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時代의 社會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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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時代의 社會

三國時代의 土地制度는 모두 國有로 하고 貴族 功臣들에게 田庄 食邑 等으로 나누어주고 거기에 農耕에 從事할 奴隸를 아울러 주니 高句麗에는 坐食하는 大家가 萬餘戶이오 下戶는 그들에게 糧食과 魚鹽을 져다 바쳤으며, 新羅에는 宰相家의 奴僕이 三千人에 달하고 牛馬의 數도 거의 비슷하였다고 한다. 이때는 돈이 없고 米穀과 麻布를 交換의 媒介로 使用하니 이것은 古代 物物交換의 遺風이오 지금에 湖南地方에서 米穀에 限하여 買하는 것을 판다하고 賣하는 것을 산다 하는 것은 三國 以來 米穀 麻布가 돈으로 쓰이던 遺俗이다.

三國의 極盛時代의 都城 人口는 高句麗는 二十一萬餘戶이오 新羅는 十七萬餘戶이오 百濟는 十五萬餘戶이다. 어떤 사람들은 人口가 稀少한 當時에 都城人口가 一戶에 五人으로 잡더라도 七十萬 或은 百萬이 될 것이니 이것은 事實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三國時代에는 都城이 膨脹치 아니할 수 없는 理由가 있으니 이 時代는 戰爭이 그치지 아니하고 어떤 때는 都城이 數三個月 敵軍의 包圍를 當하는 일도 없지 아니하였다. 이 包圍에는 食糧 武器 기타 여러 가지 生活品을 都城內에서 自作自給치 아니하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各國의 都城內에는 첫째로 武器를 製造하는 工場이 있고 거기에 從事하는 技術者및 勞務者等 百工이 있고 큰 市場도 이 都城內에 集中되어 있었다. 國家가 都城을 옮길 때에 먼저 工場과 百工을 옮긴 것은 이 까닭이오 當時에 都城이 膨脹한 것은 自然의 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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