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국사'에 해당되는 글 50건

  1. 2015.02.15 三國時代의 社會 (서당국사)
  2. 2015.02.15 高句麗의 隆盛 (서당국사)
  3. 2015.02.15 三國의 興起 (서당국사)
  4. 2015.02.15 古朝鮮 (서당국사)
  5. 2015.02.15 原始生活 (서당국사)

三國時代의 社會 (서당국사)

|

三國時代의 社會

三國時代의 土地制度는 모두 國有로 하고 貴族 功臣들에게 田庄 食邑 等으로 나누어주고 거기에 農耕에 從事할 奴隸를 아울러 주니 高句麗에는 坐食하는 大家가 萬餘戶이오 下戶는 그들에게 糧食과 魚鹽을 져다 바쳤으며, 新羅에는 宰相家의 奴僕이 三千人에 달하고 牛馬의 數도 거의 비슷하였다고 한다. 이때는 돈이 없고 米穀과 麻布를 交換의 媒介로 使用하니 이것은 古代 物物交換의 遺風이오 지금에 湖南地方에서 米穀에 限하여 買하는 것을 판다하고 賣하는 것을 산다 하는 것은 三國 以來 米穀 麻布가 돈으로 쓰이던 遺俗이다.

三國의 極盛時代의 都城 人口는 高句麗는 二十一萬餘戶이오 新羅는 十七萬餘戶이오 百濟는 十五萬餘戶이다. 어떤 사람들은 人口가 稀少한 當時에 都城人口가 一戶에 五人으로 잡더라도 七十萬 或은 百萬이 될 것이니 이것은 事實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三國時代에는 都城이 膨脹치 아니할 수 없는 理由가 있으니 이 時代는 戰爭이 그치지 아니하고 어떤 때는 都城이 數三個月 敵軍의 包圍를 當하는 일도 없지 아니하였다. 이 包圍에는 食糧 武器 기타 여러 가지 生活品을 都城內에서 自作自給치 아니하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各國의 都城內에는 첫째로 武器를 製造하는 工場이 있고 거기에 從事하는 技術者및 勞務者等 百工이 있고 큰 市場도 이 都城內에 集中되어 있었다. 國家가 都城을 옮길 때에 먼저 工場과 百工을 옮긴 것은 이 까닭이오 當時에 都城이 膨脹한 것은 自然의 理이다.

 

And

高句麗의 隆盛 (서당국사)

|

 

高句麗의 隆盛

高句麗의 國都 卒本은 平野가 적고 外敵을 막기에 不便함으로 얼마 後에 國內城에 옮기고 다시 丸都城에 옮겨서 西로 遼河方面으로 내려가고 南으로 韓半島로 내려가기 始作하였다. 高句麗가 西와 南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면 안될 理는 두 가지가 있다.

一. 高句麗의 땅은 平野가 적고 土地가 瘠薄하며 氣候가 寒冷하여 農産이 豊富치 못함으로 國家 存立上 五穀과 蠶麻가 豊盛한 南方으로 進出치 아니할 수 없는 것

二. 遼河로부터 大洞江에 이르는 一帶地는 古來로 우리 民族이 居住하던 朝鮮 故地이던 것이 只今에 玄菟 樂浪等 中國의 郡縣으로 되었음으로 이것을 恢復치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

그러므로 建國初期부터 西出 南下 政策을 써서 마침내 西로 玄菟郡을 쳐서 地境이 遼河에 이르고 南으로 樂浪을 取하여 四百年동안 내려오던 中國의 郡縣을 뿌리 채 뽑아버리고 드디어 百濟와 接境하니 이때가 三國이 비로소 鼎立한 때이오 三國 後 約 三百年 頃의 일이었다.

高句麗는 西쪽으로 發達하는 途中에 中國과의 衝突이 가장 甚하더니 中國의 三國時代의 魏와 抗爭하다가 魏將 毌丘儉에게 敗하여 丸都城이 灰燼되었으므로 一時 國勢가 매우 危殆하였으나 얼마 後에 다시 恢復하여 大陸으로 進出하는 政策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遼河 西쪽의 錦州城에 雄據하고 있는 燕나라와 爭雄하다가 燕軍에게 敗하여 丸都城은 다시 修理할 수 없이 破壞되고 都城이 敵國에 너무 가까워서 恒常 危險性이 있음을 念慮하여 그 後에 平壤으로 옮기더니 高句麗 中興의 英王 廣開土王이 다시 丸都城에 都邑하고 疆土를 四方으로 넓히니 이때가 高句麗의 極盛時代이오 지금 滿洲 輯安縣 碑石街에 屹然히 서있는 높이 二十二尺의 巨碑는 廣開土王의 功績을 永遠히 傳하기 爲하여 그 아들 長壽王이 세운 것이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三國時代의 社會 (서당국사)  (0) 2015.02.15
百濟와 新羅의 發展 (서당국사)  (0) 2015.02.15
三國의 興起 (서당국사)  (0) 2015.02.15
古朝鮮 (서당국사)  (0) 2015.02.15
原始生活 (서당국사)  (0) 2015.02.15
And

三國의 興起 (서당국사)

|

三國의 興起

처음에 北扶餘의 임금 解慕潄가 아들 朱夢을 낳았는데 朱夢은 東扶餘의 임금 金蛙에게 養育되다가 그의 兄弟들의 猜忌에 못 배겨 部下를 거느리고 逃亡하여 卒本에 이르러 國家를 세우고 姓을 高라 하니 이가 高句麗의 始祖이다.

一說에는 朱夢이 卒本에 와서 卒王의 女婿가 되었다가 王이 죽은 뒤에 그 位를 繼承하였다 하는데 여러 가지 史實로 보면 이 말이 가장 近理하고 朱夢이 卒本 國號를 고쳐서 高句麗라 하였음으로 後人이 高句麗의 歷年數에 對하여 朱夢으로부터 亡할 때까지를 七百五年이라 하고 卒本까지를 合하여 九百年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이 나라는 桂婁部 消奴部 絶奴部 順奴部 灌奴部의 다섯 代族團이 中心으로 이루어진 社會이며 山이 많고 土地가 여위어서 生活이 困難한 까닭에 사람들이 勸儉하였다.(高句麗 建國) (檀紀 二千二百九十七年)

高句麗始祖 朱夢王이 아들 沸流와 溫祚를 낳았는데 東扶餘에 있을 때에 낳은 아들 類利가 찾아와서 太子가 되었음으로 沸流와 溫祚는 部下 十人을 거느리고 南으로 向하여 漢의 樂浪郡을 지나서 馬韓에 들어가니 馬韓王이 두 兄弟의 雄傑함을 보고 東北 百里의 땅을 割與하여 써 居處하게 하였다. 沸流는 魚鹽의 利를 取하여 彌鄒忽(지금의 仁川地方)에 나라를 세우고 溫祚는 山川의 險과 平野의 利를 取하여 漢江岸의 慰禮城에 都邑하여 나라를 세우고 國號를 百濟라하고 姓을 扶餘라 하니 이가 곧 百濟始祖이다.(檀紀 二千三百十六年)

沸流는 그 땅이 卑濕하여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죽으매 그 百姓이 모두 慰禮城으로 돌아오니, 溫祚는 勢力이 漸漸자랐으니, 創業 初期에 北邊의 樂浪과 靺鞨이 자주 侵入함으로 漢山에(지금의 廣州 南漢山城)) 都邑을 옮겼다.

弁 辰韓의 斯盧國에는 六村이 있었는데 六村長이 會議를 열고 北方人의 勢力이 南으로 밀려오는 이때에 우리가 賢君 一人을 求하여 세우고 國家를 統一하지 아니하면 안되리라 하고 朴赫居世를 맞이하여 임금을 삼고 지금의 慶州에 都邑하니 이가 곧 新羅 始祖이다. (檀紀 二千二百七十七年) 新羅의 國號는, 처음에는 斯盧 그밖에 여러 가지로 불러 왔으나 後에 新羅라 고쳤으므로 新羅로 通稱하는 것이다.

三國의 始祖는 모두 一代의 英傑이라 當時의 各國이 여러 部落國家로 成立되어 完全한 統一國家를 이루지 못하고 部落과 部落사이에 互相 侵伐함이 있으되 國家 總王이 能히 制御치 못함을 보고 政治를 中央에 統一한다는 中央集權制를 쓰기로 하였다. 그 까닭에 建國初부터 附近의 部落을 倂合하여 郡縣을 만들고 官吏를 보내어 다스렸으니 이것이 我國 歷史上 政治制度의 大 轉換期이다.

高句麗는 太白山 左右에 散在한 여러 部落國家를 征服하고 漢이 玄菟郡을 쳐서 高句麗縣을 取하니 이때가 卒本이라는 國號를 高句麗로 改稱한 때이오 東으로 沃沮 地方까지를 그 版圖에 넣었다.

百濟는 漸次로 馬韓國의 여러 部落을 倂合하니 馬韓王이 責하여 曰 王이 처음에 我境에 들어 왔을 때에 客身할 곳이 없기로 土地를 주어 安居케 했거늘 이제 우리 國土를 侵犯하니 무슨 道理인고 하였으나 溫祚王은 듣지 아니하고 南으로 漸次로 疆土를 넓혔다.

新羅는 弁 辰韓의 北部를 漸漸 倂合하고 西로 馬韓國境에 다다르니 여기서 비로소 百濟 兵과 相見하게 되어 三國時代 六七百年 間의 戰亂의 幕을 열었다. 그러나 이 戰爭은 好戰氣風이 있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中央集權制와 統一國家를 만들려는 運動 過程에 必然的으로 생긴 現象이었다.

馬韓과 弁韓이 各其 百濟와 新羅로 엉켜 갔을 때에 洛東江 下流 地方은 中央集權制를 이루지 못하고 六伽倻國이 分立하여 部族社會를 그대로 지내었다. 그 中에는 洛東江 下流의 金海 地方을 中心으로 金首露王이 駕洛國을 세우니 이가 곧 駕洛始祖이오 駕洛을 또한 金官이라 하며 (檀紀 二千三百七十五年) 그밖에 大伽倻 小伽倻 阿羅伽倻 古寧伽倻 星山伽倻 等이 있었는데 좁은 區域에 六國이 分立되어 있었음으로 國力이 모두 떨치지 못하고 또 그 位置가 我國의 最南端에 있어 北에서 밀려온 我國 文化圈의 가장 구석진 곳이다. 다만 洛東江이 흘러내려 가서 三角洲를 이룬 곳으로 國民의 生活은 가장 裕足한 곳이다.

三國時代의 制度와 風習에는 여러 가지 特色이 있고 創造性이 있었다. 新羅는 當時 一般的으로 行하고 있는 君主 一姓 世襲制를 打破하고 二世 南解王은 子 儒理와 婿 昔脫解에 일러 曰 我 死後에 朴 昔 二姓이 年長 且 賢者로써 王位를 嗣하라 하더니, 昔脫解가 第四代 王이 되니 이로부터 朴昔 二姓이 相傳하고 脫解王이 金閼智를 收養하더니 後에 閼智의 子孫이 또한 王位를 繼承하여 이로부터 朴昔金 三姓이 相傳하였다. 이 時代는 戰亂이 자주 일어나고 또 創業期에 있었는데 萬一 君主가 年幼하거나 또한 暗愚하면 或은 行政權이 臣下에게 옮기고 或은 國家大事를 處理할 能力이 없어서 반드시 危亡에 빠지게 되는 것임으로 新羅에서는 一姓 世襲制를 깨트리고 骨品制를 써서 朴昔金 三姓을 聖骨이라 하고 聖骨 出身이 王位 繼承權을 가지되 年長 且 賢者가 王이 되기로 하니 이 까닭에 新羅가 高句麗 百濟와 鼎立한 동안 一,二의 例外를 除하고는 幼君과 暗王이 거의 없었다. 高句麗와 百濟도 二,三의 例外를 除하고는 年幼한 君主가 거의 없으니 이로써 보면 年長 且 賢者의 君됨은 三國時代의 王位繼承의 한 原則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며 後世에 自己 子孫에게 幸福을 주기 爲하여 黃口 幼兒에게 王位를 傳함은 國事를 爲함이 아니오 그 國家를 自家 血統의 私有物로 생각한 까닭이며, 이로 因하여 國事를 그르치고 아들에게 幸福을 준다는 것이 도리어 큰 災禍를 준 例도 적지 아니한 것이다.

三國時代에 人性은 渾厚하여 個人의 私慾보다 國家를 爲하는 마음이 더 두터웠다. 新羅에는 王位를 辭讓한 例가 여러 번 있었고 高句麗에서는 높은 벼슬을 다른 사람에게 辭讓하는 例가 있었으니 高句麗 故國王때에 五部에 命令하여 賢人을 薦擧하라한즉 五部가 宴留를 推薦하여 높은 벼슬을 시키더니 宴留가 말하되 臣이 庸愚하여 足히 써 國家 大政을 맡지 못할지라 鴨綠谷에 乙巴素가 있어 力田 自給하는데 性質이 剛毅하고 政治의 大才가 있으니 此人이 아니면 國事를 맡을 사람이 없으니 臣의 벼슬을 此에게 맡기라 하였다. 王은 곧 乙巴素를 擧用하니 을乙巴素의 政治가 賢明하여 百姓이 便安하고 또 百姓의 貧窮함을 걱정하여 봄에 國倉의 穀食을 내어 百姓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還收하여 해마다 常例를 삼으니 百姓이 모두 기뻐하고 이것이 我國의 賑貸制度의 始初였다.

三國은 國家에 큰 亂離가 있으면 貴族의 子弟가 먼저 槍劍을 집고 弓矢를 메고 軍隊의 先頭에 나서고 軍卒이 그 뒤를 따름으로 將 兵이 모두 一體가되어 當時 天下 强國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勿論 이때는 戰功이 있는 者에게 土地를 주는 田庄制度가 있고 또 捕虜를 獲得하여 農業 奴隸로 使用하는 制度가 있음으로 貴族의 子弟들이 先頭에 나서는 것은 戰功을 세우기 爲한 一面이 없지 아니하나 國家를 爲하여 生命을 아끼지 아니하는 崇高한 精神은 足히 後世의 微弱한 下民層만을 軍士로 내 세우고 自己는 安逸한 地位에 逃避하는 貴族層을 愧死케 할 것이오 有名한 新羅의 花郞도 이러한 精神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이 三國時代의 사람은 渾厚한 氣風으로써 地位의 高下와 勢力의 强弱을 가리지 아니하고 오직 一心으로 함께 國事에 當하였으므로 三國時代는 我國歷史上 가장 光輝있는 時代를 現出한 것이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百濟와 新羅의 發展 (서당국사)  (0) 2015.02.15
高句麗의 隆盛 (서당국사)  (0) 2015.02.15
古朝鮮 (서당국사)  (0) 2015.02.15
原始生活 (서당국사)  (0) 2015.02.15
我國의 自然環境 (서당국사)  (0) 2015.02.15
And

古朝鮮 (서당국사)

|

古朝鮮

只今으로부터 四千餘年 前의 옛날에 檀君王儉이 太白山에 내려와서 비로소 나라를 세우고 平壤에 都邑하고 國號를 朝鮮이라 하니 中國의 堯임금 때요 이 해를 我國의 紀元元年이라 한다.

檀君朝鮮은 千餘年동안 繼續하였다 하나 確實한 年代는 알 수 없다. 그 後에 中國의 殷나라가 亡하고 周나라가 代身하게 되었는데, 殷나라의 王子인 箕子가 그 무리를 데리고 朝鮮에 들어와서 只今의 遼西地方에 나라를 세우고 國號를 또한 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箕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滿洲 北部에는 扶餘, 南部에는 句麗貊이 있고 半島方面에는 韓이 있었는데 그 年代와 國都는 알 수 없다.

箕氏朝鮮은 여러모로 發達된 産業의 基礎 위에서 大陸의 進步한 文明을 輸入하여 크게 發展하고 造船技術이 發達하여 바다를 건너 中國의 齊와 魯로 더불어 貿易하며 農事짓는 法과 牛馬를 기르는 牧畜業이 發達하고 사람의 性質이 正直과 禮節과 信義를 崇尙하고 平和와 淨潔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中國사람들은 我國人을 君子之國 大人之市라하고 仁人善이라 불렀다.

(http://blog.daum.net/s4k2y76/699 殷民의 東來)

箕氏朝鮮이 九百餘年동안 繼續하는 中에 中國에서는 周나라 勢力이 차츰 弱해지고 所謂 春秋戰國 時代라 해서 여러 百年동안 戰爭이 繼續되고 凶年이 겹들어서 燕, 趙, 齊, 魯의 中國 北方 사람들이 或은 海路로, 或은 陸路로 朝鮮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中에서도 特히 燕나라는 箕氏朝鮮의 西部를 쳐서 빼앗고 遼河를 사이에 두고 朝鮮과 地境을 接하여 있어서 일직부터 交涉이 잦았고 周나라가 亡하고 秦나라가 中國을 統一할 무렵에 朝鮮으로 避難하여 들어오는 사람이 數 없이 많았다. 그러던 次에 箕埠王때에 燕나라 사람 衛滿을 西部國境에 머물게 하더니 滿이 野心을 품고 많은 軍士를 거느리고 亂離를 일으켜 王都를 치거늘 準王이 미처 抗拒치 못하여 海路로 馬韓에 走入하니 이는 檀紀二千一百四十年 丁未이다.

衛滿이 나라를 세운 後에 國號를 또한 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衛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中國大陸에는 秦나라를 이어서 中原을 統一한 漢나라의 勢力이 커져서 東으로 侵入하니 衛滿의 孫子 右渠는 견디지 못하여 降服하니 이는 檀紀 二千二百二十六年 癸酉의 일이오 衛氏朝鮮은 三代 八十七年으로써 끝마쳤다.

漢나라는 衛氏朝鮮의 故地에 樂浪, 眞番, 臨屯 玄菟의 四郡을 두었다. 四郡의 位置와 넓이에 對하여는 여러 가지 말이 없지 않으나 大槪 樂浪郡은 平壤을 中心으로 한 大洞江 기슭임이 確實하고 眞番郡은 黃海道와 京畿道의 漢江 以北이오 臨屯郡은 咸鏡南道의 南部와 江原道의 鐵嶺 以北이오 玄菟郡은 鴨綠江 기슭을 中心으로 한 平安北道와 佟佳江 下流地方이라 한다. 그러나 四郡은 우리 民族의 猛烈한 反抗때문에 미처 뿌리를 내릴 사이도 없이 眞番 臨屯 二郡은 二十六年만에 없어지고 玄菟郡은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스스로 解消되고 樂浪郡만이 中國 사람들의 根據地로서 半島 中部에 四百餘年동안 남아 있었다.

樂浪郡은 我國의 한 복판에 자리 잡고 中國과 交通이 便利함으로 我國의 中國 貿易을 맡아 하였다. 平壤에서 大洞江을 건너 土城里라는 마을에 分明한 土城 자리가 있고 그 마을 田土사이에서 樂浪郡의 遺物이 나옴으로 보아 이곳이 樂浪의 서울임을 알 수 있다. 그 東쪽 平平한 언덕 위에 數多한 古墳이 있고 그 古墳 속에서 金 玉 銅으로 만든 거울과 各種의 질그릇과 그림을 새긴 솥이라든가 瓦片 漆器 等 樂浪遺物이 많이 나와서 考古學上 보배가 되었다.

朝鮮 中部에 衛滿朝鮮이 建國될 무렵에 只今의 北滿洲 地方에는 扶餘族이 살아서 農業과 牧畜에 힘쓰고 中國의 進步된 文化를 輸入하였으며 地 方이 二千里이오 戶數가 八萬이나되며 西로 烏桓 鮮皐 等의 鄰과 겨뤄서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나라에 큰 水災나 旱災가 들어서 農事가 잘 되지 아니하면 그 過失이 임금에게 있다하여 或은 갈아세워야 한다하고 或은 죽여야 한다 하였다. 扶餘의 임금은 世襲的 酋長에 지나지 아니하여 그 밑에 짐승이름을 붙인 烏, 加, 猪加, 狗加 等 벼슬이 있어 四出道를 나가 지키고 이들은 各其 數百戶로부터 數千戶의 百姓을 거느리고 있었다.

扶餘와 때를 같이하여 東海 方面에는 沃沮, 濊가 있고 半島 南部에는 三韓이 있었다. 沃沮는 지금只今의 咸鏡道 地方에 살았는데 그 땅은 東北이 좁고 西南이 넓으며 長이 千里이고 北으로는 挹婁와 이웃하고 東은 大海이고 南으로는 濊와 잇닿아 있었다. 戶數는 五千이며 임금은 없고 部落마다 首領이 있어 部落일을 추려나가고 言語는 高句麗와 같고 性質이 强直하고 土地가 肥沃하여 여러 가지 穀食이 生産되고 飮食과 居處와 모든 風俗이 高句麗와 비슷하였다. 沃沮는 南北의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北沃沮는 挹婁와 接境한 關係로 여름이면 挹婁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掠奪함으로 山中에 깊이 들어가서 숨어살다가 겨울이 되어 바다가 얼어서 배가 다니지 못하게되면 비로소 部落에 내려와서 살았다.

濊는 지금의 江原道의 東에서 咸鏡道의 南에 걸쳐서 살았다. 스스로 高句麗와 同族이라 하고 戶數가 二萬이며 사람들이 性質이 淳厚하고 廉恥가 밝으며 盜賊이 없어서 밤에 門을 닫는 일이 없었다. 言語와 風俗이 高句麗와 거의 비슷하나 衣服은 다르며 여러 部落은 山川의 境界를 重히 여겨 서로 侵犯하는 일이 없고 이를 犯하면 責禍라 하여 奴隸와 牛馬로써 賠償하며 忌하는 것이 많아서 家族中에서 한 사람이 죽으면 곧 집을 버리고 새집을 지어 살았다. 濊사람들은 麻布를 짜고 養蠶할 줄 알고, 별을 보고 그 해의 農事의 豊凶을 미리 알 수 있었다.

韓에는 馬韓, 辰韓, 弁韓의 三韓이 있었다. 이 時代는 一山의 障과 一水의 阻가 스스로 한 部落을 이루어 國家노릇을 하였는데 三韓의 地方에 이러한 部落國家가 七十八國이나 있었다. 各 部落에는 首領이 있고 馬韓 辰韓 弁韓은 各其 所屬한 部落國家를 統御하는 總王이 있었다.

馬韓은 그 中 西쪽에 있어서 百姓이 農事를 짓고 養蠶을하고 五十四國으로 나뉘어 그 크기가 大國은 萬餘戶, 小國은 數百戶이며 사람의 性質이 勇敢하고 해마다 五月에 播種이 끝난 뒤와 十月에 秋收를 마친 뒤에 한번씩 全國人이 모여 天祭祀를 지내고 여러 날 동안 日夜로 마음껏 먹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놀았다.

弁, 辰韓은 지금의 慶尙道땅에서 모두 二十四國이 있고 大國은 四五千戶이오 小國은 六七百戶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地가 肥沃하여 여러 가지 穀食이 잘되고 벼를 심고 養蠶과 牛馬의 畜産이 盛하고 婚姻에 禮節이 밝고 사람이 죽으면 큰 鳥羽를 달아 보내니 이는 그 靈魂이 날아가도록 함이었다.

이때까지의 歷史家들은 三韓을 나눠서 馬韓 辰韓 弁韓이라 하고 그 中 馬韓이 只今의 漢江 以南에서부터 忠南北道와 全羅道땅이고 辰韓은 只今의 慶尙道의 大部分이고 弁韓은 나중의 伽倻의 여러 나라가 일어난 洛東江 下流地方이라 하였으나 새로운 硏究에 依하면 辰韓이 漢四郡에서 가장 가까운 漢江 流域이고 馬韓은 忠淸道와 全羅道이고 弁韓이 지금의 慶尙道 地方이라 한다.

扶餘의 一族에 卒本扶餘가 있으니 지금의 鴨綠江 沿岸의 땅이오 高句麗의 前身이다.

이 時代의 政治는 信仰과 完全히 分立되지 아니하여 部落의 首領이 마을사람들을 거느리고 天祭를 지내며 또 마을의 政治를 行하였다. 信仰의 가장 높은 對象은 하늘의 象徵인 太陽이었으며 해마다 農事가 끝나면 一定한 때에 新穀으로 술과 떡을 빚어 天祭를 지내고 그 마을사람들끼리 모여 놀았다. 高句麗의 東盟, 東濊의 舞天, 扶餘의 迎鼓 等은 모두 이를 이름이다. 이 祭祀는 처음에 높은 山마루에서 지냈으니 그 곳은 어느 곳보다도 太陽이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러한 風習은 나중에 農業이 發達되고 江岸과 平野에 내려와 살게된 뒤에도 繼續되어 國家에서는 해마다 有名한 높은 山에 山祭를 드리고 고을에는 城隍堂이 있으며 마을에는 堂山이 있어서 온 고을사람과 온 마을사람이 精誠을 바치는 곳이다.

社會는 大家라는 支配階級과 下戶라는 百姓과 奴隸의 세 階級으로 나뉘었고 大家들은 廣大한 土地를 가지고 奴隸를 부려서 農事를 지었으며 이 時代는 土地는 넓고 人口가 稀少함으로 戰爭할 때마다 奴隸로 부릴 捕虜를 얻는 것이 唯一한 戰利品이었다. 産業은 農蠶과 織布가 자못 發達하였으며 弁 辰韓에서는 鐵을 採掘하여 돈으로 쓰고 이웃나라와 서로 貿易하였다.

從前에는 石器와 銅器만 있었는데 銅器는 軟하여 칼 도끼 等으로 使用치 못하더니 鐵이 發見된 後로 鐵製연장과 武器가 생겨서 産業과 戰爭樣式에 大革命을 일으켰다. 지금 이 文明에서 鐵 한 가지를 없앤다고 하면 이 豪華스러운 文明도 자취 없이 사라질 것이니 古代의 鐵의 發見은 참으로 驚異的 事實이었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高句麗의 隆盛 (서당국사)  (0) 2015.02.15
三國의 興起 (서당국사)  (0) 2015.02.15
原始生活 (서당국사)  (0) 2015.02.15
我國의 自然環境 (서당국사)  (0) 2015.02.15
回顧談 (서당국사)  (0) 2015.02.15
And

原始生活 (서당국사)

|

原始生活

我國의 原始時代에는 主로 魚貝와 鳥獸를 잡아먹고 草根木實을 캐어 먹고 짐승의 가죽을 벗겨서 입고 石窟과 움집에서 살았다. 農事라고는 오직 黍(기장)가 있을 뿐이오 黍(기장)는 어떤土地에서든지 잘生育되고 播種時期의 早晩에 影響됨이 적으므로 農業技術이 不足한 古代에 黍農만 있는 것은 必然한 일이다.

器具나 器皿은 주로 土石들로 만든 것이었으니 이때를 石器時代라 한다. 只今 我國과 滿洲에서 發見되는 石斧, 石鏃, 石刀의 여러 가지 石器는 모두 같은 系統인 것이며 이 時代의 土器는 勿論 날 그릇이었으니 그래도 쓸모 있게 여러 가지 模樣을 만들고 또 簡單한 그림 模樣도 새겨내었다. 그러므로 石器보다 土器에 있어서 그 時代의 模習과 그 民族의 性格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石器時代의 痕跡은 只今 我國의 各處에 있는 屈속과 古城地와 古墳 가운데서 많이 發見되거니와 그 中에서도 海邊 여러 곳에 散在하는 貝塚에서 가장 많이 나오고 貝塚中에는 黃海道 夢金浦와 慶尙南道 金海에 있는 것이 가장 有名하며 그밖에 慶尙南道 固城 慶尙北道 迎日 咸鏡南道 北靑 咸鏡北道 城津, 雄基 等地에도 큰 貝塚이 있으니 이는 옛날사람들이 조개껍질을 버린 것이 파묻혀 생긴 것이다.

「선돌」이라는 立石은 높은 山을 본뜬 것이어서 그때 사람들의 信仰의 對象이었으며 이는 世界에서도 太陽을 崇拜하는 風習이 있는데, 어떤 곳에나 있지만 我國에 더욱 많고 그 中에서도 檀君傳說이 남아 있는 黃海道 九月山을 中心으로 한 地方과 馬韓의 옛 땅에 特히 많다.

또「고인돌」이라고 한 支石은 或은 하늘에 祭祀지내던 祭壇이었다 하고 或은 옛사람들의 무덤이라 하나 이 亦是 太陽을 崇拜하는 巨石文化의 한 痕跡이며 特히 支石은 鄰國인 中國과 日本에서는 全然 發見되지 아니 하는데 我國을 비롯하여 滿洲와 시베리아와 유럽에 걸쳐서 이것이 있고 我國에서는 여러 곳에서 發見되었다. 江原道 春川과 黃海道 殷栗에 있는 것이 가장 有名하다.

 

'我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三國의 興起 (서당국사)  (0) 2015.02.15
古朝鮮 (서당국사)  (0) 2015.02.15
我國의 自然環境 (서당국사)  (0) 2015.02.15
回顧談 (서당국사)  (0) 2015.02.15
아국역사(我國歷史)  (0) 2014.05.06
And
prev | 1 | 2 | 3 | 4 |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