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午軍亂 甲申政變(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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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午軍亂 甲申政變

오랜 동안의 鎖國政策을 깨트리고 外國과의 通商을 許한 우리나라는 비로소 世界의 情勢에 눈뜨게 되어 高宗 十八年 辛巳에 魚允中 洪英植等 十數人을 紳士遊覽團이라 하여 日本으로 보내어 開化의 政務를 視察케 하니 이는 우리나라가 西洋의 新文明에 對하여 積極的으로 關心을 表示한 始初이었다.

紳士團이 돌아와서 壬午年에 統理機務衛門이라는 機關을 만들어서 政治를 施行하며 또 兵制를 고치고 日本 陸軍 將校를 데려다가 新式의 軍隊를 編成하였다.

이와 同時에 모든 方面에 新舊의 對立이 생겨서 서로 非難과 攻擊을 일삼게 되니 新文化를 받아들이자는 者는 開化派라 하고 日本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守舊派라 指目하였는데 이들은 世界列强의 틈에 끼어있는 우리나라의 새 地位를 自覺하여 國民一致로 自主獨立의 基礎를 닦는다는 것보다 開化派는 日本을 힘입으려 하고 守舊派는 淸國을 기대려하여 兩者가 모두 제 精神을 차리지 못하는 點으로는 매 한가지오 다른 것이 없었고 이로 因하여 우리나라는 淸國과 日本이 東洋에서의 地位를 다투는 씨름판이 되었다.

軍制改革과 日本 勢力의 導入은 守舊派의 싫어하는 바이오 또 舊式 軍人은 失職될 것을 걱정하고 있더니 壬午年에 舊式 軍人이 오랫동안 料米를 받지 못하고 또 밀렸던 料米를 타는데 쌀에 모래가 많이 섞여서 이에 不平이 暴發하여 한便으로 退處하여 있는 大院君에게 陳情을 하고 한便으로 當時 政權을 잡고 貪虐 不法으로 民斂을 한 閔氏들을 죽이고 危害가 閔妃에게 미칠듯 함에 閔妃는 忠州로 逃亡하고 한便으로 日本 公使館을 襲擊하고 또 敎師로 와 있던 日本將校를 죽이니 日本公使는 스스로 使舘에 불지르고 仁川으로 가서 英國 軍艦을 얻어 타고 本國으로 돌아갔다. 이것을 壬午軍亂이라 한다.

大院君이 이 變報를 듣고 나와서 亂을 鎭定하고 다시 政權을 잡으니 閔氏들은 救援을 淸國에 請하매 淸國에서는 이 機會를 타서 우리나라에 勢力을 뻗치려 하여 吳長慶으로 하여금 兵 三千을 거느리고 서울로 와있게 하고 大院君이 이번 變亂이 張本人이라 하여 억지로 淸國으로 데려가더니 後에 돌려보냈다. 花房은 軍士를 거느리고 仁川으로 와서 變亂의 責任을 물으니 朝廷에서는 賠償金 五十萬圓을 내고 日本 公使館에 護衛兵을 두고 使臣을 日本에 보내어 陳謝의 뜻을 表하는 等 條件으로 條約을 맺으니 이가 濟物浦條約이오 이해 八月에 朴英孝를 大使로 하고 金玉均을 副使로 日本에 보내니 이때의 乘船에 처음으로 太極旗를 使用하였다.

朴英孝 金玉均 等이 日本에 가서 보고는 우리나라 政治 開化의 時急함을 깨닫고 돌아와서 爲先 典圜局(鑄錢所) 機器局(製造所) 博文局(印刷所)等을 設置하고 漢城旬報를 發刊하여 民志의 啓開發에 힘쓰고 國政 改革에 對하여 여러 가지 抱負를 發表하니 이가 우리나라 最初의 新聞이었다.

高宗 二十一年 甲申에 淸國은 佛國과의 사이에 紛爭이 있었다. 그럼으로 다른 일을 돌아볼 餘力이 없는지라 開化派에서는 이를 알고 日本의 後援을 얻어 守舊派를 掃蕩하여버릴 計劃을 세우고 그해 十月에 新設한 郵政局의 開廳式이 있음을 機會로 하여 閔氏 一黨의 여러 要人을 죽이고 日兵을 宮中으로 끌어들여 王을 족쳐서 開化派의 新政府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守舊派가 淸國 軍士를 淸兵함에 淸將 袁世凱가 軍士를 이끌고 들어가서 日軍과 接戰하였다. 日兵이 힘이 弱하여 宮中에서 敗退하고 洪英植 等은 죽고 日本公使 等은 憤激한 民衆의 襲擊을 받으면서 서울에서 退去하고 朴英孝 金玉均等은 이틈에 끼어 日本으로 亡命하고 그 卽時로 閔氏 守舊派의 政局이 다시 나타나니 이것이 甲申 十月의 變이라는것이오 開化派의 失敗는 내 집안일을 남의 힘으로만 하려 한 當然한 結果이오 그 까닭에 우리나라의 開化가 時運에 뒤진 것은 千載의 恨事이었다.

이해 十一月에 日本에서 全權大使 井上聲이 軍隊를 거느리고 와서 談辨하여 우리가 日本公使館의 新築할 基地와 費用을 負擔하는 條件으로 그 前 일을 結末 짓고 한便 日本은 다음해 乙酉에 伊藤博文을 淸國에 보내어 李鴻章으로 더불어 天津에서 談辨하여 兩國의 朝鮮 駐屯 兵을 四個月 以內로 撤收할 것과 앞으로 朝鮮 事變에 있어 兩國이 軍隊를 出動 시킬 때에는 서로 通知할 것을 約定하니 이것이 所謂 天津條約이오 이 甲申의 變은 여러 해 동안 속으로 葛藤되는 淸 日 兩國의 勢力이 表面에서 衝突한 것이다.

天津條約에 依하여 兩國이 모두 撤兵하였으나 淸兵의 一將 袁世凱가 通商事務 全權委員의 名目으로써 그대로 서울에 머물면서 內政에 干涉하고 諸閔이 그와 어우러져서 放恣한 行動을 行하여 國事가 더욱 글러졌다. 다만 時勢의 推移하는 바에 開化에 關한 新施設이 哲宗때에 安東金氏들이 勢道하여 함부로 官職을 팔아먹고 이 官職을 산 무리들이 地方官으로 내려와서 討索을 마음껏 하고 兩班階級이 書院을 巢窟로 하여 百姓들을 괴롭게 함으로 各地에서 民亂이 일어나고 民心이 不安한 中 慶州의 崔濟愚(水雲)가 東學이란 새 宗敎를 일으켜서 「輔國安民 廣濟蒼生」을 敎의 主旨로하니 塗炭에 빠진 百姓들이 많이 加入하였다. 政府에서는 特權階級에 不平을 품은 下層階級의 사람들이 한 黨으로 團結됨을 두려워하여 東學이 世上을 어지럽히고 民衆을 속인다는 罪名으로 崔濟愚를 잡아다 大邱에서 死刑하니 敎徒들은 地下로 들어가서 東學運動을 繼續하였다. 秕政에 시달리는 百姓들은 마음이 많이 이에 기우러져서 隱然히 天勢力을 形成하더니 壬辰에 이르러 崔時亨(海月)을 中心으로 敎祖 崔濟愚의 伸寃運動이 表面化하여 政府에 글을 올리고 癸巳年에는 忠淸道 報恩을 中心으로 굳게 團結한 敎徒들이 京城에 올라와서 大闕 앞에서 歎願한다는 名目으로 示威運動을 敢行하였다. 이때에는 政府의 解散命令으로 一旦 물러났으나 한便 不安한 民心을 刺戟하고 한便 敎勢가 크게 떨쳐서 慶尙 全羅 忠淸의 三南을 비롯하여 江原 黃海 平安道에 이르기까지 東學의 運動이 急速度로 發展하였다

이때 全羅道 古阜 郡守가 萬石洑(井邑)를 修理함에 있어 不正한 일이 있었음으로 民亂이 일어나더니 東學黨員 全琫準이 이를 契機로 하여 그 무리들과 함께 亂離를 일으켜서 四方이 이에 呼應하여 일어났다. 官軍이 이를 치러 갔으나 到處에서 敗하고 마침내 全州가 東學黨에게 占領되었음으로 朝廷에서 袁世凱에게 相議한 結果 淸國 軍士 일천오백명이 와서 軍士를 도와서 겨우 亂을 平定하였다. 日本은 벌써부터 한번 淸國과 싸워 大陸에 있는 地位를 決定해 보려고 벼르는 此이라 甲午 二月에 日本의 保護下에 있던 金玉均이 上海에 갔다가 朝鮮사람 刺客에게 暗殺을 當하고 國論이 일어나고 因하여 淸國이 東學亂에 日本에 通告함이 없이 朝鮮에 出兵함은 天津條約을 違反함이라 하여 또한 留民을 保護한다는 名目으로 出兵하더니 이해 六月에 마침내 牙山 海上에서 兩國의 海軍이 衝突하고 成歡에서 陸戰이 始作하였다. 戰爭이 난 뒤에 水陸 양쪽에서 淸國이 大敗하여 日本의 地位는 나날이 强하여 졌다.

日本이 勢力의 커짐을 따라 우리나라 內政에 干涉하기 始作하고 開化黨이 勢를 얻어 閔氏 一族을 물리치고 金弘集을 首班으로 하는 新政府가 組織되고 淸國과의 關係를 끊고 開國紀元 遵用科擧 廢止 階級打破 社會革新 等에 關한 二百餘件을 決定하니 이를 甲午更張이라 한다. 甲午更張은 우리나라의 千數百年동안을 내려오던 封建的制度를 終決시키고 西洋의 資本主義를 輸入하는 始初이며 日本이 우리나라에 이를 强要한 것은 우리나라의 發展을 爲함이 아니오 日本 資本主義의 한 市場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乙未年에 日本과 淸國이 馬關條約을 맺고 우리나라의 獨立을 밝히고 遼東半島를 日本에 주기로 하더니 俄羅斯와 獨逸과 佛蘭西의 三國이 日本을 눌러서 遼東半島를 淸國에 돌려주기로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日本의 힘이 弱함을 보고 또 主權의 侵害와 利權의 强要가 甚해 짐으로 朝廷과 國民들에 排日의 氣運이 움직이고 따라서 日本의 壓制로 된 更張도 좋을 수가 없다하여 잘 施行되지 아니 하였다.

壬午年에는 門閥打破의 勅諭가 내려서 兩班도 商業에 從事할 수 있고 또 商業이나 工業을 하던 사람도 學敎에 入學할 수 있다 하니 이는 四民平等(士農工商)의 첫 걸음을 내 디딘 것이며 이러한 精神 아래 乙酉年에는 培材學堂을 세워서 新學問과 新思想을 가르치고 이해에 또 濟象院을 設立하여 처음으로 西洋의 醫術을 받아 들였다. 이 보다 앞서 甲申年에 郵政局을 設立하고 郵遞制度를 實施하려던 것이 甲申政變으로 因하여 一時 中斷되더니 乙酉年에 電報局이 생기고 이와 前後하여 主要 都市에 電信線이 架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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