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의 文化와 經濟
三國에는 國文이 없고 中國의 漢文을 輸入하여 썼으므로 一部 貴族階級은 그것을 利用할 수 있었으나 一般百姓은 아는 者가 極히 적었고 漢文字가 國語에 맞지 않음으로 일을 記錄할 때에는 漢字의 音과 訓을 빌어서 「밝은달」을 「明期月」이라는 等으로 썼으니 新羅의 鄕歌가 그 例이다. 新羅가 三韓統一뒤에 五六百年의 戰禍로부터 비로소 解放되어 唐나라로 들어가는 遊學生이 해마다 늘어가고 盛唐의 燦爛한 文物을 부지런히 받아들이는 同時에 漢文 熱도 相當히 높아졌다. 그리하여 漢文學者 薛聰은 吏讀文을 만들어 經書를 解釋하여 生徒를 가르치고 從前에는 地名 같은 것이 모두 우리나라 말로 되어 있더니, 新羅 景德王때에 모든 地名을 中國式으로 고치니 「沙熱伊 고을」을 「淸風縣」으로 고침과 같음이오 이 무렵을 前後하여 人名도 차츰 中國式 姓名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우리의 옛 모습이 漸次 사라지고 中國을 崇拜하는 風習이 생겨서 事大思想이 國民의 머리속에 뿌리를 박게 되었으니 이것이 我國 國民思想의 一大 轉換期이다.
佛敎는 我國에 들어온 後 建築, 彫刻, 冶金, 繪畵 等 技術을 傳來 하여 佛敎 廣布와 함께 널리 普及되었으나 끊임없는 戰亂으로 因하여 그 發生하려던 싹은 여지없이 짓밟히더니 新羅의 統一期를 前後하여 힘있게 發展하였으니 지금 남아있는 皇龍寺의 九層塔, 瞻星臺, 佛國寺, 石窟庵 같은 것이 모두 그 時代의 만든 遺物이다.
土地制度는 三國 鼎立 當時에는 遺族들이 大 面積을 차지하고 奴隸를 부려서 耕作하고 一般農民은 各其 一定한 面積을 가지고 農事지으며 이때는 地가 많고 人口가 比較的 적고 遊食民을 驅하여 强制로 荒地를 開拓하고 農業에 從事케 하였다.
新羅 統一後에 社會가 安定되었으므로 비로소 唐나라의 均田制를 배워서 丁田制를 만들고 土地는 모두 國有로 하고 十五歲부터 壯丁이라 하여 國家로부터 分配받고 六十歲에 國家에 返還하며 功臣遺族들에게 賜田을 주어 土地의 收稅權을 가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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