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의 侵略(서당국사)

|

日本의 侵略

우리 나라에 排日의 소리가 높아짐에 從前부터 東洋 方面에 勢力을 뻗쳐보려고 恒常 機會를 엿보고 있던 俄羅斯가 公使 韋貝(카를 베베르)를 우리나라에 보내어 王室에 親近하기를 힘쓰고 日本을 누름에는 俄國이 가장 適當함을 宣傳하여 새로이 宮廷의 信賴를 받게되고 開化黨은 漸次로 沒落하였다. 이때 日本의 公使 三浦梧樓(미우라 고로)는 武人이라 이를 慨하여 局面의 非常打開를 決定하고 乙未 八月에 一邊 大院君을 데려내어 먼저 宮中으로 들어가고 兵士와 劍客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親俄政策을 主張하고 있는 閔妃를 害한 後 그 屍身을 燒火하고 一邊 三浦 自身은 王에게 뵈고 親俄派를 쫓아낼 것과 開化派 內閣을 再 組織할 것을 强請하여 王의 承認을 얻으니 이를 八月乙未之變이라 한다. 이 事變이 外交上으로 거북한 問題가 됨에 日本은 三浦 以下 關係者를 召還하여 投獄하였다.

開化黨 內閣은 다시 改革案을 進行하여 舊曆을 廢止하고 太陽曆을 採用하며 斷髮令을 領布하면서 一王一元의 年號를 세우기로 하여 丙申으로부터 建陽이라 採할 것을 決定하였다. 그러나 日本의 强壓手段은 一般의 惡感을 사고 더욱이 閔妃의 弑害는 王의 父子의 至恨이 되어 開化黨의 施政은 잘 進行되지 아니하였고 便으로 朴定陽 等 親俄派의 暗中運動이 있어 建陽 元年 二月에 王과 太子가 宮中에서 벗어나서 俄國使舘으로 옮겨가고 政局이 一變하여 開化의 新法令은 많이 撤廢되고 俄國의 勢力이 우리나라 宮廷에 깊이 뿌리를 박고 金弘集은 亂 中에 맞아죽고 그 밖의 親日派는 日本으로 亡命하고 各 地方에서는 國母의 怨讐를 갚고 斷髮을 反對한다하여 義兵이 일어나서 國內가 騷然하였다.

高宗은 俄館에 머무르기 一年만에 丁酉 二月에 慶運宮(지금의 德壽宮)에 돌아갔다. 그리고 己未獨立 後 하지 못한 바를 決定하여 皇帝位에 오르고 國號를 大韓이라 고치고 年號를 光武로 바꾸고 特派大使 또는 全權公使를 各國에 派遣하였다. 이렇게 나라의 허울은 훌륭하게 만들어 졌으나 君上臣下의 아무 데서도 새로운 精神을 가다듬은 實相을 볼 수가 없었다. 더욱이 官廷은 不學無識한 親俄派의 窟穴이 되어서 俄國의 심부름하기에 다른 생각이 없었다.

光武元年 九月에는 俄國이 半넘어 威脅으로써 우리 軍隊의 敎鍊과 財政의 處理를 手中에 거두어가며 一邊 鑛山 森林 其他의 利權을 훔쳐가기에 熱中하며 또 海軍 根據地로 馬山을 租借하려는 陰謀도 進行하고 있었다.

甲申의 黨人으로서 美國에 亡命하여 있던 徐載弼이 建陽 元年 美國에서 돌아와서 開化黨 內閣의 顧問으로 있으면서 獨立門을 짓고 新聞을 내고 獨立協會를 만들어 國民精神 啓發에 힘쓰더니, 俄國의 이러한 野心을 보고 猛烈히 일어나서 反對運動을 일으키니 俄國의 行動이 크게 退縮되고 馬山 租借 問題도 未然 防止되었다.

獨立協會는 內政의 改革上에 많은 意見을 提出하였으나 政府나 民間이 모두 입으로만 떠들 뿐이오 實踐에 對한 計劃과 熱意가 없어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오직 光武年間에 새로운 施設이 前보다 많았으니 元年에는 京城 仁川間에 電線을 架設하고 二年에는 京城에 電車가 놓이고 三年에는 京仁鐵道가 開通되었다.

俄國이 우리 나라에 가까워 짐음 日本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로써 日本은 俄國에 對해서 韓國問題에 關한 協議를 求하여 두어 次例 內約도 成立되었다. 그러나 俄國은 불같은 南下慾을 그러한 內約에 거리낌없이 하고싶은 일을 하며 또 滿洲의 經營에 着手하여 光武 二年에 淸國으로부터 遼東半島를 租借하여 旅順口에 軍港을 設備하고 滿洲鐵道의 敷設權을 얻으며 一邊 朝鮮의 鎭海灣의 밤구미(馬山浦의 한 地域)를 租借하여 그 野心이 점점 들어 났다. 다시 光武 四年 淸國에 義和團의 亂이 있음을 機會로 하여 滿洲를 軍事占領下에 두고 各國의 말에 이기지 못하여 撤兵한다는 期限을 定하되 그는 形式뿐이오 實行하지는 아니 하였다. 日本은 俄國의 南下를 制御하려하여 光武 六年 一月에 日英同盟을 맺으니 그 大槪는 韓淸兩國의 獨立과 및 그 領土를 保全하는 同時에 日本은 韓國에서 英國은 淸國에서 政治上 經濟上으로 特殊한 權益을 가지고 이것이 侵害되는 때에는 兩國이 公同으로 必要한 措置를 하며 또 兩國中 一國이 他國과 開戰하는 때에는 一國은 嚴正 中立을 지킨다 함이었다. 俄國에서는 日英同盟에 對抗하기 爲하여 俄佛同盟을 맺어 極東에 있는 兩國의 利益을 共同으로 保護한다 하였다.

日本과 英國이 同盟을 맺어 所謂 韓國의 獨立과 領土保全한다 함은 韓國의 利益을 爲함이 아니라 韓國이 俄國에게 奪取됨을 防止하고 日本이 奪取하겠다는 뜻이니 이때로부터 韓國은 完全히 列强의 俎上肉이 된 것이오 自主獨立하는 歷史는 이미 끊어진 것이다.

俄國은 滿洲에서 撤兵할 誠意를 보이지 아니할 뿐 아니라 光武 七年에는 韓國으로 손을 뻗어서 一邊 龍巖浦(鴨綠江 河口 平北)의 租借를 求하고 一邊 軍隊를 그리로 보내서 伐木과 建築의 사업을 始作하였다.

日本은 俄國과 最後의 交涉을 始하여 俄國이 滿洲와 韓國에서 손을 떼기를 要求하여 俄國은 이를 듣지 아니하고 北緯 三十九度 以上의 우리나라의 平安道와 咸鏡道의 땅을 中立地帶로 하기를 要求하고 조금도 讓步하려 하지 아니하더니 光武 八年 二月에 마침내 日俄戰爭이 일어났다. 日俄의 風雲이 急하여짐에 우리 政府는 미리 國外中立을 宣言하였으나 戰爭의 始作됨과 함께 日本軍이 連續 入國하여 國土의 一部가 戰爭으로 化하고 俄國의 敗退를 따라서 日本의 壓力이 그대로 커졌다. 그리하여 日本이 우리 나라에 對한 施政改善의 忠告權과 外交機能의 制限權을 가지고 다시 財政과 外交의 監督權을 가지고 政府 各 機關에 日本人 顧問이 들어앉고 이 동안에 京義 京元의 兩 鐵道 敷設權 以下로 許多한 權益을 가지고 이어 通信事業도 日本의 것이 되었다.

光武 九年에 日本이 滿洲 奉天에서 大勝하고 또 俄國 海軍이 對馬海峽에서 致命傷을 받아 戰局의 大勢가 이미 定하매 美國 大統領 루즈벨트가 이 中間에 들어 兩國의 講和條約이 포츠머스(뉴햄프셔주)에서 調印되어 日本이 韓國에서 政治上 軍事上 經濟上으로 特殊한 利益이 承認되었다.

日本은 이해 十一月에 伊藤博文을 우리나라에 보내어와서 威脅으로써 協約을 맺으니 外交權을 빼앗고 統監을 京城에 두어 保護政治를 施行하니 이것이 普通 이른바 五條約 또는 乙巳保護條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條約은 參政大臣이 反對하고 皇帝가 署名을 拒絶한 때문에 形式을 갖추지 못하고 一方的으로 實行된 것이다.

이 條約이 한번 發布됨에 國民 上下의 憤激이 極度에 達하고 오랫동안 韓國의 保全과 東洋平和를 公約해 오던 日本의 無信義함을 痛罵하여 韓臣들 중에는 條約 廢棄를 疏請하다가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매 閔泳煥 趙秉世 以下 殉國한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趙秉世는 그 遺書에 「强隣이 條約을 져버리고 盜賊의 무리가 나라를 팔아서 우리의 子孫이 이 將次 남의 奴隸가 될 것이니 바라건대 同胞들은 各自가 奮發하여 獨立의 基礎를 닦으라」하고 閔泳煥의 遺書에서는「내가 죽어도 地下에서 우리나라의 獨立을 爲하여 싸우리니 同胞들은 조금도 失望하지 말고 千萬番 奮發하여 뜻을 굳게 가지고 學問을 더욱 힘쓰며 한마음 한뜻으로 나가서 自主獨立을 恢復하면 나는 저승에서 기뻐하리라」하였다.

그러나 日本의 韓國倂合에 對한 方案은 이미 決定되고 時機만 기다릴 뿐이더니 光武 十一年에 和蘭(네델란드) 海牙(헤이그)에서 萬國平和會議가 열리매 韓國皇帝의 密使 李相卨 李雋이 海牙에 가서 協約의 無效함을 力說하니 이에 日本이 그 責任을 묻는다 하여 皇帝를 退位시켜 太皇帝라 하고 太子를 세워 皇帝를 삼고 年號를 隆熙라 고치고 一切 行政을 統監의 指揮를 받고 日本人을 韓國의 官吏로 任用하기로 하는 同時에 軍隊를 解産하고 各部의 次官에 日本人을 任用하여 所謂 次官政治가 實現되었다.

間島地方은 淸國의 封禁地로 되어 滿洲族 以外의 人民의 入居함을 許諾하지 아니하더니 어느 틈에 淸國의 山東地方의 流民들이 入住하여 우리 高宗 初年에는 이미 抑制할 수 없이 되었음으로 高宗 十八年에 淸國의 土門江 一帶 地方을 正式으로 開放하기로 하고 官吏를 보내어 調査할 때 그곳이 이미 朝鮮人의 集團 居住로 된 것을 發見하였다. 이에 淸國에서는 朝鮮人에게 淸國 民俗을 좇거나 朝鮮으로 撤還하거나 兩者 中에 그 하나를 擇하라고 하였다. 朝鮮人은 그대로 살되 淸國 風俗을 좇지 아니하겠다 하여 말썽이 되더니 二十年에 魚允中이 西北經略使가 되어 豆滿江 沿邊을 視察할 때에 이 事情을 알고 이는 國勢民生의 큰 問題라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白頭山 定界碑와 그 附近의 地形을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다. 그 結果로 定界碑에서 가까이 나오는 물은 東北의 方向으로 흐르다가 土門의 形狀을 짓고 지금 間島地方을 휩싸 흐르는 것을 發見하고 土門江이라는 것은 곧 이 물이오 間島地方은 當然히 朝鮮의 所屬임을 判定하였고 淸國에서는 土門江은 豆滿江의 別名이라 하여 兩國의 主張이 서로 對立되었다. 二十二年에 兩國은 實地로 調査한 結果 淸國에서 그 主張하는 根據가 不足함을 깨닫고도 오히려 屈하지 아니하고 朝鮮에서도 期於히 主張을 貫徹하려하여 爾來 數十年에 問題의 解決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韓國의 外交가 日本으로 넘어감에 間島問題가 淸日사이의 紛爭이 되고 처음에는 日本이 韓國의 方針대로 間島를 우리 나라 領土로 定하고 行政機關을 間島의 龍井村에 두고 朝鮮人民을 거느리더니 隆熙 三年에 日本이 南滿州 鐵道의 安奉線을 고쳐 놓을 때에 淸國이 日本의 말을 잘 듣지 아니함에 日本은 鐵道用地 問題를 日本의 要求대로 解決하는 代身에 間島를 淸國領土로 認定하였다. 그리하여 間島의 主權은 淸國에 주고 韓國人民은 前과 같이 自由로 居住하면서 淸國의 法權에 服從하며 龍井村 局子街 頭道溝 百草溝 는 開放地로 하여 이쪽의 領事館을 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間島問題는 日本이 저희 本國의 利益을 爲하여 淸國에 준 것이오 韓國의 承認한 것이 아님으로 今後 우리 나라와 中國과의 사이에 다시 紛爭이 일어날 問題이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己未獨立 宣言書  (0) 2015.02.21
民衆運動(서당국사)  (0) 2015.02.21
壬午軍亂 甲申政變(서당국사)  (0) 2015.02.21
開國時代(서당국사)  (0) 2015.02.20
北間島 移住(서당국사)  (0) 2015.02.20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