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位爭奪 (서당국사)

|

王位爭奪

처음에 太祖는 松京으로부터 都邑을 옮기려하여 公州 鷄龍山과 漢陽을 親히 돌아본 結果 漢陽으로 옮겨왔는데 얼마 안가서 王子의 變이 일어나서 骨肉의 慘酷한 禍亂을 자아냈다. 太祖에게는 神懿王后 韓씨의 所生에 六子가 있고 神德王后 康씨의 所生에 芳蕃 芳碩의 二子가 있는데 太祖의 革命 運動에 韓氏 所生의 芳遠(太宗)의 힘이 가장 크더니 韓氏는 開國하기 前에 죽고 康氏가 王后로 되어 自己의 所生 芳碩으로 世子를 삼으려하니 政府大臣 中에는 「平時에는 長을 세우고 亂時에는 功을 먼저 한다.」하여 反對한 일도 있었다.

太祖는 王位로써 國家 全體와 關聯시키지 아니하고 李氏家의 私事로 생각하여 그 사랑하는 康氏의 所生 芳碩으로써 世子를 삼으니 韓氏 所生의 여러 兄들이 不平을 품고 그 中에서도 開國의 功이 있는 芳遠의 不滿이 가장 컸다.

이때 世子 芳碩을 돕는 責任을 맡은 者는 鄭道傳 等이라 鄭道傳 等은 여러 王子가 不平을 품고 있는 形勢를 살피고 太祖에게 말하여 王子들의 兵器를 지니는 것을 禁하고 다시 王子 七人을 七道에 分遣하고자 하니 이는 王子들을 放逐하려는 術策이다. 이에 芳遠은 크게 怒하여 芳蕃 芳碩과 鄭道傳 等을 죽이고 芳遠의 兄 芳果가 世子가 되니 太祖는 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또 忿함을 참지 못하여 가장 親近한 部下를 거느리고 처음에는 서울 近處의 山寺를 逍遊하다가 멀리 北으로 行하여 舊居인 咸興 本宮으로 들어갔다. 이에 芳果가 王位에 오르니 이가 定宗이오 定宗 元年에 漢陽은 骨肉의 變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新都를 버리고 開京으로 돌아갔다. 定宗은 芳遠으로써 世弟子를 삼으니 芳遠의 兄 芳幹이 거기에 不滿을 품고 朴苞로 더불어 芳遠을 害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朴苞는 잡혀서 죽고 芳幹은 兎山으로 쫓겨나갔다. 定宗이 임금이 된지 二年만에 하루는 世弟芳遠의 氣色이 殊常함을 보고 王位를 芳遠에게 傳하니 이가 太宗이다. 太宗은 卽位한 後 곧 漢陽으로 돌아왔는데 朝臣中에는 開京 舊都를 생각하고 新都를 싫어하는 者가 많아서 王都가 安定치 못하더니 하루 밤에 開京宮闕이 全部 불에 타버리니 다시 開京으로 옮기자는 사람이 없었다.

太祖가 咸興에 들어간 後에 朝廷에서는 자주 問安使를 보내었으나 太祖는 忿함이 풀리지 아니하여 오는 사람마다 죽여서 一人도 生還한 者가 없으니 지금까지도 한번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咸興差使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太宗이 朴淳을 보내어 太祖의 還國하기를 請하고 父子間의 天倫의 情을 極盡하니 太祖가 感動하여 돌아왔다.

朴淳의 極盡한 말의 內容을 咸興古老들이 口碑로 相傳하는 말에 依하면 「父子가 相爭하여 南北 二朝가 있음과 같이 國民의 눈에 보이는데 創業한지 오래되지 못하고 人心이 安定되지 못하여 將次 무슨 變亂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어찌 父子가 相爭하여 나아가 國家 萬年의 基業을 떨어뜨리랴」함이라 太祖는 이 말을 듣고 大悟하여 드디어 南還을 決意하였다 한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端宗과 世祖(서당국사)  (0) 2015.02.18
建設時機(서당국사)  (0) 2015.02.18
李朝政治 (서당국사)  (0) 2015.02.18
李朝建國 (서당국사)  (0) 2015.02.18
高麗의 滅亡 (서당국사)  (0) 2015.02.17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