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成宗의 治積
六世 成宗에 이르러 高麗一代의 모든 制度가 비로소 完備되니 太祖가 三國 統一後 四十餘年의 오랜 歲月을 지나서 겨우 法典이 完成되고, 또 高句麗의 故地를 收復할 北方 經營도 進捗되지 못함은 遲遲함이 없지 아니하나 이렇게 遲遲함은 新羅와 後百濟의 遺民이 不斷히 反抗運動을 일으켜서 國內가 安定치 못함으로 因함이라고 볼 것이다.
成宗은 佛敎의 外에 特히 儒敎를 崇尙하여 이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根本을 삼고 外方의 優秀한 子弟를 뽑아 國子監(지금의 大學)에서 공부하게 하고 그 中에서 뛰어난 者를 골라서 다시 宋나라에 遊學시켰다.
그리고 外方의 十二牧에 經學博士 醫學搏士를 보내어 敎育과 醫療를 맡아보게 하였다.
또 經濟政策에 힘써서 農事철의 賦役을 禁하고 兵器를 걷어서 農具를 만들어 農業을 獎勵하니 지금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풍장 같은 農樂이 이時代에 처음으로 생긴 것이라 하며 免災法을 磨練하여 災難을 입은 者에게 稅納과 賦役을 減하는 準例를 세우고 備荒策으로 州와 府에 義倉을 두어 穀食을 쌓고 兩京과 十二牧에 常平倉을 두어 穀食과 布木을 貯蓄하였다가 農事의 形便을 따라서 物價가 높으면 常平倉의 物品을 歇하게 放賣하여 物價를 내리게 하고 物價가 너무 떨어지면 常平倉에서 비싸게 買入하여 物價의 調節을 圖謀하여 國民의 生活을 安定시켰다.
또 特異한 制度로 寶라는 것이 있으니 寶는 지금의 契의 起源으로써 一定한 財團을 가지고 거기서 생기는 利息으로 目的하는 事業을 經營하는 것이니 弊難에 빠진 사람들을 救恤하기 爲한 濟危寶, 敎育을 目的으로 하는 學寶 같은 것이 그 것이오 이 機關은 한便으로는 事業 經營體가 되고 한便으로는 庶民金融 機關이 되어 國民의 經濟 生活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이때의 物品 買賣에는 貨幣를 쓰지 아니하고 麻布와 米穀으로 貨幣의 代身으로 썼다. 그러나 社會가 發達하고 人口가 늘어서 買賣는 漸次 많아지는데 麻布는 重量이 무겁고 濕氣와 煙氣에 品質이 傷하기 쉽고 또 鼠耗도 적지 아니하여 큰 不便을 느끼게 되었다. 外國과의 通商貿易에는 布貨 以外에 地銀을 쓰고 一部에는 宋錢이 들어와서 流通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極히 小數에 不過하였다.
이에 成宗은 비로소 銅을 原料로 하여 錢貨를 만드니 이것이 我國 鑄錢의 始이다. (檀紀 三千三百二十九年 成宗 十五年) 그러나 貨幣는 반드시 市場을 通하여 流通되는 것이오 萬一 市場이 없으면 그것으로써 生活 必需品을 買得하기에 如干 不便이 아니라 이 時代는 市場 數가 적고 또 民間에서 錢貨를 信用치 않는 關係로 널리 쓰이지 못하고 如前히 布貨로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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