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混戰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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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混戰

百濟는 高句麗에게 밀려서 熊津으로 옮긴 後 外로는 高句麗의 侵略이 그치지 아니하고 內로는 政治가 어지러워서 國力이 떨치지 못함으로 한 便으로는 멀리 日本과 親善하여 그 後援을 얻으려 하였으며 百濟의 學者 王人이 千字文과 論語를 가지고 日本에 들어가서 그 王子에게 처음으로 漢文을 가르쳐주고 佛敎와 및 建築, 陶器, 釀造, 冶金, 彫刻, 繪畵等의 技術을 傳한 것도 모두 이 時代의 일이었다. 百濟 聖王은 新羅와 함께 高句麗를 치려하더니 新羅가 高句麗의 强盛함을 두려워하고 또 부질없이 外國과 싸우기보다 內政을 닦아서 國力을 充實히 하는 것이 옳다하고 百濟의 請을 拒絶하고 도리어 高句麗와 通함으로 百濟와 新羅의 和好가 깨지고 新羅를 치다가 王이 戰死하였다. 이에 百濟는 더욱 弱하여 熊津에서 支撑치 못하고 都邑을 泗沘(지금의 扶餘)로 옮기고 國號를 南夫餘라 고쳤다.

新羅 法興王때에 佛敎가 처음으로 들어왔는데 이 나라 政治는 君主와 民衆의 階級 差別이 嚴格한 階級制度이며 佛敎는 上下의 差別이 없는 平等思想위에 서는 것이므로 法興王이 佛敎를 펴서 政治的으로는 君民의 階級을 嚴立하고 宗敎的으로는 君民平等을 主唱하여 國民의 一致團結을 圖하니 이 政策이 民心團合에 적지 않은 效果를 거두었던 것이다.

다음임금 眞興王은 新羅 中興의 英傑이라 처음으로 花郞이라는 制度를 만들어 젊은 사람들이 무리를 모아서 娛遊하면서 學文과 道德을 討論하기도하고 歌舞로써 즐기기도 하고 멀리 國內의 有名한 山川을 돌아다니면서 몸도 鍛鍊하고 人情도 살피며 그리하는 中에 옳고 바른 사람을 골라서 나라에 薦擧하여 適當한 所任을 맡아보게 하니 當時에 國家를 爲하여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은 모두 花郞 出身이었고 이것이 新羅의 三韓統一의 原動力이 된 것이다.

三國時代는 中國과 交通하여 서로 和好를 맺는 것이 外交政策의 主要한 하나로 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一便으로는 大陸文化를 輸入하고 一便으로는 大國의 聲援을 빌어서 敵對國을 威壓하려 함이니 只今에 外國 承認을 받음과 같은 것이다. 高句麗와 百濟는 自由로 中國과 交通할 수 있으되 오직 新羅는 中國과 交通 할 길이 없으므로 三國의 混戰 地帶인 漢江 一帶地를 占領하고 西海로부터 中國과 交通하는 것이 國家大計의 主要한 一部이었다. 이에 高句麗와 百濟가 漢江 地帶에서 激戰하고 있는 機會를 틈타서 먼저 百濟軍과 聯合하여 高句麗 軍을 쫓아버리고 다시 百濟軍을 反擊하여 드디어 漢州(지금의 서울)로부터 仁川 南陽에 이르는 地域을 占有하니 이로부터 中國에 通하는 길이 열리고 後日 三韓統一의 基礎가 이루어 진 것이다.

이로부터 해마다 大陸과의 交通이 끊이지 아니하고 遊學生과 求法僧이 數없이 다녔다. 이때 六伽耶國 中에 駕洛國은 法興王때에 이미 新羅에 合倂되고 眞興王때에 大伽倻國을 쳐서 郡縣을 삼으니 남은 四 伽倻國이 次例로 무너져서 洛東江 流域 地方이 全部 新羅의 땅이 되었고 지금의 伽倻琴은 이 伽倻國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며 眞興王은 또한 北으로 땅을 넓혀서 南沃沮의 中部에까지 이르고 國境 地方에 巡狩하여 碑를 세우니 지금의 慶尙道 昌寧邑과 서울의 北漢山 碑峰과 咸鏡南道의 咸州郡 黃草嶺과 咸鏡南道 利原郡의 摩雲嶺에 있는 巡狩碑가 곧 그것이다.

新羅의 局勢가 갑자기 强盛하여짐을 보는 高句麗와 百濟는 從來의 世讎를 버리고 서로 和好를 맺어서 新羅에 當하게 되니 新羅도 形勢의 危殆함을 깨닫고 中國大陸의 힘을 이끌어 올 政策을 쓰게 되었다.

이때 中國은 隋나라가 亡하고 唐나라가 代身하고 그 임금 太宗은 有名한 英王이다. 唐太宗은 北으로 突闕(터키)을 무찌르고 西로 吐藩(티베트)과 西域의 여러 나라를 平定하고 南方의 여러 나라도 朝貢하게되어 天下를 統一하였다고 생각되었으나 오직 東方의 高句麗만이 그에게 屈伏하지 아니함으로 高句麗 寶藏王때 (檀紀 二千九百七十七年)에 스스로 軍士 三十萬을 거느리고 風雨같이 몰려와서 이듬해 四月에 이미 遼河를 건넜고 이때 高句麗에는 淵蓋蘇文이 國政을 잡고 굳게 지키었다. 唐太宗은 遼東城과 白岩城을 빼았은 後 安市城을 包圍하고 數個月을 싸웠으나 마침내 떨어뜨리지 못하던 中 高句麗 將帥의 화살이 唐太宗의 눈을 마쳤으므로 唐兵은 戰意를 잃고 또 가을철이 되어 찬바람이 불어오고 糧食까지 다하게 되었다. 이에 唐太宗은 싸움을 斷念하고 도로 돌아가는데 險路와 風雪에 人馬의 犧牲이 길에 가득하였고 그 後 數次로 軍士를 보내어 高句麗를 쳤으나 亦是 高句麗의 猛烈한 反擊으로 失敗하고 돌아갔다.

高句麗와 大陸의 勢力이 半世紀를 두고 겨룬 그 사이에 新羅의 힘이 더욱 커지고 그 때에 또 金庾信과 金春秋의 두 英傑이 나서 하나는 軍事로 하나는 外交로 大 新羅를 세우기에 힘을 다하였다. 百濟는 聖王이 戰死한 怨讐를 期於히 갚으려하여 자주 軍士를 내어 新羅를 치고 高句麗가 또한 新羅의 大陸의 힘을 이끄는 것을 미워하여 壓力을 加하니 新羅는 金春秋를 唐나라에 보내어 救援을 請하였다. 唐太宗이 죽은 後 그 아들 高宗은 어버이의 뜻을 이어 恒常 東方을 版圖內에 넣으려 하던 次에 新羅의 請兵이 있으므로 千載一遇의 好機會라 하여 드디어 百濟를 칠 軍士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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