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指導者)의 시범(示範)
사회(社會)의 악(惡)을 제거(除去)함에는 형벌제도(刑罰制度)가 있는데, 실제(實際)에는 형벌(刑罰)만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다. 공자(孔子)의 정치론(政治論)에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 도(道)하기를 정(政)으로써 하고 제(齊)하기를 형(刑)으로써 하면 민(民)이 면(免)하되 치(恥)가 없나니라, 도(道)하기를 덕(德)으로써 하고 제(齊)하기를 예(禮)로써 하면 치(恥)가 있고 또 격(格)하나니라」【註八】하니, 도(道)라함은 지도(地道)함이오, 제(齊)라 함은 양(陽)이 음(陰)을 극제(克制)하여 균평제일(均平齊一)함이라, 민중(民衆)을 지도(指導)하기를 법령(法令)으로써 하고 균제(均齊)하기를 형벌(刑罰)로써 하면, 민중(民衆)이 범죄(犯罪)하지 아니할 정도(程度)에 이를 수는 있으나 범죄(犯罪)를 수치(羞恥)로 생각하는 이성(理性)은 발(發)하지 아니하며, 지도자(指導者)의 덕행(德行)이 상도(常度)가 있어 실천(實踐)으로써 지도(指導)하면 인심(人心)이 관감(觀感)하여 스스로 흥기(興起)하고, 다시 예절(禮節)로써 질서(秩序)를 균제(均齊)하면 인심(人心)이 수치(羞恥)를 알고 스스로 화성(化成)함에 이른다 함이니, 정형(政刑)은 외형(外形)을 조화(調和)함이오, 덕례(德禮)는 마음을 조화(調和)함이라, 악(惡)의 제거(除去)는 외형(外形)의 조화(調和)만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오, 반드시 마음에 수치(羞恥)를 알아서 스스로 조화(調和)치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다. 수치심(羞恥心)이라 함은 이성(理性)의 산물(産物)로서 만물중(萬物中)에 오직 사람만이 가지는 특성(特性)이라, 사람이 과오(過誤)나 죄악(罪惡)을 범(犯)한 때에 그를 세척회개(洗滌悔改)하는 것은 오직 수치심(羞恥心)의 힘이니, 역(易)에 「회(悔)」라 함은 이 수치심(羞恥心)의 분진(奮震)함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수치심(羞恥心)을 상실(喪失)하여 어떠한 야비(野卑) 저열(低劣)한 행동(行動)을 하더라도, 그것이 수치(羞恥)인줄을 알지 못하면 그는 이미 인류계(人類界)로부터 동물계(動物界)로 타락(墮落)한 것이니, 정치(政治)는 그 사회내(社會內)에 일인(一人)의 동물(動物)도 없게 하는 사업(事業)이다. 또 논어(論語)에 「季康子 患盜 問於孔子 孔子對曰 苟子之不慾 雖賞之 不竊 = 계강자(季康子)가 도적(盜賊)을 근심하여 공자(孔子)에게 물은대 공자(孔子)가 대(對)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자(子)가 욕(欲)치 아니하면 비록 상(賞)주더라도 절도(竊盜)치 아니하리라」【註九】하니, 이는 계강자(季康子)가 탐욕(貪慾)하여 권세(權勢)와 지위(地位)를 절도(竊盜)한 까닭에 백성(百姓)이 그를 본받아서 절도(竊盜)하는 것이니 자(子)가 절도(竊盜)를 하지 아니하면 비록 백성(百姓)에게 상(賞)을 주면서 절도(竊盜)하기를 권장(勸獎)하더라도 백성(百姓)들이 응(應)치 아니하리라 하여 상위(上位)에 있는 자(者)가 청렴결백(淸廉潔白)한 것이 곧 절도(竊盜)를 방지(防止)하는 양책(良策)이오, 지도자(指導者) 자신(自身)이 절도(竊盜)를 하면서 백성(百姓)의 절도(竊盜)를 방지(防止)하기 위(爲)하여 금령(禁令)을 발(發)하고 형벌(刑罰)을 쓰는 것은 효과(效果)없는 일이라 함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易)에 「天地 以順動故 日月不過而四時不忒 聖人以順動 則刑罰淸而民服 = 천지(天地)가 순(順)으로써 동(動)하는 고(故)로 일월(日月)이 과(過)치 아니하고 사시(四時)가 틀리지 아니하나니, 성인(聖人)이 순(順)으로써 동(動)하는지라 곧 형벌(刑罰)이 청(淸)하고 민(民)이 복(服)한다」【註十】하니, 이는 천지(天地)의 운행(運行)이 순리(順理)로 동(動)하는 까닭에 일월(日月)의 절도(節度)가 어기지 아니하고 사시(四時)의 순서(順序)가 틀리지 아니하며. 성인(聖人)의 정치(政治)가 순리(順理)로 동(動)하는 까닭에 백성(百姓)이 범법(犯法)하는 자(者)가 적어서 형벌(刑罰)이 청간(淸簡)하고 인심(人心)이 순복(順服)함을 말함이다.
교육(敎育)은 인격(人格)의 수양(修養)을 체(體)로 하고 지능(知能)의 학습(學習)을 용(用)으로 하는 것이라, 인격(人格)은 우수(優秀)하되 지능(知能)이 적으면 체(體)가 용(用)의 고무력(鼓舞力)을 얻지 못하여 사물(事物)에 응(應)하여 조판(措辦)하는 재능(才能)이 적고, 지능(知能)은 있으되 인격(人格)이 연성(鍊成)되지 못하면 용(用)이 의착(依着)할 체(體)를 얻지 못하여 그 소위(所謂) 지능(知能)은 부허(浮虛)에 흘러서 도리어 사회(社會)를 해독(害毒)하는 교지간재(巧智奸才)로 화(化)하기 쉬운 것이며, 또 모든 사물(事物)에 이론(理論)은 체(體)이오, 실천(實踐)은 용(用)이라, 이론(理論)이 없는 실천(實踐)은 무정견(無定見)․무계획(無計劃)한 행동(行動)이 되고, 실천(實踐)이 없는 이론(理論)은 관념유희(觀念遊戱)와 공리공론(空理空論)이 되나니, 인격(人格)과 지능(知能), 이론(理論)과 실천(實踐)이 체용(體用)이 상사(相俟)하고 교호(交互)로 작용(作用)한 연후(然後)에 비로소 교육(敎育)의 사공(事功)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고어(古語)에 「구이학(口耳學)」이라는 말이 있으니, 이것은 사(師)로부터 들은 학문(學問)이 귀에 들어와서 다시 입으로 나간다는 말이다. 학문(學問)이라 함은 귀에 들어오면 그것을 마음속에 반입(搬入)하여 검토(檢討)하고 소화(消化)하여, 인격(人格)을 수련(修鍊)할 자료(資料)를 삼고 사업(事業)을 실천(實踐)할 이론(理論) 근거(根據)를 만들고, 그 연후(然後)에 입을 통(通)하여 외부(外部)에 발표(發表)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이학(口耳學)은 마음에 반입(搬入)하는 한 과정(過程)을 엽등(躐等)하고 겨우 일촌(一寸) 거리(距離)밖에 되지 아니하는 귀와 입의 사이를 내왕(來往)하는 것이므로 그 학문(學問)한 바의 지능(知能)과 이론(理論)은 부유공허(浮遊空虛)하여 도리어 악(惡)의 방면(方面)에 유용(流用)되기 쉬운 것이다.
천지(天地)가 운행(運行)하여 물(物)을 생생(生生)함에는 문서(文書)나 언어(言語)가 있는 것이 아니오, 오직 일월(日月)과 사시(四時)가 신(信)을 잃지 아니하고 간단(間斷)없이 운행(運行)하여 상(象)을 수시(垂示)할 뿐이며, 만물(萬物)은 그 운행(運行)에 따라서 스스로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고, 사람이 조기야침(朝起夜寢)하고 춘경추수(春耕秋收)하는 것도 또한 천지(天地)의 운행(運行)을 신뢰(信賴)하고 그 수시(垂示)하는 범법(範法)을 따를 뿐이다. 사회(社會)를 지도(指導)하는 정치(政治)나 민중(民衆)을 교화(敎化)하는 교육(敎育)도 모두 민중(民衆)에게 수시(垂示)하는 범법(範法)이라, 소위(所謂) 법령(法令)이나 강의(講義) 같은 것은, 그것을 널리 알려서 외형(外形)을 균제(均齊)함에 불과(不過)한 것이오, 진실(眞實)로 인심(人心)을 고무(鼓舞)하여 흥작(興作)케 함에는 지도자(指導者)들 자신(自身)이 실천(實踐)으로써 시범(示範)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자신(自身)들이 악(惡)을 시범(示範)하면서 민중(民衆)에게 선(善)을 요구(要求)하는 것은 수치(羞恥)를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일이다. 그러므로 지도자(指導者)들은 극기작용(克己作用)으로써 먼저 자신(自身)의 두흉복중(頭胸服中)에 자리를 잡고 있는 모든 사사심(私邪心)과 투쟁(鬪爭)하여 그를 극복(克服)하고 자체(自體)를 수제(修齊)한 연후(然後)에 타(他)를 지도(指導)할 것이다. 즉(卽) 민중(民衆)의 악(惡)과 투쟁(鬪爭)하기 전(前)에 먼저 자신(自身)의 악(惡)과 투쟁(鬪爭)하는 자(者)가 진실(眞實)로 천지(天地)의 생존법칙(生存法則)을 본받는 자(者)이다 고래(古來)로 사회(社會)의 조화(調和)를 먼저 파괴(破壞)하는 자(者)는 백성(百姓)이 아니라, 실(實)로 상층위(上層位)에 앉아서 순리(順理)로 동(動)치 아니하고 불선(不善)한 일을 시범(示範)하는 소위(所謂) 지도층(指導層)들이다. 그러므로 역(易)에는「下觀而化 = 하(下)가 관(觀)하여 화(化)한다」【註十一】하니, 이는 하층민(下層民)은 지도층(指導層)의 언행(言行)을 관(觀)하여 그 감화(感化)를 받는 것이므로 지도층(指導層)이 선(善)을 수시(垂示)하면 선(善)으로 화(化)하고 악(惡)을 수시(垂示)하면 악(惡)으로 화(化)한다 함을 말함이다.
註一. 孫子 九地篇
註二. 小畜卦 九三爻辭
註三. 說卦傳 第五章
註四. 同人卦 以下에 同人에 對한 引用文은 모두 同人卦中에 있는 것이다
註五. 繫辭下傳 第五章
註六. 同上
註七. 論語 子路篇
註八. 論語 爲政篇
註九. 論語 顔淵篇
註十. 豫卦 彖傳
註十一. 觀卦 彖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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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安定)과 유동(流動)
‣안정(安定)은 방(方)하고 유동(流動)은 원(圓)하다
만물(萬物)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은, 항구(恒久)한 체(體)는 그 상(象)이 방(方)하여 안정(安定)하는 작용(作用)이 있으니, 방(方)이라 함은 평(平)하고 정(正)함을 상(象)함이오, 변화(變化)하는 용(用)은 그 상(象)이 원(圓)하여 유동(流動)하는 작용(作用)이 있으니, 원(圓)이라 함은 주(周)하고 전(轉)함을 상(象)함이다.
역(易)에 「乾爲圜 = 건(乾)은 환(圜)이된다 」【註一】함은, 양(陽)의 유동(流動)하는 작용(作用)이 원(圓)함을 말함이오, 「坤德方 = 곤(坤)은 덕(德)이 방(方)하다」【註二】함은, 음(陰)의 안정(安定)하는 작용(作用)이 방(方)함을 말함이며, 또 「蓍之德圓以神 卦之德方以知 = 시(蓍)의 덕(德)은 원(圓)하여 써 신(神)하고, 괘(卦)의 덕(德)은 방(方)하여 써 지(知)하다」【註三】하니, 시(蓍)는 삼오착종(參伍錯綜)으로 변화(變化)하는 것이오 괘(卦)는 이미 형체(形體)를 이루어 정지(靜止)한 것이라, 이는 시(蓍)는 신(神)하여 방(方)이 없이 변화(變化)함으로 그 작용(作用)이 원(圓)하고, 괘(卦)는 정지(靜止)하여 정리(定理)가 있으므로 그 작용(作用)이 방(方)함을 말함이다.
만물(萬物)은 체(體)가 안정(安定)한 연후(然後)에 능(能)히 일정(一定)한 방소(方所)에 위(位)하여 항상(恒常) 존존(存存)할 수 있고 용(用)이 유동(流動)한 연후(然後)에 능(能)히 시(時)와 환경(環境)에 따라서 생생불궁(生生不窮)할 수 있는 것이니, 이 까닭에 만물(萬物)의 운동(運動)은 안정(安定)하면서 유동(流動)하고 유동(流動)하면서 안정(安定)하여, 안정(安定)과 유동(流動)이 호근(互根)하고 있는 것이다. 예(例)컨대 대지(大地)의 지축(地軸)이 현재(現在) 북극성(北極星)과 연결(連結)하여 항상(恒常) 일정(一定)한 방향(方向)으로 운행(運行)함은 체(體)의 안정(安定)이오 대지(大地)가 태양(太陽)의 주위(周圍)를 환전(圜轉)하여 정식(停息)치 아니함은 용(用)의 유동(流動)이다.
천지간(天地間)에는 하나도 운동(運動)치 아니하는 것이 없는지라, 대지(大地)가 이미 북극성(北極星)에 계속(繼續)되어 있으므로 그 동계(同系)인 태양(太陽)도 반드시 북극성(北極星)에 대(對)하여 어떠한 형태(形態)로든지 안정(安定)과 유동(流動)의 작용(作用)을 행(行)할 것이며, 대지(大地)는 또 태허(太虛)에 있어서는 유동(流動)하는 용(用)이 되고 있으나, 지상(地上)의 만물(萬物)과의 관계(關係)에 있어서는 만물(萬物)을 안정(安定)히 의착(依着)시키는 체(體)가 되고 있어, 여기에도 또한 안정(安定)과 유동(流動)의 양면작용(兩面作用)이 있는 것이다. 모든 생물(生物)이 대지(大地)에 의착(依着)하여 상리(相離)하지 못함은 체(體)의 안정(安定)이오, 동물(動物)이 비록 대지(大地)에 의착(依着)하고 있으되 항상(恒常) 운동(運動)하고 있음은 용(用)의 유동(流動)이며, 식물(植物) 같은 것도 비록 토지(土地)에 고착(固着)되어 있으되 또한 용(用)의 유동작용(流動作用)에 의(依)하여 부단(不斷)히 운동(運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萬物)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은 안정(安定)만 있고 유동(流動)이 없으면 스스로 고정(固定)하여 시의(時宜)에 적응(適應)치 못하고 또 유동(流動)만 있고 안정(安定)이 없으면 스스로 요동(撓動)하여 자체(自體)를 지탱(支撑)치 못하는 것이다.
정치(政治)의 운영(運營)에 있어서 안정(安定)한 체(體)라 함은 성헌정규(成憲定規)를 준수(遵守)하는 상도(常道)를 말함이오, 유동(流動)하는 용(用)이라 함은 시의(時宜)에 응(應)하여 적의(適宜)히 변통(變通)하는 권도(權道)를 말함이다. 상도(常道)는 그 상(象)이 방(方)하여 안정(安定)함으로 국민행동(國民行動)의 규준(規準)이되고 질서유지(秩序維持)의 근간(根幹)이 되며, 권도(權道)는 그 상(象)이 원(圓)하여 주류(周流)함으로 일변월화(日變月化)하는 사회상태(社會狀態)에 적응(適應)하여 수시변화(隨時變化)하는 것이다.
‣방(方)과 원(圓)의 호근(互根)
안정(安定)과 유동(流動)은 체용관계(體用關係)로써 호근(互根)하고 있으므로, 방(方)과 원(圓)이 또한 호근(互根)하여 방(方)의 속에 원(圓)이 있고 원(圓)의 속에 방(方)이 있다. 전(前)에 예거(例擧)한 대지(大地)로써 보면 대지(大地)는 원구형(圓球形)을 띠고 있으면서 지상(地上)의 해면(海面)은 평면(平面)을 이루어 그 작용(作用)이 방(方)하니 이는 대지(大地)가 태허중(太虛中)을 유동(流動) 환행(圜行)하는 용(用)이되기 위(爲)하여는 그 형상(形象)이 원(圓)치 아니하면 안되나, 만물(萬物)을 정착(定着)시키는 체(體)가 되기 위(爲)하여는 지면(地面)의 작용(作用)이 방(方)치 아니하면 안되나니, 이가 곧 방원(方圓)의 호근(互根)이다. 역(易)에 대지(大地)의 작용(作用)을 말하되 「坤至柔而動也剛 至靜而德方 坤道其順乎 承天而時行 = 곤(坤)은 지극(至極)히 유(柔)하되 동(動)함이 강(剛)하고 지극(至極)히 정(靜)하여 덕(德)이 방(方)하니라, 곤(坤)의 도(道)가 그 순(順)한저 천(天)을 승(承)하여 시(時)로 행(行)한다」【註四】하니, 이는 대지(大地)가 천(天)의 운행(運行)을 승수(承受)하여 강(剛)하게 동(動)하는 상(象)은 천(天)과 같이 원(圓)하고, 또 지극(至極)히 순(順)하고 정(靜)한 작용(作用)은 그 상(象)이 방(方)하다 함을 말함이니, 고래(古來)로 천원지방(天圓地方)하고 천동지정(天動地靜)하다 함은 지(地)가 방(方)하고 정(靜)함이 아니라, 전(全)혀 천(天)과 지(地)와의 대대작용(對待作用)을 말함이다.
모든 생물(生物)로써 보면 초목(草木)의 과실(果實), 자인(子仁) 등(等)과 충어조수(虫魚鳥獸)의 난(卵), 난자(卵子) 등(等)이 모두 원형(圓形)을 띠고 있는 것은 그것이 생식작용(生殖作用)의 생생(生生)하는 용(用)으로서 유동(流動)하기 위(爲)하여 원형(圓形)이 되지 아니할 수 없음이오, 식물(植物)이나 동물(動物)의 모체(母體)는 지상(地上)에 정착(定着)하여 그 작용(作用)이 방(方)한 것은 그것이 존존(存存)하는 체(體)로서 안정(安定)을 얻기 위(爲)하여 방형(方形)이 되지 아니할 수 없음이며, 실(實)․난(卵) 등(等)이 비록 원(圓)하나 용(用)으로서의 임무(任務)를 마친 연후(然後)에는 성장(成長)하여 방형(方形)의 체(體)가 되고 다시 원형(圓形)의 실(實)․난(卵)을 생(生)하나니, 이는 모두 방원(方圓)이 호근(互根)하여 원(圓)은 방(方)으로 화(化)하고 방(方)은 원(圓)을 생(生)하는 것이다. 소강절(邵康節)은 말하되 「陽之類圓 成形則方 陰之類方 成形則圓 = 양(陽)의 유(類)는 원(圓)하나 형(形)을 성(成)한즉 방(方)하고 음(陰)의 유(類)는 방(方)하나 형(形)을 성(成)한즉 원(圓)하다」【註五】함은, 원(圓)한 용(用)은 방(方)한 체(體)로 화(化)하고, 방(方)한 체(體)가 성숙(成熟)하여 원(圓)한 용(用)을 출산(出産)함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의 만물(萬物)은 그 구조(構造)에 있어서도 모두 방원(方圓)의 양작용(兩作用)을 가지고 있으니, 동식물(動植物)의 체(體)는 안정(安定)하기 위(爲)하여 그 작용(作用)이 방(方)하고 있으되, 그 유동(流動)하는 부분(部分)은 식물(植物)의 근(根) 간(幹) 경(莖) 지(枝), 동물(動物)의 체구(體軀) 사지(四肢) 등(等), 어느 것이 원형(圓形)을 띠지 아니한 것이 없다.
대공간(大空間)에 열장(列張)된 무수(無數)한 성수(星宿)들이 어떤 형태(形態)로든지 모두 원형(圓形)을 띠고 있는 것은 모두 운동(運動)하고 있는 까닭이며, 지상(地上)에서 우리 사람을 비롯하여 조수(鳥獸), 충어(虫魚), 식물(植物)들이 활동(活動)하는 상태(狀態)를 보면 원주형(圓柱形)의 체간(體幹)․지속(肢屬)․경지(莖枝) 등(等) 타원형(橢圓形)의 안면(顔面)․목엽(木葉) 등(等), 원구형(圓球形)의 안구(眼球)․과실(果實) 등(等), 원공형(圓空形)의 이공(耳孔)․비공(鼻孔)․구강(口腔) 등(等), 무수(無數)한 원(圓)이 총동원(總動員)되어 활동(活動)하고 있으며 심지어(甚至於) 주위(周圍)를 둘러싼 산봉(山峰)이 모두 원(圓)하고, 식탁상(食卓上)의 기반(器盤)이 또한 원(圓)하고, 초목(草木)의 엽상(葉狀)에 맺힌 수적(水滴)도 원형(圓形)이오, 수은(水銀)이나 철속(鐵屬)의 용액(溶液)을 산포(散布)하면 모두 원구(圓球)가 되며, 사람이 지상(地上)을 왕래(往來)함은 평면상(平面上)을 행(行)하고 있으되, 실(實)은 원구상(圓球上)을 회전(廻轉)하는 것이니, 지상(地上)의 원(圓)의 운동(運動)은 천공(天空)의 성신(星辰)을 망견(望見)하는 듯한 기관(奇觀)이다. 이와 같이 천공(天空)과 지상(地上)이 모두 원(圓)의 무대(舞臺)로 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잠시(暫時)도 지식(止息)치 아니하고 운동(運動)하고 있는 상징(象徵)이며, 오직 우리의 거처(居處)하는 가옥(家屋)이 대개(大槪) 방형(方形)으로 되어 있는 것은 유동(流動)의 속에 안정(安定)을 얻기 위(爲)하여 만들어진 유일(唯一)한 정식처(靜息處)인 까닭이다.
사람의 행동(行動)에도 방원(方圓)의 상(象)이 있으니 조수(操守)가 견고(堅固)하여 동요(動搖)치 아니함은 안정(安定)한 방(方)의 상(象)이오, 구니(拘泥)와 집착(執着)이 없고 융통성(融通性)이 있음은 유동(流動)하는 원(圓)의 상(象)이라, 이 까닭에 조행(操行)이 일정(一定)한 규격(規格)을 이루고 있음을 방정(方正)이라 하고, 사물(事物)을 접응(接應)함에 주선(周旋)하고 변통(變通)함을 원숙(圓熟)이라 한다. 역(易)에「義以方外 = 의(義)로써 외(外)를 방(方)한다 」【註六】함은, 주위(周圍)의 사물(事物)을 적의(適宜)히 재제(裁制)하여 한 정형(定形)을 작성(作成)함이니 곧 방(方)의 상(象)이오 「知周乎萬物 = 지(知)가 만물(萬物)에 주(周)한다」【註七】함은 지(知)는 의(義)의 정(精)함이라 지(知)가 천하(天下)의 만물(萬物)에 주류편행(周流遍行)하여 모두 그 생존(生存)을 완수(完遂)케 함이니 곧 원(圓)의 상(象)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 「其戰人也 如轉木石 木石之性 安則靜 危則動 方則止 圓則行 故善戰人之勢 如轉圓石於千仞之山 = 그 사람과 싸움이 목석(木石)을 전(轉)함과 같으니 목석(木石)의 성(性)이 안(安)한즉 정(靜)하고 위(危)한즉 동(動)하며, 방(方)한즉 지(止)하고, 원(圓)한즉 행(行)하는지라, 고(故)로 선(善)히 사람과 싸우는 세(勢)는 원석(圓石)을 천인(千仞)의 산(山)에서 전(轉)함과 같다」【註八】하니, 안정(安定) 위동(危動)은 인심(人心)이 안정(安定)하면 지정(止靜)하고 인심(人心)이 안정(安定)치 못하면 투쟁(鬪爭)하는 이(理)를 말함이오 방지원행(方止圓行)은 수세(守勢)를 취(取)하는 자(者)는 방(方)하여야하고 공세(攻勢)를 취(取)하는 자(者)는 원(圓)하여야하는 이(理)를 말함이니, 이는 차등(差等)과 균평(均平), 안정(安定)과 유동(流動)의 원리(原理)를 전술(戰術)에 응용(應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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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변통구 변화와역 삼역 (역학원론) (0) | 2013.09.17 |
‣환주운동(圜周運動)과 직선운동(直線運動)
만물(萬物)이 방(方)을 구성(構成)한 요소(要素)는 「직(直)」이므로 방(方)한 자(者)는 직(直)한 체(體)를 가지고 있고, 원(圓)의 운동(運動)하는 궤도(軌道)는 「환(圜)」이므로 원(圓)한 자(者)는 환(圜)하는 용(用)을 가지고 있으니, 방(方)과 원(圓)이 호근(互根)하고 있으므로 직(直)과 환(圜)이 또한 호근(互根)한다. 대지(大地)의 형상(形象)은 원(圓)하고 그 운행(運行)하는 궤도(軌道)는 환(圜)이 되고 있으나 지상(地上)의 수평선(水平線)은 직(直)하고 남북극(南北極)을 연결(連結)하는 지축(地軸)이 또한 직(直)하며 모든 원구(圓球)가 일정(一定)한 궤도(軌道)를 따라서 환행(環行)하는 자(者)는 그 속에 직(直)한 축(軸)이 없는 것이 없으니, 차륜(車輪)의축(軸), 기계(器械)의 심봉(心棒) 등(等)이 그것이오, 이는 개체(個體)는 직(直)하고 통체(統體)는 환(圜)하여 호근(互根)하는 것이며, 모든 생물(生物)의 실(實)․난(卵) 등(等)은 원형(圓形)을 띠고 환전(圜轉)하고 있으되 그 실(實)․난(卵) 등(等)으로부터 출생(出生)하는 형체(形體)에는 직(直)한 지주(支柱)가 있으니, 이는 체(體)는 직(直)하고 용(用)은 환(圜)하여 호근(互根)하는 것이다.
천지(天地)의 운행(運行)으로써 보면 일월(日月) 대지(大地)가 형태(形態)의 여하(如何)를 불구(不拘)하고 모두 원궤도(圓軌道)를 환행(圜行)하고 있으니, 이는 천지(天地)의 운동(運動)이 통체적(統體的)으로 행(行)하는 까닭에 선후(先後)의 순(順)도 없고 시종(始終)의 단(端)도 없는 환주운동(圜周運動)이 되는 것이오, 일월(日月) 대지(大地) 등(等)의 운동(運動)이 고왕금래(古往今來) 누억만년(累億萬年)을 계속(繼續) 전래(傳來)하는 형태(形態)는 직선(直線)으로 되어 있으니, 이는 모든 천체(天體)가 개체(個體)로 되어 있는 까닭에 발생(發生)하는 날과 성장(成長) 소멸(消滅)하는 날이 있는 직선운동(直線運動)이 되는 것이다.
사시(四時)로써 보면 춘하(春夏)가 가면 추동(秋冬)이 오고 다시 춘하(春夏)가 와서 사시(四時)가 항상(恒常) 반복(反復)함은 환주운동(圜周運動)이오. 금년(今年)이 가면 명년(明年)이 오고 다시 재명년(再明年)이 와서 동일(同一)한 해가 재래(再來)치 아니함은 직선운동(直線運動)이다. 생물(生物)로써 보면 초목(草木)은 과실(果實)이 싹을 생(生)하고 싹이 성장(成長)하여 간지(幹枝)가되고 간지(幹枝)가 다시 과실(果實)을 맺으며, 충류(虫類)는 난(卵)으로부터 유충(幼虫)․성충(成虫)의 순서(順序)를 지나서 다시 난(卵)을 생(生)하며, 조수(鳥獸)는 태생(胎生)이나 난생(卵生)이 모체(母體)로 더불어 서로 순환(循環)하는 것은, 원궤도(圓軌道)를 환주(圜周)하는 것이오, 이러한 생물(生物)이 모두 선조(先祖)로부터 부전자수(父傳子受)로 대대계승(代代繼承)하여 세대(世代)의 분별(分別)이 있고 부조(父祖) 증고(曾高)가 비록 동일(同一)한 계통(系統)이로되 그 용모(容貌)와 개성(個性)이 서로 달라서 각개체(各個體)의 구별(區別)이 있는 것은 직선(直線)으로 진행(進行)하는 것이다.
세간(世間)에는 계(鷄)와 난(卵)의 친자(親子) 관계(關係)를 판정(判定)하려하는 일이 있는데, 이것도 통체(統體)의 면(面)으로는 환주운동(圜周運動)이 되므로 계(鷄)가 난(卵)을 생(生)하고 난(卵)이 부화(孵化)하여 계(鷄)가 되어 선후(先後)와 친자(親子)의 분별(分別)이 없고, 개체(個體)의 면(面)으로는 직선운동(直線運動)이 됨으로 모계(某鷄)는 전난(前卵)의 후신(後身)이오 후란(後卵)의 부모(父母)이며, 모란(某卵)은 전계(前鷄)의 자녀(子女)이오 후계(後鷄)의 전신(前身)으로서, 선후(先後)와 친자(親子)의 분별(分別)이 있는 것이다. 우주창생설(宇宙創生說) 같은 것도 역리(易理)로써 보면 우주(宇宙)는 시(始)도 없고 종(終)도 없이 윤회(輪廻)하는 것이라 함은 환주운동(圜周運動)의 면(面)을 말함이오, 우주(宇宙)가 어느 때에 조물주(造物主)에 의(依)하여 처음으로 창조(創造)된 것이라 함은 직선운동(直線運動)의 면(面)을 말함이다. 이와 같이 만사만물(萬事萬物)은 모두 환주운동(圜周運動)과 직선운동(直線運動)의 양면(兩面)이 있으니, 이는 천지(天地)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이 체(體)가 용(用)을 생(生)하고 그 용(用)이 체(體)로 변(變)하고 그 체(體)가 다시 용(用)을 생(生)하여 체(體)와 용(用)이 서로 순환(循環)함으로 환주운동(圜周運動)이 되지 아니할 수 없고, 또 체용(體用)이 서로 계승(繼承)하여 세대(世代)의 분별(分別)이 있으므로 직선운동(直線運動)이 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역(易)에 문왕(文王)의 팔괘도(八卦圖)는 팔괘(八卦)를 팔방(八方)에 원형(圓形)으로 배열(配列)하고 특(特)히 감리(坎離)를 북(北)과 남(南)으로 배정(配定)하여 북한(北寒) 남서(南暑)를 표시(表示)하여 직선(直線)의 중추(中樞)를 삼으니 곧 지금의 소위(所謂) 남북극(南北極)을 통(通)한 지축(地軸) 또는 자오선(子午線)이니, 이는 원(圓)의 속에 직(直)이 있음을 말함이오, 또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사시(四時)가 팔방(八方)으로 순환(循環)하여 만물(萬物)의 생장수장(生長收藏)하는 상(象)이 표시(表示)되어 있는데, 물(物)이 시(始)하면 종(終)하고 종(終)하면 다시 시(始)하여 시종(始終)의 단(端)이 없는 형태(形態)는 환주운동(圜周運動)이 되고, 금년(今年)의 초목(草木)이 생장(生長)하여 과실(果實)을 맺고 그 과실(果實)에서 신아(新芽)가 반생(反生)하여 차년(次年)의 초목(草木)이 되는 형태(形態)는 직선운동(直線運動)이 되니, 이는 환주운동(圜周運動)과 직선운동(直線運動)이 호근(互根)하고 있음을 말함이다.
사람의 사회생활(社會生活)에도 방직(方直)과 원환(圓環)의 호근(互根)이 있으니, 역(易)에 「直其正也 方其義也 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 = 직(直)은 그 정(正)이오 방(方)은 그 의(義)이라 군자(君子)가 경(敬)으로써 내(內)를 직(直)케하고 의(義)로써 외(外)를 방(方)케하여 경(敬)과 의(義)가 입(立)하매 덕(德)이 고(孤)치 아니하다」【註九】하니, 직방(直方)은 곧 정의(正義)이오 불고(不孤)라 함은 주위(周圍)가 응여환요(應與圜繞)함이라 이는 정의(正義)로써 안으로 마음을 직(直)케하고 밖으로 규모(規模)를 재제(裁制)하면 민중(民衆)이 그 주위(周圍)를 환요(圜繞)하고 사업(事業)이 광대(光大)하여 고립(孤立)치 아니하고 일신(日新)의 성덕(盛德)이 만물(萬物)에 원행주편(圓行周遍)함을 말함이다. 직방(直方)은 체(體)오 원환(圓圜)은 용(用)이라 체(體)가 없으면 용(用)이 의착(依着)치 못하여 환주(圜周) 작용(作用)을 행(行)치 못함으로, 정의(正義)가 없는 사회(社會)는 통체주편(統體周遍)하는 생존작용(生存作用)이 행(行)치 못하고, 용(用)이 없으면 체(體)가 고무력(鼓舞力)을 얻지 못하여 스스로 굴곡(屈曲)함으로, 운행(運行)이 주편(周遍)치 못한 사회(社會)는 국민개체(國民個體)의 정의감(正義感)이 스스로 박약(薄弱)하여지는 것이니, 이미 말한 이간정치(易簡政治)가 「직(直)」을 체(體)로 하는 것도 또한 이 까닭이다. 또 개인(個人)의 생존작용(生存作用)으로써 보더라도, 마음이 정직(正直)한 사람은 대인접물(對人接物)함이 모두 적의(適宜)히 재제(裁制)됨으로 그 행동(行動)이 원만(圓滿)하고, 마음이 왜곡(歪曲)한 사람은 사물(事物)에 대(對)하여 사사(私邪)와 부정(不正)을 행(行)함으로 그 행동(行動)이 경측(傾側)한 것이다.
인류력사(人類歷史)에도 환(圜)과 직(直)이 호근(互根)하고 있으니, 역사상(歷史上)에 대대(對待)되는 사회(社會)가 서로 기복(起伏)하여 항상(恒常) 준사(準似)한 사실(事實)이 반복(反復)하고 있음은 동일궤도(同一軌道)를 순환(循環)하는 환주운동(圜周運動)이오, 대대(對待)되는 시대(時代)가 서로 전수(傳受)하여 일시대(一時代)가 가면 다시 일시대(一時代)가 와서 동일(同一)한 시대(時代)가 재래(再來)치 아니함은 일직선(一直線)을 진행(進行)하는 직선운동(直線運動)이니, 고래(古來)로 「 역사(歷史)는 순환(循環)한다」함은, 환주운동(圜周運動)을 말함이오, 「 역사(歷史)는 순환(循環)치 아니한다 」함은, 직선운동(直線運動)을 말함이다. 이것을 아국(我國)의 토지제도사(土地制度史)에 징(徵)하건대, 전절(前節)에서 말한 바의 균평제(均平制)와 차등제(差等制)가 교호(交互)로 대사(代謝)함은 사회(社會)의 환주운동(圜周運動)의 형태(形態)이오, 그러나 동일(同一)한 균평제(均平制)이로되 고려(高麗)의 국유수수제(國有授受制)와 이조(李朝)의 국유분급제(國有分給制)와 지금의 사유분급제(私有分給制)는 그 형태(形態)가 서로 다르고, 또 동일(同一)한 차등제(差等制)이로되 고려(高麗)의 사전제(私田制)와 이조(李朝)의 소작제(小作制)는 그 형태(形態)가 또한 서로 달라서 모두 각기(各其) 독자(獨自)한 시대성(時代性)을 나타내고 있음은 전시대(前時代)로 순환(循環)치 아니하는 직선운동(直線運動)의 형태(形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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