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宗反正後의 國政(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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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宗反正後의 國政

中宗의 反正은 燕山君의 虐政에 괴로움을 받던 百姓과 두 番의 士禍에 氣가 꺾어진 儒學界에 한 光明을 주고 活氣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社會의 行方面에 改革의 氣運이 움직였다. 이때 金宏弼의 弟子에 趙光祖(號 靜菴))가 있으니 그는 儒學을 振興하고 政治를 淨化함으로써 己任을 삼고 中宗의 信任을 얻어 金淨 金湜 等 靑年學徒와 더불어 그 理想한 바를 實現하기에 努力하였다. 그리하여 비로소 鄕約法을 施行하여 地方自治의 制度를 세우니 鄕約이라 함은 中國 宋나라 사람들이 始作한 것으로 한 地方사람끼리 自治的인 規約을 만들어 善한 일을 서로 勸勉하고 惡한일을 서로 規諫하고 禮義로써 서로 交際하고 患難을 서로 救濟한다는 네 가지 趣旨에서 나온 것이다. 中宗反正의 때에 功臣에 濫參한 者가 많았으니 元來 反正功臣이라 함은 反正事業을 劃策하고 身命을 그 事業에 바친 者를 말함이다. 그런데 中宗의 功臣中에 擧事하는 날에 그 所聞을 듣고 비로소 와서 列에 參擧한 者 實際로 이 事業에 貢獻한 일이 없이 功臣들과 因緣이 있는 者들이 功臣名簿에 記錄됨으로 因하여 功臣인 者가 七十餘人에 達하고 功臣들은 國家로부터 功臣田을 받아서 世襲하고 君을 封하여 社會的 特權을 享有하니 趙光祖 一派는 이러한 功臣들을 削除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當時 反正의 功이 있는 功臣들 中에는 特權을 濫用하여 勢力을 얻기와 財貨를 모으기에만 힘쓰는 者가 적지 아니하니 이는 國家를 爲하여 反正事業을 行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富貴를 얻으려 하는 反正 牟利輩의 行動이었다. 儒臣對 功臣의 싸움은 해를 지낼수록 더욱 深刻하여지는 터이라 趙光祖 儒臣一派가 이를 그대로 看過할 理가 없었다. 그리하여 功臣派에 어떠한 過失이 있는 때는 總蹶起하여 攻擊하고 王이 自己들의 意見을 듣지 아니하는 때에는 同盟退職한 일도 二三次 있었으나 中宗王은 暗王이라 趙光祖를 信任한 것도 마음속으로부터 나온 信任이 아니라 다만 一般世論을 듣고 그를 賢人이라 하여 大用한 것이다. 그런데 趙光祖 一派는 中宗을 堯舜과 같은 聖君을 만들고 社會로 하여금 誠意正心할 것을 强要하다 깊이 歎하였다.

이 까닭에 趙光祖 一派는 弊政을 改革한 것이 많아서 百姓으로부터 歡迎을 받는 反面에 功臣 貴族들로부터 極度의 미움을 받고 王도 또한 漸漸으로 厭症을 내게 되었다.

趙光祖 一派는 專혀 道學을 主張하여 小學과 같은 修身書와 近思錄과 같은 性理學을 爲主하고 詩 賦 表 策과 같은 文章學을 排斥하며 人才를 取함에 있어도 文章으로써 科擧를 보는 現行試驗法을 廢止하고 人物考査로써 사람을 取하는 賢良科를 行하기를 建議하니 이때 領議政으로 있는 鄭光弼이 홀로 反對하여 말하되 賢良科의 이름은 비록 좋으나 人心이 淳厚치 못한 今日에는 반드시 弊害가 生할 것이니 行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王은 趙光祖의 말을 좇아 마침내 施行하였다. 그러나 賢良科의 試驗官은 主로 趙光祖 一派가 當하고 있었음으로 그 取하는바 사람은 거의 性理學 派들이어서 文章을 主하는 선비들의 不平이 적지 아니하고 人才를 씀이 偏僻하다는 非難이 各方面에서 일어났다.

李朝의 田制는 國有制이오 買賣와 典當을 禁하더니 徵兵制度에 入營하는 費用 또 兵役服務中 衣食諸費를 軍人이 自擔하는 關係로 農民이 軍隊에 徵召되는 때에는 그 入營하는 모든 費用을 마련하기 爲하여 耕作하던 土地를 典當치 아니할 수 없고 典當期間은 五年으로하되 그 期間이 지나도 負債를 갚지 못하는 때는 土地가 貸金業者의 所有로 넘어가는 것이니 이것이 비록 國法에 違反되는 일이나 國家에서는 軍隊徵召上 禁止할 수 없는 일임으로 黙認치 아니할 수 없으니 이것이 田制破綻의 始初이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典當行爲가 秘密裏에 行하더니 乃終에는 公公然하게 慣習化하고 所有의 移轉도 自由로 行하여 完全한 私有制로 化하고 따라서 土地없는 農民들은 남의 土地를 耕作하고 收穫物의 一部를 地主에게 주게 되었으니 이것이 地主와 小作人이 發生한 始이오 世宗 末年으로부터 世祖때에 걸쳐서 생긴 일이다. 그 後에는 典當期間 五年이라는 것이 五十日로 短縮되니 軍隊로 徵召되는 軍人이 五十日 期間內에 還土할 수는 없음으로 典當하는 날이 곧 土地가 永永 放賣되는 날이다.

이 까닭에 貧民들의 耕地는 急速度로 富人의 손에 兼倂되고 中宗때에 이르러서는 地主와 小作人이라는 두 階級이 똑똑히 社會面에 나타났다. 江陵사람 朴遂良은 御前에서 賢良科 試驗을 마치고 말하되 「平素에 生覺하고 있는 바를 한번 殿下께 아뢰고자 하였는데 이 機會에 아뢰어도 좋은가」라고 물어서 王의 許諾을 받고 아뢰기를 「지금 江陵 地方은 土地없는 農民이 許多하여 農民 生活이 대단히 窮乏하니 이것은 하루바삐 고치지 아니하면 國家의 將來에 큰 근심이 될 것이니 다시 均田制를 行하는 것이 可하다」고 하였다.

重臣들 中에는 地主의 土地를 國家에서 收上하여 土地없는 農民에게 분급(分給)할 수 는 있으나 그렇게 하면 空然한 混亂을 일으킬 것이라 하여 反對하고 前日에 分給한 것을 地主에게 팔고 農土를 잃었으니 지금 分配하여 주더라도 또 後에 다시 地主에게 팔 것이 아니냐하여 應치 아니하였다. 이 問題가 한번 提議되자 朝廷안에는 兩論이 對立하고 趙光祖 派에서는 土地를 다시 分配하자는 革新論을 主張하여 비록 後日에 다시 팔아버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今日의 일은 今日의 情에 맞게 하는 것이 政治의 本旨라 하여 期於히 土地制度를 改革하려 하였다. 王은 重臣들로 하여금 여러 날 동안 討論시킨 結果 한 사람의 土地 所有는 五十結 以內로 制限하기로 하니 當時에 있어서 土地 所有를 制限한 것은 一大 改革이 아닌 것은 아니나 大體로 地主階級에 有利한 解決이오 今後의 土地 兼倂의 防止에 아무런 實效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地主 階級이 이 制度令에 對하여 不滿을 가진 것은 勿論이다.

趙光祖 一派의 政治 理念은, 그 理想은 좋으나 그 手段이 過激한 點이 많고 功臣 貴族들과의 사이에 極端의 非妥協 態度를 取하고 性理學派 以外의 사람에게는 偏狹한 排他心으로 對하여 當時 賢 宰相으로 이름난 鄭光弼같은 이도 그들은 鄙夫라고 痛罵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自己 일파一派의 사람들을 朝廷에 布列하고 漸漸 政治의 實權을 잡으며 百姓들은 그들을 크게 歡迎하게 되니 이에 王은 隱然히 危懼 不平한 마음을 품게되었다. 그러던 中 그들은 七十餘人의 僞勳을 削除하자고 提議하니 功臣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들기 始作하고 平素에 儒臣派로부터 小人이라는 이름 밑에 極度의 排斥을 받은 南袞과 功臣의 한사람인 沈貞 等이 主動이 되어 便으로 王의 마음을 動搖시키고 便으로 趙光祖 派의 謀逆함을 誣告하여 中宗 十四年 己卯에 趙光祖와 그의 同志들을 一網打盡하여 卽回로 죽이려하는 것을 鄭光弼이 王의 소매를 붙잡고 「新進 年少들이 時務를 알지 못하고 그 行動이 過激하였을 뿐이오 異志가 있는 것이 아니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挽留하여 모두 귀양살이 보내더니 未久에 謫所에서 大部分을 죽이니 이것이 己卯士禍이다. 이 禍가 있은 後에 賢良科를 廢하고 土地制度 限令이 스스로 消滅됨은 勿論이오 小學과 近思錄을 읽는 者는 모두 趙光祖 派라 하여 强壓함으로 이러한 글은 當世의 큰 禁物이 되고 南袞 沈貞 等이 用事하여 政治를 어지럽게 하고 鄭光弼도 그들에게 물려 나갔다.

南袞 沈貞 等이 政權을 잡고 그 黨類를 이끌어 들여 政治를 어지럽힌 지 十餘年에 王은 그 무리에게 속은 줄을 깨닫고 金安老를 써서 그 무리를 없애니 이를 以毒制毒이라 하여 安老의 凶惡함은 袞貞의 무리보다 더 甚하였다. 安老가 用事한지 七年에 王은 그 一派를 모두 除去하니 奸臣이 政權을 잡음이 前後 十九年동안이라 王은 크게 悔悟하여 歎息하되 「처음에 趙光祖 一派를 몰아내면 國事가 잘될 줄 알았더니 袞貞 一派의 奸惡은 말할 수 없이 甚하였고 이 一派를 몰아내면 今後는 아무 일 없을 줄로 생각했더니 安老의 凶惡은 前보다 더 甚하여 國家를 危殆롭게 하고 百姓을 괴롭게 하였다. 後世에 나를 어떤 임금이라 稱할고」하고 鄭光弼을 謫所로부터 불러들여 政丞을 삼으니 百姓들이 天日을 본듯이 歡呼하였다. 이에 小學 近思錄의 禁이 스스로 풀리고 儒臣들을 擧用하였으며 豊基郡守 周世鵬은 비로소 書院을 짓고 거기에 先賢을 모시고 儒生들이 모여서 道學을 硏究하게 하니 이것이 李朝書院의 始初이다.

그러나 中宗은 暗主라 朝廷안에 王權 爭奪의 端緖가 열리었다. 中宗도 妃에 先妃 尹氏는 仁宗을 낳고 繼妃 尹氏는 明宗을 낳았는데 仁宗의 外叔은 尹任이오 明宗의 外叔은 尹元衡이니 世人이 尹任을 大尹이라 하고 尹元衡을 小尹이라 하고 이 두 사람의 勢力 다툼을 大尹 小尹의 싸움이라 하였다. 仁宗은 中宗을 이어 王이 된지 겨우 一年에 昇遐하고 아들이 없음으로 그 아우 明宗이 十二歲에 王이 되고 그 母后 文定王后가 政治 實權을 잡고 尹元衡이 用事하니 最初부터 戚里派를 미워하는 儒生들이 明宗 外家의 擅政함을 좋아할 理가 없었다. 이에 尹元衡은 前부터의 政敵인 大尹 一派와 自己에게 좋지 못한 感情을 가지고 있는 儒臣들을 一切 排除하기로 定하고 明宗이 王이 되던 乙巳年에 根據없는 事實을 꾸며서 逆賊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을 或은 죽이고 或은 귀양보내니 이를 乙巳士禍라 한다.

乙巳士禍는 여러 次例 士禍 中 가장 慘酷하고 人心이 가장 憤慨하였다. 戊午 己卯의 士禍는 그 相對者가 奸臣들이었고 甲子士禍는 燕山君이 그 어머니를 爲한 復讐이니 或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乙巳士禍는 王의 母后와 王의 外叔이 아무런 罪가 없는 儒臣들을 誣陷하여, 絶對忠誠을 다할 것을 學問의 大本을 삼고 있는 儒學徒들도 王室에 對한 忠誠이 엷어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前者에 세 번의 士禍에는 비록 慘酷한 變을 當하였으되 오히려 다시 儒學을 振興하여 그 理想하는 바를 政治의 面에 實現하려고 努力하는 사람이 連달아 나왔지만 乙巳士禍 以後에는 그들은 政治에서 물러나 現實 世上과 因緣을 끊고 山林에 숨어서 오로지 學問에만 힘쓰게 되었음으로 政治와 學問이 나뉘어져서 所謂 山林學者라는 것이 생기고 實事를 떠나서 理論에 行動을 떠나서 思索에 치우치는 傾向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徐敬德(號 花潭) 曺植(號 南溟) 이李滉(號 退溪) 奇大升(號 高峯) 李之菡(號 土亭)같은 一代 名儒가 나서 明宗時代의 儒學界에 꽃을 피웠으나 그들은 政治 方面에 발을 들이지 아니하고 비록 李滉같은 이는 王의 부름을 받아서 벼슬에 나온 일이 있으나 기회만 있으면 다시 山林으로 돌아갔음으로 그때에 이를 評하여 山禽이라고 別名을 지은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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