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衆運動(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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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衆運動

처음에 乙巳保護條約이 맺어지며 中央 政局이 騷亂함은 勿論이오 地方에서도 條約에 對한 反抗運動이 到處에서 일어났다. 그 中에서도 크게 氣勢를 떨친 것은 光武 十年에 閔宗植이 洪川에서 義兵을 일으키고 崔益鉉은 淳昌에서 申乭石은 平海에서 이에 呼應하여 일어나 한동안 日人을 괴롭게 하였다.

日本 勢力이 커지기 始作함으로부터 우리나라 사람 中에서 私利私慾에 눈이 어두워서 日本의 앞잡이가 되어 祖國과 同胞를 背叛하는 무리가 생겼으니 그 中에서도 安秉畯 尹始炳같은 者들은 東學敎徒의 한 사람인 李容九와 더불어 一進會를 만들어서 日本의 戰爭에 協力하고 또 保護條約을 맺기 前부터 이미 우리나라는 日本의 保護를 받아야 한다고 發表하였다. 이에 日本에 가있던 東學의 首領 孫秉熙는 곧 京城으로 돌아와서 李容九와 손을 끊고 새로이 天道敎를 일으켜서 東學의 傳統을 이으니 따로이 侍天敎를 세워서 이와 對立 하였다.

이에 一進會의 反逆行動에 對抗하기 爲하여 張志淵等이 大韓自强會를 組織하였으나 內務大臣으로 들어간 宋秉畯에게 解散을 當하고 光武 十一年에는 羅寅永等이 日本과 協約맺은 五大臣을 賣國奴 또는 五賊이라 하여 暗殺을 圖謀하고 五大臣의 한 사람 權重顯을 길거리에서 狙擊한 일이 있었다.

隆熙 年代에 이르러서는 義憤에 북받치는 民衆의 激烈한 行動이 더욱 잦았다. 처음에 日本이 우리나라를 빼앗으려는 行動을 美國이 是認하고 日本의 推薦으로 美國사람 須知芬(D.W.스티븐스)이 우리나라의 外交 顧問이 되더니 須知芬이 美國에 건너가서 日本이 우리나라에 對한 行動을 讚한 까닭에 田明雲과 張仁煥의 두 사람이 이를 쏘아 죽이고 三年 十月에는 前 統監 伊藤博文이 哈爾濱(하얼빈)에 간 것을 安重根이 쏘아 죽이고 이해 十二月에는 總理大臣 李完用이 京城의 길거리에서 李在明의 칼에 찔린 일은 가장 世上에 들어 난 일이다.

앞서 國家의 內外 情勢의 緊迫과 새 思潮의 움직임은 뜻이 있는 人士들로 하여금 日俄를 反省하게 하여 國學에 對한 硏究가 늘어갔으니 周時經은 國文의 硏究와 普及에 힘썼고 申采浩 朴殷植같은 젊은 學者들은 國史 硏究에 功績이 있었고 兪吉濬의 西遊見聞은 國文과 漢文을 섞어 쓴 새로운 글월로서 新 小說은 우리나라의 文學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言論機關에는 獨立新聞을 비롯하여 皇城新聞 帝國新聞 大韓每日新聞 等이 차례로 나타나서 모두 獨立思想을 鼓吹하고 日本의 野望을 非難하였다.

그러나 한번 기우러지기 始作한 國勢는 다시 恢復할 길이 없었다.

隆熙 四年에 日本軍閥의 巨頭 寺內正毅(데라우찌 마사다께)가 總督으로 되어 總理大臣 李完用과의 사이에 合邦條約이 맺어져서 이해 八月 二十九日에 이를 發表하였다.

우리 나라가 建國 以來 四千餘年에 일직 斷絶 된 일이 없는 歷史의 傳統이 처음으로 끊어지고 二千萬 民族은 悲痛한 試鍊을 直面하였다.

李氏 建國으로부터 隆熙 四年 庚戌에 이르기까지 二十七代 五百十九年이었고 뜻 있는 사람들은 義憤을 이기지 못하여 日本에 反抗하다 或은 죽고 或은 獄에 갇치고 或은 外國으로 亡命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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