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辰倭亂(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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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

宣祖 初에 日本에서는 豊臣秀吉이 國內를 統一하고 將次 大陸으로 進出할 野心이 있어 우리나라에 使臣을 보내어 兩國이 서로 親和하게 지내자 하고 또 우리나라에 侵入할 뜻이 있다는 風說이 퍼지고 있음으로 宣祖 二十三年에 朝廷에서는 黃允吉과 金誠一을 通信使로 日本에 보내니 그 形式은 兩國 修好를 爲함이나 其實은 秀吉의 態度를 打診함이다. 黃과 金이 돌아온 後 두 사람의 復命이 서로 같지 아니하니 黃은 말하되 秀吉의 眼光이 빛나고 態度가 倨慢하니 반드시 入寇하리라 하고 金은 말하되 秀吉의 눈이 쥐눈 같고 人物이 보잘 것 없으니 반드시 入寇치 아니한다. 하였다. 黃은 西人임으로 西人들은 덮어놓고 黃의 말을 옳다하고 金은 東人임으로 東人들은 金의 말을 支持하여 國家明日의 興亡이 달려있는 重大 事에 敵의 實情을 깊이 檢討치 아니하고 오직 黨人 擁護만을 爲主하였으며 이때 東人의 勢力이 컸음으로 朝廷의 議論은 金의 말을 좇게 되고 宣祖도 또한 金이 善使하였다 하여 褒賞하고 着手中에 있는 南方의 軍備도 睡眠狀態에 빠지고 君臣以下가 모두 泰平夢에 醉倒하였다.

日本 秀吉은 우리나라의 軍備의 虛實을 前日의 使臣 往來 時에 미리 探知하고 宣祖 二十五年 壬辰(檀紀 三千九百二十五年)에 明나라를 치러가니 朝鮮은 길을 빌려달라고 憑藉하고 그해 四月에 軍士 二十萬과 小西行長 加藤淸正 等 將帥를 보내어 風雨같이 몰려와서 釜山에 上陸하니 이는 우리나라의 靑天霹靂이오 醉生夢死하던 我國 軍隊가 百戰 老鍊한 倭兵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에 東來城이 一戰도 못하고 陷落되고 敵軍은 거침없이 東西 두 길로 나뉘어 京城을 向하여 北上하니 朝廷에서는 이 急報를 듣고 모두 蒼皇罔措하고 宣祖는 金誠一이 國事를 그르쳤다 하여 곧 잡아오라고 嚴命을 내리더니 誠一이 惶恐 入京하는 次에 宣祖는 다시 命令을 내리어 이번 倭寇는 너로 因하여 오는 것이니 네가 나가서 막으라 하여 南方으로 보내었다.

朝廷에서는 敵을 막을 힘이 없고 西路를 좇아 避難의 길을 떠나니 京城 안에 있던 亂民들이 景福宮에 불질러 사뤘으며 各地의 守令들은 大部分이 職務를 버리고 逃亡하였음으로 戶口와 土地의 文籍이 이때에 大槪 滅失되었다. 倭兵이 釜山에 上陸한지 겨우 二十日만에 京城이 陷落되고 八道 人心이 土崩하듯이 무너져서 다시 收拾할 수가 없었다. 宣祖는 西路를 避難하면서도 西道 人心의 向背를 크게 疑懼하여 李元翼을 불러서 말하되 卿이 일직 安州 牧使가 되었을 때 行政을 잘하여 平安道 百姓이 지금까지 卿을 생각한다하니 卿이 먼저 平安道에 가서 民心을 按撫하라하고 또 崔興源을 불러 말하되 卿이 일직 黃海監司사가 되었을 때 百姓을 사랑하였음으로 黃海道 百姓이 지금까지 卿을 잊지 아니한다 하니 卿이 먼저 黃海道에 가서 民心을 收拾하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開城에 가서 얼마동안 머물다가 倭兵이 따라옴을 보고 平壤을 거쳐서 義州에 가서 머물고 있었다.

國勢가 이렇게 危殆로운 地境에 이르렀을 때에 國內에는 오직 두 줄기의 生氣가 움직였으니 그 하나는 李舜臣의 海戰이오 또 하나는 義兵의 蹶起이다. 李舜臣은 全羅道 左水使가 된 때로부터 미리 倭賊의 侵入이 있을 것을 斟酌하고 優秀한 戰船을 製造하려 하여 百濟 時代 以來 高麗 時代로 거쳐서 傳해오는 我國 特有의 造船技術을 써서 새로이 한 배를 創造하니 그 배는 鐵板으로 위를 덮어서 거북의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 송곳을 꽂고 敵兵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그 사이에 十字路를 通하여 우리 軍士가 自由로 通行하게 하고 前後左右에 銃穴을 내어서 軍士가 그 밑에 숨어 銃을 놓게 된 것이니 이를 龜船이라 한다.

李舜臣은 倭兵이 들어옴을 보고 龜船 八十隻을 거느리고 五月 七日 玉浦에서, 六月 四日에 唐浦에서, 七月 八日에 閑山島의 앞바다 等 敵의 水軍을 連거푸 쳐 부시고 閑山島의 길목을 守備하니 敵이 다시 南海 邊을 엿보지 못하였다. 처음에 倭兵은 陸路와 海路의 두 길로 倂進하여 一擧에 우리나라를 삼키려 한 것인데 海路가 李舜臣에게 막힌 까닭에 陸路 軍의 東은 咸鏡道 豆滿江까지 들어가고 西는 平壤까지 들어갔으되 더 北上하기를 두려하여 王을 쫓아가지 못하였으니 이 大亂에 우리나라가 다시 蘇生함에는 李舜臣의 힘이 絶對한 것이었다.

倭兵이 처음 들어 올 때에는 人心이 모두 慌怯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또 敵은 鳥銃을 가지고 있는데 銃의 威力이 얼마나 큰가를 알지 못함으로 敢히 接戰할 勇氣를 내지 못하더니 時日이 經過함을 따라 漸次로 敵의 情勢를 알게 됨으로부터 憂國之士들의 擧義하려는 氣運이 움직였다. 慶尙道에서 처음으로 義兵을 일으킨 者는 郭在祐(號 忘憂堂)이니 紅衣를 입고 馬를 타고 敵陣에 들어가서 橫行하되 敵이 敢히 막지 못하고 天降紅衣將軍이라 부르고 紅衣將軍이 있는 곳에는 敵이 반드시 避去하였다. 全羅道에서는 光州의 高敬命(號 霽峰)이 아들 從厚, 因厚와 金千鎰 等으로 더불어 義兵을 일으키니 이 消息을 듣고 各地에서 義兵이 연거푸 일어났음으로 壬辰倭亂中에 義兵의 勢力이 가장 큰 곳이 湖南이었고 이 義兵의 힘에 依하여 湖南이 保全된 까닭에 國家의 生脈이 끊어지지 아니한 것이다.

湖南 義兵가운데 高敬命 軍과 아울러 有名한 것은 錦山의 趙憲(號 重峯)軍이다. 趙憲은 壬辰 前年에 미리 明年에 큰 兵亂이 일어 날줄을 알고 宣祖에게 上疏하여 政治의 잘못됨을 痛論하고 急히 防備의 策을 세울 것을 極言하니 그 말이 너무 過激함으로 朝廷에서는 이를 狂人이라 하여 귀양 보내었다.

壬辰亂이 일어남에 同志를 모아서 義兵을 일으키니 遠近의 뜻 있는 사람들이 모두 趙憲이 일어났다. 하여 聳觀하고 憂國하는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여러 番 倭兵과 싸워서 이기더니 錦山싸움에서 衆寡가 不適하여 敗死하고 同志인 七百義士도 함께 죽으니 지금도 戰爭하던 자리에 七百義士 塚이 있으며 이 싸움에 倭兵도 죽은 者가 많고 또 戰爭의 後方 勢力이 어떠함을 알지 못하여 물러가고 다시 全羅道를 엿보지 못하니 湖南北部의 保全함은 主로 趙憲의 힘이었다.

이밖에도 各道에서 義兵이 일어나서 큰 戰功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敵兵을 괴롭게 하여 마음대로 橫行치 못하게 하고 우리나라 百姓에게 한줄기의 氣를 넣어준 功은 적지 아니하였으며 特히 僧兵의 힘이 또한 적지 아니하니 僧 惟政(號 泗溟山人)은 西山大師 休靜의 高弟로서 僧兵을 모아 비록 實戰에는 參加치 아니하였으나 物資의 運搬과 여러 가지 役事에 큰 助力을 하였다.

이때 國軍들도 漸次로 勢力을 얻어서 倭兵을 쳐 부시려는 勇氣를 내게 되고 權慄은 梨崎(배티,大芚山附近)에서, 李廷馣은 延安에서, 金時敏은 晉州에서 모두 크게 이겼다.

이 程度의 兵力만으로는 全國에 가득히 찬 敵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王(宣祖)은 義州에 있어서 柳成龍 李恒福(號 白沙) 李德馨 號 (漢陰)等으로 더불어 國事를 議論하는데 亂이 일어난 後에 黨爭은 一時 멈추어 졌으나 그 底流에는 如前이 東西의 軋轢이 있음으로 王(宣祖)은 「痛哭關山月 傷心鴨水風 朝臣今日後 寧復有西東」가 하여 東西의 싸움이 國家로 하여금 이 地境을 만들어 놓고 또 여기까지 몰려와서 東西 싸움을 하느냐 恨歎하였다.

國事가 이에 이르매 獨力으로는 恢復할만한 길이 없음으로 明나라에 請兵하기로 決定하였다. 이때 明나라에서는 異常한 訛言)이 傳播되어 朝鮮이 倭와 共謀)하여 明國을 치러온다고 하였다 그 證據로는 倭兵이 들어온後 한번의 決戰도 없이 王(宣祖)은 鴨綠江 邊까지 들어오고 倭兵은 平壤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朝廷에서는 請兵하는 使臣을 보내어 이를 辨明하고 또 援兵을 보내어 달라고 懇請하였으며 明나라에서는 使臣을 보내어 調査한 結果 日本秀吉이 將次 明나라를 치기 爲하여 朝鮮에 길을 빌려 달라 하고 朝鮮이 그를 拒絶하자 곧 侵入한 事情과 明國의 울타리가 되고 있는 朝鮮이 明國을 代身하여 倭寇의 禍를 받고 있다는 事實을 確實히 알게 되고 이에 朝鮮에 援兵을 보내기로 決定하였다. 그리하여 癸巳年 正月에 明將 李如松이 군사 四萬을 거느리고 鴨綠江을 건너와서 平壤의 敵을 大破하니 敵이 開城 方面으로 물러났다. 李如松은 敵을 輕히 여기고 追擊하여 碧蹄舘에서 싸우다가 敗하고 다시 追擊할 생각이 없었다. 이때에 權慄이 幸州에서 크게 敵을 破하니 敵은 制海權을 잃어서 補給이 끊어지고 또 平壤과 幸州에서 大敗하여 氣勢가 漸漸 줄어들더니 李如松이 明나라사람 沈惟敬을 시켜서 倭將 小西行長과의 사이에 和議를 進行 시켰음으로 倭兵은 이해 四月에 京城을 물러나서 南海岸으로 내려갔다.

倭兵은 南海岸에서 오래 머물 計劃을 세우고 또 前日에 晉州에서 敗한 것을 憤하게 여겨서 十餘萬의 軍士로 晉州城을 包圍하였다. 前番에 金時敏이 晉州 싸움에 大勝할 때는 數千兵으로써 敵의 十萬兵을 물리쳤는데 이번에는 城中兵이 六萬에 이르니 사람마다 모두 城을 지키기에 아무 念慮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나 오직 晉州 妓生 論介가 근심하였다. 義兵將 金千鎰이 그 緣故를 물으니 論介가 對答하되 前番에는 軍士가 비록 적으나 將帥가 서로 사랑하고 號令이 한군데서 나온 까닭에 이겼지만 이번은 軍士가 비록 많으나 統率이 없고 將帥가 兵을 알지 못하니 이 까닭에 근심한다고 하였다.

城中은 九日 九夜의 동안에 百餘次例를 싸워서 番番히 적을 막으나 마침내 城이 陷落하고 城中의 百姓들까지 모두 七萬名이 죽으니 그 慘酷하기가 壬辰亂 中에서도 가장 甚하였고 論介는 敵將에 끌려서 矗石樓 아래의 岩上에서 敵의 酒宴에 나갔다가 敵將의 허리를 안고 함께 江中에 떨어져 죽으니 後人이 이 岩石을 義妓岩이라고 이름 지었다.

 

  王(宣祖)은 京城이 收復한 後 京城을 떠난지 一年半만에 舊都에 돌아왔다. 그러나 倭兵이 아직 南方에 가득히 차있어 어느 때에 다시 쳐올지 알 수 없고 沈惟敬의 和議의 對하여는 反對의 態度를 취하고 明나라에 積極 南攻하기를 請하였다 明나라에서는 軍士와 物資를 遠輸하기가 困難하다하여 苟且히 和議를 成立시키려하니 王(宣祖)은 國力이 弱하여 獨力으로 倭를 殲滅치 못함을 슬퍼하여 軍制의 大 改革을 提案하니 이 案은 隸를 解放하여 軍士로 쓰자는 것인데 이는 軍制 改革이 될 뿐만 아니라 社會階級制度의 一大 革命이 되는 것이다.

我國의 軍制는 兩班階級은 軍役이 免除되고 奴隸階級은 賤人이라 하여 軍役에 參與치 못하게 하니 그 까닭은 萬一 賤人이 먼저 入隊하여 軍校가 되고 良民이 後에 入隊하여 兵卒이 되면 良民이 賤人의 指揮를 받게 되어 社會의 秩序가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王(宣祖)은 良民이나 賤人이나 모두 나의 赤子이오 또 國家의 앞날을 생각하여 볼 때 軍士가 不足한 現實을 打開하려면 數十萬의 賤人 壯丁을 쓰지 않을 수가 없으니 從來의 階級制度를 깨뜨리고 賤人을 良民과 함께 軍士로 쓰게 하려하니 諸臣들은 이를 잘 討議하라고 令을 내렸다.

朝廷 諸臣中에는 여기에 贊成한 사람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私奴를 많이 부리고 있는 兩班階級은 强硬한 反對運動을 일으켰으니 그 理由는 奴主의 分은 君臣의 分과 같으매 만일 奴隸를 解放하여 良民을 만들면 이는 綱常이 무너지는 것이라 하니 其實은 國家의 綱常을 尊重히 여기는 데서 나온 主將이 아니라 專혀 奴隸를 부려서 豪華한 生活을 누리려는 私心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王(宣祖)의 提案이 마침내 通過되지 못하니 王(宣祖)은 「國家를 살리는 最善의 案이 個人들의 私心때문에 實行되지 못하니 可歎한 일이로다.」하고 이 制度를 公奴에게만 施行하였다. 公奴中에는 晝夜로 武藝를 練習하여 軍隊에 들어가서 良民이 된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으나 便으로 兩班階級의 여러 가지 妨害로 因하여 完全한 實施를 보지 못하였다.

倭兵은 南海岸으로 물러간 後에 明나라와의 사이에 和議가 進行되어 차츰 本國으로 물러가더니 兩國의 代表 사이에 決定한 和議 條件과 明나라가 豊臣秀吉에게 보낸 勅書의 內容이 서로 틀린다 하여 宣祖 三十年 丁酉에 다시 大軍을 보내어 쳐들어오니 이를 丁酉亂이라 한다.

倭兵은 前番의 失敗에 삼가서 水軍을 더 增加하고 또 미리 間諜 要詩羅를 놓아서 우리 朝廷과 李舜臣과의 사이를 離間하니 우리 朝廷에서는 그 謀略에 넘어가서 李舜臣을 잡아다가 獄에 가두고 將次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 事件의 裏面에는 亦是 黨派 싸움이 숨어 있으니 朝廷이 義州에 있을 동안은 黨爭이 한동안 멈추고 있더니 京城에 還都한 後에 다시 再燃하여 北人의 勢力이 優勢한 판인데 李舜臣은 柳成龍의 薦擧한 사람이오 柳成龍은 南人이기 때문에 北人들은 李舜臣을 黨爭의 犧牲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王(宣祖)은 李舜臣 處置에 對하여 意見을 柳成龍에게 물으니 柳成龍은 「李舜臣은 名將이라 倭人의 말을 듣고 함부로 罪줄 수도 없고 또 戰亂이 끝나지 아니한 때 이런 名將을 죽이는 것은 不可하다」하였다.

王(宣祖)은 이 말을 重히 여겨 다만 免職시키고 釋放하니 이때 史臣은 이를 評하기를 「南海를 홀로 지켜서 國脈을 붙잡고 오던 名將이 敵의 謀介 離間과 黨爭의 餘波로 이런 일을 當하니 멀리 南方의 賊勢를 바라보고 가까이 朝廷의 形便을 살펴봄에 가슴속에서 痛哭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구나」하였다.

李舜臣이 免職된 뒤에 元均이 三道水軍統制使가 되니 元均은 本是 李舜臣과 함께 水使로 있었는데 李舜臣이 統制使가 된 뒤에 그 部下되기를 부끄러워하여 恒常 李舜臣을 朝廷에 謀害하던 者이오 먼저에 李舜臣이 罪를 받은 것도 元均의 謀害가 有力한 一因이 된 것이다. 倭兵들은 元均이 李舜臣을 代身함을 듣고 水軍을 크게 發하여 우리 水軍을 치니 元均이 大敗하여 陸地에 올라와 逃亡하였는데 그 生死는 世上이 알지 못하며 敵은 全羅道 海岸을 占領하고 멀리 忠淸道의 稷山 唐津에 까지 侵入하였다. 朝廷에서는 크게 唐慌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판이라 하는 수 없이 다시 李舜臣으로 統制使를 삼았다. 이때 倭兵이 全羅道 陸地에 깊이 들어와 싸우므로 李舜臣은 山谷길을 좇아 右水營에 이르니 戰船의 남은 것이 겨우 十二隻이라 避難船을 모아 가지고 珍島의 울돌목(鳴梁)에서 敵船 五百隻을 무찌르고 古今島를 무찌르니 敵의 勢力이 꺾이어서 다시 西海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때 陸地에서는 明나라 援軍이 南原에서 敗하고 또 蔚山 泗川 順天等地에 陣地를 쌓고 敵과 싸우다가 모두 敗하였다.

敵勢가 다시 盛함을 보고 全羅道 光州사람 金德齡이 義兵을 일으키니 金德齡은 勇力이 있고 眼光이 횃불과 같아서 對敵하는 바가 없고 倭兵이 두려워하여 敢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때 忠淸道에서 叛亂軍이 일어나서 金德齡도 自己들과 合謀한다고 宣傳하니 朝廷에서는 곧 金德齡을 잡아다가 調査한 結果 그 無罪함을 알았으나 金德齡은 李貴의 薦擧한 사람이오 李貴는 西人이라 東人이 朝廷안의 勢力을 잡고 있는데 金德齡의 목숨을 救援하여 줄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金德齡같은 勇將을 放免하였다가 後日에 萬一 叛亂을 일으키면 抑制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죽였다.

우리나라 軍士와 明나라 軍士는 南海岸에서 오랫동안 敵兵과 對峙하고 있더니 宣祖 三十一年 戊戌 十一月에 豊臣秀吉이 죽으면서 倭兵을 撤收시키는데 李舜臣은 그 退路를 막고 慶尙道 露梁에서 敵을 맞아 싸워 크게 破하더니 敵의 彈알에 맞아 戰死하고 敵이 逃還한 者가 겨우 五十餘隻에 不過하고 七年동안의 大亂이 이로써 끝났다. 이때 朝廷의 一部에서는 李舜臣이 「萬一 戰勝하고 돌아오더라도 반드시 奸臣들의 謀害로 죽을 것이니 차라리 戰死하리라」하고 일부러 투구를 벗고 彈알에 죽었다고 하였다.

壬辰倭亂은 日本이 無端히 軍士를 일으켜서 隣國을 侵略하여 無辜한 人民을 함부로 殺戮하고 우리나라는 饑饉과 疾病이 이에 겹 들여서 慘酷한 禍가 蒙古의 侵入보다 더 甚하였고 明나라가 오랫동안 軍士를 움직여서 이 때문에 나라가 몹시 病弊하였다.

明나라 軍士가 우리나라에 와서 있는 동안에 橫暴한 일도 적지 아니하고 소위 關王廟라 하여 中國 옛날의 關羽將軍을 모시고 宣祖 王으로 하여금 절하게 하는 일도 있어 우리나라를 괴롭게 함이 많았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大亂을 求해 주는 恩惠를 깊이 感謝하여 아무런 不平도 말치 아니 하였고 明나라는 이 亂離에서 많은 軍士와 財物을 잃은 까닭에 얼마 되지 아니하여 滿洲族에게 亡하게 되니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깊이 明나라 恩惠를 생각하여 오래 잊지 아니 하였다.

이 亂離에 武器의 發達한 것은 龜船 以外에 飛擊震天雷가 있으니 이는 李長孫이 만든 大砲로써 이 砲가 터지면 소리가 天地를 震動하고 鐵片이 튀어 나가서 敵을 해치는 것인데 慶尙左水使 朴昔이 이 砲를 써서 慶州를 恢復하였다. 倭兵으로부터 얻은 鳥銃은 本是 日本이 西洋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인데 우리나라도 이 法을 얻은 後에 工匠에게 命令하여 製造하니 이가 우리나라가 銃을 使用한 처음이다. 倭兵은 물러갈 때에 여러 가지 技術者를 사로잡아 가고 特히 그 中에는 陶工이 가장 많았음으로 日本의 陶磁器 工業이 이로부터 始作하였다. 倭兵은 저희들도 많은 軍士와 物資를 犧牲하고 아무런 所得이 없이 돌아갔으나 우리나라의 優秀한 技術을 배워 갔음으로 저희들끼리 말하기를 「武裝한 遊學生을 朝鮮에 보냈다」고 하였다. 豊臣秀吉이 죽은 後 德川家康이 새로이 幕府를 열어서 以前의 잘못을 말하고 國交를 恢復하기를 거듭 請하며 또 그들에게 사로잡혀간 數千名의 捕虜를 돌려보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日本에 對한 復讐心이 복 받혀서 許諾치 아니하더니 兩國間에 오랫동안 國交가 끊어지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戰爭이 끝난지 七年(乙巳)만에日本의 所願을 들어서 釜山에 다시 倭館을 열고 對馬島와의 貿易을 許諾하여 그 後 三百年동안 繼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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