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과의 關係(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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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과의 關係

世宗때에 玉浦를 열어서 貿易을 許諾한 것이 그 後 차츰 倭人의 數爻가 늘어서 數千名에 이르며 朝廷의 命令을 어기는 일이 적지 아니하더니 中宗 五年(檀紀 三千八百四十三年 (庚午)에 對馬島와 連結하여 亂을 일으키니 이를 三浦倭亂 또는 庚午倭變이라 한다.

이 亂은 곧 平定되었으나 그 後에도 中宗 三十九年에 統營郡 蛇梁에서 變亂을 일으킨 일이 있고 明宗 十年 乙卯에 또 다시 海南郡 達梁浦에 侵入하니 이를 乙卯倭變이라 한다. 元來 倭人들은 我國과 貿易하지 아니하고는 살수가 없는 데이나 그 貿易額에는 制限이 있으므로 倭人들은 秘密히 制限外의 貿易을 行하고 또 變裝하고 居住區域밖에 나와서 民家로 좇아다니면서 장사하는 한便 國家의 政治와 事業의 機密을 偵探하여 倭 本國에 報告하는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에 政府에서는 地方官吏에게 命하여 그를 嚴禁한 關係로 兩國民의 感情이 서로 좋지 못하여 마침내 三浦의 變이 일어나고 그 變이 平定된 뒤로 從來의 貿易額을 半으로 줄이니 이때로부터 倭人의 我國에 對한 感情이 더욱 惡化되었다.

이에 朝廷에서는 倭人들이 倭寇를 잡아 바치었다든가 漂流한 우리나라 사람을 돌려 보내주었다든가 하여 우리나라에 功勞가 있는 者에게는 官職을 주어 이를 守職倭라 하여 特別한 待遇로써 그들을 撫摩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그들의 感情은 마침내 풀리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奸狡한 꾀로써 우리나라를 속이고 우리나라 國政을 密偵하니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들을 對할 때 敬語를 쓰는 일이 적고 흔히 왜놈이라 불러서 侮辱하였다. 金安國같은 이는 이를 근심하여 兩國民 사이의 感情이 좋지 못하고 將來 國家에 利롭지 못하리라고 警告한 일도 있었다.

乙卯亂이 일어나자 朝廷에서는 李浚慶으로 都巡察使를 命하여 치게 하니 李浚慶이 湖南에 내려갔으나 軍士도 몇 사람 되지 아니하고 武器도 없어서 싸울 수가 없었다.

이에 한편으로는 軍士들을 召集하고 한편으로는 武器를 만들어서 迎擊하더니 賊은 掠奪하여 가지고 海上으로 도망하였다. 이 亂이 있은 後에 한동안 兩國 交通이 끊어지더니 日本이 다시 通商하기를 懇望하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들을 撫摩하는 것이 得策이라 하여 通商을 許하는데 從來에 開港한 菁浦方面은 疊疊한 島嶼에 싸여서 倭船이 숨기 쉽고 우리나라의 斥候가 보기 어려움으로 釜山 一港을 열어서 倭船의 來往을 許하니 이는 釜山에 섬이 없어서 倭船의 來往을 보기 쉬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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