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會의 腐敗(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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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의 腐敗

燕山君 以後 六十餘年 間 奸臣이 政權을 잡을 때가 많았고 明宗 末年에 이르러서는 政治가 極度로 어지럽고 貨賂가 盛行하여 社會는 腐敗 一路를 걷고 있었다. 外方의 貢物은 開國初에 地方産物과 戶口數를 勘案하여 定한 것인데 燕山君이 이를 加徵하고 또 産物이 數量과 戶口가 五六十 年間에 變動된 것이 적지 아니 하되 朝廷에서는 그것을 民間 實情에 맞도록 改正치 아니하여 民弊가 甚하였다.

軍役은 軍布을 바치고 徵召됨을 免하는 制度가 行하였는데 이는 各 鎭堡가 軍布를 받아 가지고 軍人을 傭人하기 爲함이다. 그러나 鎭堡의 主將이란 者들은 軍布로써 私腹을 채우고 軍士를 傭人치 아니 하는 까닭에 各 鎭堡의 實際 人員은 定員數의 千의 二三에도 達치 못하고 軍籍에는 虛名 假名 甚至於 狗名 猫名까지 씌어있었다. 그리고 한번 軍布를 바치기 始作한 사람은 每年 繼續하여 바치기로 되어있는데 或은 그 사람이 死亡한 뒤에도 如前히 徵布하는 일이 있으니 이를 白骨徵布라하고 或은 乳兒에게도 徵布하였으니 이를 黃口徵兵이라 하고 或은 사람이 苦役을 견디지 못하여 全家를 거느리고 逃亡하여 버리면 그 軍布를 그의 一族으로부터 받고 一族이 없으면 切隣으로부터 徵收하니 이는 軍布가 主將의 私收入이 되는 까닭에 死亡 乳兒 逃亡 같은 事實을 國家에 報告하지 아니하고 繼續 徵收하는 것이며 이로 因하여 鎭堡에는 每年 固定不變하는 軍布 收入이 있었다. 그럼으로 이때에는 各 鎭堡의 價格이 軍布 疋數에 定해져서 그 價格의 多少로써 地位의 高下를 定하는 것이었다.

吏胥의 弊亡 前부터 있는 일이지만 中宗 明宗의 前後 三十餘年 間 中央의 政治가 어지러움으로 因하여 더욱 甚하여져서 모든 苛斂誅求에 百姓들은 그 生活을 維持할 수 없었고 當時 郡縣의 數는 三百二十餘인데 郡縣이 너무 많아서 百姓의 負擔이 過重함으로 이를 廢合하여 百姓의 負擔을 輕減하려고 企圖한 일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吏胥의 失職하는 者가 많게 됨으로 郡縣의 實權을 잡고 있는 吏胥들은 中央政府 內의 奸臣輩들과 結託하여 極力으로 沮害한 일도 있었고 守令들은 中央으로부터 任命되어 三年이라는 任期(任期에는 伸縮이 있었다.)를 지내는데 地方의 實情을 잘 알지 못함으로 그 大部分은 吏胥의 손에 事務를 맡겨 버리는 形便이어서 百姓들은 守令보다도 吏胥를 두려워하였으니 이 까닭에 國家의 末端行政은 吏胥政治로 化하였다.

曺植 같은 이는 明宗에게 上書하여 王의 母后 文定王后가 寡婦로서 政治를 어지럽게 한다는 寡婦干政論과 郡縣의 吏胥輩들이 國事를 그르치고 있다는 吏胥亡國論을 올려 世人의 耳目을 聳動케 한 일도 있었다.

이때 儒臣들은 여러 次例의 士禍를 겪어서 비록 氣가 꺾이었으나 그 潛在한 힘은 더욱 굳세어 功臣戚里들을 미워하는 생각이 날로 强해지더니 明宗 末年에 文定王后가 죽음에 從來 王后의 힘을 背景으로 하여 온갖 橫暴를 恣行하던 尹元衡은 依支할 곳이 없는 一獨夫라 儒臣들은 一齊히 蹶起하여 마침내 尹元衡을 몰아내고 무리를 一掃하였다.

明宗의 뒤를 이어 宣祖가 王이 되니 이때는 名相 李浚慶이 領議政이 되고 朝廷이 儒臣 一色으로 組織되었다. 世祖때에 儒臣 對 功臣戚里파의 싸움이 일어난 以來 一百十餘 年만에 비로소 儒臣이 完全히 政權을 잡으니 이로부터 그 理想하는 바의 政治를 實現할 時機가 到來한 것이다.

그러나 李浚慶은 그 臨終 遺箚에 「只今 士習이 浮虛하여 虛僞가 風을 作하니 朋黨의 漸이 있다」고 警告하니 當時 儒士들이 輕躁하여 篤實한 風이 없고 高言大談을 일삼고 사람의 조그마한 過失이라도 寬容함이 없이 攻擊하기를 좋아함으로 반드시 朋黨이 생긴다고 豫言한 것이다.

이 遺箚가 한번 들어오자 朝廷 諸臣들은 朋黨이 없음을 極力 辨明하고 李珥같은 이는 李浚慶이 無根한 말로써 士林을 禍毒하는 것이라 하여 攻駁하고 甚至於 李浚慶을 追罪하자는 激論까지 일어난 일이 있으니 이는 自己들이 決코 朋黨을 만들지 않을 것을 盟誓함과 같음이다.

그러나 李浚慶이 죽은지 四年만인 宣祖 八年 乙亥(檀紀 三千九百八年)에 마침내 東西分黨이 생기고 말았다. 처음에 沈義謙은 王室의 外戚으로서 明宗때에 奸臣들의 行惡이 甚한 中에서 儒士들을 救活한 일이 많았음으로 비록 沈이 戚里派에 屬하되 儒臣들의 好感을 얻고 있으며 金孝元은 新進 儒士로써 年少儒臣들의 推仰을 받고 있었는데 金孝元은 沈義謙을 戚里派라 하여 排擊하고 沈義謙은 金孝元이 일직 權臣의 門에 出入하였다 하여 蔑視한 關係로 두 사람사이에 葛藤이 생겼다. 이에 沈義謙을 右하는 者와 金孝元을 右하는 者가 생기고 輕佻浮薄한 무리들이 마치 正月 初生 줄다리기에 兩便에 서로 와서 덧붙듯이 或은 沈義謙派에 붙고 或은 金孝元派에 붙어서 朝廷안이 兩黨으로 갈라지니 沈의 집은 서울의 西便에 있음으로 그를 西人이라 하고 金의 집은 東便에 있음으로 東人이라 하고 또 老成派는 大槪 西人이 되고 少壯派는 大槪 東人이 되니 儒臣 對 功臣戚里派의 百十餘年間의 激烈한 鬪爭은 亦是 儒士 對 戚里의 些少한 感情 疏隔을 契機로 하여 그 形態가 一變하여 同流 相殘 同志 相食하는 儒臣 對 儒臣의 醜惡한 黨爭으로 化하였다.

黨爭이 한번 일어난 後 朝廷안에는 中正 不偏한 者가 거의 없고 오직 自黨의 이해를 爲하여 움직여서 政治의 理想이 있는 것도 아니오 事의 是非와 善惡을 가리는 것도 아니오 東人은 東人을 擁護하고 西人은 西人을 擁護하여 一大 亂鬪 場을 이루었다. 宣祖는 群臣에게 누가 朋黨을 만들고 있느냐고 問責한즉 群臣들은 朋黨이라는 말은 다만 巷間에서 流布되는 風說이오 朝臣中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辨明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쓰고 罪 줌이 모두 黨爭의 影響을 받아서 公論이 行치 못하고 政治가 어지러워짐으로 李珥는 이를 調停하는 것을 己任으로 삼고 分黨의 張本人인 沈義謙과 金孝元을 外官으로 내어보내면 黨爭이 멈추리라고 하여 王께 이 意見을 아뢰었던바 王은 沈義謙으로 開城 留守를 삼고 金孝元으로 會寧 府使를 삼으니 비록 同한 外官이로되 沈은 昇進되고 金은 貶點되는 結果를 生하였다. 이에 東人들은 크게 不平을 품고 또 金의 貶點은 李珥의 提案에 依한 것이라 하여 一齊히 일어나서 李珥도 公正한 調停者가 아니고 西人에 黨하여 東人을 壓迫하는 것이라 하여 攻擊을 行하니 李珥는 調停하기를 斷念할 뿐만 아니라 朝廷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음으로 鄕里로 물러갔다. 이때 李之菡은 國事를 근심하여 말하기를 栗谷이 朝廷에 있으면 큰 效果는 없어도 破局은 되지 않을 것이지만 한번 물러가는 날이면 이 政局을 다시 收拾할 수 없으리라 하여 크게 歎息하였다.

飮食이 있는 곳에 반드시 다툼이 있는지라 처음에는 西人이 得勢하더니 얼마 되지 아니하여 東人이 힘이 커지자 東人 속에서 다시 內部에 싸움이 일어나니 이는 李山海를 中心으로 한 一派와 柳成龍 號 (西崖)을 中心으로 한 一派이니 李는 서울에 살고 있음으로 北이라 하고 柳는 嶺南에 살고 있음으로 南人이라 하였다. 이에 朝廷은 南 北 西의 三黨으로 나뉘어 三色 싸움을 하게 되었다.

이때 日本과의 關係는 날로 險惡하여 가고 國內 情勢는 黨爭으로 因하여 더욱 腐敗하여지고 特히 兵備가 極히 虛疎하여 北의 野人이나 南의 倭寇가 侵入하는 일이 있으면 到底히 막을 수 없이 되었다. 이에 李珥는 미리 十萬 兵을 養하여 京城에 二萬을 두고 各道에 一萬씩을 두어 廬外의 惡을 防備할지오 萬一 그렇지 아니하면 一年을 不去하여 土崩의 禍가 있으리라고 逕庭에서 아뢰나 柳成龍이 無事泰平한 때에 兵을 養하는 것은 禍를 養함이라 하여 反對하고 다른 朝臣들도 黨爭에만 熱中하고 國事를 근심하는 者가 없음으로 이 나라를 살리는 唯一策인 十萬 養兵論은 實現되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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