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子胡亂(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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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胡亂

鴨綠江과 豆滿江의 밖에 있는 女眞族 卽 野人은 明나라에서도 抑制하기 어려워서 恒常 懷柔하여 오던 터이라 壬辰倭亂때에 우리나라 北邊을 侵入하려는 計劃이 있었는데, 萬一 이때에 野人이 侵犯하였다면 우리나라는 腹背로 敵을 받아서 支撑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朝廷에서는 六鎭의 守備를 튼튼히 한 까닭에 아무 일 없었다. 그 後에 野人들은 明나라 勢力이 弱해짐을 보고 漸次로 氣勢를 펴는 中에 女眞族中에서 奴兒哈赤(누르하치)이 일어나서 滿洲에 있는 여러 部族을 統一하고 光海君 八年에 임금이 되고 王號를 「大汗」이라 하고 瀋陽(奉天)에 都하고 국호國號를 後金이라 하고 猛烈한 氣勢로 明나라에 쳐들어갔다. 明나라에서는 우리나라에 救援을 請하였음으로 光海君은 姜弘立 等으로 하여금 軍士 一萬名을 거느리고 가서 明나라를 돕게 하니 이는 壬辰亂의 恩惠를 갑기 爲함이라 그러나 明나라 軍士가 敗하고 姜弘立은 滿洲에 降服하고 그 後로부터 光海君은 될수록 中立을 지켜서 滿洲가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와서 同盟하기를 請하였으나 應하지 아니하고 또 明나라에서 援兵을 보내기를 交涉하였으되 亦是 躊躇하고 있었다. 仁祖가 反正한 後에 朝廷에서는 光海君의 中立政策이 明나라에 對한 義理에 어긋났다하여 假島(平安道 피섬)에 와 있는 明將 毛文龍을 도와서 그와 緊密한 關係를 맺었다.

처음에 仁祖反正할 때에 李适의 功이 적지 아니하였는데 朝廷의 處事가 李适의 마음에 滿足치 아니하였음으로 李适은 平安道에서 亂離를 일으켜 風雨같이 달려와서 京城을 占領하였다. 仁祖는 忠淸道 公州에 避難하고 張晩, 鄭忠信, 李曙 等으로 하여금 이를 쳐서 깨뜨리고 李适이하 여러 首領들을 죽이니 그 餘黨이 滿洲로 逃亡하여 들어가서 滿洲 임금 太宗을 衝動시켜 朝鮮을 치기를 請하였다.

이때 滿洲는 우리나라가 明나라를 돕고 있는 形勢를 살피고 힘으로 누르려고 하던 次이라 阿敏이라는 將帥로 하여금 軍士 三萬을 거느리고 仁祖 五年 丁卯에 쳐들어왔다. 朝廷에서는 張晩을 都元帥로 하여 敵軍을 막고 王(仁祖)은 江華島에 避難하더니 마침내 그들과 兄弟의 誼를 맺고 敵軍이 물러가니 이를 丁卯虎亂이라 한다.

그 後 滿洲의 勢力은 더욱 强해지고 그 임금 누르하치의 아들 太宗은 用兵을 잘하여 中國과 蒙古를 漸次로 略取하고 우리나라에 對하여 兄弟國의 約條를 고쳐서 君臣國으로 만들자고 함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憤하게 여겨서 그들과 絶交하자고 主張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던 次에 滿洲는 國號를 淸이라 고치고 天子의 號를 稱하고 우리나라에 對하여 저희에게 尊號를 바치라고 要求하니 이에 兩國의 國交는 몹시 險惡하였다.

이때 朝廷에서는 淸兵이 반드시 侵入할 것을 알고 있었는데 오직 입으로 淸國을 排斥하는 소리만 높을 뿐이오 侵入하는 것을 막을만한 準備는 全然 없었다.

朝臣 中에는 이미 兩國의 和가 끊어지고 또 防備策도 세우지 않으면 國家의 將來가 어떻게 될 것이냐고 근심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고 尹煌(八松)같은 이는 「이미 和하지 못하고 또 싸우지도 못하면 이는 앉아서 나라를 亡케 함이라 다시 和할 수가 없다면 싸울 準備를 急히 갖춰야 될 것인데 只今에 軍士도 없고 軍糧도 없으니 이제로부터 이를 準備하여 淸兵을 막기에는 때가 이미 늦었다. 오직 한 가지 方法은 王이 여러 臣下를 거느리고 모두 槍을 집고 활을 메고 先陣에 나가서 開城이나 平壤에 進駐하여 全國에 號令을 내리면 이 消息을 들은 義兵士들이 반드시 武器를 準備하고 糧食을 등에 지고 스스로 달려와서 國難에 赴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旬月사이에 精兵 數萬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이 方法만이 나라를 救하는 길이라」하여 親征論을 力說하였다.

그러나 朝廷 內에는 金瑬와 金自點의 勢力싸움이 벌어지고 붓대와 혀끝으로 敵을 꾸짖을 뿐이오 아무런 計劃도 없는 者들이 大部分이니 이 親征論이 實行되지 못함은 다시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던 中에 仁祖 十四年 丙子 十二月에 淸太宗이 스스로 軍士 十萬을 거느리고 쳐들어오는데 이때 우리나라의 名將 林慶業(孤松)이 義州府尹으로 있으면서 白馬山城을 굳게 지키고 있음으로 淸兵은 이를 피避하여 昌城의 間道로 나와서 道中에서 만나는 사람을 모조리 죽여 京城에 通報하는 길을 끊고 信道兼行하여 鴨綠江을 건넌지 四月만에 先陣이 京城 郊外 十餘里許에 이르니 朝廷에서는 夢想도 못하던 일이라 上下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먼저 王子를 비롯하여 大臣들의 家族을 江華島로 避難시키니 이는 淸兵이 侵入하는 때에 가장 安全한 避難地로 設備하여 둔 곳이오 또 淸兵을 막을 準備를 하지 아니한 것도 專혀 이 江華島를 믿었기 때문이다.

王(仁祖)은 諸臣을 거느리고 江華 半月로 나가려 하더니 淸兵이 이미 길을 막았음으로 急히 東大門을 나가 廣州의 南漢山城으로 들어가니 淸兵이 뒤를 따라 城을 包圍하였다 城에 籠居한지 四十日에 勤王兵은 이르지 아니하고 糧食이 乏絶하여 馬를 잡아먹게 되고 城中 人心이 크게 危懼하여 孤城을 지키기 어려운 形便이었다. 하루는 王(仁祖)이 城을 巡視하더니 한 軍卒이 王前에 나와 업드려 말하되 「지금 大將된 사람은 목숨을 아껴하여 싸우지 아니하고 비단 옷을 입고 城아래에 앉아서 우리 軍卒을 督戰하니 이런 大將은 아무 所用이 없는 것인즉 우리 軍卒 中에서 大將을 定하여 주시면 死力을 내어 싸우리라」하니 王은 軍心이 이미 變함을 보고 크게 놀라서 諸臣과 이를 議論하는데 或是 軍變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이때 江華島를 지키는 大將은 淸兵이 바다를 건너서 들어올 수 없는 것을 굳게 믿고 每日 酒宴을 베풀고 놀더니 뜻밖에 淸兵이 城下에 이르러 쳐들어 왔다. 城中에서는 비록 軍士는 있었으나 手足을 놀릴 사이 없이 陷落되고 避難 나갔던 王子以下가 모두 捕虜되고 大臣들 家族의 婦女들은 凌辱을 當할 것을 두려하여 혹은 목매어 죽고 或은 바다에 빠져 죽으니 그 慘狀을 참아 볼 수가 없었다.

南漢山城에서는 江華島 陷落의 消息을 듣고 모두 落膽하여 더 抗戰할 氣를 全然잃고 王(仁祖)과 崔鳴吉(遲川)等은 和議를 主張하게 되니 이 和議라 함은 同等한 國家로써 和親하는 것이 아니오 淸에 屈服하고 天子로 모시는 屈辱的인 降服이다. 이에 朝臣 中 斥和派는 君臣이 모두 戰死할지언정 決코 오랑캐의 앞에 屈膝하고 살지는 못하리라 하고 崔鳴吉 等 主和派를 賣國賊이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王(仁祖)은 한갓 죽는 것은 國家를 爲함이 아니라 하고 다음해 丁丑 正月에 三田渡(松坡)에서 淸兵에 降服하였다.

이에 淸太宗은 世子와 鳳林大君을 人質로 하고 金尙憲 等 斥和臣과 數千名의 捕虜를 끌고 軍士를 돌렸다.

이때 崔鳴吉等 主和派와 金尙憲 等 斥和派의 사이에 서로 疑心이 생긴 까닭은 斥和派는 主和派로써 富貴를 貪내어 淸國에 降服하여 그 地位를 굳게 하려는 것이라 하고 主和派는 斥和派로써 참으로 大義를 세우는 것이 아니오 釣名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라 한 것이다.

그 뒤에 淸國은 明國을 치기 爲하여 우리나라 軍士를 보내기를 强要하니 崔鳴吉이 極力 反對함으로 淸은 崔鳴吉을 불러다가 獄에 가두었다. 金尙憲과 崔鳴吉은 모두 死生이 눈앞에 迫頭하되 조금도 屈하지 아니하고 끝끝내 大義를 지켰음으로 從來 兩派사이의 모든 疑心과 誤解가 풀려버렸다.

우리나라 사람이 淸兵에게 잡혀간 것이 적지 아니하고 또 淸國은 明나라를 칠 軍士를 보내라고 繼續 要求하니 朝廷에서는 捕虜된 사람을 돌려오는 것과 軍士보내기를 拒絶하는 것이 對淸外交의 가장 重要한 일이었다. 그러나 淸의 힘이 늘어서 軍士를 보내지 아니할 수 없었는데 林慶業이 軍士를 거느리고 明兵과 싸우게 되자 軍士 中에 逃亡하여 明나라에 들어가서 淸兵의 內容을 알려준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또 捕虜된 사람을 담배를 주고 돌려온 일이 있으니 담배는 光海君때에 日本을 거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몇 해 아니 되어 國內에 퍼져서 한 生産業이 되었다.

우리나라와 中國과의 關係는, 三國時代는 或은 對等한 地位로써 交際하고 或은 外交政策으로 事大의 禮를 잡더니 蒙古 侵入 後에 그 힘에 屈服하여 完全한 君臣 關係가 되고 高麗末에 明나라가 中國을 차지하자 自進하여 君臣 關係를 맺으니 이는 北方 胡族에 對하여는 恒常 敵對感情을 가지면서 漢族에 對하여는 아무 거리낌 없이 事大의 禮를 잡는 古來의 한 傳統이었다. 그런데 淸國은 胡族이라 國人 全體가 그에게 屈服하기를 싫어하고 힘만 있으면 그를 쳐보려는 생각을 가졌다.

丙子의 亂에 힘이 元體 不足하여 屈服하기는 하였으나 淸에 對한 反抗心은 더욱 굳어졌다. 人質로 갔던 王子는 十年만에 돌아오더니 世子는 十年 勞苦에 歸國한지 얼마 아니 되어 病死하고 鳳林大君이 仁祖의 뒤를 이어 王이 되니 이가 孝宗이다.

孝宗은 瀋陽에 있을 때에 百般苦楚를 備嘗하고 또 淸兵에 從事한 일이 있어 그들의 實力을 잘 알고 있는지라 王이 된 後에 淸의 怨讐를 갚을 생각이 懇切하여 北伐할 뜻을 품었다.

이에 宋時烈(尤庵)等과 더불어 北伐 計劃을 꾸미고 李浣으로 하여금 軍士를 調練시키고 各地에 戰馬를 기르고 主要한 兵站地에 軍糧을 儲置하였다. 그리고 李朝建國한지 二百五十餘年동안에 西北人의 仕路를 막고 苛酷한 差別 待遇를 하더니 强大한 淸國을 치려니 自然히 西北人의 힘을 合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에 비로소 西北人 調用의 論이 일어났다. 그러나 從來에 文은 持平掌令에 지나지 못하고 武는 萬戶僉使에 지나지 못하던 것을 겨우 一二階級을 올려주자는 데 不過하고 이것조차 朝廷안의 兩班階級의 妨害로 因하여 順便하게 進行치 못하였다.

便으로 淸國과 交通한 뒤로 中國의 學問과 産業方面을 보고 돌아온 學者들 中에는 우리 自體의 批判이 생기게 되었다. 이때 淸國에는 考證學이 發達하고 西洋學術이 收入되어 널리 퍼지고 있는 때이라 우리나라 使臣들이 當時 淸의 서울인 北京을 來往하면서 이러한 中國 學術方面에 눈뜨기 始作하고 우리의 從來의 性理學만으로는 國力을 크게 할 수 없으니 爲先 우리의 固有한 文化와 歷史 地理 等을 硏究하는 同時에 利用厚生의 學問을 넓혀서 國內의 産業과 外國貿易을 振興시켜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를 北學論이라 이르고 北學이라 함은 北으로 先進國을 배운다는 뜻이다.

北學論을 生하는 學派를 實事求是學 또는 實學派라 하는데 그中 먼저 主唱한 사람은 有名한 經濟學者로 稱하는 柳馨遠(磻溪)이었고 實學의 主唱은 從來 程朱學만을 崇高하던 學風의 一大 變化이오 또한 沈滯한 社會 雰圍氣에 一大 淸新氣分을 注入한 것이었다.

政治家中에는 金堉(潛谷)이 中國으로부터 鐵錢을 收入하여 鐵貨 制度의 確立을 꾀하니 이는 綿布를 貨幣로 使用하여서는 國內의 産業이 發達될 수 없음으로 期於히 鐵貨로써 通貨를 삼으려 한 것이오 高麗 成宗이 鑄錢을 始作함으로부터 六百餘年을 지난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鐵貨가 通貨로 쓰게 되었으며 또 大同法도 金堉의 强力한 主張에 依하여 全國에 고루 施行하게 되었다.

또 우리나라는 三國時代 以來로 凶年이 자주 드는데 凶年의 原因은 主로 旱災이었고 特히 水稻耕作에 旱災가 더욱 甚하였다. 이에 孝宗은 滿洲에서 보고 온 水車를 國中에 普及시켜서 灌漑에 적지 않은 便宜를 주었다.

孝宗이 北伐 計劃을 세움으로부터 비로소 自己批判이 생겨서 自體가 얼마나 微弱하고 沈滯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學術 産業 等 모든 方面에 改革과 刷新의 氣運이 가득 하였다. 所謂 北伐이라 함은 孝宗이 復讐心에서 나온 一種의 希望이오 當時의 兩國 國力을 比較하여 보아서 決코 實現性이 있는 것이 아니며 國民全體가 北伐의 不可能함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宋時烈 等이 이를 主張한 것은 王(孝宗)의 뜻을 迎合하여 自己의 地位를 固植하려 한 것이오 아무 眞實性이 있는 것이 아니며 後에 尹鑴가 北伐論을 主張한 것도 또한 釣名을 爲한 것이었다. 孝宗은 北伐하기 爲하여 銃手隊를 養成하였는데 이때 北滿州의 黑龍江 方面에서는 俄羅斯(러시아)人 侵略이 甚하여 淸과의 사이에 衝突이 있으되 淸人은 恒常 俄人에게 敗함으로 淸은 朝鮮 銃手의 잘 싸움을 알고 救援을 請하여 두 번을 우리 銃手隊가 들어가서 俄人 擊退에 成功하니 이가 우리나라와 俄 人이 서로 關涉한 始初이었으며 孝宗은 王位에 있은지 十年 (己亥五月) 昇遐하고 北伐論은 스스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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