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도 만인만색(萬人萬色)
그러므로 마음의 즐거움은 동일(同一)한 것이로되, 즐거움의 범위(範圍)는 사람에 따라서 서로 동일(同一)치 아니하다. 혹(或)은 육체(肉體)에 대(對)한 본능(本能)이 만족(滿足)을 얻는 때에 무한(無限)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혹(或)은 정신(精神)의 면(面)이나 통체(統體)의 면(面)에 대(對)한 본능(本能)이 만족(滿足)을 얻는 때에 비로소 무한(無限)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또 혹(或)은 호의호식(好衣好食)으로써 육체(肉體)를 양(養)함을 즐겨하고, 혹(或)은 권세(權勢)를 마음대로 행사(行使)함을 즐겨하고, 혹(或)은 포의한사(布衣寒士)의 청빈(淸貧)한 생활(生活)을 하면서 정신적(精神的)으로 천지(天地)와 상사(相似)한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는 것을 즐겨하니, 즐거움도 실(實)로 만인만색(萬人萬色)이다. 공자(孔子)가 「賢哉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回也 = 어질다 회(回)여 일단사(一簞食)와 일표음(一瓢飮)으로 누항(陋巷)에 있음을 사람이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할 것이어늘 회(回)가 그 낙(樂)을 고치지 아니하니 어질다 회(回)여」【註九】하니, 회(回)는 안자(顔子)이오 낙(樂)이라 함은 천지(天地)와 상사(相似)하려하여 천지(天地)의 운행(運行)을 본받는 것을 즐겨 함이니, 이러한 즐거움은 식도락자(食道樂者)나 세도락자(勢道樂者)들의 상상(想像)조차 할 수 없는 경지(境地)이다. 또 고래(古來)의 역사(歷史)를 펴 보건대 사람을 무함음해(誣陷陰害)하고 국민(國民)에게 죄(罪)를 지으면서 권세(權勢)를 잡는 것을 무한(無限)한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는 또한 즐거움의 변태성(變態性)이라, 이러한 사람들은 동류(同類)나 아첨배(阿諂輩)이외(以外)에 진정(眞情)으로 교우(交友)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스스로 부성(富盛)을 버리고 고립(孤立)에 빠짐이오, 수인(讐人)의 보복(報復)이 있을 가 두려워하여 단신(單身)으로 산야(山野)를 소요(逍遙)하거나 필마(匹馬)로 여행(旅行)을 다니지 못하고 외출(外出)할 때에는 반드시 호위(護衛)를 따르게 하니, 이는 스스로 광대(廣大)한 천지(天地)를 버리고 소천지(小天地)에 쭈그림이오, 그 취적(聚積)한 재화(財貨)로써 일시(一時) 구복(口腹)의 즐거움을 얻을 수는 있으나, 인격적(人格的)으로는 죽은지 이미 오래고, 더욱이 시대(時代)는 항상(恒常) 이역(移易)하고 사필(史筆)은 사(私)없이 엄직(嚴直)한지라, 권세(權勢)를 부리는 당일(當日)에는 능(能)히 민중(民衆)의 입을 막을 수가 있으되, 시대(時代)가 바뀐 뒤나, 그 몸이 죽은 뒤의 사필(史筆)을 미리 억제(抑制)할 수는 없으니, 이는 그 자손(子孫)에게 무한(無限)한 치욕(恥辱)을 남겨서 스스로 구원(久遠)한 생생(生生)을 버림이라, 이조(李朝)의 연산(燕山)․중종(中宗)․명종(明宗)․광해(光海) 등(等)의 시대(時代)에 권세(權勢)가 흔천동지(掀天動地)하던 간신(奸臣)들의 자손(子孫)이 수백년(數百年)을 지나도록 머리를 들고 명랑(明朗)한 천지(天地)를 보지 못한 것이 그 일례(一例)이다. 사람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이 개체(個體)의 사욕(私慾)에 편경(偏傾)하면 도리어 악(惡)으로 흐름과 같이, 즐거움이 개체(個體)의 쾌락(快樂)에 편경(偏傾)하면 도리어 근심으로 화(化)하는 것이니, 남을 상해(傷害)하여 불선(不善)으로 얻은 즐거움은, 즐거움이 아니오 곧 근심의 씨이다.
공자(孔子)가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 소사(疏食)를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굽혀 베개 하더라도 낙(樂)이 또한 그 가운데에 있다, 의(義)치 아니하고 부(富)하고 또 귀(貴)함은 나에게 부운(浮雲)과 같으니라」【註十】하니, 이는 부귀(富貴)를 얻기 위(爲)하여 불의(不義)한 일을 행(行)하여, 민중(民衆)으로부터 고립(孤立)하고 광대(廣大)한 천지간(天地間)을 마음대로 활보(闊步)치 못하고 더러운 이름을 구비(口碑)와 사서(史書)에 전(傳)하기보다, 차라리 청빈생활(淸貧生活)로써 천지대자연(天地大自然)을 즐겨 하리라 함을 말함이다. 공자(孔子)는 부귀(富貴)를 싫어함이 아니라, 「崇高莫大乎富貴 = 숭고(崇高)함이 부귀(富貴)보다 대(大)함이 없다」【註十一】하고, 또 「聖人之大寶曰位 = 성인(聖人)의 대보(大寶)는 가로되 위(位)라」【註十二】하여, 성인(聖人)이 부귀(富貴)의 대위(大位)에 있은 연후(然後)에 인정(仁政)을 행(行)할 수가 있다고 말하면서 또한 불의(不義)의 부귀(富貴)를 배척(排斥)하는 것은, 불의(不義)의 부귀(富貴)는 즐거운 일이 아닌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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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과 즐거움
그러므로 사람은 천지대자연(天地大自然)의 즐거운 운행(運行) 속에 살고 있으면서, 정치(政治)의 임무(任務)를 맡은 때에는 이간정치(易簡政治)를 행(行)하여 천하민중(天下民衆)으로 더불어 함께 태평(泰平)을 즐겨 할지오, 초야(草野)에 처(處)한 때에는 이간정치(易簡政治)의 은택하(恩澤下)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써 육체(肉體)와 정신(精神)을 양(養)하고 친척(親戚)․붕우(朋友)로 더불어 함께 그 생존(生存)을 즐겨 할지니, 이것이 곧 천지(天地)와 상사(相似)하게 되는 운동(運動)이다.
사람이 천지(天地)와 상사(相似)하게 되면, 비록 적고 적은 일속신(一粟身)이지만 천지대자연(天地大自然)의 속에 혼륜화합(渾淪和合)하여, 천지(天地)가 곧 내오, 내가 곧 천지(天地)라는, 무한(無限)한 즐거움의 경지(境地)에 도달(到達)할 것이니, 이가 곧 인생(人生)의 사는 목적(目的)이다.
그러나 천지(天地)에는 정대(正大)의 정(情)이 있으므로 그 운행(運行)이 자연(自然)스럽고 조화(調和)하여 스스로 즐겁게 행(行)하고 있으나, 사람은 편(偏)하고 국(局)하여 정대(正大)의 정(情)이 없음으로 인생(人生)의 행로(行路)에는 육체적(肉體的)으로는 기한질고(飢寒疾苦) 등(等)이 있고, 정신적(精神的)으로는 우수사려(憂愁思慮) 등(等)이 있고, 사회적(社會的)으로는 시세(時勢)의 불리(不利)와 정치(政治)의 불순(不順) 등(等)이 있어, 즐거움보다 근심이 더 많은 것이다. 역(易)에「比樂師憂 = 비(比)는 낙(樂)하고 사(師)는 우(憂)한다」【註十三】하니, 비(比)는 조화(調和)이오 사(師)는 투쟁(鬪爭)이라, 투쟁(鬪爭)과 조화(調和)는 호근(互根)하고 있어 투쟁(鬪爭)을 통(通)하여 조화(調和)를 얻음과 같이, 근심과 즐거움도 또한 호근(互根)하여 근심을 지나서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人生)은 즐거움을 얻기 위(爲)하여 근심하고, 근심하면서 즐거움을 추구(追求)하여, 천지(天地)와 상사(相似)한 ,부성(富盛)․광대(廣大)․구원(久遠)의 경지(境地)에 이르러 천지(天地)로 더불어 삼재(三才)의 위(位)를 이루는 때에, 비로소 무한(無限)한 즐거움을 향유(享有)하게 되나니, 이때가 곧 일생(一生)동안 더듬고 있는 목적지(目的地)에 도달(到達)하는 때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개체(個體)인 동시(同時)에 또한 통체(統體)의 일원(一員)이라, 이러한 목적지(目的地)는 개체(個體)의 독행(獨行)만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오, 반드시 통체(統體)인 사회(社會)에 이간정치(易簡政治)가 행(行)하여, 사회전체(社會全體)가 무한(無限)한 즐거움을 향유(享有)하는 때에 비로소 그 개체(個體)도 또한 함께 무한(無限)한 즐거움을 맛보아 이 목적지(目的地)에 도달(到達)하는 것이다.
註一. 繫辭上傳 第一章
註二. 繫辭上傳 第四章
註三. 乾卦文言
註四. 論語 述而篇
註五. 論語 子路篇
註六. 繫辭上傳 第五章
註七. 乾卦文言
註八. 繫辭上傳 第四章
註九 論語 雍也篇
註十. 論語 述而篇
註十一. 繫辭上傳 第十一章
註十二. 繫辭下傳 第一章
註十三. 雜卦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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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錄 一】
易學과 우리 國文과의 關係
‣제자원리(制字原理)
우리 국문(國文)은 그 제자(制字)의 원리(原理)를 천지(天地)의 자연법칙(自然法則)에서 본받은 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오, 역학(易學)이 또한 자연법칙(自然法則)을 상(象)한 학문(學問)이므로, 국문(國文)과 역학(易學)은 한가지로 자연법칙(自然法則)에서 발원(發源)하여 그 파류(派流)가 두 길로 나뉘운 것이다. 즉(卽) 자연법칙(自然法則)이 인생(人生)과 사회(社會)의 생존원리(生存原理)를 구명(究明)하는 학문(學問)에 응용(應用)된 것이 곧 역학(易學)이오, 자연법칙(自然法則)이 성음학(聲音學)에 응용(應用)되어 문자(文字)로 나타난 것이 곧 우리 국문(國文)이라, 그러므로 우리 국문(國文)은 역학(易學)으로 더불어 동일(同一)한 계통(系統)에 연계(連繫)된 학문(學問)이오, 따라서 국문중(國文中)에는 역학(易學)을 본받은 것이 적지 아니한 것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제자해(制字解)에 「凡有生類 在天地之間者 捨陰陽而何之 故 人之聲音 皆有陰陽之理 顧人不察耳 今正音之作 初非智營而力索 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 理旣不二則 何得不與天地鬼神同其用也 = 무릇 생류(生類)가 천지간(天地間)에 있는 자(者)가 음양(陰陽)을 버리고 어디로 가리오, 그런 고(故)로 사람의 성음(聲音)에도 다 음양(陰陽)의 이(理)가 있는데 사람이 살피지 아니할 뿐이라, 이제 정음(正音)의 지음은 지(智)로 영(營)하고 역(力)으로 색(索)함이 아니오, 다만 그 성음(聲音)을 인(因)하여 그 이(理)를 극(極)할 따름이라. 이(理)가 이미 이(二)치 아니하니 어찌 천지귀신(天地鬼神)으로 더불어 그 용(用)을 한가지로 하지 못하리오」하니, 이는 정음(正音)의 지음이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이(理)를 취(取)함을 말함이오, 또 그 서문(序文)에 「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叶七調 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 =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형(形)을 상(象)하되 자(字)는 고전(古篆)을 본받고 성(聲)을 인(因)하되 음(音)은 칠조(七調)에 맞추니, 삼극(三極)의 의(義)와 이기(二氣)의 묘(妙)함이 널리 포괄(包括)되지 아니함이 없다」하니, 삼극(三極)이라 함은 역(易)에 이른 바의 「삼극지도(三極之道)」【註一】인데,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대대(對待)의 이(理)를 말함이오, 이기(二氣)라 함은 역(易)에 이른 바의 「이기감응(二氣感應)」【註二】인데, 음양(陰陽)의 이기(二氣)를 말함이며, 또 「東方有國 不爲不久 而開物成務之大智 蓋有待於今日也歟 = 동방(東方)이 나라를 유(有)한지 오래지 아니하지 아니하되 물(物)을 개(開)하고 무(務)를 성(成)하는 대지(大智)는 대개(大槪) 금일(今日)에 대(待)함이 있을진저」하니, 개물성무(開物成務)라 함은 역(易)에 이른 바의 「夫易開物成務」【註三】인데, 문물(文物)을 개명(開明)하고 세무(世務)를 성수(成遂)함을 말함이니, 이 삼극(三極)․이기(二氣)․개물성무(開物成務) 등(等) 용어(用語)는 모두 역학(易學)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정음이십팔자(正音二十八字)는 각각(各各) 그 형(形)을 상(象)하여 지은 것인데, 초성(初聲)은 사시(四時)의 이(理)를 취(取)하고 【註四】중성(中聲)은 삼재(三才)의 이(理)를 취(取)하니【註五】이 사시(四時)와 삼재(三才)의 이(理)가 또한 역학(易學)의 원리(原理)와 전연(全然) 일치(一致)되는 것이다. 이제 제자해(制字解)의 요지(要旨)를 해설(解說)하면 대개(大槪)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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