契丹關係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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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關係

이때 中國大陸에는 宋나라가 있었고 滿洲에는 契丹이 있어서 서로 다투고 있었다. 原來 我國은 滿洲의 背後에 있는 强國임으로 滿洲에 터를 잡고 있는 나라가 中國大陸과 다투고자하면 먼저 背後의 危險을 調整하지 아니하고는 中國 方面으로 全力할 수 없는 것임으로 三國時代 以來로 中國方面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我國의 兵을 받음이 通例이었다. 契丹이 渤海를 滅한 後에 鴨綠江 左右의 地에는 女眞族이 살았음으로 契丹과 我國은 直接 부딪히는 일이 없고 또 宋나라가 契丹을 칠 때에 我國에 援兵을 請하였으되 我國에서는 섣불리 이에 應하지 아니하였음으로 契丹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關涉이 없었다. 그러나 契丹은 어느 때든지 我國을 制壓치 아니할 수 없는 處地였음으로 成宗 十二年에 (三千三百二十六年) 空然한 트집을 잡아 大軍을 보내어 北邊에 쳐들어 왔다.

이때 高麗는 三韓統一後 近 六十年間 兵革을 알지 못하여 人心이 解弛한 터이라 契丹 兵이 들어옴을 보고 政府 高官中에는 北邊의 땅을 割讓하고 和親하자는 議論까지 있었다. 이때 徐熙는 割地論을 크게 反對하여 말하되 우리나라는 東方의 大國이오 또 契丹을 막을만한 힘도 있는데 땅을 버려서 和親함은 國家의 恥辱이오 더욱이 高句麗의 故地를 收復하려는 우리나라로서 어찌 輕率히 割地論을 말하랴 一戰한 後에 모든 일을 處理하여도 늦지 아니하다고 하여 스스로 軍士를 거느리고 나가 싸워서 敵의 氣勢를 꺾어놓고 契丹將帥 蕭遜寧을 찾아가서 저들이 까닭 없이 事端을 일으켜 이웃나라를 侵犯함을 詰難하였다. 蕭遜寧은 高麗는 新羅를 물려받은 나라이니 高句麗의 옛 땅은 全部 契丹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徐熙는 우리나라는 高句麗의 復興임으로 國號를 高麗라 한 것이니 땅의 境界를 말하면 契丹은 本是 高句麗 땅이니 우리가 차지해야 할 것이라고 抗辯하였다. 蕭遜寧은 그러면 高麗는 무슨 까닭으로 가까운 契丹과 사귀지 아니하고 멀리 宋나라와 親하냐 하니 이것은 우리나라와 宋나라의 關係를 끊고 自己 나라와는 親善하여 後顧의 걱정을 없애려는 心算이다. 徐熙는 우리도 契丹과 사귀고자하나 中間에 女眞의 땅이 가로 놓여 있어서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니 鴨綠江 以南의 땅을 우리에게 달라하여 同意를 얻고 서로 和親을 맺고 契丹軍이 물러간 뒤에 翌年부터 軍士를 내어 郭州 龜州등 여러 城을 쌓으니 이것이 이른바 江東六城의 基礎가 된 것이다. 그러나 契丹은 이번 和親으로써 滿足치 아니하고 機會만 있으면 다시 高麗를 侵犯하려 하던 次에 마침 高麗에 內亂이 있어서 康兆가 穆宗을 害하고 顯宗을 세우니 契丹이 康兆의 罪를 묻는다 憑藉하고 三十萬의 軍士로 쳐들어 왔다. 이때 臣下들 中에 和親하자고 主張하는 者가 있었으나 姜邯贊이 이를 反對하고 顯宗 王을 羅州로 避難하게 하고 楊規로 하여금 契丹軍을 맞아 싸우니 契丹軍은 掠奪과 暴虐을 마음껏 하다가 마침내 헛되이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우리나라의 貴重한 文獻이 많이 불타버렸으니 우리나라에도 옛날부터 古記三韓, 古記高句麗, 留記新羅 百濟의 史記 等 史籍이 적지 아니하였으나 모두 이와 같은 兵火에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三國時 以前의 일을 記錄한 史書는 三國史記 三國遺事 기타 中國 書籍에 散見하는 것뿐이다. 契丹은 高麗에 對한 野心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 後 八年만에 (顯宗 九年 檀紀 三千三百五十一年) 다시 앞서 쌓은 六城을 달라는 핑계로 十萬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이에 上元帥가 山골에 伏兵을 두어 契丹軍을 무찌르고, 敵兵이 길을 避하여 松都로 내려오는 것을 大洞江에서 襲擊하여 敵兵을 萬餘名을 죽이니 契丹軍의 氣勢가 한목 꺾이었다. 이듬해 二月에 敵軍의 大部隊가 龜州를 지나는 것을 姜邯贊이 東門 밖에서 맞아 싸워서 크게 깨트리고 逃走하는 敵을 追擊하여 이를 殲滅하니 以後로 契丹은 다시 高麗를 侵犯하는 일이 없었고 지금까지 우리 國民은 姜邯贊을 乙支文德과 함께 名將으로 竝稱하고 있는 것이다.

滿洲에서 契丹의 勢力이 衰弱해지고 鴨綠江 左右에 있는 女眞의 힘이 아직 크지 못한 틈을 타서 高麗는 以南의 地를 漸次 收復하고 德宗은 柳韶를 시켜서 女眞을 防備하기 爲한 城을 쌓으니 鴨綠江 於口인 義州郡 光城面 外洞으로부터 始作하여 咸鏡南道 定平郡의 鼻白山을 거쳐서 咸州郡 都連逋에 이르기까지 무릇 千餘里이니 이것을 千里長城이라 하며 十二年동안의 功力을 기우려 靖宗 十年에 完成하였다. (檀紀 三千三百二十四年)

成宗때에 地方으로 나누어 京畿의 外에 關內道-(楊州)- (廣州)- (海州), 中原道-(忠州)- (淸州), 河南道-(公州) 等, 江南道-(全州)等, 嶺南道-(尙州)等, 山南道-(晉州)等 嶺東道-(慶州)等, 海陽道-羅州 昇川 順川) 朔方道-(春州 溟州)等, 浿西道-(西京)等의 十道로 만들었으니 顯宗때에 이르러서 北邊이 아직 定치 못하였음으로 다시 地方의 區劃을 고쳐서 京畿의 外에 楊廣道-(지금의 京畿道의 一部와 忠淸南北道) 慶尙道 全羅道, 交州道-(지금의 江原道의 一部) 西海道-(지금의 黃海道)의 五道를 두고 北邊에는 東界와 北界를 두니 東界는 또한 東北面이라 하는데 지금의 江原道 北部와 咸鏡南道의 南部이오 北界는 또한 西北面이라 하는데 지금의 平安南北道의 大部分이다. 이와 같이 北邊을 西界로 定한 것은 이 地方이 契丹및 女眞과 相接하는 땅이오 또 앞으로 北進하려는 計劃이 있기 때문에 暫定的으로 定해 놓은 行政區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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