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敎와 佛敎의 文化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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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敎와 佛敎의 文化

高麗 建國 以後에 儒敎가 들어와서 官家에서 세운 敎育機關에 依하여 相當한 發達을 이루고 이러한 官學外에 私學이 있어서 한때 크게 떨치었고 學生들은 官學보다도 私學에 가기를 좋아하였으며 따라서 官學에서보다 私學에서 더 많이 人才가 났다.

高麗時代의 黃金時代라고 稱하는 文宗때에는 有名한 私學이 十二個나 있어서 거기서 工夫하는 學徒들은 十二門徒라하고 그 中에서도 海東孔子라고 稱하는 崔沖의 門이 가장 이름이 높고 當時 國家의 드러난 人物은 大槪가 이 崔門 出身이었고 崔沖의 諡號가 文憲公임으로 文憲公徒라고 稱 하였다.

高麗는 佛敎로써 國敎를 삼고 政治制度 같은 것이 佛法에 因緣되지 아니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一般 風習에도 모두 佛敎의 精神이 들어 있었다.

高麗社會의 特殊한 風習으로는 燃燈會와 八關會가 있었으니 이는 國家祭典으로써 우리나라 古代社會에서 널리 行하여진 迎鼓 東盟 舞天 等의 風俗이 佛敎의 影響을 받아서 얼마쯤 變化하여진 것이다. 燃燈은 佛을 섬기는 것이오 八關은 天神을 비롯하여 自然神을 섬기는 것이니 둘 다 燈불을 燦爛히 켜고 온갖 飮食을 베풀며 그 사이에 춤추고 노래하여 全國民이 함께 즐기고 同時에 天地神明을 즐겁게 하여 豊年이 들고 天下가 和平하기를 빌고 感謝하는 것이었다.

成宗때에는 僧 三十餘名을 宋나라 抗州에 보내어 그 곳 永明寺 智賢禪師에게 禪宗의 敎理를 배워 오고 그 外에도 佛法을 닦으러 大陸에 건너가는 僧이 數없이 많았다. 그 中에서도 高麗 佛敎界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大賢國師 義天이다. 義天은 文宗의 넷째 아들로써 十一歲에 出家하여 僧이 되고 後에 宋나라에 건너가서 佛經 千卷을 求해 오고 또다시 宋나라와 遼나라(契丹)와 日本에 사람을 보내어 四千卷을 求해와서 興王寺에 敎藏都監을 두고 佛經을 박아내니 一千十部 四千七百四十卷이며 이를 興王寺版 大藏經 또는 義天의 續藏經이라 한다.

이보다 앞서 成宗때에 佛法의 힘으로 契丹의 軍士를 물리치려 하여 佛經 版刻을 始作하여 大藏經 一千七十六部 五千四百八十卷을 박아내고 그 後 文宗때에 빠진 佛經 一千卷을 박아내고 여기에 興王寺版을 合치면 그 當時의 世界에서 가장 完備한 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國寶가 後日 蒙古亂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高宗이 다시 發願하여 十六年동안의 努力으로 이를 새로 만드니 이것이 지금 慶尙道 海印寺에 있는 有名한 八萬大藏經이다.

佛敎가 퍼짐과 함께 거기에 따르는 美術工藝도 크게 發達하여 我國史上 美術工藝의 黃金時代를 이루었고, 다만 三國時代는 人性이 渾厚함으로 모든 製品이 雄大한 氣象이 나타나고 있음에 比하여 高麗時代의 人性은 渾厚한 風이 적고 오직 眞實하였음으로 모든 製品에 優雅한 맛은 有餘하나 雄大한 氣象은 적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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