부터 西出 南下 政策을 써서 마침내 西로 玄菟郡을 쳐서 地境이 遼河에 이르고 南으로 樂浪을 取하여 四百年동안 내려오던 中國의 郡縣을 뿌리 채 뽑아버리고 드디어 百濟와 接境하니 이때가 三國이 비로소 鼎立한 때이오 三國 後 約 三百年 頃의 일이었다.

高句麗는 西쪽으로 發達하는 途中에 中國과의 衝突이 가장 甚하더니 中國의 三國時代의 魏와 抗爭하다가 魏將 毌丘儉에게 敗하여 丸都城이 灰燼되었으므로 一時 國勢가 매우 危殆하였으나 얼마 後에 다시 恢復하여 大陸으로 進出하는 政策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遼河 西쪽의 錦州城에 雄據하고 있는 燕나라와 爭雄하다가 燕軍에게 敗하여 丸都城은 다시 修理할 수 없이 破壞되고 都城이 敵國에 너무 가까워서 恒常 危險性이 있음을 念慮하여 그 後에 平壤으로 옮기더니 高句麗 中興의 英王 廣開土王이 다시 丸都城에 都邑하고 疆土를 四方으로 넓히니 이때가 高句麗의 極盛時代이오 지금 滿洲 輯安縣 碑石街에 屹然히 서있는 높이 二十二尺의 巨碑는 廣開土王의 功績을 永遠히 傳하기 爲하여 그 아들 長壽王이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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