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국역사'에 해당되는 글 50건

  1. 2015.02.19 日本과의 關係(서당국사)
  2. 2015.02.19 中宗反正後의 國政(서당국사)
  3. 2015.02.19 燕山君의 失政(서당국사)
  4. 2015.02.19 李朝基礎의 完成(서당국사)
  5. 2015.02.18 端宗과 世祖(서당국사)
  6. 2015.02.18 建設時機(서당국사)
  7. 2015.02.18 王位爭奪 (서당국사)
  8. 2015.02.18 李朝政治 (서당국사)
  9. 2015.02.18 李朝建國 (서당국사)
  10. 2015.02.17 高麗의 滅亡 (서당국사)
  11. 2015.02.17 外國關係 (서당국사)
  12. 2015.02.17 政治의 紊亂 (서당국사)
  13. 2015.02.17 蒙古亂 (서당국사)
  14. 2015.02.17 繼生하는 叛亂 (서당국사)
  15. 2015.02.17 女眞關係 (서당국사)

日本과의 關係(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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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과의 關係

世宗때에 玉浦를 열어서 貿易을 許諾한 것이 그 後 차츰 倭人의 數爻가 늘어서 數千名에 이르며 朝廷의 命令을 어기는 일이 적지 아니하더니 中宗 五年(檀紀 三千八百四十三年 (庚午)에 對馬島와 連結하여 亂을 일으키니 이를 三浦倭亂 또는 庚午倭變이라 한다.

이 亂은 곧 平定되었으나 그 後에도 中宗 三十九年에 統營郡 蛇梁에서 變亂을 일으킨 일이 있고 明宗 十年 乙卯에 또 다시 海南郡 達梁浦에 侵入하니 이를 乙卯倭變이라 한다. 元來 倭人들은 我國과 貿易하지 아니하고는 살수가 없는 데이나 그 貿易額에는 制限이 있으므로 倭人들은 秘密히 制限外의 貿易을 行하고 또 變裝하고 居住區域밖에 나와서 民家로 좇아다니면서 장사하는 한便 國家의 政治와 事業의 機密을 偵探하여 倭 本國에 報告하는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에 政府에서는 地方官吏에게 命하여 그를 嚴禁한 關係로 兩國民의 感情이 서로 좋지 못하여 마침내 三浦의 變이 일어나고 그 變이 平定된 뒤로 從來의 貿易額을 半으로 줄이니 이때로부터 倭人의 我國에 對한 感情이 더욱 惡化되었다.

이에 朝廷에서는 倭人들이 倭寇를 잡아 바치었다든가 漂流한 우리나라 사람을 돌려 보내주었다든가 하여 우리나라에 功勞가 있는 者에게는 官職을 주어 이를 守職倭라 하여 特別한 待遇로써 그들을 撫摩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그들의 感情은 마침내 풀리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奸狡한 꾀로써 우리나라를 속이고 우리나라 國政을 密偵하니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들을 對할 때 敬語를 쓰는 일이 적고 흔히 왜놈이라 불러서 侮辱하였다. 金安國같은 이는 이를 근심하여 兩國民 사이의 感情이 좋지 못하고 將來 國家에 利롭지 못하리라고 警告한 일도 있었다.

乙卯亂이 일어나자 朝廷에서는 李浚慶으로 都巡察使를 命하여 치게 하니 李浚慶이 湖南에 내려갔으나 軍士도 몇 사람 되지 아니하고 武器도 없어서 싸울 수가 없었다.

이에 한편으로는 軍士들을 召集하고 한편으로는 武器를 만들어서 迎擊하더니 賊은 掠奪하여 가지고 海上으로 도망하였다. 이 亂이 있은 後에 한동안 兩國 交通이 끊어지더니 日本이 다시 通商하기를 懇望하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들을 撫摩하는 것이 得策이라 하여 通商을 許하는데 從來에 開港한 菁浦方面은 疊疊한 島嶼에 싸여서 倭船이 숨기 쉽고 우리나라의 斥候가 보기 어려움으로 釜山 一港을 열어서 倭船의 來往을 許하니 이는 釜山에 섬이 없어서 倭船의 來往을 보기 쉬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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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宗反正後의 國政(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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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宗反正後의 國政

中宗의 反正은 燕山君의 虐政에 괴로움을 받던 百姓과 두 番의 士禍에 氣가 꺾어진 儒學界에 한 光明을 주고 活氣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社會의 行方面에 改革의 氣運이 움직였다. 이때 金宏弼의 弟子에 趙光祖(號 靜菴))가 있으니 그는 儒學을 振興하고 政治를 淨化함으로써 己任을 삼고 中宗의 信任을 얻어 金淨 金湜 等 靑年學徒와 더불어 그 理想한 바를 實現하기에 努力하였다. 그리하여 비로소 鄕約法을 施行하여 地方自治의 制度를 세우니 鄕約이라 함은 中國 宋나라 사람들이 始作한 것으로 한 地方사람끼리 自治的인 規約을 만들어 善한 일을 서로 勸勉하고 惡한일을 서로 規諫하고 禮義로써 서로 交際하고 患難을 서로 救濟한다는 네 가지 趣旨에서 나온 것이다. 中宗反正의 때에 功臣에 濫參한 者가 많았으니 元來 反正功臣이라 함은 反正事業을 劃策하고 身命을 그 事業에 바친 者를 말함이다. 그런데 中宗의 功臣中에 擧事하는 날에 그 所聞을 듣고 비로소 와서 列에 參擧한 者 實際로 이 事業에 貢獻한 일이 없이 功臣들과 因緣이 있는 者들이 功臣名簿에 記錄됨으로 因하여 功臣인 者가 七十餘人에 達하고 功臣들은 國家로부터 功臣田을 받아서 世襲하고 君을 封하여 社會的 特權을 享有하니 趙光祖 一派는 이러한 功臣들을 削除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當時 反正의 功이 있는 功臣들 中에는 特權을 濫用하여 勢力을 얻기와 財貨를 모으기에만 힘쓰는 者가 적지 아니하니 이는 國家를 爲하여 反正事業을 行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富貴를 얻으려 하는 反正 牟利輩의 行動이었다. 儒臣對 功臣의 싸움은 해를 지낼수록 더욱 深刻하여지는 터이라 趙光祖 儒臣一派가 이를 그대로 看過할 理가 없었다. 그리하여 功臣派에 어떠한 過失이 있는 때는 總蹶起하여 攻擊하고 王이 自己들의 意見을 듣지 아니하는 때에는 同盟退職한 일도 二三次 있었으나 中宗王은 暗王이라 趙光祖를 信任한 것도 마음속으로부터 나온 信任이 아니라 다만 一般世論을 듣고 그를 賢人이라 하여 大用한 것이다. 그런데 趙光祖 一派는 中宗을 堯舜과 같은 聖君을 만들고 社會로 하여금 誠意正心할 것을 强要하다 깊이 歎하였다.

이 까닭에 趙光祖 一派는 弊政을 改革한 것이 많아서 百姓으로부터 歡迎을 받는 反面에 功臣 貴族들로부터 極度의 미움을 받고 王도 또한 漸漸으로 厭症을 내게 되었다.

趙光祖 一派는 專혀 道學을 主張하여 小學과 같은 修身書와 近思錄과 같은 性理學을 爲主하고 詩 賦 表 策과 같은 文章學을 排斥하며 人才를 取함에 있어도 文章으로써 科擧를 보는 現行試驗法을 廢止하고 人物考査로써 사람을 取하는 賢良科를 行하기를 建議하니 이때 領議政으로 있는 鄭光弼이 홀로 反對하여 말하되 賢良科의 이름은 비록 좋으나 人心이 淳厚치 못한 今日에는 반드시 弊害가 生할 것이니 行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王은 趙光祖의 말을 좇아 마침내 施行하였다. 그러나 賢良科의 試驗官은 主로 趙光祖 一派가 當하고 있었음으로 그 取하는바 사람은 거의 性理學 派들이어서 文章을 主하는 선비들의 不平이 적지 아니하고 人才를 씀이 偏僻하다는 非難이 各方面에서 일어났다.

李朝의 田制는 國有制이오 買賣와 典當을 禁하더니 徵兵制度에 入營하는 費用 또 兵役服務中 衣食諸費를 軍人이 自擔하는 關係로 農民이 軍隊에 徵召되는 때에는 그 入營하는 모든 費用을 마련하기 爲하여 耕作하던 土地를 典當치 아니할 수 없고 典當期間은 五年으로하되 그 期間이 지나도 負債를 갚지 못하는 때는 土地가 貸金業者의 所有로 넘어가는 것이니 이것이 비록 國法에 違反되는 일이나 國家에서는 軍隊徵召上 禁止할 수 없는 일임으로 黙認치 아니할 수 없으니 이것이 田制破綻의 始初이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典當行爲가 秘密裏에 行하더니 乃終에는 公公然하게 慣習化하고 所有의 移轉도 自由로 行하여 完全한 私有制로 化하고 따라서 土地없는 農民들은 남의 土地를 耕作하고 收穫物의 一部를 地主에게 주게 되었으니 이것이 地主와 小作人이 發生한 始이오 世宗 末年으로부터 世祖때에 걸쳐서 생긴 일이다. 그 後에는 典當期間 五年이라는 것이 五十日로 短縮되니 軍隊로 徵召되는 軍人이 五十日 期間內에 還土할 수는 없음으로 典當하는 날이 곧 土地가 永永 放賣되는 날이다.

이 까닭에 貧民들의 耕地는 急速度로 富人의 손에 兼倂되고 中宗때에 이르러서는 地主와 小作人이라는 두 階級이 똑똑히 社會面에 나타났다. 江陵사람 朴遂良은 御前에서 賢良科 試驗을 마치고 말하되 「平素에 生覺하고 있는 바를 한번 殿下께 아뢰고자 하였는데 이 機會에 아뢰어도 좋은가」라고 물어서 王의 許諾을 받고 아뢰기를 「지금 江陵 地方은 土地없는 農民이 許多하여 農民 生活이 대단히 窮乏하니 이것은 하루바삐 고치지 아니하면 國家의 將來에 큰 근심이 될 것이니 다시 均田制를 行하는 것이 可하다」고 하였다.

重臣들 中에는 地主의 土地를 國家에서 收上하여 土地없는 農民에게 분급(分給)할 수 는 있으나 그렇게 하면 空然한 混亂을 일으킬 것이라 하여 反對하고 前日에 分給한 것을 地主에게 팔고 農土를 잃었으니 지금 分配하여 주더라도 또 後에 다시 地主에게 팔 것이 아니냐하여 應치 아니하였다. 이 問題가 한번 提議되자 朝廷안에는 兩論이 對立하고 趙光祖 派에서는 土地를 다시 分配하자는 革新論을 主張하여 비록 後日에 다시 팔아버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今日의 일은 今日의 情에 맞게 하는 것이 政治의 本旨라 하여 期於히 土地制度를 改革하려 하였다. 王은 重臣들로 하여금 여러 날 동안 討論시킨 結果 한 사람의 土地 所有는 五十結 以內로 制限하기로 하니 當時에 있어서 土地 所有를 制限한 것은 一大 改革이 아닌 것은 아니나 大體로 地主階級에 有利한 解決이오 今後의 土地 兼倂의 防止에 아무런 實效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地主 階級이 이 制度令에 對하여 不滿을 가진 것은 勿論이다.

趙光祖 一派의 政治 理念은, 그 理想은 좋으나 그 手段이 過激한 點이 많고 功臣 貴族들과의 사이에 極端의 非妥協 態度를 取하고 性理學派 以外의 사람에게는 偏狹한 排他心으로 對하여 當時 賢 宰相으로 이름난 鄭光弼같은 이도 그들은 鄙夫라고 痛罵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自己 일파一派의 사람들을 朝廷에 布列하고 漸漸 政治의 實權을 잡으며 百姓들은 그들을 크게 歡迎하게 되니 이에 王은 隱然히 危懼 不平한 마음을 품게되었다. 그러던 中 그들은 七十餘人의 僞勳을 削除하자고 提議하니 功臣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들기 始作하고 平素에 儒臣派로부터 小人이라는 이름 밑에 極度의 排斥을 받은 南袞과 功臣의 한사람인 沈貞 等이 主動이 되어 便으로 王의 마음을 動搖시키고 便으로 趙光祖 派의 謀逆함을 誣告하여 中宗 十四年 己卯에 趙光祖와 그의 同志들을 一網打盡하여 卽回로 죽이려하는 것을 鄭光弼이 王의 소매를 붙잡고 「新進 年少들이 時務를 알지 못하고 그 行動이 過激하였을 뿐이오 異志가 있는 것이 아니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挽留하여 모두 귀양살이 보내더니 未久에 謫所에서 大部分을 죽이니 이것이 己卯士禍이다. 이 禍가 있은 後에 賢良科를 廢하고 土地制度 限令이 스스로 消滅됨은 勿論이오 小學과 近思錄을 읽는 者는 모두 趙光祖 派라 하여 强壓함으로 이러한 글은 當世의 큰 禁物이 되고 南袞 沈貞 等이 用事하여 政治를 어지럽게 하고 鄭光弼도 그들에게 물려 나갔다.

南袞 沈貞 等이 政權을 잡고 그 黨類를 이끌어 들여 政治를 어지럽힌 지 十餘年에 王은 그 무리에게 속은 줄을 깨닫고 金安老를 써서 그 무리를 없애니 이를 以毒制毒이라 하여 安老의 凶惡함은 袞貞의 무리보다 더 甚하였다. 安老가 用事한지 七年에 王은 그 一派를 모두 除去하니 奸臣이 政權을 잡음이 前後 十九年동안이라 王은 크게 悔悟하여 歎息하되 「처음에 趙光祖 一派를 몰아내면 國事가 잘될 줄 알았더니 袞貞 一派의 奸惡은 말할 수 없이 甚하였고 이 一派를 몰아내면 今後는 아무 일 없을 줄로 생각했더니 安老의 凶惡은 前보다 더 甚하여 國家를 危殆롭게 하고 百姓을 괴롭게 하였다. 後世에 나를 어떤 임금이라 稱할고」하고 鄭光弼을 謫所로부터 불러들여 政丞을 삼으니 百姓들이 天日을 본듯이 歡呼하였다. 이에 小學 近思錄의 禁이 스스로 풀리고 儒臣들을 擧用하였으며 豊基郡守 周世鵬은 비로소 書院을 짓고 거기에 先賢을 모시고 儒生들이 모여서 道學을 硏究하게 하니 이것이 李朝書院의 始初이다.

그러나 中宗은 暗主라 朝廷안에 王權 爭奪의 端緖가 열리었다. 中宗도 妃에 先妃 尹氏는 仁宗을 낳고 繼妃 尹氏는 明宗을 낳았는데 仁宗의 外叔은 尹任이오 明宗의 外叔은 尹元衡이니 世人이 尹任을 大尹이라 하고 尹元衡을 小尹이라 하고 이 두 사람의 勢力 다툼을 大尹 小尹의 싸움이라 하였다. 仁宗은 中宗을 이어 王이 된지 겨우 一年에 昇遐하고 아들이 없음으로 그 아우 明宗이 十二歲에 王이 되고 그 母后 文定王后가 政治 實權을 잡고 尹元衡이 用事하니 最初부터 戚里派를 미워하는 儒生들이 明宗 外家의 擅政함을 좋아할 理가 없었다. 이에 尹元衡은 前부터의 政敵인 大尹 一派와 自己에게 좋지 못한 感情을 가지고 있는 儒臣들을 一切 排除하기로 定하고 明宗이 王이 되던 乙巳年에 根據없는 事實을 꾸며서 逆賊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을 或은 죽이고 或은 귀양보내니 이를 乙巳士禍라 한다.

乙巳士禍는 여러 次例 士禍 中 가장 慘酷하고 人心이 가장 憤慨하였다. 戊午 己卯의 士禍는 그 相對者가 奸臣들이었고 甲子士禍는 燕山君이 그 어머니를 爲한 復讐이니 或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乙巳士禍는 王의 母后와 王의 外叔이 아무런 罪가 없는 儒臣들을 誣陷하여, 絶對忠誠을 다할 것을 學問의 大本을 삼고 있는 儒學徒들도 王室에 對한 忠誠이 엷어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前者에 세 번의 士禍에는 비록 慘酷한 變을 當하였으되 오히려 다시 儒學을 振興하여 그 理想하는 바를 政治의 面에 實現하려고 努力하는 사람이 連달아 나왔지만 乙巳士禍 以後에는 그들은 政治에서 물러나 現實 世上과 因緣을 끊고 山林에 숨어서 오로지 學問에만 힘쓰게 되었음으로 政治와 學問이 나뉘어져서 所謂 山林學者라는 것이 생기고 實事를 떠나서 理論에 行動을 떠나서 思索에 치우치는 傾向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徐敬德(號 花潭) 曺植(號 南溟) 이李滉(號 退溪) 奇大升(號 高峯) 李之菡(號 土亭)같은 一代 名儒가 나서 明宗時代의 儒學界에 꽃을 피웠으나 그들은 政治 方面에 발을 들이지 아니하고 비록 李滉같은 이는 王의 부름을 받아서 벼슬에 나온 일이 있으나 기회만 있으면 다시 山林으로 돌아갔음으로 그때에 이를 評하여 山禽이라고 別名을 지은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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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山君의 失政(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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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山君의 失政

成宗 王妃 尹氏는 燕山君의 生母라 尹妃가 王에게 不遜한 일이 있음으로 王이 廢位하였다가 죽였다. 燕山君은 性質이 元來 亂暴한데 그 母가 寃死함을 알고 心中에 깊은 惡感을 품고 있었다. 이때 臣下들 中에는 後日에 燕山君이 王位에 오르면 반드시 國事를 크게 그르치리라고 諷諫한 사람도 있었으나 成宗도 그 性味를 모르는 바 아니로되 참아 世子를 廢할 수가 없다하여 實行치 못하고 마침내 燕山君을 세워서 李朝 衰頹의 端을 열었으니 이는 專혀 成宗 柔弱의 所致이다.

燕山君이 王이 된 後에 儒臣 對 功臣戚里의 싸움은 如前히 激化하였다. 成宗은 恒常 儒臣을 擁護한 까닭에 儒臣의 言論이 實行되었지만 燕山君은 昏暗한 임금이라 儒臣들이 功臣戚里를 攻擊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또 그때 朝廷에는 功臣의 子孫들과 外戚의 무리가 權勢를 잡고있어 儒臣들을 몹시 미워하였다. 그런데 金宗直이 일즉 「弔義帝文이라는 글을 지은 일이 있으니 이 글은 옛날 中國에 項羽가 義帝라는 어린 임금을 세우고 섬기다가 죽인 일이 있는데 隱然히 義帝를 端宗에 比하고 項羽를 世祖에게 比하고 義帝를 弔함은 곳 端宗을 弔함이라 宗直의 弟子 金馹孫이 史官이 되어 이 글을 史草에 記載하고 그 끝에 「忠憤之文」이라고 附記하였다.

功臣戚里派 中의 李克墩 柳子光 等이 이 史草를 보고 이는 世祖의 일을 誹謗하는 것이라 하여 燕山君에게 알리니 燕山君은 이를 大逆罪라 하여 金宗直의 屍體를 파내어 버리고 金馹孫 鄭汝昌 金宏弼 等을 비롯하여 그의 弟子들을 或은 죽이고 或은 귀양보내니 이를 戊午士禍 또는 史禍라 하고 李朝 儒學界에 第一次의 劫運이었다.

燕山君은 淫蕩하고 遊宴을 좋아하여 莫大한 財政을 消費하고 遊宴費가 不足하게 되자 人民으로부터 貢物을 加徵하여 祖宗 以來의 規準을 깨뜨리고 奸人輩를 登用하여 國政을 混亂케 하더니 戊午士禍가 있은지 六年만에 그 生母 尹氏를 廢하여 죽일 것을 主張한 사람들을 調査하여 或은 죽이고 或은 귀양 보내니 이를 甲子士禍라 하고 儒學界의 第二次 劫運이었다. 두 番의 士禍가 있은 後로 燕山君은 虐政이 더욱 甚하여 政治가 어지럽고 百姓이 살 수 없으니 이에 成希顔 朴元宗 等이 反正運動을 일으키어 燕山君을 廢하여 江華島의 喬桐에 내치고 燕山君의 아우 晉城大君을 推戴하여 세우니 이를 中宗反正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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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基礎의 完成(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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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基礎의 完成

世祖의 다음에 睿宗은 位에 있은지 一年이오 成宗이 王이되니 이때는 李朝의 基礎가 굳어지고 또 여러 가지 制度가 갖추어졌다. 王은 儒臣 金宗直 等을 쓰고 東國通鑑 東國與地勝覽 東文選같은 冊을 만들고 또 世祖때에 始作하여 끝마치지 못한 經國大典을 完成하니 이는 以後 數百年동안 政治를 行하는 기틀이 되었다. 集賢殿은 世祖때에 廢하였으나 成宗은 弘文館을 새로이 두고 젊은 學者들을 工夫시키던 湖堂도 다시 始作하였다.

社會의 階級에는 네 層이 있어 그 地位가 職業과 社會的 待遇를 달리 하였으며 大槪는 居住地域도 달리하고 또 다른 階級과 婚姻하는 일도 적었다. 여러 階級 中에 가장 上層에 있는 것이 兩班이니 兩班이라 함은 東班인 文官과 西班인 武官을 合한 말이다. 公卿과 士大夫 階級을 통틀어 말함이며 이들은 政治를 指導하는 地位를 차지하여 모든 特權과 享樂을 누리었다.

그 다음에 中人 階級이 있으니 그들은 醫官 譯官 計士 觀相 律學 寫字 圖畵 等 國家에 要緊한 技術 方面의 일을 맡아보았다. 社會的 地位는 양반과 常民의 中間이었으며 이 밖에 吏胥와 軍校 같은 層은 보다 얼마쯤 낮은 것이었으나 亦是 中人 階級에 屬하였다. 그 다음에 常民階級은 農業 工業 商業에 從事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數가 가장 많고 또 國家經濟의 中心을 이루고 있으나 그 社會的 地位가 낮아서 自己의 生存權을 保全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하고 兩班과 中人에게 눌리어 지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賤民階級은 奴婢를 비롯하여 俳優 巫堂 妓生 驛卒 白丁 等을 말하는 것이니 奴婢에는 國事에 屬하는 것을 公奴婢라하고 個人家에 屬하는 것은 私奴婢라 하며 白丁에도 지금에 흔히 말하는 소 잡는 사람만이 白丁이 아니라 柳器 匠皮 革工 같은 것도 모두 白丁이라 불렀고 이들은 人權을 主張하지 못함은 勿論이오 어떤 境遇에는 牛馬와 同樣의 待遇를 받았다.

外交關係에 있어서는 明나라에 對한 朝貢과 日本 南陽 等에 對한 交隣이 있었는데 이러한 外交의 裏面에는 隣國들과 平和로운 貿易을 行하려는 것이 있었다. 明나라와의 關係는 해마다 使臣을 보내어 朝貢貿易을 行하고 저쪽에서 使臣이 오면 이를 勅使라 하여 特別히 待遇하였는데 朝貢貿易이라 함은 物貢의 形式을 通하여 나라와 나라사이의 公的貿易을 行하는 것으로 이는 中國 사람들의 大國然하는 自尊心에 말미암은 것이며 우리나라에서 貢物의 形式으로 내어가는 物件은 金銀, 人蔘, 豹皮, 苧布, 花紋席, 螺鈿, 白紙 等이었고 그 代身 저쪽에서 들어오는 것은 主로 絹緞, 磁器, 藥材, 書籍 等이었으며 이밖에도 國境 地帶의 私貿易과 密貿易을 通하여 두 나라 사이의 物資가 많이 交流되었으니 이 時代는 三國時代에 比較的 自由로 中國으로 往來하면서 學問도 배우고 貿易도 하던 때와 달라서 公的으로 中國을 다니는 以外에는 往來를 嚴禁하는 鎖國時代라 物資의 有無相通이 如意치 못함으로 鴨綠江 岸의 中江鎭과 豆滿江岸에서 年 一二次 公的貿易을 行하는 外에 密易이 年中 盛行하였다. 明나라에 바치던 金銀 貢은 世宗때에 外交 交涉에 依하여 免除되고 그 後로는 우리나라에서 金銀이 나지 아니함을 보이기 爲하여 金銀鑛을 廢한 일도 있었다.

日本과의 사이는 世宗 元年에 對馬島를 친 以後로 한때 交通이 그쳤었으나 對馬島는 山이 많고 食糧 其他 物産이 적어서 우리나라의 힘을 입지 아니하면 살아갈 수가 없음으로 저쪽에서 謝罪의 뜻을 表하고 다시 서로 和好하기를 懇請하였다. 이에 世宗은 三浦를 열어서 對馬島人이 와서 貿易함을 許諾하니 三浦라 함은 薺浦 (지금의 (昌原郡)(馬山傍) 薺德里의 乃而浦 釜山浦 蔚山의 塩浦이다. 그 後에 癸亥條約을 맺어서 해마다 對馬島 王이 보내는 배를 五十隻으로 限定하며 또 米豆 二百石 씩 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貿易品을 倭人들은 銅 銀 硫黃 等의 鑛産物을 비롯하여 南洋의 特産인 蘇木 胡椒 香料 等을 들여오고 우리나라에서는 綿布 麻布 米豆 白紙 書籍(特히 大藏經)을 보내었다.

女眞과의 사이에는 豆滿江 기슭에 鏡城 鏡源의 貿易所를 열어서 그들의 馬匹과 여러 가지 獸皮 卽 土豹皮, 貂鼠皮, 熊皮, 鹿皮를 들여오는 代身 이쪽에서 金銀, 麻布, 苧布, 綿布, 農具, 釜鼎, 鍮器, 白紙, 鹽醬, 酒 等을 내어 보냈으며 또 女眞의 酋長들에게 職帖을 주어서 그 階級에 따라 서울에 와서 進上肅拜란 이름으로 公的貿易을 하게 하니 이는 朝貢貿易의 形式을 본뜬 것이다. 이리하여 서울에는 지금의 太平路에 太平館이 있어 明나라 使臣들을 接待하고 東大門안에는 北平館이 있어 倭人들이 들게 하였다. 그들이 와서 묵을 때면 後市라는 名目으로 館所 에서 貿易이 行하여 졌다. 이 밖에 琉球國에서도 자주 使臣을 보내어와서 蘇木, 胡椒, 香料, 雪糖, 錫, 서각(犀角) 等의 여러 가지 珍奇한 南洋産物을 가져오고 우리나라의 綿布, 麻布, 大藏經 等을 얻어 갔으며 暹羅(지금의 (泰國))에서도 方物을 가지고 使臣을 보내온 일이 있었다.

그러나 外國 使臣이 우리 國境에 들어오면 政府에서 그들을 厚待하는 뜻으로서 서울까지 오는 費用과 서울에서 머물고 다시 돌아갈때 國境까지 나가는 費用을 負擔하였고 그 보내는 物件도 가져온 物件의 倍를 주었음으로 南洋의 여러 나라에서는 자주 使臣을 보내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負擔이 적지 아니하니 이는 外國이 우리나라에 朝貢한다는 形式을 꾸미고 貿易上 實權을 取하려 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外國의 朝貢을 받는 것을 滿足하게 생각할 뿐이오 우리나라 사람이 海外에 나가서 貿易하는 길을 全然 閉鎖하여 버리니 이 까닭에 貿易關係에는 恒常 損을 보고 國民의 海外 雄飛의 氣象은 날로 사라졌다.

成宗의 世는 建國한지 이미 八九十年이라 國家의 基礎가 굳어진 때라 漸次 保守의 傾向이 生하고 모든 部面에 硬化 沈滯의 빛이 濃厚하여지니 史家들은 이를 盛極時代將衰의 期라 한다.

特히 貴族의 勢力이 强하고 班常의 區別이 嚴하며 全國的으로 不過 三十 內外의 族閥이 政治를 專行하고 地方別로는 京畿 忠淸 慶南의 三道가 貴族 住居의 中心이 되었다. 또 男尊女卑의 制度가 더욱 嚴格하여 女子의 改嫁를 不許하고 再嫁女의 所生한 子孫은 國家가 敍用치 아니하고 貴族들은 寡婦를 禁錮하는 것을 家內의 榮譽로 여겼으며 妾의 所生한 子孫은 庶孼이라 하여 賤待하고 庶子들은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니 이 庶子는 所謂 그 아비된 者가 享樂과 淫慾의 滿足을 얻기 爲하여 生긴 産物이오 母腹으로부터 落地하는 瞬間이 이미 賤待를 받을 運命을 가졌으니 庶子의 庶子된 罪는 아비에게 있는 것이오 庶子自身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비된 者는 妾을 蓄하는 날에 벌써 庶子의 出生할 것이 約束되었고 그 庶子가 社會로부터 賤待를 받는 것을 알면서 蓄妾生活을 하는 것은 그 心身의 腐敗한 所致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오 더욱이 庶子孼 賤待의 制度는 蓄妾을 가장 많이 하는 貴族階級들이 만든 것이다.

世祖때에는 强力한 專制政治를 行하여 비록 諫官이라 하더라도 言論의 自由를 行치 아니하더니 成宗이 性質이 仁柔하고 言語를 開하여 諫官들의 言論自由를 認하니 이에 儒臣 對 功臣戚里의 싸움이 벌어졌다. 儒臣들은 世祖때에 가슴속에 쌓여 있으되 發表할 수 없었던 鬱憤이 一時에 터져 나와서 功臣戚里의 조금이라도 過誤를 犯함이 있는 때는 一毫의 寬容이 없이 論駁 攻擊하고 어느 한 사람이 攻擊을 始作하면 儒臣 全體가 그를 應援하여 朝廷은 儒臣이 指導權을 잡고 成宗도 大體로 儒臣들의 말을 聽從하였다.

이때의 儒敎는 高麗時代의 漢學과 달라서 宋나라의 程朱學인 性理學을 말하는 것이니 性理學을 또한 理氣說이라 하고 金宗直의 弟子 가운데서 性理學에 가장 밝은 사람은 鄭汝昌 (號) (一蠹)) 金宏弼(호(號) (寒暄堂))이니 鄭汝昌의 理氣論에는 「理의 在하는 바에 氣가 또한 聚하고 氣가 動하는 바에 理가 또한 着하여 彼此의 別이 없다. 그러나 理는 渾然至善하여 爲함이 없고 氣는 醇醨(漓)淸濁하여 運用이 있어 彼此의 別이 있으니 이를 一하되 二하고 二하되 一한다 함이다. 理가 없으면 氣가 凝做할 바가 없고 氣가 없으면 理가 流行치 못한다」하니 이것이 理氣說의 大要이다. 이 理氣說의 새로운 理論은 靑年學者들 사이에 歡迎되고 李朝一代 學問의 中心이 되었다.

이와 같이 儒敎를 崇尙하였음으로 敎育과 科擧도 또한 儒學을 中心으로 하였으니 敎育機關으로는 서울에 成均館(지금의 國立大學校)을 비롯하여 四部學堂이 있고 外方에는 고을마다 鄕校가 있고 마을에는 書堂이 있어 主로 敎의 經典을 가르쳤고 이밖에 特殊 科目으로 天文 地理 醫學 律學 算學 書學 畵學을 硏究하는 機關이 있고 또 漢語 女眞語 蒙古語 倭語 等을 가르치는 機關도 있다.

科擧는 國家에서 人才를 取하는 最高 試驗이라 太宗 世宗의 時代에는 主로 政治 經濟 社會 等 主要한 現實問題에 對한 論文을 試驗하더니 成宗 以後에는 그러한 論文 試驗이 점점 적어지고 主로 文章을 取하는 詩賦表策 等의 試驗이 行하니 이 詩賦表策 等의 試驗은 그 속에 治國 經綸이 있는 것도 아니오 國民生活 上에 어떠한 關聯이 있는 것도 아니오 다만 工巧로운 尋章摘句와 吟風弄月을 일삼는 것이니 이 까닭에 所謂 學問은 形式에 흐르고 實用이 없는 貴族階級의 遊戱物이 되고 말았다. 그럼으로 鄭汝昌같은 이는 巧詩 하는 士를 取하지 아니하여 말하되 「詩는 性情의 發함이라 어찌 屑屑하게 工夫를 强下하리오」하였다.

李朝開國 後에 外方官吏의 民弊를 作하는 者가 있고 없음을 調査하기 爲하여 자주 敬差官이라는 特使를 보내더니 그 後에 그 官名을 御使라 고쳐서 秘密히 各道에 보내 이가 暗行御史의 起源이다. 成宗때에 이르러 王이 性質이 仁柔하여 官吏가 罪를 받는 者가 極히 적고 泰平盛代라고 일컬었으나 그 反面에 民弊를 作하는 官吏가 많이 생겨서 社會內部에 頹廢의 氣運이 싹트기 始作하였다. 이에 暗行御史를 各道에 派遣하니 當時 趙之瑞 鄭光弼 金馹孫 같은 이가 모두 名御使였다.

御使의 任務는 大體로 國法을 지키지 않는 者, 父母에 不孝하는 良風美俗을 害하는 者, 守令이나 吏胥들이 國穀을 盜賊하고 人民을 괴롭게 하는 者等 法律과 道德에 어그러지는 行爲 一切를 調査하고 그것을 犯한 者를 發見할 時는 王의 代理의 資格으로 그 고을에 出道하여 或은 守令을 罷免시킬 수도 있고 或은 罪人을 先斬後啓할 수도 있음으로 外方에서는 御使를 虎라고도 불렀다.

御使가 數月의 동안에 一道를 巡行하는 것임으로 奸吏들의 所行을 一 一히 探知할 수는 없으나 한번 出動하면 一道가 肅然하여 奸惡을 恣行치 못하니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집에 畜猫가 있으매 鼠가 肆行치 못한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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端宗과 世祖(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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端宗과 世祖

世宗의 다음에 文宗은 在位한지 겨우 二年이오 그 아들 端宗이 王이 되니 나이 겨우 十二歲이다. 그런데 當時 端宗에게는 母后가 없고 近親이라고는 叔父 七人 卽 首陽大君 以下 七人君이 있어 모두 强盛하니 國民들은 王의 將來에 對하여 모두 危懼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前日에 世宗이 昇遐하였을 때에 國民이 聖君을 잃은 것을 크게 슬퍼하였는데 文宗이 昇遐하였을 때에는 그때보다도 더욱 슬퍼하니 그것은 文宗을 爲한 슬픔이 아니라 어린 端宗이 保護者가 없고 七大君의 힘이 强大함으로 國事가 將次 어떻게 될까 근심하는 슬픔이었다.

端宗 二年에 首陽大君이 權擥 韓明澮等과 더불어 亂을 일으켜, 그때 政丞으로 있는 皇甫仁 金宗瑞等을 죽이고 스스로 軍國 大權을 잡고 있더니 또 二年後에 端宗을 몰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니 이가 世祖이다. 이에 端宗의 舊臣中에는 兩派로 갈려서 鄭麟趾 申叔舟等은 世祖에게 붙고 世祖의 行爲를 痛憤히 생각하는 成三問 朴彭年 河緯地 李塏 柳誠源 兪應孚 等은 世祖를 몰아내고 端宗을 復位하려 하다가 未然에 發覺되어 그 家族및 連累者들과 함께 死刑을 當하고 端宗은 魯山君으로 내려서 寧越로 귀양 가더니 이듬해에 世祖의 아우 錦城大君이 慶尙道 順興에서 李甫欽과 더불어 端宗 復位를 일으키다가 敗하여 죽고 端宗도 또한 世祖에게 害된 바 되었다.

世祖는 王位를 억지로 얻었으나, 政治를 잘하여 成長期에 있는 李朝를 힘써 培養하였다. 王은 抑佛政策을 늦추어서 서울 안에 圓覺寺를 짓고 十三層塔을 쌓으며 刊都監을 두어서 佛經을 많이 박아내었다.

특히 民間의 弊害를 없애기에 努力하여 百姓들이 抑鬱한 일이 있는 때는 直接으로 王에게 上書하게 하고 비록 勢力이 있는 者라도 民弊를 짓는 者는 容恕함이 없이 處罰하였다.

(權擥은 權近의 孫子라 權近은 高麗 臣下로써 李氏 得國함에 歸化하였다. 처음에는 太祖가 써먹기 爲하여 잘 待遇하더니 李氏가 完全히 得國하니 權近을 節槪없는 臣下라고 물리치니 老末年에 忿함을 참지 못하였다. 이를 孫子가 알고 端宗이 임금이 되어 世祖가 王位를 빼앗는다는 것을 듣고 이에 參與하여 李氏끼리 싸우라는 內容計劃을 세웠다. 그러니 高麗 臣下가 李朝 집안끼리 싸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死六臣은 다만 端宗이 王位에 오르면 世祖보다 政治를 잘한다하여, 또 나라를 爲하여 端宗을 받든 것이 아니라 端宗에만 忠誠한 것이다. 世祖가 한 일은 無理가 아니고 當然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說도 있다.)

當時 民弊의 가장 큰 者는 防納이니 防納이라 함은 百姓이 國家에 바치는 貢物을 商人이나 勢力있는 者들이 代納하는 것이다. 當時의 百姓이 國家에 對한 負擔의 義務에는 土地生産의 一部를 바치는 租稅, 各 地方에서 産出되는 特産品을 바치는 貢物, 兵役, 築城, 運輸 等에 從事하는 賦役의 세 가지가 있었다.

貢物은 全國 各 郡을 單位로 하여 바치는 것인데 例컨대 海邊 郡은 魚物 海草 等等 山間 郡은 毛皮 藥材等 平野 郡은 煙草 果實 明油等 全州의 紙, 海州의 墨, 甲山의 山蔘, 江原道의 淸蜜, 全羅道 竹物 等이오 政府에서 數百種의 産物을 各郡 産出額과 戶口數를 參酌하여 各道에 配定하고 道는 郡에 配定하고 郡은 百姓의 各에 配定하며 百姓이 自己에게 配定된 貢物을 郡守에게 바치면 郡의 吏胥들이 그것을 檢査하여 收納하니 當時 貢物의 負擔은 租稅보다 몇 배나 重하고 檢査에 不合格되면 다시 好品을 求得하지 아니하면 안되므로 百姓의 損害가 적지 아니하였고 吏胥들은 百姓의 弱點을 乘하여 비록 好品이라도 不合格으로 退却하고 商人과 結託하여 百姓으로부터 時價의 二三倍를 걷어서 그 物品을 代納하고 差額되는 利益을 分食하는 것이다.

大抵 李朝의 吏胥는 行政上 한 特殊階級으로 存在하였다. 吏胥는 原來 國家의 官吏가 아니오 各郡의 行政事務를 돕는 事務員으로서 아무런 俸給이나 報酬를 받지 아니하는지라 李朝開國 初에는 事務는 多端하되 生活費를 얻을 길이 없음으로 苦役과 窮困을 견디지 못하여 逃亡하는 者도 적지 아니하더니 그 後에 百姓들로부터 橫斂하는 曲逕을 發見하고 또 所謂 郡守 縣令은 그 地方의 實情을 잘 알고 있는 吏胥의 힘을 받지 아니하면 郡政을 行할 수가 없음으로 郡行政의 實權은 全혀 吏胥의 손에 쥐여있었고 더욱이 全國 三百餘郡에는 모두 그 地方 出身의 吏胥가 있어 國家에서 任命한 守令과 百姓의 中間에 介在하여 事務階級으로써 一大勢力을 形成하고 있어 守令은 勿論이오 中央政府에서도 그 勢力을 無視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吏胥들이 貢物 檢査를 하게되니 그 合檢 不合檢은 專혀 그들의 一口一筆에 달려 있고 거기에 따라서 防納制가 생기게 되니 百姓에게 끼치는 弊害는 實로 莫大하고 世祖在世하는 동안은 嚴格하고 果斷있는 行政으로 能히 이 弊害를 막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임금 때로부터 漸漸 復活되고 말았다.

世宗이 六鎭을 建設한 뒤에 野人들의 侵略이 그치지 아니 하고 端宗 때에는 그 勢力이 더욱 盛하였음으로 朝臣 中에는 六鎭을 抛棄하자는 卑屈한 論者도 있어 한동안 서로 議論을 다투었다. 世祖가 王이 된 뒤에 처음에 鴨綠江기슭의 四郡을 廢하고 野人들을 撫摩하기로 하였으나 갈수록 그들의 버릇이 사나워 짐으로 世祖는 會寧을 엿보는 野人을 쳐서 이를 豆滿江 북쪽으로 쫓고 또 申叔舟를 보내어 江 內外의 野人의 巢窟을 엎었으며 魚有沼 南沼 將軍 等을 시켜서 婆豬江의 野人 魁首 李滿住의 父子를 잡아 죽였다.

世祖의 王位 爭奪 亂은 李氏王家의 開國 初부터 있은 例의 骨肉戰이오 六臣의 死는 主를 爲한 死節이라 君主政治 時代에는 흔히 있는 일이오 아무런 特異한 것이 없으나 다만 이 亂이 우리나라의 政治와 人心에 미친 影響은 實로 크고 또 深刻한 것이었다. 高麗 末에 鄭夢周가 國事에 殉節하고 그 弟子 吉再(號) (冶隱)가 鄭夢周의 理學 系統을 繼承하고 그것이 金叔慈(號 江湖))를 거쳐 金宗直(號 佔畢齊)에게로 傳하였는데 이 系統의 學을 받은 儒士들은 節義에 對한 觀念이 가장 强하고 따라서 世祖의 行事에 對하여 큰 憤怒를 품고 世祖에게 붙어서 功臣이 된 鄭麟趾 申叔舟 韓明澮 權擥 等을 極度로 미워함은 勿論이오 韓明澮 같은 사람은 이 功勞로 國舅가 되었기 때문에 儒士들은 王室의 外戚까지를 몹시 미워하여 이때로부터 儒士 對 功臣 戚里의 激烈한 鬪爭이 벌어져서 爾來 百餘年동안을 政界의 大小事件이 主로 儒士 對 功臣戚里의 싸움으로부터 일어났고 畢竟 우리 社會를 亡쳐버린 朋黨 싸움의 始初인 東西分黨도 儒士 對 戚里의 싸움에서 發端한 것이다.

또 한가지 影響은 벼슬하는 사람들이 君主에 忠誠을 다하다가 世祖의 毒手에 걸려서 無慘히 죽고 그 家族까지 虐殺 當하는 것을 보고 世事의 無常함을 보고 長太息하고 自後로는 保身之策에 置中하고 될 수 있는 대로 伉直한 行動을 避하려 하였음으로 政界의 空氣가 因循姑息과 悠悠泛泛에 흘러서 創造와 革新을 行하려는 活氣를 全혀 잃으니 이것이 李朝一代를 通하여 新銳와 獨創이 생기지 못한 主因이 되었다.

李朝開國 以來로 西北人을 쓰지 아니함으로 西北人의 不平이 적지 아니하고 太祖를 도와서 革命을 成功한 西北 猛將들도 모두 憤氣를 품고 鄕里에 돌아갔으며 特히 太祖의 牙將으로 있던 佟豆蘭도 太祖가 姓을 李氏를 주고 淸海伯을 封하여 特殊한 待遇를 하였으나 亦是 不滿을 품고 削髮爲僧하여 그 털과 上疏文과 함께 封하여 太祖에게 올리고 逃亡하여 그 故鄕인 咸鏡道 北靑으로 돌아가니 太祖는 後日에 或 變을 生할까 두려워하여 그 家族을 漢陽으로 옮겨온 일도 있다.

그러던 中 世祖의 亂이 일어나서 人心이 불안하게 되자 咸鏡사람 李施愛가 亂離를 꾸며서 咸鏡監司(申叔舟의 아들)를 죽이고 各地에서 亂民이 일어나서 守令들을 죽였다. 世祖는 軍士를 보내어 여러 달 만에 平定하고 爾來百年동안 咸鏡道에 停擧를 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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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設時機(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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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設時機

太宗이 임금이 된 것은 開國한지 九年만이라 이제로부터 漸次로 建設的 政策을 行하게 되었다.

經濟面에서는 高麗時代以來로 貨幣制度를 여러 番 確立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太宗이 다시 着手하여 錢貨를 만들려 하였으나 그 原料되는 銅이 不足함으로 主로 楮幣를 만들어 쓰게 하니 이는 지금의 紙幣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錢貨를 信用치 않는 當時 사람들이 楮貨를 信用할 理由가 없었다. 그리하여 楮幣의 價値가 暴落하더니 마침내 流通이 끊어지고 前日과 같이 麻布를 交換의 媒介로 쓰고 五升布를 標準으로 하니 五升布라 함은 一定하여있는 布幅에 經絲 四百本을 말함이다. (한 목은 十 오리 一升은 八목)

文化 面에 있어서 特記할만한 것은 鑄字所 設置이다. 高麗때에 活字를 만들어 쓴 일이 있었으나 그 規模가 크지 못하더니 太宗 三年에 鑄字所를 두고 李稷 朴錫命 等으로 하여금 銅으로 많은 鑄字를 만들어 主要한 書籍을 印刷하여 내니 이는 우리나라 出版文化史上 劃期的 革命이다.

外交에 있어서는 太祖開國할 때에 明나라의 承認을 얻고 해마다 많은 歲幣를 바치기로 하였음으로 明나라의 歲幣 要求가 數量이 많고 또 苛酷하여 特히 馬匹의 要求가 더욱 甚하여 每年 數千匹 乃至 萬餘匹을 强要하고 또 畜牛까지 要求하니 朝廷에서는 여기에 應하면 國內의 馬匹이 全部 없어질 것이오 應하지 아니하면 明나라로부터 어떠한 壓迫이 올지 알 수 없어서 進退 兩難에 빠졌다. 朝臣 中에는 이를 拒絶하자고 主張한 强硬 論도 있었으나 太宗은 穩話하게 이를 解決하자고 撫摩하고 明나라에 對하여 歲幣를 減할 것을 여러 次例로 要請하더니 얼마後에 그 要請대로 實現되었다.

高麗末에 極盛하던 倭寇는 한동안 잠잠하더니 太宗때에 南海岸을 侵犯한 일이 있음으로 太宗이 位를 世宗에게 傳하고 大上王이 되었으니 自己 生前에 倭寇의 巢窟을 없애야 한다하고 世宗 元年에 李從茂로 하여금 對馬島를 쳐서 相當한 戰果를 내었으나 오래 守備하기가 어려움으로 얼마 후에 回軍하였다. (李從茂가 변변치 못하여 一敗하여 돌아왔다.)

처음에 太宗의 長子 讓寧大君으로써 世子를 삼았으나 三子 忠寧大君이 聖德이 있음을 보고 恒常 將次 忠寧大君에게 王位를 傳할 생각이 있고 讓寧大君이 또한 天資가 倜儻하여 自己보다 忠寧大君의 才德이 뛰어남을 알고 王位를 그에게 넘기려하여 거짓 放蕩하여 世子의 位에서 물러나니 李氏 開國이후 醜惡한 王位 爭奪戰을 하는 속에서 홀로 讓寧大君이 이와 같은 特異한 行動을 한 것은 一身의 榮譽보다 國家 全體를 위하는 至誠에서 나온 것이며 三國時代에 王位를 相讓하던 渾厚한 風을 다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後에 忠寧大君이 王이되니 이가 世宗이라 世宗은 李朝 一代를 通하여 第一가는 聖君일 뿐만 아니라 我國의 歷史 全體를 通하여 보아도 가장 훌륭한 人君이다.

世宗은 黃憙 許稠 等 名相으로 더불어 國事를 議論함에 그 重點을 人才 問題에 두었다. 즉 어떻게 하면 人才를 많이 培養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좋은 人才를 擧用할 수 있을까 하고 또 君王이나 宰相의 하는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은 훌륭한 人才를 얻어서 國家의 各 機關에 適材適所로 配置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科擧로써 人才를 取하는데 그 出題는 主로 政治 經濟 國防 文化 等에 關한 實際 方策으로 하고 여기에 及第한 사람은 다시 湖堂에 보내어 몇 해 동안을 자유롭게 硏究케 하니 이 까닭에 人才가 輩出하여 여러 가지 큰 事業을 行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西邊과 北邊에는 女眞族이 居住하고 있는데 國人들은 이를 野人이라 불렀다. 太祖가 開國한 뒤에 鴨綠江과 豆滿江의 以南의 女眞族이 한때 모두 歸附하였으나 이는 一時的의 일이오 그 地帶가 우리나라의 領土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 野人은 恒常 西北 邊의 근심이 되더니 世宗은 이를 征伐하기로 決意하고 金宗瑞를 보내어 北邊을 치게 하니 朝臣 中에는 有限한 人力으로써 成功할 수 없는 軍役을 始作한다하여 極力으로 反對하는 者가 적지 아니하였다. 世宗은 굽히지 아니하고 野人을 쳐서 或은 降服받고 或은 豆滿江 外로 쫓아내고 豆滿江 南에 鍾城 慶源 會寧 慶興 穩城 富寧의 六鎭을 새로이 세우고 慶尙道 百姓을 옮겨서 그 地方을 채우니 渤海가 亡한지 五百餘年에 이地帶가 처음으로 우리나라 領土로 돌아왔으며 歸順한 野人들은 或은 우리나라 사람에 同化하고 或은 在家僧이라는 特殊人으로서 그 地方에 남았었다.

(咸鏡地名에 興 字가 셋이 있는 것은 太祖의 高祖父가 살았던 데를 慶興이라 하고 定宗 太宗의 出生地를 咸興이라 하고 永興은 太祖가 낫기 때문에 永興이라고 地名을 各各 지었다. 新興은 倭政때 새로 지은 地名)

世宗이 租稅制度에 對하여는 七八年을 苦悶하고 드디어 投票制度를 實施하였다.

西邊에서는 婆豬江 기슭에 野人 李滿住 等이 雄據하여 자주 鴨綠江을 건너와 掠奪함으로 太宗때에 甲山의 땅을 나누어 지금의 平安道에 閭延郡을 두었다. 世宗때에 이르러 野人의 侵入이 잦아서 江岸 一帶에는 百姓들이 安住할 수 없으니 世宗은 이를 다만 防備하느니보다 한 걸음 나아가 江을 건너서 野人의 本據를 부실 計劃을 세웠다. 그러나 江건너는 明나라의 領土이오 또 林木이 蔽文하여 함부로 쳐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이에 明나라에 對하던 外交로써 野人征伐의 不得已함을 力說하고 便으로는 秘密히 北伐軍을 訓練하고 江邊에 軍糧을 備蓄하니 朝臣 中에는 北伐을 反對하는 者가 많아서 每日 이 問題를 가지고 떠들었다. 世宗은 萬一 野人의 本據를 깨지 않으면 西邊 一帶는 野人의 獨舞臺가 될 것이니 이를 實行치 아니할 수 없고 또 이를 치자면 明나라 領土에 公公然하게 들어갈 수가 없음으로 秘密裏에 擧事하려는 것이다. 이 問題를 크게 떠들어서 萬一 明나라에 들리면 大事가 틀어질 것이니 조용히 處理하고자 타일렀다.

그러나 反對하는 者들은 듣지 아니하고 連日 떠들었다. 世宗은 大怒하여 曰 野人의 侵略을 그대로 放任하자는 것은 國土를 賊에게 주자는 생각이니 外交關係에 關한 일을 公公然하게 떠들면 國家 將來에 무슨 利益이 있느냐 하여 責하고 我國 人性이 輕躁하여 반드시 國家 大事를 그르칠지로다. 하고 嘆息하였다. 이에 모든 反對를 물리치고 崔潤德을 보내어 野人을 치고 江 이쪽에 慈城 茂昌 虞芮의 세 곳을 두니 이로써 鴨綠江 기슭에 四郡이 이루어져서 그 後 多少의 曲折이 없지 않았으나 이때부터 鴨綠江이 完全히 우리나라의 國境이 되었다.

土地의 租稅制度는 古制에 依하여 收穫量의 十分之一을 받기로 하였으나 土地마다 每年 一定한 額數를 받는 貢法을 쓰느냐 또는 해마다 年年의 豊凶과 作況의 良否를 實地로 踏査하여 稅額을 定하는 踏驗法을 쓰느냐 하는 것이 全國的으로 一大 訟案이 되었다. 土地가 肥沃하여 努力을 들이면 收穫을 올릴 수 있고 또 水旱災가 적은 土地를 가진 사람은 貢法을 歡迎하고 土地가 瘠薄하고 氣候의 影響을 많이 받아서 凶年이 잦은 土地를 가진 사람은 踏驗法을 歡迎하였다. 그리하여 貢法도 써보고 踏驗法도 써 보았는데 貢法에서 土地의 等級을 定하는 일이나 踏驗法에서 每年의 收穫量을 定하는 일이나 모두 實際로 幹事하는 官吏의 公正與否가 法의 精神을 살리고 죽이고 하였다.

그러나 稅制를 어느 쪽으로든지 確定치 아니할 수 없음으로 世宗은 各道를 單位로 하여 各 守令과 農家로 하여금 어느 制度를 贊成하는가를 落點케 하니 落點이라 함은 지금의 投票와 같은 것이다. 그 結果 忠淸 全羅 慶尙의 三道는 貢法 贊成 者가 十의 八이오 京畿 江原의 兩道는 兩法의 贊成이 大略 半半이었다. 이에 民意를 尊重히 여겨 三南과 京畿 江原은 貢法을 쓰고 西北 三道는 踏驗法으로 쓰이게 하되 貢法을 쓰는 地帶에서도 土地 等級이 낮은 薄土에 對하여는 災를 주기로 하였다. 同一한 國內에서 地方에 따라서 相異한 法을 쓴 것은 오직 民情에 맞추려 함이오 더욱이 지금으로부터 五百餘年 前옛날에 民意를 묻기 爲하여 大衆의 落點制를 썼다는 것은 一大 奇觀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土地制度에 結負制를 偏用한 것은 制度의 紊亂을 發生시킨 一因이 되었다. 新羅時代의 土地制度에는 面積을 表示하는 頃畝制와 收穫量을 表示하는 結負制를 竝用하니 一結의 百分之一이 負가되고 一負의 十分之一이 一束이 되었다. (結은 맥, 負는 짐, 束은 뭇)

頃이라 함은 土地의 一等地의 一結과 同一한 面積이오 頃의 百分之一이 畝가된다. 高麗에 이르러 처음에는 兩制를 竝用하다가 그 後에 稅額計算의 便宜를 爲하여 結付法을 專用하고 李朝에 이르러 이를 踏襲하였다. 世宗때에 土地를 九等에 나누었는데 이를 結負와 頃으로써 比較하여보면 一等地 一結은 一頃의 面積과 同一하나 九等地 一結은 四頃 餘의 面積과 同一함으로 土地의 等級에 따라서 頃數가 모두 다르고 따라서 그 土地를 보고 그 結數를 알 수 없으며 或 勢力있는 者들이 農民의 土地를 侵犯하되 國家의 土地帳簿에는 結負數만 있고 그 土地의 地圖라든가 面積이든가가 記載되어 있지 아니함으로 侵占與否와 侵犯한 面積을 可考할 길이 全然없고 이 까닭에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各 土地의 稅額이 헝클어지기 始作하였다. (世宗이 面積을 재기 爲하여 人才를 求하니 人才가 없어서 面積을 재지 못하여 土地制度가 紊亂하였다.)

世宗은 天性이 聰明하고 또 學問을 좋아하여 宮中에 集賢殿을 두고 學者들을 모아서 學問을 硏究하는 한편 有益한 書籍을 많이 만드니 高麗史 八道地理志 農事說 醫方類聚 鄕藥集成方等은 모두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音樂에도 많은 關心을 가져서 海州에서 秬黍가 나고 南陽에서 磬石이 나며, 朴堧으로 하여금 樂器를 고쳐 만들고 이어서 舊樂을 고쳐 다듬으니 지금껏 世界에 자랑이 되고 우리나라의 雅樂은 이때에 完成한 것이다. 또 曆象 方面에도 硏究를 쌓아서 蔣英實과 더불어 大小 簡儀臺 自擊漏(물시계) 仰釜日晷(해시계) 等을 만들고 銅으로 測雨器를 만들어 서울과 各道에 나눠주어서 雨量을 재었다. 이는 西紀1639年보다. 二百年이 앞서서 活字와 함께 우리 文化의 자랑거리다.

또 우리 文化史上 가장 特記할만한 事業은 訓民正音 즉 國文의 創製이다.

世宗은 「諸國이 各其 文字가 있어서 方言을 記하거늘 獨히 無하노라 我國語音이 中國과 달라서 漢字와 서로 流通치 못함으로 愚民이 言코자 함이 있으되 마침내 그 情을 伸치 못하노라 내가 이를 憫惘히 여겨 文字를 新製하야 人人으로 하여금 學習하기 쉽고 日用에 便케 하고자 하노라」함과 같이 國家意識의 自覺과 大衆敎育의 必要에 依하여 國文을 만들 생각을 가지고 鄭麟趾 申叔舟 成三問 崔恒 等과 더불어 親히 硏究를 거듭한 結果 그의 二十八年 三千七百七十九年 丙寅)에 二十八字를 지어내어 中外에 領布하니 이것이 오늘날 世界의 여러 文字中에서 第一 優秀한 우리 國文이다.

이때 漢學思想에 젖은 崔萬里같은 무리들은 訓民正音을 聖賢의 글이 아니라 하여 쓰기를 反對한 일이 있었으나 世宗은 이를 물리치고 訓民正音으로써 龍飛御天歌를 지어내는 한편 官廳의 公文書에 이 글을 쓰게 하며 또 儒敎와 佛敎의 經典을 飜譯하여 百姓들에게 읽혔다. 民間에서는 이 글을 諺文 또는 諺書라하고 漢文을 飜譯한 것을 諺解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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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位爭奪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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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位爭奪

처음에 太祖는 松京으로부터 都邑을 옮기려하여 公州 鷄龍山과 漢陽을 親히 돌아본 結果 漢陽으로 옮겨왔는데 얼마 안가서 王子의 變이 일어나서 骨肉의 慘酷한 禍亂을 자아냈다. 太祖에게는 神懿王后 韓씨의 所生에 六子가 있고 神德王后 康씨의 所生에 芳蕃 芳碩의 二子가 있는데 太祖의 革命 運動에 韓氏 所生의 芳遠(太宗)의 힘이 가장 크더니 韓氏는 開國하기 前에 죽고 康氏가 王后로 되어 自己의 所生 芳碩으로 世子를 삼으려하니 政府大臣 中에는 「平時에는 長을 세우고 亂時에는 功을 먼저 한다.」하여 反對한 일도 있었다.

太祖는 王位로써 國家 全體와 關聯시키지 아니하고 李氏家의 私事로 생각하여 그 사랑하는 康氏의 所生 芳碩으로써 世子를 삼으니 韓氏 所生의 여러 兄들이 不平을 품고 그 中에서도 開國의 功이 있는 芳遠의 不滿이 가장 컸다.

이때 世子 芳碩을 돕는 責任을 맡은 者는 鄭道傳 等이라 鄭道傳 等은 여러 王子가 不平을 품고 있는 形勢를 살피고 太祖에게 말하여 王子들의 兵器를 지니는 것을 禁하고 다시 王子 七人을 七道에 分遣하고자 하니 이는 王子들을 放逐하려는 術策이다. 이에 芳遠은 크게 怒하여 芳蕃 芳碩과 鄭道傳 等을 죽이고 芳遠의 兄 芳果가 世子가 되니 太祖는 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또 忿함을 참지 못하여 가장 親近한 部下를 거느리고 처음에는 서울 近處의 山寺를 逍遊하다가 멀리 北으로 行하여 舊居인 咸興 本宮으로 들어갔다. 이에 芳果가 王位에 오르니 이가 定宗이오 定宗 元年에 漢陽은 骨肉의 變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新都를 버리고 開京으로 돌아갔다. 定宗은 芳遠으로써 世弟子를 삼으니 芳遠의 兄 芳幹이 거기에 不滿을 품고 朴苞로 더불어 芳遠을 害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朴苞는 잡혀서 죽고 芳幹은 兎山으로 쫓겨나갔다. 定宗이 임금이 된지 二年만에 하루는 世弟芳遠의 氣色이 殊常함을 보고 王位를 芳遠에게 傳하니 이가 太宗이다. 太宗은 卽位한 後 곧 漢陽으로 돌아왔는데 朝臣中에는 開京 舊都를 생각하고 新都를 싫어하는 者가 많아서 王都가 安定치 못하더니 하루 밤에 開京宮闕이 全部 불에 타버리니 다시 開京으로 옮기자는 사람이 없었다.

太祖가 咸興에 들어간 後에 朝廷에서는 자주 問安使를 보내었으나 太祖는 忿함이 풀리지 아니하여 오는 사람마다 죽여서 一人도 生還한 者가 없으니 지금까지도 한번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咸興差使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太宗이 朴淳을 보내어 太祖의 還國하기를 請하고 父子間의 天倫의 情을 極盡하니 太祖가 感動하여 돌아왔다.

朴淳의 極盡한 말의 內容을 咸興古老들이 口碑로 相傳하는 말에 依하면 「父子가 相爭하여 南北 二朝가 있음과 같이 國民의 눈에 보이는데 創業한지 오래되지 못하고 人心이 安定되지 못하여 將次 무슨 變亂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어찌 父子가 相爭하여 나아가 國家 萬年의 基業을 떨어뜨리랴」함이라 太祖는 이 말을 듣고 大悟하여 드디어 南還을 決意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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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政治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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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政治

一. 土地制度이니 高麗時代는 土地는 모두 國有로 하고 壯丁에 따라서 授受하더니 太祖가 恭愍王 三年에 改革한 田制는 다만 私田을 廢하고 科田制를 復活한 것이 高麗의 田制와 같을 뿐이오 土地를 農民에게 分配한 것은 壯丁 授受制가 아니라 大槪 農民이 現在 耕作하고 있는 土地를 그 農家에 주는 것을 原則으로 한 까닭에 各 農家의 耕作面積에 많고 적은 差異가 생겼다.

그러므로 土地는 비록 高麗의 國有制를 그대로 繼承하고 있으나 各 農家의 耕地는 永久 耕作權의 形態로 되어 있어 그 속에 後日 私有地로 될 싹을 包藏하고 있으며 그 耕作地는 國法에 의하여 自由로 買賣 典當하는 것을 禁하고 있으나 이것은 完全히 國有制가 私有制로 變해 넘어가는 過渡期的 形態이었다.

二. 高麗는 佛敎로서 國敎를 삼고 各地에 數多한 寺刹을 세우고 王室로부터 民間에 이르기까지 모든 儀式은 佛敎式을 썼다. 그러나 末葉에 이르러 佛敎의 廢가 적지 아니 하였음으로 李朝는 佛敎를 極度로 排斥하여 寺刹의 大部分을 헐어버리고 寺刹土地를 沒收하고 儒敎로서 國敎를 삼고 特히 中國 宋나라의 程朱學을 尊崇하고 朱子家禮에 依하여 집마다 家廟를 만들게 하고 程朱學 以外의 學文은 모두 異端이라 하여 一切로 容納치 못하게 하였다. 人爲的 國民思想 統一의 結果는 學風이 偏狹하여 排他性이 强하고 思想의 沈滯를 招來하여 生發의 氣가 없었다.

三. 高麗에 武臣橫暴의 弊가 크고 李成桂 自身도 武臣으로써 王代의 社稷을 빼앗았음으로 李朝는 武臣을 누르고 文臣을 높여서 國家大事는 專혀 文臣의 손에 依하여 行하니 이 까닭에 社會는 文弱에 빠져서 外敵이 쳐들어오면 나아가 막을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恒常 退屈하였으며 貴族의 子弟는 勿論이오 그 一門까지도 兵役을 免除하고 오직 無勢無力한 寒門微族의 사람들만 軍兵으로 만들었다.

四. 革命을 일으킨 理論이 光明正大치 못하여 高麗遺民들의 反對가 强烈하였음으로 李朝는 王代復興運動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建國한지 三年에 全國의 王代를 老少없이 모두 잡아서 虐殺하니 이때 王代를 江華島와 南海 여러 섬에 보내어 安住시킨다 하고 배에 싣고 들어가다가 물속에 넣어 죽인 者도 八百餘名이오 開城으로부터 以北의 平安道地方에 사는 王代들은 모두 逃亡하여 遼東으로 들어가니 지금 滿洲地方에 다른 姓보다 特히 王代가 많은 것은 이 까닭이라 하며 外國으로 逃亡할 수 없는 王代들은 姓字를 고쳐서 玉 全 田 車 等으로 變하니 革命後에 前朝 王族을 一人도 남기지 아니하고 虐殺한 것은 我國有史 以來 오직 李朝뿐이었다. 便으로 黃海道 平安道 地方에서 王代를 받들고 叛亂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開城 以北의 사람을 朝廷의 大官에 쓰지 아니하고, 咸鏡道는 自己의 出身地方이다.

人性이 强하고 萬一 大用하면 李氏 朝廷에 不利한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亦是 大官에 쓰지 아니하니 이 까닭에 李朝 五百年동안에 西北人은 仕路가 막힌 것이다.

五. 高麗 末葉에 政治가 紊亂하여지자 權臣貴族들은 國家의 官吏에 定員이 있음에도 不拘하고 마음대로 自己 親戚이나 特殊關係가 있는 者를 官吏로 쓰게 되어 定員數의 倍 以上을 超過하였는데 李朝 開國後에 官吏의 數를 줄이고 官吏를 改替하려하였으나 만일 그 때문에 人心이 不安하여 動搖가 생기면 李氏 政權의 維持에 不利할까 念慮하여 官吏의 數도 줄이지 못하고 主要한 자리 外에는 改替하지도 못하니 이 까닭에 財政이 困難하고 따라서 官吏의 俸給은 生活費를 充足치 못하였고 이것이 李朝 五百年동안을 通하여 貪官汚吏가 많이 생긴 主因이 되었다. (官吏數가 많으면 李朝時代의 貪官汚吏가 생긴다.)

六. 高麗의 문은 貴族이 이미 없어지고 李氏에 親附한 者가 新貴族이 되었는데 李氏 朝廷은 아직 人心이 安定되지 못하고 어느 한 구석에서 어떠한 事件이 일어날지 알 수 없음으로 이들 新貴族을 特別 待遇하고 民財를 빼앗아 먹는 것을 黙認하기까지 하고 李氏에게 謀反하는 일을 告發하라고 獎勵하여 厚한 賞을 주었으니 이것이 李朝 一代에 貴族의 橫暴와 告發의 弊習을 助長한 一因이 되었다.

七. 李朝가 高麗를 빼앗은 것은 社會의 發展을 爲한 革命이 아니오 다만 李氏家가 王노릇을 한다는 것이 主要한 目的이 되어 있으니 이것은 李代 開國後 흔히 「化家爲國」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開國한 처음부터 醜惡한 王位爭奪戰이 일어나서 五百年동안을 끊임없이 父子 兄弟 叔姪 等의 사이에 流血의 劇을 演出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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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建國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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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建國

太祖 李成桂의 先祖는 本是 咸鏡道에 살았는데 그 高祖父가 元나라에 들어가서 벼슬을 하고 지금의 咸鏡北道 慶興에 살더니 太祖의 어버이 李子春은 永興에 살고 거기서 太祖를 낳으니 이때 永興은 雙城總督府로 되어 元나라에 屬하였다. 恭愍王때에 柳仁雨가 雙城을 칠 때에 李子春이 이를 도와서 功이 있었음으로 朔方道萬戶 兼 兵馬使가 되어 咸州를 中心으로 하여 큰 勢力을 가졌고 이때 太祖는 나이 젊었으나 特出한 武藝가 있었음으로 咸州 以北에 살고 있는 女眞族들의 推仰을 받고 있으며 後日에 太祖가 자주 큰 功을 세운 것도 그 手下에 佟豆蘭 以下 女眞 出身의 猛將을 많이 가지고 있는 까닭이라 한다.

太祖가 建國한 이듬해에 國號를 고쳐서 朝鮮이라 하고 三年 後에 都邑을 지금의 서울에 옮기고 景福宮을 짓고 城을 쌓아서 五百年 王業의 基礎를 닦았다.

 

이조(李朝)역대표(歷代表)

태조(太祖)

정종(定宗)

태종(太宗)

세종(世宗)

문종(文宗)

단종(端宗)

임신(壬申)

기묘(己卯)

신사(辛巳)

기해(己亥)

신미(辛未)

계유(癸酉)

7

2

18

32

2

3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

연산군(燕山君

중종(中宗)

인종(仁宗)

병자(丙子)

기축(己丑)

경유(庚酉)

을묘(乙卯)

병인(丙寅)

을사(乙巳)

13

1

25

11

39

1

명종(明宗)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

효종(孝宗)

현종(顯宗)

병오(丙午)

무진(戊辰)

을유(乙酉)

계해(癸亥)

경인(庚寅)

경자(庚子)

22

41

14

27

10

15

숙종(肅宗)

경종(景宗)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

헌종(憲宗)

을묘(乙卯)

신축(辛丑)

을사(乙巳)

정유(丁酉)

신유(辛酉)

을미(乙未)

46

4

52

24

34

15

철종(哲宗)

광무황제(光武皇帝)

융희황제(隆熙皇帝)

 

 

 

경술(庚戌)

갑자(甲子)

정미(丁未)

 

 

 

14

44

4

 

 

 

 

비고(備考)

一. 고려(高麗)왕실(王室)이 없어진 것은 태조(太祖)가 한양(漢陽)에 이도(移都)하니 전(全) 백성(百姓)이 송경(松京)에 회귀(回歸)하기에 뜻을 두니 태종(太宗)이 부하(部下)로 하여금 망월대(望月臺)를 불살라 버리라

二. 개국(開國)초(初)에 무국호(無國號)하여 고려권지국사(高麗權知國事)라 칭(稱)하고 명국(明國)에서 태조(太祖)가 왕위(王位)에 오름을 승낙(承諾)받고 화녕(和甯, 寧)과 조선(朝鮮)이라는 두 이름에서 조선(朝鮮)이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이조(李朝)는 명(明)의 아유국(阿諛國))

三. 태조(太祖)는 백성(百姓)을 위하여 혁명(革命)함이 아니라 다만 일생(一生)에 왕위(王位)를 차지하려고 명국(明國)에 아유(阿諛)해서 겨우 임금이 되니 이태조(李太祖)는 명(明)에서 명령(命令)하면 모두 응(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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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의 滅亡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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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의 滅亡

恭愍王 末年에 元나라가 北으로 쫓겨 가고 明나라가 中原을 차지하게 되니 (檀紀 三千七百一年) 高麗 朝廷에서는 大陸 外交에 對하여 두 가지 意見이 對立되었다. 崔瑩은 오래 동안 元나라에 가 있어서 저쪽의 事情을 잘 알고 있음으로 元나라와 明나라의 現 勢力이 아직 定해진 것이 아니니 우리는 元나라와 사귀고 明나라를 누르면서 이 機會에 遼東을 恢復하여 國勢를 다시 한 番 떨쳐보자 하고 李成桂는 明나라가 이미 中原을 차지하였으니 우리는 天下의 大勢에 어김없이 元나라에 對하던 態度로써 明나라를 對하는 것이 옳다고 主張하니 이것이 所謂 親元派와 親明派와의 對立이다. 그러던 次에 明나라는 차츰 遼東을 平定하고 禑王 十四年에 이르러서는 鐵嶺衛를 세우고 將次 鴨綠江이쪽의 땅을 빼앗으려 하니 崔瑩이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다하여 明나라를 치기로 決定하니 李成桂는 여러 番 王에게 글을 올려 反對하였다.

崔瑩은 조금도 北伐計劃을 굽히지 아니하고 스스로 八道都統使가 되어 王과 함께 西京으로 나가서 曹敏修와 李成桂로 하여금 軍士 五萬을 거느리고 가서 遼東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北伐을 反對하는 李成桂에게 大軍을 주어서 그 計劃을 實現하려 한 것이 崔瑩의 一大失策이었다. 李成桂는 鴨綠江에 이르러서 威化島 (을혜섬)에 머무는 차에 曹敏修를 달래어 장마철에 많은 軍士가 江을 건너가기 어렵고 또 明나라는 새로 일어나서 그 强大한 氣勢를 對敵하기가 쉽지 아니하니 여기서 回軍하는 것이 옳다하고 風雨같이 西京을 向하여 行進하니 이것은 分明히 王命을 拒逆하는 일이라 軍士中에서는 벌써 木子 得國이라는 謠言이 盛行하고 崔瑩은 王과 함께 形勢가 이미 틀리고 李成桂의 손에 잡혀 죽으니 國人이 崔瑩의 죽음을 듣고 都下가 모두 撤市하여 弔하고 遠近의 男女老少 없이 모두 서로 붙들고 울었다. 李成桂는 禑王의 아들을 세우니 이가 昌王이다. 이로부터 李成桂가 權勢를 한 손에 잡고 안으로는 그의 反對派를 몰아내고 밖으로는 明나라와 親하여 高麗의 運命은 이미 朝夕으로 保全하기 어렵게 되었다.

처음에 恭愍王때에 僧 辛旽을 써서 國政을 맡겼다가 失政을 보고 辛旽을 죽였는데 禑王은 或은 恭愍王의 아들이라 하고 或은 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王室을 中心으로 奇怪한 風說이 크게 流行하니 禑王을 王代라 하는 것은 主로 王代 朝廷을 支持하려는 사람이오 辛代라 하는 것은 主로 李成桂를 中心으로 한 革命派이다. 李成桂는 禑王을 辛代라 하여 몰아내어 죽이고 그 아들 昌王 또한 辛代의 血統이라 하여 몰아내어 죽이고 王代중에서 가장 暗弱한 恭讓王을 세우니 이때로부터는 이미 李成桂의 天下가 되고 만 것이다.

高麗의 田制는 紊亂할대로 紊亂하여 이를 事務的으로 바로잡을 수 는 없었다. 이에 趙浚 等이 私田 改革을 主張하여 勳臣 貴族들의 猛烈한 反對가 있었으나 李成桂의 勢力이 이를 支持하여 高麗가 亡하기 前해인 恭讓王 三年에 옛날의 科田制를 復活하는 田制改革을 斷行하고 私田 文券을 서울의 한 복판에 쌓아 놓고 萬民 環視中에 불살라 버리니 이로써 李成桂의 勢力은 農民들의 歡迎을 받고, 便 묵은 貴族들의 勢力을 무너뜨리어 勢力은 더욱 커지고 또 國家의 財源을 넉넉하게 하여 李氏朝鮮 建國의 經濟的 基礎를 삼았다.

우리나라 衣服 資料는 麻布가 가장 主되고 그밖에 中國으로부터 輸入되는 綿布 等이 있고 農村의 細民層은 狗皮를 입는 者도 적지 아니 하였다. 그러던 中 恭愍王때에 文益漸이 中國에 갔다가 交趾(베트남)로부터 棉花 種子를 가져오는데 이때 元나라에서는 棉花 種子를 外國에 보내는 것을 嚴禁하고 있었음으로 文益漸은 筆管속에 秘密히 넣어 가지고 와서 심은 것이 우리나라 棉花 栽培의 始初이며 高麗가 亡할 무렵에 全國에 퍼져서 우리나라 衣服界에 一 新紀元을 그었던 것이다.

高麗의 王室을 지켜가고 李成桂의 勢力을 눌러 보려고 하는 사람들 中에 그 中心 人物은 鄭夢周였다. 그러나 鄭夢周는 一個 文臣이라 아무 武力的 實力이 없더니 恭讓王 四年에 李成桂가 海州에 갔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傷하였다는 所聞을 듣고 이를 機會로 李成桂를 몰아내려 하였으나 李成桂가 松京에 돌아오고 그 아들 李芳遠이 刺客 趙英珪를 보내어 善竹橋에서 鄭夢周를 처 죽였다.

鄭夢周가 죽자 高麗의 運命도 이와 함께 다 하였다. 그해 七月에 李成桂는 恭讓王을 廢하여 原州로 내치고 王位에 오르니 이가 李太祖이오 (檀紀 三千七百二十五年 壬申) 高麗는 三十四王 四百七十五年으로 끝마쳤다.

高麗時代는 三國時代의 武勇의 遺風이 있어 能히 契丹 蒙古 紅巾賊 倭寇와 같은 大敵을 막아 싸우니 當時의 遺物로서 建築에 浮石寺의 無量壽殿, 彫刻에 恩津의 彌勒佛 等은 美術로도 有名하거니와 그 굳세고 힘찬 모습은 그때 사람의 氣質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末葉에 이르러 從來에 國難이 있을 때는 貴族의 子弟가 陣의 先頭에 나서던 眞實한 風이 없어지고 勢力이 있는 者들이 兵役을 忌避하는 風이 生하니 紅巾賊의 亂에 儒學을 배우는 學生들이 우리는 孔子廟를 지키는 儒生들이니 戰爭에 나갈 수 없다고 政府에 請願한바 그때 政丞 廉悌臣이 嚴責하여 曰 國難이 있을 때에 貴族子弟들이 먼저 칼을 잡고 나가는 것은 祖宗 以來의 常規라 너희들이 孔子廟를 憑藉하는 것은 兵役을 忌避함이라 너희들이 지키지 아니하면 孔子廟가 어디로 逃亡가느냐 하고 一齊히 戰爭에 내어 보낸 일이 있으니 이것이 高麗사람의 氣質의 變함이오 이 變化한 氣質이 李朝에 相續 되었다.

高麗社會의 腐敗는 革命을 불렀고 革命은 社會發展 科程에 있어서 一大 淸新劑가 된 것이다. 그러나 李成桂는 恭愍王 三年에 이미 田制를 改革한 뒤에 自己가 國王이 되지 아니하면 안되겠다는 政治改革에 對한 主張을 내 세운 것이 없고 다만 王代 社稷을 빼앗으려는 權力 다툼만을 일삼았기 때문에 朝臣中에는 李成桂의 革命에 對하여 强烈한 反對를 한 者가 적지 아니하고 그 中에는 松京의 杜門洞에 숨어서 一生을 李氏의 앞에 무릎을 屈치 안한 者 있으니 이를 杜門洞 七十二賢이라 한다.

七十二賢과 그 子孫들은 李氏에 服하지 아니하고 或은 柳器 皮革匠등 賤業을 하는 者도 있고 或은 商業에 몸을 던져 松京과 延安 배천(白川)의 사이를 往來하는 者도 있었으니 지금의 開城 사람의 商業術이 一國에 有名하고 開城商業簿記가 西洋式 簿記와 倂稱되고 있는 것은 당시 杜門洞 諸賢의 創案으로 된 까닭이라 한다.

 

備考

一. 高麗王室이 없어진 것은 太祖가 漢陽에 移都하니 全 百姓이 松京에 回歸하기에 뜻을 두니 太宗이 部下로 하여금 望月臺를 불살라 버리라

二. 開國初에 無國號하여 高麗權知國事라 稱하고 明國에서 太祖가 王位에 오름을 承諾받고 화녕(和甯, 寧)과 朝鮮이라는 두 이름에서 朝鮮이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李朝는 明의 阿諛國)

三. 太祖는 百姓을 爲하여 革命함이 아니라 다만 一生에 王位를 차지하려고 明國에 阿諛해서 겨우 임금이 되니 李太祖는 明에서 命令하면 모두 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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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國關係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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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國關係

元나라가 亞細亞 大陸에 大帝國을 建設한지 八九十年에 차츰 그 힘이 기우러져서 四方에 盜賊이 일어나도 그를 막아내지 못하는 形便이라 恭愍王은 世子때에 元나라에 가 있어서 이러한 事情을 잘 알고 있음으로 이 機會에 元나라 勢力을 물리치기로 하고 王의 五年(檀紀 三六八九年)에 元나라에서 高麗에 設置하여둔 征東行者를 罷하고 前日에 元나라에게 빼앗긴 東北面의 땅과 나아가서는 遼東 等地를 도로 찾으려하여 印璫으로 하여금 鴨綠江便의 八站을 치고 柳仁雨로 하여금 東北面의 雙城 以北을 收復하게 하니 이것은 오랜 동안 北方 民族에게 눌려서 피어나지 못하던 大高句麗主義가 다시한번 光彩를 보이게 된 것이다. 이때에 元나라의 紅頭賊이란 盜賊의 무리 十餘萬名이 우리나라에 根據를 잡으려 하여 쳐들어 왔다. 高麗로서는 뜻밖의 일이오 盜賊의 氣勢는 매우 사나웠음으로 王은 慶尙道 尙州 等地로 避難하니 賊이 松京을 陷落시켜서 宮闕과 모든 財寶 文獻이 蕩盡하였다. 數日後에 鄭世雲이 安祐 金得培 李芳實等 三元帥로 더불어 겨우 쳐서 破하니 敵의 太平은 죽고 나머지는 鴨綠江을 건너가서 달아났다.

王은 期於코 遼東을 恢復하려하여 李成桂等으로 하여금 遼陽城을 쳐서 떨어뜨리고 遼東의 官民에게 榜을 내 걸어 우리의 目的은 한때 잃어버린 故地를 찾으려 함에 있다하고 타일렀다. 이는 勿論 遼河까지가 本是 우리의 地境임을 말함이겠지만 이때 形便으로도 元 나라가 高麗를 누르고 國境을 南으로 뻗은 反面에 百姓들은 이 分明치 않은 地境을 믿어서 前날 보다도 더 北쪽으로 나갔음으로 遼東平野에 高麗사람이 많이 살아서 遼陽에 高麗軍民總督府가 생기더니 이때 마침 高麗의 國情이 安定되지 못하고 그 때문에 大陸政策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나라는 北으로 滿洲大陸과 接하고 東으로 一 海峽을 隔하여 日本과 이웃하고 있음으로 外交關係와 國防關係는 恒常이 두 方面에서 생겼다. 高麗 末葉의 倭寇는 高麗를 滅亡케 한 一因이 된 大事件이라 元來 倭寇는 日本사람의 海賊떼로서 高麗 中葉부터 高麗와 宋나라의 海岸地方을 擄掠질 하여 代代로 내려오면서 掠奪 强盜로 業을 삼는 무리들이었다. 恭愍王때에 이르러 倭寇가 더욱 甚하여 海岸地方은 勿論이오 차츰 陸地로 들어오고 또 南方을 휩쓴 뒤에 北으로 뻗어서 京畿道의 江華 豊德같은 서울의 咫尺에까지 미쳤다.

海岸地方 사람들은 安堵하고 살 수 없음으로 깊이 陸地로 들어가고 良田沃畓에 갈대가 茂盛하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穀食이 많이 나는 土地는 主로 沿海岸에 있는데 海岸地方에 農民이 살지 못하고 모든 土地가 荒蕪로 化한 까닭에 國內의 食糧이 不足하고 國家의 財政이 또한 窘塞하였다.

이와 같이 倭寇가 三十餘年을 繼續하는 동안에 崔瑩과 李成桂가 여러 次例로 倭寇를 大破한 일이 있고 崔茂宣이 元나라 사람에게서 처음으로 火藥을 製造하는 方法을 배워 我國 最初의 火器를 만들어서 全羅道 鎭浦에서 倭寇의 배 三百隻을 單番에 무찌른 일이 있었다. 그러나 倭寇의 氣勢는 좀처럼 줄어들지 아니하고 禑王때에는 王都를 깊은 陸地로 옮기자는 議論도 일어나고 鄭夢周를 日本에 보내어 倭寇를 禁해 달라고 請한 일도 있었으며 臨津江 於口로부터 南岸을 거쳐 멀리 東海岸의 咸州 海岸에 이르기까지 延長 四千里의 땅이 모두 倭寇의 亂舞場이 되었고 어떤 곳에는 鷰雀이 林木에 歸巢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倭寇中에는 日本 海賊만 있는 것이 아니오 高麗사람으로서 地方官吏에게 不滿을 품은 者와 生活이 困難한 자者가 倭寇노릇을 하는 假 倭寇도 적지 아니하여 防備가 虛疎한 곳에는 반드시 倭寇가 出沒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倭寇의 大部隊가 全羅道 雲峰으로 모이었다. 李成桂는 部下將 佟豆蘭과 精兵을 거느리고 가서 荒山 西北에서 크게 싸워서 倭寇의 阿只拔都 大將을 죽이고 그 무리를 쳐 없애니 이로부터 倭寇의 氣勢가 꺾이어서 다시 前日과 같이 橫行하지 못하였고 李成桂가 凱旋하는 大路變에는 百姓들이 모여 나와서 歡迎하고 崔瑩은 李成桂의 손을 잡고 울면서 그 功을 稱謝하니 이에 李成桂의 威望이 一世를 덮어서 後日 革命의 基地를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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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의 紊亂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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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의 紊亂

高麗는 農業으로써 國家經濟의 中心을 삼았음으로 土地生産은 國民生活의 基礎가 되고 國家財政의 支柱가 되고 戶口의 整備 軍士의 徵發 等이 모두 土地의 授受制度로부터 出發하였으니 國家의 興廢, 政治의 善否가 모두 土地制度의 如何에 달려 있었다. 蒙古亂 以後로 社會의 秩序가 헝클어짐을 따라 가장 먼저 弊害를 生한 것이 土地制度였다.

처음에 官吏의 俸給으로써 農民의 耕作하는 土地의 收租權을 준 것은 다만 現物 運搬의 不便을 덜기 爲한 方便에 不過한 것이오 그 官吏에게 土地를 준 것은 아니오 收租權을 가진 官吏와 農民과의 사이에 身分的으로 奴主關係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土地 生産物의 十分一을 官吏에게 주면서도 賦役이나 戶稅는 國家에 바친 것이니 이것은 다른 나라의 封建社會의 農奴制와는 그 性質이 全然 다르다.

그런데 國家의 秩序가 한번 헝클어지자 權臣 貴族 土豪들은 그 收租權을 가지고 農民에 對하여 國家의 戶口帳에서 削去하고 國家에 바쳐야 할 賦役과 戶稅를 自己가 私取하니 國家의 公民의 數는 날로 줄어들고 이 까닭에 戶籍이 헝클어지고 또 土地授受法이 제대로 實行되지 못함으로 因하여 兵役을 負擔할 壯丁의 數도 알 수 없이 되었다.

便으로 奸人의 무리가 함부로 弄奸을 하여 일찍 官吏가 兵丁을 들어간 일이 없이 田柴科의 土地를 盜賊해 먹으며 아비는 公田을 私私로이 아들에게 世襲시키고 아들은 이를 隱匿하여 나라에 바치지 아니하니 高麗 土地 一百七十餘萬結 中에서 國家의 土地帳에 남아있는 土地가 七八十萬結 밖에 되지 아니하였다 한다.

또 農民 한 집의 耕作하는 土地에 對하여 收租權을 가지고 있다고 自稱하는 者가 六七人에 達하는 일도 있어 어느 사람이 國家에서 認定한 收租權者인지 알 수 없고 이 까닭에 農民이 지은 一年 農事는 모두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이 公田數가 줄어들고 國家에 들어가는 田租가 또한 中間에서 橫領되어 國家財政은 말할 수 없이 窘塞하였고 或 賢相이 들어 있어 이 弊害를 그치려하되 盤根錯節한 權臣 貴族들의 勢力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었고 農民들은 하루바삐 政局에 大變動이 생겨서 새로운 政治가 나오기를 渴望하였다.

世上일이 이와 같이되니 官吏의 腐敗는 極度에 達하여 民財를 빼앗아 먹기를 恒茶飯事로 하니 이때의 史官들은 이를 評하여 말하되 鷹犬을 雉兎의 場에 放함과 같다고 하였다.

高麗文化에 中心이 되고 있는 佛敎에도 弊害가 生하여 僧侶들은 特權을 믿고 放恣한 行動을 마음대로 하고 寺刹에서 淫犯을 行하는 일도 적지 아니하여 政界와 함께 腐敗 一路를 걷고 있었다. 여기에 不滿을 가진 儒臣中에는 佛敎를 排斥하는 소리가 漸漸 높아지고 儒敎 獎勵의 先陣에 나선者가 安珦이다. 安珦은 中國으로 부터 孔子圖像과 儒敎의 모든 儀式을 傳해오고 또 宋나라의 程朱學 卽 性理學을 가져와서 後進을 가르치니 이것이 우리나라에 性理學이 뿌리를 뻗은 始初이오 이어서 李穡(號 牧隱) 鄭夢周(號 圃隱) 같은 大儒를 生하니 當時 鄭夢周는 東方 理學의 祖라 稱하였고 이 淵源이 李朝에 흘러 내려가서 性理學의 全盛時代를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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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古亂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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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古亂

崔忠獻이 權勢를 잡은 後에 政治가 어지러워서 蒙古의 勢力이 크게 밀려 들어와서 새 版局이 벌어졌다. 蒙古는 本是 外蒙古의 온온한 기슭에서 遊牧하는 部族이러니 成吉思汗(징기스칸)이 나서 四方의 여러 部族을 合쳐서 큰 勢力을 이루니 이는 崔忠獻이 한창 勢道를 부리던 熙宗때 일이다. 金나라가 蒙古의 힘에 눌림에 契丹의 貴族들이 遼東에서 일어나고 金의 叛將 蒲鮮萬奴는 지금의 間道地方을 根據地로 하여 東眞國을 세웠다. 그 後 高宗때에 이르러 遼東의 契丹族이 鴨綠江을 건너서 우리나라 地境 안으로 밀려들어와서 掠奪을 함부로 行하였다. 高麗는 軍士를 보내어 各地에서 契丹兵과 싸우는 中에 또 蒙古가 東眞과 聯合하여 契丹兵을 치기 爲하여 그 뒤를 따라 鴨綠江을 건너오니 國內에 四國軍隊가 어울려서 形勢가 極히 險惡하고 또 急迫하였다. 더욱이 高麗와 蒙古는 從來로 外交關係가 全然 없을 뿐만 아니라 그 人性이 强悍함으로 國內人心이 恟恟하였다.

이때 契丹兵은 앞으로 高句麗軍에게 막히고 뒤로 蒙眞聯合軍에게 쫓기어 西北面의 江東城에 들어가서 지키니 蒙古將 哈眞과 東眞將 完顔子淵이 그 뒤를 따라 江東城을 包圍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形勢가 甚히 危懼함을 보고 戰略과 外交에 能熟한 사람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리라 하여 趙冲을 元帥로 하고 金就礪를 副元帥로 하여 軍士를 거느리고 蒙眞軍의 營에 가서 크게 酒宴을 베풀고 두 將帥를 接待하였다. 두 將帥는 우리나라 두 元帥의 人格이 매우 높음을 보고 慕仰함을 마지 아니하였다. 完顔子淵은 我人에게 말하되 高麗의 趙元帥는 奇偉한 사람이라 國家가 이러한 將帥를 둔 것은 天의 賜함이라 하고 哈眞은 金就礪를 보고 말하되 내가 일직 六國을 征伐하여 貴人을 만남이 많으되 兄의 얼굴을 보니 어찌 그렇게 奇偉한고 하여 稱讚하였다. 이에 세 나라 軍士는 江東城을 쳐서 契丹兵을 전全滅시킨 뒤 蒙塵과 和好를 맺고 無事히 돌려보냈었다. 이 亂에 歸降한 者가 말했는데 이들은 山林地帶와 荒蕪地에 移住시켜 農事짓게 하니 이를 契丹場이라 하고 契丹場에 들어간 者들 中에는 農事짓기 싫어하고 사냥과 皮革 柳器 等 手工業으로 轉業하는 者가 많았으니 이것이 大槪 後日의 所謂 소白丁 고리白丁等이 된 것이다.

滿洲 地方에서는 蒙古의 勢力이 밀려나와서 東眞國은 얼마後에 亡하고 蒙古는 高麗를 救援하였다. 高宗 十二年에 蒙古의 使臣이 高麗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鴨綠江을 건너가서 盜賊을 만나 죽은 일이 있음으로 蒙古에서는 이것을 트집 잡아 가지고 國交가 漸漸 險惡하더니 마침내 高宗 十八年에 第一次로 高麗에 쳐들어 왔다. 原來 滿蒙 地方에 뿌리를 잡은 國家들은,

一. 海洋을 가지지 못해서 海外로 發展할 길이 없고

二. 氣候가 추워서 蠶布 等 衣服 資料가 生産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蒙古가 처음으로부터 高麗를 빼앗을 慾心을 가지는 것도 이 海洋과 衣服 資料를 얻기 爲함이오 契丹兵이 뒤를 쫓아 나온 것도 高麗에 발을 부칠 口實을 얻으려 함이오 다시 高麗에 쳐들어 온 것도 自己들이 처음부터 慾心내던 일을 達成하기 爲함이다.

今後에 있어서도 蒙古方面에 立하는 나라는 海岸을 얻기 爲하여 반드시 가장 距離가 가까운 東海로 進出하려 할 것이오 더욱이 不凍港을 얻기 爲하여 반드시 我國 海岸에 着目할 것은 勿論이다. 蒙古軍이 쳐들어오면서 龜州城을 包圍하니 이때 龜州를 지키던 朴犀와 金慶孫 等이 여러 날 동안 蒙古軍과 싸워서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니 蒙古將 한 사람이 歎服하여 曰 내가 從軍한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城이 이와 같이 攻擊을 받고 屈치 않는 것은 처음 보았노라 城中 諸將들은 後日 반드시 將相이 되리로다 하였다.

그러나 高麗는 마침내 蒙古軍을 對敵치 못하여 그 이듬해 三軍이 蒙古軍에게 屈服하기에 이르렀다. 蒙古에서는 達魯花赤(다루가치)라는 官吏 七十二人을 보내와서 高麗의 內政을 干涉하였다. 이에 高麗 朝廷은 蒙古와 抗爭하려하여 崔忠獻의 아들 崔瑀가 當時 政權을 잡고 있는지라 王을 모시고 江華島로 들어가니 (檀紀 三千五百六十五年) 이는 蒙古軍이 陸地에서는 强하나 水軍이 없어서 바다에서는 힘쓰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三十年동안 蒙古의 軍士가 江華島의 便에 와서 아무리 威脅을 하고 出陸하기를 繼續하여도 崔瑀는 應하지 아니하니 그 忿풀이를 陸地에서 마음껏 하여 前後六次나 그들의 사나운 발굽이 鴨綠江 이쪽을 짓밟아서 西北面 一帶에는 百姓이 견디지 못하여 아주 마을이 비게 되었으며 敵軍은 멀리 慶州까지 쳐들어와서 虐殺과 擄掠을 마음대로 하였다.

大邱 符仁寺에 있는 大藏經版과 慶州 皇龍寺의 九層石塔이 불타 버린 것도 이 때이며 그들이 第六次로 들어 왔을 때는 高麗사람을 잡아 간 것이 二十萬名을 넘고 죽은 사람의 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高麗에서는 大藏經이 불타버린 것을 아깝게 생각하여 高宗王은 다시 發願하여 十六年동안의 努力으로 八萬大藏經版을 새기고 이 大藏經을 새겨 내기에 하도 힘들어서 더 簡便한 方法을 생각해 낸 것이 活字이다.

高宗 二十一年 (三千六百六十七年)에 이미 鑄字로써 冊을 박아내니 이는 獨逸사람들이 西洋에서 처음으로 活字를 만들어서 冊을 박아낸 것보다 二百年이나 앞섰다. 活字는 文明의 母라는 말이 있거니와 世界에서 가장 먼저 活字를 發明한 高麗는 亦是 文化의 先進國이었다.

宋나라 임금이 일부러 使臣을 보내와서 貴重한 冊을 빌려달라 하고 日本이 恒常 南洋의 珍奇한 物件을 가지고 와서 그 값으로 特히 大藏經을 나눠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高麗가 當時의 東洋에서 文化的으로 얼마나 높은 水準을 지니었던가를 알 수 있고 이러한 文化 속에서 맺어진 열매가 活字이었다.

江華島에 들어간 뒤 崔氏는 政權을 오로지 하여 私兵인 三別抄軍으로써 스스로 守備하여 陸地에 나가 싸운 일이 없고 오직 陸地軍隊에 對하여 抗戰을 命令할 뿐이며 西南岸地方으로부터 水路로 食糧과 其他 物資를 運輸해다 安樂한 生活을 繼續하였다.

高宗 四十五年에 崔氏와 三別抄軍사이에 틈이 생김을 利用하여 三別抄를 시켜서 崔氏를 滅하니 崔氏는 四世 六十餘年만에 亡하고 王이 直接 政治를 맡아보게 됨에 마침내 蒙古에 屈服하고 王子를 보내어 和親하기를 請하니 元나라(蒙古) 世祖 忽必烈이 뜻밖의 일로 생각하고 기뻐하여 曰 高麗는 萬里의 나라이라 唐太宗이 치다가 뜻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王子가 오니 이는 하늘이 시킴이라 하고 厚히 接待하고 軍士로 扈衛시켜서 本國으로 돌려보냈었다.

그 동안에 高宗이 昇遐하고 王子가 돌아와서 임금이 되니 이가 元宗이다. 元宗 時代는 戰爭이 겨우 끝나고 그 뒤를 整理하는 가장 複雜한 때라 첫째로 三十年동안 都邑하던 臨時首都 江華島로부터 松京에 還都한 것이오 둘째로 還都한 뒤 三別抄가 叛亂을 일으켜 珍島로 내려가서 官軍과 싸우다가 敗하여 다시 濟州道에 들어가더니 마침내 官軍에게 亡하였다.

이 三別抄의 亂에 對하여 지금의 어떤 學者는 三別抄의 亂으로써 蒙古에 抗戰하는 義擧라 하여 讚揚하고 있으나 三別抄는 元來 崔氏의 手足으로써 蒙古亂中 가장 安樂한 島中生活을 하고 抗敵의 陣에 參加한 일이 없고 崔氏가 亡한 뒤에 如前히 江華島에 있어 陸地에 나와 싸운 일이 없었으니 이것을 抗戰派라고 부를 수 없음은 勿論이오 還都後에 그 組織을 고쳐서 官軍으로 改編하려하매 그들은 過去의 特殊存在로서의 特權이 喪失됨에 不滿을 품고 叛亂을 일으킨 것이다.

셋째로 東北面의 雙域에 있는 官吏들이 本國을 背叛하고 和州 (永興) 以北의 땅으로써 元나라에 附屬한 것이다. 이로부터 元나라가 高麗의 宗主國 노릇을 하게 되었으며 元나라가 日本을 칠 터이니 高麗도 힘을 合하라 하여 忠烈王이 임금이 되던 해에 (檀紀 三千六百七年) 高麗에서 만든 戰艦 九百隻으로 合浦(지금의 마산부근)를 떠나서 對馬島와 壹岐島를 무찌르고 九州의 博多를 占領하였으나 暴風雨가 일어나서 戰艦이 많이 破損되었음으로 더 나가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그 後 七年만에 다시 蒙古軍과 中國의 江南軍과 高麗軍이 聯合하여 日本을 치러 갔으나 이번에도 大風이 일어나서 江南軍이 거의 全滅하고 헛되이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에 中國의 戰艦은 大槪 破損되었으나 高麗 戰艦의 破損 된 것이 極히 적은 것은 百濟時代 以來 我國의 造船技術이 優秀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高麗는 百餘年동안 元나라의 支配를 받는 사이에 나라 政治는 專혀 元나라의 意思에 依하여 行하여졌다. 忠烈王以後로는 代代로 王이 元나라의 公主에게 장가를 들어서 元나라 임금의 사위가 되고 그 公主가 낳은 아들이 王位에 오르게 되니 高麗王室은 血統的으로도 元나라의 支配를 받게 되었고 임금의 諡號는 從前의 宗字를 廢하고 그 머리에 忠字를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代代로 王이 元나라 大都에 別邸를 두고 거기 來往이 잦으니 그 費用도 적지 아니하여 國家財政이 極히 困難하였지만 政治의 命令系統이 헝클어져서 本國에서 發한 命令이 元나라 大都로부터 沮止 當하는 일도 있고 元나라에 阿附하여 權勢를 얻으려 하여 本國을 誣陷하는 吠主犬들이 兩國의 사이를 往來하면서 政府나 임금이 알지 못하는 政令을 發하는 일도 있어 나라 紀綱이 餘地없이 무너졌다.

이러한 吠主犬들은 甚至於 本國의 國號를 廢하고 元나라의 一地方으로 만들자는 運動까지 일어나니 忠宣王은 涕泣하면서 四百年 祖宗의 基業이 나의 몸에 이르러 떨어지게 되니 어찌 痛心한 일이 아니랴하고 李濟賢 等으로 더불어 元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겨우 無事함을 얻은 일도 있었다.

이때 王室로부터 民間에 이르기까지 元나라 風習이 흘러 들어오고 便으로는 文化의 輸入도 活潑하여 安珦이 孔子의 圖像과 儒敎儀式을 中國으로부터 直接 가져 온 것도 이때의 일이오 忠宣王은 元나라에 가서 萬卷堂을 이루고 趙孟頫等 大學者들과 사귀어 한때 大陸文化의 中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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繼生하는 叛亂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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繼生하는 叛亂

肅宗의 아들 仁宗은 나이 어리고 그 外祖父 李資謙이 權力을 잡고 스스로 높은 벼슬에 나아가서 國事를 마음대로 뒤흔들고 九城 싸움에 나가서 功을 세우고 돌아온 拓俊京을 心腹으로 부려서 온갖 暴虐한 일을 다 하였다. 그는 自己에게 反對하는 사람을 모조리 放逐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고자 하여 王을 죽이려 하니 이것은 木 子 得國 秘訣에 因함이라 그러나 資謙은 마침내 敗하고 말았다. 이 亂離에 宮闕이 불타 버리고 서울이 쓸쓸하게 됨에 僧 妙淸과 詩人 鄭知常 等을 中心으로 西京에 都를 옮기고 임금을 皇帝라 일컫고 年號를 세우자는 意見이 일어났다. 그러나 朝廷에서는 그 意見을 反對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妙淸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西京에서 亂離를 일으켜 새로 나라를 세워 國號를 大爲라 하고 年號를 夫開라 하니, 仁宗은 金富軾으로 하여금 軍士를 거느리고 나아가 싸워 그 이듬해에 平定하였다.

妙淸의 亂에 對하여 옛날 史書에는 妙淸으로써 妄誕한 사람이라 하고 그 亂을 일으킨 것은 政權 다툼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여러 學者들은 妙淸으로써 金富軾을 中心으로 한 事大主義에 對抗하는 革命家라 하여 是非가 定치 못하고 있다. 當時의 時勢를 보건대 朝廷안에는 中國을 祖國처럼 여기는 事大主義 思想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으니 政治家中에는 거기에 不滿을 품은 者 적지 아니하였고 妙淸도 그 中의 一人이었다. 이 事大主義의 革破를 主張함에는 그것을 主張할만한 人物이 아니면 안된다. 그러나 妙淸은 事實로 妄誕한 사람이오 風水地理說로써 王의 마음을 이끌고 鄭知常이 또한 陰陽說로써 거기에 附同하였으며 西京에 都邑을 옮기려 함은 西京에 妙淸의 勢力이 이미 扶植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妙淸이 眞心으로 國家의 百年大計를 爲하는 正人 志士가 아니오 다만 勢力 다툼을 爲한 術策에 不過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高麗는 太祖 以來로 右文政策을 쓰고 武人을 낮추어보게 되어서 武人들의 不平이 적지 아니하더니 毅宗때에 이르러 王은 本是 氣質이 懦弱하여 近侍와 文臣들만을 가까이하고 그들이 또한 王의 사랑을 믿고 放恣한 일이 많아서 武臣들의 感情이 더욱 날카로워 졌다. 이러한 武臣들의 不平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鄭仲夫 等이 亂을 일으켜 近侍와 文臣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의 집을 헐어버리고 王을 몰아내고 王의 아우를 세우니 이가 明宗이다. 이 亂離가 庚寅年에 第一次로 일어나고 癸巳年에 再次 일어났음으로 이를 庚癸之亂이라 한다. 鄭仲夫는 나라의 權勢를 한 손에 잡고 朝廷의 重要한 벼슬에서 外方의 所任에 이르기까지 全部 武臣이 맡아보게 되었다.

文臣의 世上은 비록 無力하나마 傳統과 權威를 세우고 그를 中心으로 하여금 움직여 나갔지만 武人의 世上은 그러한 것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힘으로 움직였다. 鄭仲夫는 權勢를 잡은지 十年만에 慶大升에게 죽고 大升은 多幸이 天命을 마쳤으나 그때 서울 안 盜賊은 모두 武臣의 部下라고 할 만치 百姓들의 怨聲이 적지 아니하였으며 그가 죽은 後에 將軍 李義旼이 權勢를 잡고 갖은 暴虐을 다하여 木子 得國의 秘訣을 利用하여 叛逆을 圖謀하더니 崔忠獻이 義旼을 죽이고 그의 三族과 종들까지도 모조리 잡아 죽이니 國家의 모든 權勢가 忠獻에게 돌아갔다. 忠獻은 明宗을 가두고 그 아우를 세우니 이가 神宗이다. 忠獻은 私兵을 길러서 自己를 守護케 하니 그 勢力이 官軍보다 억세고 나라의 政治를 自己 집 都房에 앉아서 處決하니 이것을 都房政治라하고 都房政治가 생긴 後로 朝廷은 빈집이 되고 官軍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아니하고 그가 權勢를 잡은 二十四年間에 두 임금을 내치고 내 임금을 세우니 柔弱한 王들이 또한 忠獻의 脾胃를 맞추는 수밖에 다른 道理가 없었다.

武臣의 亂離를 거쳐서 그들의 跋扈로 遺族社會의 묵은 傳統이 무너지고 社會가 힘으로 움직이게 되자 이때까지 下層에서 눌려 살던 農民과 奴隸階級이 자주 叛亂을 일으켰다. 그 中에서 가장 두드러진 事件으로는 明宗때에 公州에서 일어난 亡伊의 亂과 淸道에서 일어난 金沙彌의 亂과 神宗때에 東京(慶州)에서 일어난 金順의 亂과 蔚珍에서 일어난 金偉의 亂 같은 것이며 奴隸의 叛亂으로는 神宗때에 私奴 萬積의 事件과 같은 것은 注目할 現象이니 萬積은 官私 奴婢 數千名을 松都의 뒷산에 모아 놓고 崔忠獻 以下 자기네들의 上典을 各各 죽이고 奴婢 文書를 불사라서 奴婢를 모두 解放하여 三韓에 賤人 階級을 없이하고 또 將相이 本是 種이 있는 것이 아니니 우리도 將相이 될 수 있다하고 일을 꾸미다가 中途에 發覺되어 擧事치 못하고 모두 잡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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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眞關係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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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眞關係

女眞은 처음에 渤海國을 構成한 靺鞨의 一族이라 渤海가 契丹에게 亡한 뒤에 女眞族이 南滿州 方面에 居住하는 者는 契丹에게 歸化하여 熟女眞이 되고 白頭山을 中心으로 한 北滿州와 沃沮故地에 居住하는 者는 恒常 契丹에 反抗하였음으로 이를 生女眞이라 한다. 우리나라와 隣接하고 있는 女眞族은 모두 生女眞으로서 貿易과 侵略을 되풀이하였으나 高麗를 두려워하는 氣色이 없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哈爾濱(하얼빈) 附近의 完顔 部에 烏雅束이 나서 그 勢力이 무척 늘어서 이웃의 여러 部族을 合치고 그 힘이 우리나라 國境에까지 미치니 烏雅束의 先世는 高麗 東北面의 和州(지금의 永興)사람 金某임으로 그들은 高麗를 父母之國이라 肅宗 九年 正月에 咸州(지금의 咸興)의 女眞 部落을 統合한 烏雅束의 部下는 國境을 넘어서 定平에 들어왔다. 이에 高麗에서는 林幹을 보내어 치다가 失敗하고 다시 尹瓘을 代身 보내었으나 또한 功을 이루지 못하고 겨우 敵을 宥和하여 돌려보내었다. 그러나 尹瓘은 이 싸움에서 女眞이 어찌하여 强한가를 알았다. 그것은 高麗의 步兵에 對하여 敵은 모두 騎兵이어서 처음부터 對敵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尹瓘은 이에 神騎隊라는 騎兵隊를 만들어서 猛烈한 訓練을 시켰다. 그러던 中 肅宗이 昇遐하면서 遺言으로 지금의 女眞의 勢力을 꺾지 아니하면 반드시 後患이 있으리라 하여 女眞을 치기를 付託하였다.

肅宗 二年에 (紀元 三千四百四十年) 女眞이 다시 國境을 侵犯함으로 尹瓘이 十七萬의 軍士를 거느리고 長城을 넘어 가서 敵의 巢窟 一百 三十餘所를 무찌르고 英州, 雄州, 福州, 吉州, 咸州, 公嶮鎭, 宜州, 通泰, 平戎의 九城을 쌓으니 이것이 有名한 東北面 九城이다.

九城의 땅이 지금의 어느 곳인지 確實히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或은 公嶮鎭을 지금의 北間島의 땅이라 하고, 或은 吉州를 지금의 咸鏡北道 吉州라 하여 마치 九城의 땅이 豆滿江의 左右에 까지 미침과 같이 말하는 일도 있으나 當時 戰爭한 日數와 距離 等으로 생각하여 보면 지금의 咸鏡南道의 北部 海岸地方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이 해로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女眞은 高麗에 怨讐를 갚고 九城을 恢復하려하여 쉴 사이 없이 反擊을 되풀이하고 또 完顔部가 數萬名으로서 英州 雄州 吉州等을 차례로 包圍하였으나 成功치 못하였다. 이때 女眞은 九城 等地에서 쫓겨나간 部落이 安住할 곳을 잃어서 몹시 疲勞하고 高麗도 또한 九城의 땅이 驗하여 지키기 어렵고 또 距離가 멀어서 모든 軍需物을 輸送하기 어려워서 國力이 疲弊하였다. 이에 女眞은 使臣을 보내어 와서 九城을 返還하여 달라고 哀願하여 曰 만일 九城을 돌려주면 以後로는 永遠히 高麗를 父母의 나라로 섬기고 子子孫孫이 朝貢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하늘에 盟誓하고 돌 자갈 하나라도 地境을 넘어서 던지지 아니 하겠다고 굳게 다짐함으로 高麗는 그들의 所願을 들어주기로 하고 官員을 보내어 女眞 面長들로 하여금 咸州城 밖에 壇을 모으고 하늘에 盟誓케 한 다음 九城으로부터 次例로 물러나니 이로써 여러 해 동안 애써 이루어진 東北面의 計劃이 모두 무너졌다.

그러나 返還은 效果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으니 後日 高麗와 女眞과의 交涉에 큰 影響을 끼쳐서 오랫동안 不安하던 東北面의 國境이 이로부터는 平靜하여졌고 烏雅束의 아들 阿骨打가 女眞國을 크게 만들어 國號를 金이라 하고 契丹 卽 遼나라를 滅하고 다시 中國에 쳐들어가서 宋나라를 楊子江 南쪽으로 몰아내서 東洋 天地를 뒤흔들었건만 高麗에 對하여는 恒常 友好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擇里志라는 글에 쓰여 있는 것을 보면 滿洲에서 일어난 國家는 大江과 大野를 가지고 있어 그 氣風이 雄大함으로 高句麗와 渤海는 能히 中國大陸과 雌雄을 다투었고 渤海 遺族인 金나라는 能히 中國에 들어가서 帝王노릇을 하였는데 鴨綠江 以南에 (局蹐), 跼蹐하고 있는 國家는 千里의 江과 百里의 野가 없기 때문에 겨우 그 封域을 僅守할 뿐이라는 뜻을 썼는데 地理와 國民氣風의 關係가 있고 없는 것은 別問題로 하고 어쨌든 우리 民族이 滿洲를 잃은 後에 그 勢力이 갑자기 微弱하여진 것은 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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