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國時代
哲宗의 뒤를 이어 興宣君(李昰應)의 第二子(命福)가 王位에 오르니 이가 高宗이오 때에 나이 十二歲이었다. 興宣君이 大院君으로 되어 實際의 政權을 잡으며 外戚의 勢道를 막기 爲하여 安東金氏의 勢力을 누르고 또 黨派싸움의 뿌리를 뽑기 爲하여 四色을 똑같이 登用하여 階級과 地方의 差別을 없애기 爲하여 平氏와 西北사람을 불러 쓰고 黨爭의 根源地가 되어 百姓을 못살게 구는 많은 書院을 없애며 軍布란 이름으로 常民이 많이 負擔하는 兵役稅를 戶布로 고쳐서 兩班階級도 이를 내게 하고 不正한 官吏와 吏屬들을 處罰하니 오랫동안 흐리고 어지럽던 政治에 새 光明의 빛이 오는듯 하였다. 그러나 大院君은 果斷性과 決行力이 强한 反面에 疎忽한 處斷도 없지 아니하고 더욱이 壬辰倭亂에 불타버린 景福宮을 다시 지으려고 百姓들의 財物과 勞力을 强制로 바치게 하고 經費가 不足함에 當百錢을 만들어 내어서 經濟界를 어지럽게 하니 百姓들의 怨聲이 날로 높아지고 한 便으로 王代의 特權을 잃은 階級들이 大院君을 誹謗하려는 소리도 또한 적지 아니하였다. 이보다 앞서 哲宗 末年에 俄羅斯 國이 淸國으로부터 烏蘇里江 以東의 沿海州를 얻어 朝鮮이 俄國으로부터 國境이 相接하게되고 高宗 卽位의 해에 俄人이 이미 慶興에 와서 通交를 請하니 朝廷에서는 근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中에 天主敎人 가운데 俄國 問題를 좋게 解決하는 代身에 天主敎 傳導의 公認을 얻으려하여 大院君에게 運動하는 者가 있었는데 그의 行動이 大院君의 마음을 거슬리는 點이 있었고 또 天主敎徒들이 外國과 連絡하여 우리나라를 危殆롭게 할 念慮가 있다하여 高宗 三年(檀紀 四千百九十九年)에 秘密히 入國한 佛蘭西사람 敎士들과 天主敎徒 數萬名을 大虐殺하였다. 敎士 中 한사람이 빠져나가서 淸國에 있는 佛蘭西 艦隊에 이일을 알리니 佛國艦 七隻이 江華島를 侵犯하다가 우리 軍士에게 敗하여 물러가니 이를 丙寅洋擾라 한다.
高宗 五年에 美國商船이 平壤의 大洞江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빠지고 糧食이 다하여 沒殺한 일이 있었다. 淸國에 있는 美國 官吏가 오랜 뒤에 이 所聞을 듣고 高宗 八年에 軍艦 五隻을 거느리고 江華 海峽으로 侵入하다가 우리 軍士에게 막혀서 더 들어오지 못하고 물러가니 이를 辛未洋擾라 한다.
大院君은 거듭 洋擾를 치뤘으나 번번히 쳐서 물리쳤음으로 外國의 무서운 것이 없음을 速斷하고 禁敎와 排外의 決心을 더욱 굳게 하고 서울 鐘路 네거리와 國內의 重要한 곳에 斥和碑를 세우니 그 글에「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이라 하였다.
日本은 德川幕府의 末期에 歐美로 더불어 通商關係를 맺고 西洋文化를 輸入한 뒤로 우리나라는 日本의 心事를 疑心하여 前부터의 交際를 끊어버렸더니 高宗 五年 戊辰에 이른바 明治維新이 된 後에 그 事由를 우리 나라에 通知하여 왔는데 그 文句가 前과 같이 恭遜하지 아니함으로써 大院君이 이를 받지 아니하여 兩國의 사이에 不和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던 中에 大院君은 朝廷에서 물러나지 아니하면 안되게 되었는데 처음에 大院君은 外戚이 權勢를 잡고 國事를 그르치는 일이 있을까 두려하여 高宗 王妃를 揀擇함에 있어서 일부러 아비 없는 閔妃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 閔妃는 非常히 재주가 있고 政治에 慾心이 있는지라 여러 가지 策略을 써서 大院君이 政權을 잡은지 十年만에 마침내 이를 내어놓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高宗에게 돌아온 政權을 自己가 代身 掌握하고 閔氏 一派의 勢力을 늘이니 이로부터 大院君과 그 며느리 閔妃와의 사이에 葛藤이 생겨서 여러 가지 變을 지어내었다. 大院君이 물러나고 閔妃의 本家便에서 勢道를 잡으면서 對外 方針이 次次 變하여 가더니 高宗 十二年 乙亥에 日本 軍艦 한 隻이 江華島앞에 들어와 서있는 것을 우리 砲臺가 이를 砲擊하니 日本이 이를 當하여 事態가 險惡함에 이르렀다. 그러나 日本의 眞意가 이 機會에 外交關係를 맺음에 있고 우리 國策도 그렇게 기우러진 때이라 다음해 丙子에 兩國代表가 江華에 모여서 修好條規를 맺으니 그 內容은 朝鮮이 自生國으로써 日本과 平等權을 가지고 使命을 交換 하기로 하고 釜山 밖에 또 二港을 開港하기로 한 것이다. 이 結果로 十六年 己卯에 日本公使 花房義質이 와서 倭館을 열고 釜山 元山 仁川이 차례로 開港 되었다.
原來 朝鮮은 仁祖 丁丑 以後에 淸國을 宗主國으로 하여 多貢을 보내고 있으니 그것은 形式에 그치고 實際에 있어서는 內外의 政策을 自主하는 獨立國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朝鮮에 外國關係의 事端이 일어날 때마다 淸國은 恒常 外交에 對하여 朝鮮이 自主國임을 言明하니 그럼으로 江華條約의 첫머리에 이 뜻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이 條約이 締結된 뒤에 日本의 勢力이 朝鮮에 퍼질 兆朕이 보이므로 淸國은 前日 態度를 버리고 그 外交를 맡아보는 北洋大臣 李鴻章이 우리나라를 勸해서 西洋各國으로 더불어 通商을 열게 하여 十九年 壬午에 美國과 修好通商 條約이 成立하고 癸未年에 英國 德國(독일) 甲申年에 伊太利 俄羅斯와의 條約이 次例로 成立하여 我國이 完全히 國際舞臺위에 나서고 世界 各國의 사이에 門戶가 開放되었다.
大抵 産業 革命으로 이미 成就한 西洋社會는 物資 文明이 相當히 發達하고 所謂 資本主義 社會를 만들고 그 만들어 낸 商品을 팔기 爲하여 새로운 市場을 찾아내기에 눈이 붉은 때이라 우리나라가 홀로 東北 一隅의 隱土國으로서 門戶를 잠그고 있을 수 없었고 또 西洋社會와의 接觸을 通하여서만 그들의 새로운 物質文明을 받아들일 수가 있음으로 日本을 비롯한 여러 外國과 通商을 始作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여러 强國이 우리나라를 사이에 두고 서로 勢力 다툼을 하게 되었으니 實로 高宗 丙子 以後의 우리나라는 世界列强의 角逐場으로 化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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